이미 남가주서머나에서부터 예배에 참석해서 알고 지내시던 분들도 계실 것이고
목회이전에 알고 계시던 분들도 계실 것이고 서울 서머나를 통해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돌아가신 후 영상이나 음성설교를 통해 만나보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목사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지인들도 계실 것이고 그냥 손한번 잡고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계실 것이다.
바로 옆에서 가족으로 지내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냥 먼발치에서 말씀으로만 예배로만 지내셨던 분들도 계실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의 생각을 알고 그가 관심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기뻐하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그런 것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그가 무엇을 먹었고 그가 누구를 만나며 그가 누구를 사랑하고
그가 소중히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으로
그를 우리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그 자신을 아는 것으로 김성수 목사라는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전하다간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그를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뒤늦게 도착한 장례식장 영정에서 밥을 퍼먹다가 오열한 나는 그때야 비로서 그를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를 알고나니 그가 욕먹는 것이 싫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그를 아는 것처럼 욕을 하는 것도 그를 변론하는 것도 다 싫었다.
고인을 욕되게 한다는둥 그런 시덥지 않은 알량한 변호도 싫었고 그의 설교가 진짜 진리라고 치세우는 이들도 싫었다.
추종자라는 오인을 벗어나려고 인간 김성수가 아닌 그가 설교를 통해 밝힌
진짜 복음과 진리만을 따르는 것이며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그래서 인간 김성수는 그냥 도구로 쓰이다가 간것이라며 변명하는 모습도 꼴보기 싫었다.
그의 설교가 대단하다고 너스레떨던 이들의 칭송도 싫었으며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그의 설교를 들고파는 이들도 싫었다.
반대로 그의 설교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화가 났으며 해석방식이라든지 비성경적이니 알레고리식이라든지 비유해석이라든지 지멋대로의 잣대로 난도질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울분이 나왔던것 같았다.
내가 알았다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하나님이 그를 지독하게 사랑하셨고 그로인해 그의 육적 삶은 암흑속에서 엄청나게 헤매여야 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그를 지독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셨는가.
아니 그게 보이시는가. 좋다.
그것을 알았다면 내가 그를 욕하고 변론하고 추종하고 폄하하고 칭송하고 모여있는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도 알았을 것이고 이런 글의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말씀의 텍스트 이전에 주신 은혜를 알고 시작했다.
즉, 받은 은혜의 코드가 있다는 소리다. 내가 말하는 은혜의 잣대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 짤막하지만 그 내용의 기저에는 복음의 내용이 다 담겨져 있다.
기존 교회에서 예수를 섬기겠다고 하는 예배나 기도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모양과는 많이 다르다.
즉 인본에 의해 재해석된 믿음이 아니라 이것의 원인은 알겠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모호한(아마도 받은 당시에는 한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밀고 들어온 실체적 믿음으로 인해 이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싶어서
그 은혜의 코드를 붙들고 말씀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적당히 목회하면서 말씀이나 설렁설렁 전하고 교회확장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성공한 목회라는 주변의 유혹에도 그가 붙든 은혜의 코드가 그런 것과는 달랐기에
일명 개혁주의 진영에서 올바른 성경인식과 해석에서부터 참다운 목회를 해보겠다고
기존 기독교의 잘못된 방향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아실 것이다.
그는 분명 그 은혜의 코드로 그 보화가 있다는 것을 안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보화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이다.
당연히 소홀해지는 현실에서의 삶과 삶에서의 분쟁들...
먹고 사는 것에조차 점점 그의 관심이 끊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기존 교회들의 잘못된 가르침 그리고 종교로써 사용되어지는 기독교의 모습을
질타하였으나 한꺼풀 한꺼풀 까다보니 결국 '나'라는 인본으로 죄로 똘똘뭉친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김성수목사 자신이었고 여러분들이었던 것이다.
그를 상하게 했던 것으로 여러분들은 탁월하다고 말하곤했다.
그는 스스로의 찔림으로 부끄러움에도 그것을 드러냄으로 세상이 말하는 목사의 권위는 포기하였고 그것으로 여러분들은 은혜의 말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참다운 목사라고 칭송하심으로 그의 고백을 욕되게 하시려는가.
아니면 자살했으니 가짜라고 하시겠는가.
그의 설교들을 탁월하고 주옥같고 그런 의미로 여러분들을 감동시키고
여러분들의 머리를 크게 만드는 용도로 받아들이셨다면 또한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고 받아들이신다면 그것으로 여러분들은 심판 받은 것이다.
그의 설교는 한편 한편이 은혜와 함정, 잘못이해되어진 것과 은혜로 이해되어진 것의 양날의 검으로 작성되었다.
그 설교 한 편마다 자기의 찔림이 있는 것이고 자기가 부인되는 고백이 있는 것이고
또한 잘 설명되어질 수 없지만 밭에 보화가 있다는 것을 늘상 전해온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졸지말고 어렵다고 토로하지 말고 그 밭을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사시라고 전했던 것이다.
