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 있어요?
고성만
갑자기 비를 만났어
산행 중 느닷없이 빗방울 떨어진다 급하게 찾아든 큰 나무 밑 먼저 와 있던 사람들 틈 비집고 들어간 자리
미안해요 하면서 뛰어든 여자 모락모락 김 나는 목에 걸린 금빛 십자가 행여 내 입김 닿을까 봐 숨소리조차 조심하는데 더욱더 큰 가지 벌리는 진초록
흙먼지 가라앉히며 후드득 소나기 지나간 후 무지개다 외치는 소리에 가슴이 저절로 뛰던,
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까 꽤 오래전의 그 밀
하늘을 찾아서
초등학교 입학 무렵 시험을 치렀지
선생님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서 속으로 뿌듯했지
선생님이 색종이를 들었어 나는 “파란색”이라고 대답했고 선생님이 픽 웃었어 아무리 머리를 굴러 봐도 파란색이라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았고 또다시 자신 있게 “파란색”을 외쳤지
선생님은 하늘색이라고 말씀하셨지
그 이후 나는 하늘색을 찾아다녔어 고려청자 속 하늘 우주인이 찍어 온 하늘 들꽃 피어나는 하늘 낙하산을 타고 하늘 속으로 뛰어드는 꿈
비행기 조종사는 점점이 떠 있는 배들을 별들이라 착각하여 바다로 활공*한다는데
쯧쯧,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야 검정일 수도 파랑일 수도 쪽빛일 수도 물색일 수도 있는 하늘
미세먼지 때문에 뿌연 대기
우리가 알던 곳이 아니야
도대체 하늘은 어디에 있는 거지?
씨앗파는 남자
거의 매일 붉고 푸른 다라이 앞에 놓고 앉은 사내의 얼굴에 잠의 씨앗이 덕지덕지합니다 아주 오래 기다렸으므로 이미 성불을 하였거나 도를 통하였을 법한데 소나기 내리는 것도 알지 못하고 가로등에 기댄 채 단잠 빠졌던 사내는 투덜투덜 비닐을 씌웁니다 비록 원산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콩과 식물은 넌출넌출 기어오르고 수수는 초록 줄기 밀어 올리고 “파씨 있어요?” 납작 눌린 아랫도리 황급히 털고 일어서려는데 “없으면 관두세요” 그냥 가 버리는 젊은 여자가 마냥 섭섭하여 파씨스트, 파씨스트, 중얼거려 보는 오후 브래지어 팬티 늘어놓은 김 씨와 소주 안주 내기 장기 한 판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으로 다시 잠에 빠져듭니다
엘리베이터
안녕하세요!
명랑하게 인사할 때
여자는 유모차에 실린 댕댕이*를 꼬옥 껴안습니다
4층에서 싸우는 소리가 11층에서 커피향이 14층에서 생선구이 냄새가 섞이는 찰나 아, 우린 공동운명체구나 깨달으면서 옥상 난간에 매달린 물방울과 재회하는 순간 눈앞이 아득하죠
슬픔은 추락하기 쉬운 구조니까요
관보다 크고
방보다 작은,
이곳에 정착한 지 십여 년 만에 우기의 비린내와 고비사막의 먼지 냄새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죠 유목의 노래를 부르던 어젯밤 재워줄 수 있느냐고 단지 그것뿐이라고 한사코 품으로 파고들던 여자
빈털터리 지갑을 확인하고 난 후 쳇, 돌아서는 여자에게
채울수록 비어가는 방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선물하고
당신이 내리면 내가 오릅니다
내가 내리면 당신이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