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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근대화의 추진 및 제국주의의 침입
제1절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Ⅰ. 19세기 대외적 상황
1. 제국주의 등장
가. 제2차산업혁명 : 원료를 구하기 위한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심화되었다.
제1차 산업혁명 | 면방직공업, 기계공업, 제철업, 석탄 사용, 증기기관(1769년, James Watt), 증기선(1803, 미국 Robert Fulton), 증기기관차(1814, 영국 George Stephenson) |
제2차 산업혁명 | 전기(1769, A. Volta), 전지(1800, A. Volta) 디젤기관(1897,2,12,31 독일 Rudolph Diesel), 전신(1837, 미국 Samuel Morse), 전화(1876.3 Alexander Graham Bell), 석유 사용 |
나. 신흥공업국가들의 성장 : 기존 강대국(영국과 프랑스)과 신흥공업국들간의 식민지 확조 경쟁이 치열했다.
방적기
James Hargreaves | 1767년 방적기(spinning jenny, 초기의 방적기) |
Richard Arkwright | 1769년 수력방적기(water frame) |
Samuel Crompton | 1779년 뮬방적기spinning mule or mule jenny(a hybrid of Arkwright's water frame and James Hargreaves' spinning jenny) |
Edmund Cartwright | 1785년 역직기(power loom, 力織機) |
Joseph Marie Jacquard | 1801년 Jacquard loom (is a mechanical loom) |
Sakichi Toyoda | 1924년 자동직기(automatic loom, Type-G Toyoda Automatic Loom) |
2.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
가. 청일의 문호개방
나라 | 연도 | 개항과정 |
청 | 1842년 | 영국과의 아편전쟁(阿片戰爭, the Opium War, 1840~1842)의 결과 난징조약(南京條約, 장닝조약, 江寧條約))을 맺고 홍콩을 할양받고,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5항을 개항했다. |
일본국 | 1853년 | 미국 함포외교(艦砲外交)로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神奈川, かながわ조약)을 맺고 하코다테(函館)와 시모다(下田)를 개항했다. |
나. 청일의 근대화 추진정책
청・일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해야 했고 국내외적 압력을 조선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은 청・일의 이중적인 외압 속에서 근대화를 추진해야 했다.
Ⅱ. 흥선대원군의 집권
1. 흥선대원군의 집권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안동김씨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대비는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12살)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대원군을 실권을 장악하고 1873년 고종이 친정하기까지 10년동안 섭정(攝政)하였다.
2. 개혁의 성격
대원군은 세도정치로 문란해진 전통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했고 개혁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3. 흥선 대원군(李昰應)의 개혁정책(1863~1873)
왕권강화정책 | 세도정치 타파 | 안동 김씨를 정권에서 축출하고 4색(老少南北) 고루 등용 |
통치기구 정비 | 1864년 비변사 축소・폐지(1510년 3포왜란때 설치되어 1555년 상설기구) 의정부(정치), 삼군부(군사) 기능회복 | |
법전정비 | 대전통편, 육전조례, 종부조례 | |
경복궁 재건 | 1865~1867, 결두전(결두전, 농민, 1結 100文) , 도성문 통행세(門稅), 원납전(願納錢) 강제 징수, 당백전(當百錢) 악화 발행 | |
민생안정정책 | 삼정개혁 | 전정 : 양전사업 실시하여(은결 색출) 누락된 토지 발굴하고, 지방관과 토호의 토지 겸병 금지 군정 :호포제(戶布制) 실시. 상민에만 부과하던 군포를 호포라 하고 상민・양반 모두 부과 환곡 : 환곡을 사창(社倉)으로 개혁 |
서원 철폐 및 정리 | 고종 2년 1865년 만동묘(萬東廟,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 권상하가 세운 것으로 만력동정때 군대를 파견한 명나라 임금 신종과 마지막 왕 의종을 모신 사당) 철폐 고종 8년 1871년 전국 서원 47외 모두 철폐 | |
대외정책 | 쇄국정책 | 통상수교 거부정책 고종 3년 1866년 독일상인 Oppert 두차례 통상요구. 고종 3년 1866년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 호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러 통상요구하다 평안 감사 박규수와 군민들에 의해 화공에 소실 고종 3년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 Ridel 신부, 해군제독 Roze 군함 7척. 강화읍 점령하고 군기・서적 약탈. 문수산성(文殊山城, 韓聖根)과 정족산성(鼎足山城.梁憲洙)에서 패퇴 고종 5년 1868년 독일상인 Oppert 충남 덕산에 있는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무덤 도굴사건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 북경주재 미국공사 Low와 아시아함대사령관 Rodgers Colorado호 등 군함 5척으로 초지진(이렴), 덕진진, 광성보(魚在淵・魚在淳 분사)점령, 갑곶(甲串)도 강화수비병 저항으로 패퇴 고종 8년 1871년 척화비 건립: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丙寅作 辛未立 |
문화정책 | 천주교탄압 | 고종 3년 1866년 병인박해. 남종삼, 프랑스 신부 9명 등 j |
최익현 : 서원철폐는 조선의 아름다운 학문연구 기풍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Ⅲ. 서구 열강의 침략과 쇄국정책
1. 서양세력의 접근
가. 이양선의 출몰
19세기 중엽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선박들이 자주 출몰했는데 서양배를 “이양성”이라고 불렀다. 1832년 순조 32년 영국 상선 Lord Armherst호가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였고 헌종 11년 1845년 영국 군함 1척이 다도해 수역을 측정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헌종 12년 1846년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해안에 출현하였고 철종 5년 1854년 러시아 군함 2척이 함경도 해안에 와서 각지를 측량하고 갔다.
