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33세 익모益模공의 따님 열부烈婦 배유인裵孺人 사적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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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 익모益模공의 따님 열부烈婦 배유인裵孺人 사적
열부는 고우古愚 부군 휘 이옥以鈺공의 둘째 아드님 복렴復濂공의 6세손 익모益模공의 따님으로 배삼익裵三益 선생 후손 재형在衡에게 출가하였다. 출가하여 시모님 병환에 지성으로 구호하여 효부로 이름이 났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니 재형공이 가족을 데리고 만주滿州 서간도西間島에 들어가서 이역만리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지냈다. 불행히 남편 재형이 서두西痘에 걸려서 병세가 위독하니 열부가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서 선혈을 입에 드리웠다.
그래서 며칠 동안 남편의 목숨이 이어나갔으나 마침내 죽으니 열부는 자신이 초종등절을 일일이 보살펴 장사를 마치고 시어머님과 시동생의 사철의복을 깨끗이 지어서 의장 속에 넣어 놓고 고국에 있는 친정부형님께 영결 편지를 써서 두고 그 날부터 절식하여 십여 일이 지나서 목숨을 끊었다.
당지의 중국관헌이 그 사실을 알고서 비단에 동한의열부東韓義烈婦 모씨某氏라 고 찬란한 명정銘旌을 써서 정중히 조위하였다. 고국에 소문이 전해지자 각 서원 書院과 향교에서 통문通文을 내어 표창하고 진사 이중균李中均공이 기문記文을 지어 알렸다
아래 사진은 ' 열부烈婦 배유인裵孺人' 행록입니다.
아래 글은 '열부烈婦 배유인裵孺人' 정려에 대한 저의 감상을 적었던 글입니다.
제 고향은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등재입니다. 옛날에는 월곡면에 속했던 동네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가장 많이 뛰어놀았던 곳이 양지마을 뒤편에 있는 산소였습니다. 어느 집안 산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산소가 경사진 곳에 아래 위로 위치해 있었습니다. 잔디로 덮여진 산소는 묘역이 넓어 동네 애들 놀기에는 참 좋았지요. 이 산소 왼편 아래쪽에 한칸짜리 조그마한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안에 비석은 없었지만, 우리 집안의 어떤 할매를 모신 곳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며칠 전에 법흥 아재에게서 책자 하나를 받았습니다. 제목은 없었는데, 저보고 5부 정도 복사해 오라고 하시더군요. 집에 와서 살펴보았습니다.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니 자세히 알 수는 업었지만.... 그날 들은 애기와 책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옛날 등재에 사시던 우리 집안의 어른으로 휘자가 '在衡(재형)'인 분이 계셨는데,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 전 가족이 서간도로 가셨습니다. 이 어른은 독립군 장교 양성의 산실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3기로 졸업하셨고, 졸업 후에는 교관으로 계시면서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래서 법흥아재는 이 책을 복사하여, 독립운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근거의 하나로 제출하려고 하시는 거지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재형공'은 1919년 전염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때 재형공의 부인되시는 분이 '裵節婦(배절부)'로 일컬어지는 의성김씨입니다. 학봉 선생의 후손이라 들었습니다. 의성김씨는 남편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지극정성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병이 낫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군되시는 '재형공'은 돌아가셨습니다.
'裵節婦(배절부)'께서는 남편의 장사를 마친 뒤에, 시어머니와 시동생의 옷을 한벌 지어놓고, 또 자신의 수의를 지어 놓은 후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단식을 하였습니다. 남편의 뒤를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식한 지 18일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훗날 안동 유림사회에 알려지면서, '
裵節婦(배절부)'를 기려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납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이라면 임금에게 상소하여 '열녀'로 인정받았겠지만, 나라가 망했으니 이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공론이 일어납니다. 이에 임천서원에서는 裵節婦(배절부)의 행적을 도내 각 서원과 향교에 알려 동의를 얻은 후에 ‘表烈閣(표열각)’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등재에 남아있는 '裵烈婦金氏表烈閣(배열부김씨표열각)'입니다.
이 책을 보면, 학봉 김성일을 모신 임천서원에서 도내 각 서원과 향교에 '裵節婦(배절부)'의 행적을 알리면서 동의를 구하는 글을 돌렸고,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 임연선조를 모셨던 도생서당, 한강 정구를 모셨던 회연서원 등과 각 향교에서 여기에 찬동하는 답글을 보내왔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각 문중에서도 찬성한다는 의사를 글로 보내왔습니다. 이 책을 보면, 지금은 서원인데 서당으로 나옵니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된 후 공식적으로 서원이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유림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서원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옛날 유림사회의 여론 수렴과정을 살필수 있는 사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