여러분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단지 그의 설교를 여러번 수없이 생활이 안될 정도로 반복해서 듣는 것으로
면밀히 그의 설교를 원고화해서 알아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여러분들은 그 밭을 사긴 하는데 그 밭을 전부 갈아엎어서 그 은혜가 뭐냐. 그 진리가 뭐냐라며 찾는 용도로 밖에는 사용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 은혜가 어떻게 생긴것인줄 알고 그 은혜가 무슨 종자인지 알고 찾으시는 것일까.
김성수목사는 늘상 예수를 찾으셔야한다고 표현해왔다.
여러분들은 소문을 듣고 광산에 와서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 많은 설교중에 자기가 제멋대로 찾은 보석을 들고 이게 보물이라고 이게 그 보화라고 이게 김성수목사가 설교속에 감추어놓은 그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이미 그 보화를 찾았으니 이젠 다 되었다고 막살아도 된다는 의미로 번지기도 했다.
은혜와 함정, 많은 분들은 함정에 빠져있다. 은혜는 잘 모르겠으니 함정을 자신만의 무기로 익히는 것이다. 김성수목사는 마지막까지 지독한 함정을 파놓고 가셨다.
은혜로 해석되지 않으면 전부 걸려넘어질 설교를 남기고 간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없을 은혜의 코드를 들고 그것만 붙들고 간것이다.
서울에 오시기전 그토록 이곳으로 오고 싶어하셨다.
남가주에서의 염증은 그를 많이 상하게 했다.
은혜와 함정의 양날검을 알아듣는 이들보다는 또다른 칼을 갈아서 그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그를 그토록 철저하게 외롭게 만드신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하심에 따라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때 수많은 걱정을 하시던 목사님이 기억난다.
나도 당시에는 김성수목사를 안다고 할수는 없었다. 지금에 와서보니 그랬다.
나는 걱정말라며 용기를 주었었다.
남가주에서의 정리와 서울에서의 교회개척에 대하여 몇몇 문제에 대한 처세까지도 주제넘게 말했던것 같다.
그는 그렇게 상당부분 행동에 옮겼다.
또한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승냥이들의 사욕때문에 나는 목사님을 오해하면서
그렇게 짧았던 만남은 끝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목사님은 그냥 승냥이들이 하자는대로 하셨던것 같다.
개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깊은 함정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이 한동안 들었었다.
변증과 논리를 그토록 잘 사용하시는 그분이 머리만 깍으면 중으로도 살수 있는 해박한 지식이
어째서 그리 깊은 함정을 파는데 사용되었을까.
광산으로 몰려온 이들에게 한쪽에 엄청난 깊이의 탄광을 파놓은 것이다.
반면에 은혜로의 초대를 아주 간략하게 소개했다.
그도 성도를 찾아왔었다
. 서울 서머나에서 누군가 목사님의 동무로 친구로 사랑하는 자로 함께하였는지 나는 잘 모른다.
있었기를 소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
화면과 예배의 모습으로 상담자의 모습으로 그를 보았다고 그를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란다.
또한 가까이 있었다고 함께 일을 했다고 그를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는 은혜의 코드를 붙들고 처절하게 살았다.
인간으로써의 나약함과 무능함, 고통과 병증과 두려움까지 다 실제로 살았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김성수 목사가 막산것처럼 보이시는가.
아니면 여러분들을 위한 스승의 삶을 자처하여 가르치기 위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는 그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에 편승하여 살았고 그 사랑이 그의 설교를 아주 몇몇만 은혜의 코드로 알아먹고 사랑의 메세지로 알아먹는 이들에게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만난적도 없는 누군가를 위해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그의 삶이 다른 것으로 포장되어지는 것은 그의 삶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의 글과 그의 설교와 그의 저서들이 은혜로 읽혀지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내가 알았다던 그는 하나님이 지독하게 사랑하신 사람이었다.
그를 욕하였고 비판했던 모든 이들은 그 성경해석방식과 그 자신만의 잣대와 그 말씀을 차용한
이해로 인해 걸림이 될 것이다.
또한 그를 칭송하고 변론하고 자랑하고 자기의 의로 사용해버리고 지식으로 써먹으며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살았다면 은혜로 이해되어지지 못한 결과를 말 안해도 아실 것이다.
나는 그의 설교를 들으셨던 분들 중에서 그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나누시고 계실 분들을 응원한다. 솔직하게 아직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응원한다.
그가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함으로 우린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그 사랑을 노래함으로 서로 사랑하시게 된다.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고 은혜의 빚진자로 살아가시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그분의 부인도 그분을 잘 모르더라구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나 자신을 잘 몰라요
그래서 나를 지으신 분과 사귐의 시간이 인생이지요
그 사람만 사람 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표현하든 사랑이라 하든 고난이라 하든
우리의 언어와 상관없이 그분은 자기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그 창조 안에 있는자는 창조자를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젊은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가 되신 분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십자가 지신 하나님입니다.
그분과의 하나됨이 사람의 완성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분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끝이 그 사람의 전부이니까요
과정은 끝으로만 해석이 가능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