나. 주변정세
조선은 주변국 상황을 경계하며 해안 방어를 강화했다.
청 | 아편전쟁(1840~1842), 애로호사건(1856년) 및 영국 프랑스 엽합군의 베이징 점령(1860) |
일본 | 미국의 함포외교(艦砲外交, gunboat diplomacy)에 의한 강제개항(1853) |
함포외교(艦砲外交, 포함외교(砲艦外交), gunboat diplomacy )
분쟁 당사국의 한쪽이 다른 나라에 함대를 파견하여 압력을 가함으로써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려는 외교 전략
함포(艦砲) : 군함에 장착한 포.
2.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가. 병인박해(1866년 1월)
초기에 대원군은 신자 남종삼(南鍾三)의 건의에 의하여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조불(한국・프랑스)조약을 통해 천주교를 공인하는 대신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베르누Berneux), 푸르투니에르, 도리, 성 다불뤼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루가, 오페트르 등)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나.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8월)
고종 3년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에서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되고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Ridel, 페롱, 칼레)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는데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백락내)와 로즈(Roze)제독이 군함 7척으로 침공해 왔다. 한성근(韓聖根)은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양헌수(梁憲洙)는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3. Oppert 도굴사건(1868년 4월)(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
독일 학자 겸 상인 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고종 3년 1866년 2월에 영국 상선 Rona호에 승선하여 충청도 해미 부근에 나타나 조선과의 통상을 시도하고, 6월에 다시 Emperor호로 조선에 입국하여 통상을 요구하였다. 두 차례 모두 통상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과 중국인, 말레이인 선원 140여 명을 차이나호에 승선시키고 고종 5년 1868년 4월에 충청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거산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하여 도굴에 필요한 장비를 챙긴 다음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을 도굴하다 실패하였다. 전통적으로 조상의 묘를 신성시하던 조선에서는 이 사건으로 서양 열강에 대한 강경한 거부 정책이 더욱 고조되었다.
4. General Sherman호 사건과 신미양요(1871년)
가. General Sherman호 사건(866년 7월)
고종 3년 1866년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와 평양군민들은 화공(火攻)으로 배를 소각시켰다.
나.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고종 8년 1871년 북경주재 미국공사 Low와 미국 아시아 함대사렴관 Rogers는 Colorado등 군함 5척을 거느리고 강화해협을 통과하여 6월 11일 초지진(草芝鎭, 이렴 분전), 6월 12일 덕진진(德津鎭), 광성진(廣城鎭)을 점령하였으나 광성진에서는 진무중군 (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어재순(魚在淳) 형제, 대솔군관(帶率軍官) 이현학(李玄鶴), 어영초관(御營哨官)...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고 갑곶(甲串)에 상륙한 미국 군대도 강화 수병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여 청으로 가버렸다.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어재연(魚在淵)
한성근(韓聖根・1833~1905)
한성근은 1833년 8월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서 태어나 1905년 12월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성근(韓聖根)은 1866년 병인양요 때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수비하여 120명의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공격해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시켰다. 한성근은 순무영(巡撫營)의 초관(哨官)으로서 집사(執事) 지홍관(池弘寬)과 함께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지키고 있었고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성근은 이후 봉상시 봉사, 병조좌랑, 은산현감,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자 정령관(正領官)으로서 좌부령관(左副領官) 윤웅렬(尹雄烈)과 같이 신식군사훈련에 힘썼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1893년 한성판윤 2월(하루), 1896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1899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냈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쌍곡 야산에는 병인양요 문수산성전투의 주역인 한성근의 묘비가 있다. 2015.08.26. (사진=괴산향토사연구회 제공) '正憲大夫 正二品 兵曹判書 耆老所堂上 淸州韓公 聖根之墓(정헌대부 정이품 병조판서 기로소당상 청주한공 성근지묘)
양헌수(梁憲洙)(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부사정 종임(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양헌수(梁憲洙)는 1866년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해오자 한성 방어를 위해 주교도청(舟橋都廳)・훈련도감 좌별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순무영천총(巡撫營千摠)으로 선봉이 되어 10월 1일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입성하여 진을 쳤다. 10월 3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분견대 160명이 정족산성을 공격해오자 매복작전으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혀 적을 격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으며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약탈, 방화한 뒤 철수했다. 이 공으로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며 1873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1874년에는 좌포도대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형조판서・금위대장 등을 지냈다.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어재연(魚在淵)은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프랑스 로즈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오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방어했으며 1871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 4월 15일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었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함포사격과 야포사격을 퍼붓고 광성보로 돌입하자 어재연은 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전사했다.
5. 대원군의 실각(1973년)
가. 실각 원인
1871년 서원철폐령 이후 유림 세력의 반발이 거세졌고 최익현은 탄핵 상소를 통해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했고 고종도 나이가 20이 되면서 섭정의 명분이 소멸하고 여흥 민씨세력이 성장하여 고종을 배후에서 조정하였으며 정계 일각에서는 통상개화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고종 10년 1873년 대원군이 하야했다.
나. 흥선대원군 개혁의 한계
전통적인 통치체제를 재정비하여 폐단을 없애는 수준에서 개혁이 진행되었고 쇄국정책은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해 서양의 침략적인 접근을 일시 저지했을 뿐 근대화가 뒤지는 결과를 낳았다.
대원군의 정책평가
정책 | 양반 | 농민 |
서원철폐 | × | 0 |
호포제 실시 | × | 0 |
경복궁 중건 | × | × |
통상수교거부정책 | 0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