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사세 효우당공 배경(十四世 孝友堂公 裵經)
공의 諱는 경(經), 字는 경상(景常)이며 처사공(處士公) 휘언충(諱彦忠)의 장남이다. 중종 39년(1544) 갑진(甲辰)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지극이 효성스러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늙으신 모친을 업고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이때 왜적을 만나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공은 모친을 안고 살려달라고 애걸(哀乞)을 하니, 왜적들도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도망갈 길을 알려주어 모자(母子)가 모두 살 수 있었다.
그후에 모친이 병이 들었을 때는 직접 모친의 대변(大便)을 맛보면서 병(病)의 정도를 살폈다. 모친상(母親喪)을 당해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이 상할 정도였으나 예절에 벗어남이 없었다.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매일 슬프게 곡읍(哭泣)을 하니, 墓의 풀이 모두 말라죽는 이변(異變)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후에 고을 사람들이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여러 번 정문(呈文)을 올렸는데, 이에 선조대왕은 공을 정려(旌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영조 때에 관찰사였던 박문수(朴文秀)가 임금에게 아뢰어, 공에게 증통덕랑호조좌랑(贈通德郞戶曹佐郎)의 직첩(職牒)내려졌다. 이로써 100여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적(事績)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진실로 조정의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포숭(褒崇)의 은혜가 구천(九泉)에 미치고 영광(榮光)이 자손에 미치는 경사(慶事)였다. 그로부터 집의 당호(堂號)를 효우당(孝友堂)이라 하였다. 정문(呈文)과 당시에 정려(旌閭)를 축하하던 詩도 있으나, 지면관계로 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配는 수안김씨(遂安金氏)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인 근(瑾)의 따님이다. 二男을 기르셨는데, 장남은 성균진사(成均進士) 득인(得仁)이고, 차남은 복인(復仁)이다. 묘소는 풍산읍(豐山邑) 계평동(桂坪洞) 빈소곡(殯所谷)의 가장 위의 임좌(壬坐)이다.
『興海裵氏世蹟』 p165
▶ 여묘(廬墓) :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 곡읍(哭泣) : 소리내어 슬피 욺.
▶ 직첩(職牒) : 조정(朝廷)으로부터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任命).
▶ 정문(呈文) : 하급(下級) 관청(官廳)에서 상급(上級) 관청(官廳)에 보내던 공문서(公文書).
▶ 정려(旌閭) : 충신(忠臣)ㆍ효자(孝子)ㆍ열녀(烈女) 등(等)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