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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신명기계 역사서
1. 여호수아기
모세 오경에 이어지는 여호수아기는 우리 앞에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를 펼쳐 보인다. 이 시대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에 첫발을 디디고,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중요한 시기이다. 유다교에서는 구약 성경을 ‘율법서’(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나눈다.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크게 갈라지는데, 여호수아기는 이 ‘전기 예언서’라는 큰 단락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1.1 여호수아기의 구조와 내용
여호수아기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1-12장과 13-21장). 그리고 특이하게도 여기에 각각 맺음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 개의 장이(22; 23; 24장) 이어진다.
1) 가나안 땅의 정복(1-12장)
먼저 1장은 책 전체의 서론 구실을 한다. 2장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 정복을 시작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예리코에 정탐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리코 쪽으로 요르단 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친다(3-4장). 그리고 광야를 건너오면서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인들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고, 이어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5장). 예리코의 함락과(6장) 아이의 점령으로(8장) 이제 중부 팔레스티나에서부터 정복 사업이 개시된다. 그 와중에 하느님의 명령을 거스른 아칸의 죄악이 드러나기도 한다(7장). 그 뒤에 여호수아가 기브온인들과 평화 조약을 맺게 되는데(9장),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임금을 주축으로 한 반이스라엘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이어 기브온에서 전투가 벌어진다(10장). 북부 팔레스티나에서도 하초르 임금이 이끄는 새로운 연합군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스라엘군은 이 군대도 물리치고 하초르 성읍을 불살라 버린다(11장). 12장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지방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2) 가나안 땅의 분배(13-21장)
이 부분은 먼저 열두 지파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일을 자세히 전해 준다(13-19장). 그 다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이가 피신할 수 있는 도피 성읍들과(20장) 레위인들이 살 성읍들이 열거된다(21장).
3) 맺음말(22; 23; 24장)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복에 참여하였던 요르단 동쪽 지파들을(1,12 -16) 그들의 상속 재산이 있는 요르단 건너편으로 돌려보낸다(22,1-6). 이 첫 번째 맺음말에 일화 하나가 덧붙여진다(22,7-34). 곧 이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제단을 세우는데, 그것이 열두 지파 사이의 일치를 엄숙하게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23장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을 담고 있다. 23장의 내용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 하는 듯한 24장은, 여호수아가 ‘스켐 집회’를 소집하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만 섬긴다는 내용의 계약을 백성과 함께 맺었다고 전한다.
1.2 여호수아
이렇게 여호수아기의 구조와 내용을 요약해 볼 때, 이 책 전체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인물이 부각된다. 곧 에프라임 지파 소속으로(민수 13,8.16) 눈의 아들인 여호수아이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이 이름은 그가 일생을 통해서 보여 주게 될 일들의 청사진과 같은 것이다(특히 23,14 참조). 달리 말하면, 이 이름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언이다. 곧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된 땅을 정복했다는 것은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영적 해방으로서, 그 참의미가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마태 1,21 참조). 성경의 어떤 전승에 따르면, 모세가 그의 이름을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로 바꾸어 주는데(민수 13,16), 이름이 바뀌었음은 운명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성경에 보면 다른 이들도 이 이름을 지녔는데, 신약 성경 시대에 와서 그리스 말로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예수가 된다(히브 4,8 참조). 이러한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하신 행동과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안식의 땅으로 이끈 행동을 쉽게 연관시킬 수 있게 해 준다. 모세 오경에서는 여호수아가 늘 모세 곁에 있으면서도 그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탈출 24,13에 따르면, 그는 모세와 함께 하느님의 산으로 올라간다. 그는 또 만남의 천막을 떠나지 않고 지키며(탈출 33,11), 때로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탈출 17,8-16). 그러나 여호수아는 항상 모세의 “젊은 시종”일뿐이다. 모세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여호수아는 드디어 모세에게서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중대한 사명을 받게 된다(민수 27,18-23; 신명 31,7-8).
1.3 여호수아기의 저작 과정과 의도
여호수아기를 단순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순서대로 기술하는 보고서로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현대의 성서학은 이 책이 근거로 한 전승들, 곧 그러한 과정을 담고 있는 전승들의 중요성을 점점 더 크게 인식한다. 그렇지만 여호수아기가 이야기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때와(기원전 13세기 말경) 이 책이 최종적으로 편집된 시기 사이에는 여러 세기의 간격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연맹 전체가 가나안 땅 전부를 정복하였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인들의 땅 가나안은 다윗 시대에(기원전 10세기) 와서야 완전히 정복된다. 그 이전에는, 여호수아기 자체도 자주 시사하듯이, 가나안인들이 전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주로 산악 지방만 내주었을 뿐, 계속 평야 지대에 살면서 이스라엘인들과 공존하였다(15,63; 16,10; 17,12.18 참조). 여호수아가 죽을 때, 가나안 땅 전체가 이미 열두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23장, 특히 13,1-7 참조).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어떤 전망에서 읽어야 하는가? 여호수아기는 어떠한 의도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가?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2-10장이 벤야민과 에프라임, 곧 중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던 두 지파에 고유한 전승이면서, 동시에 길갈, 그리고 이어서 베텔 성소와 관련된 전승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기의 이 첫 부분은 기원전 10세기 말에 편집되었다. 이 단계에서는 여호수아가 백성 전체를 지휘한다. 이 백성은 아직 뚜렷한 체제를 갖춘 집단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집트 탈출에 참여한 몇몇 지파의 전사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이 계속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 너머로는 경신례적인 차원이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의 자료 자체가 전례적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갈대 바다 횡단과 짝을 이루는 요르단 횡단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3-4장). 이스라엘인들은 성전 전례에 참석하기 전에 하듯이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 다음, 하느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을 앞세우고 요르단 강을 건넌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실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약 궤를 모시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전례 행렬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5장에는 할례에 이어서 가나안 땅의 소출을 가지고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명백히 전례적 순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명기를 저술한 ‘학파’에 속하면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최근의(기원전 7-6세기) 체험에 비추어 묵상하려는 편집자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서, 그때까지 형성된 여호수아기의 자료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묵상은, 이전 작품에 가한 수많은 손질 외에도, 특히 1장과 23장에 나오는 긴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가나안 땅의 정복은 이제 일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일로 제시된다(10,28-39 참조).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계속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치가 위협받는 시대에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1,12-16; 12,1-6; 13,8-32; 22,1-6 참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에게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공존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충성이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호수아기에 이 충성에 관한 생생한 관심이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에 사는 민족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곧 그들을 모두 “완전 봉헌물”로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6,17.21; 11,12.14).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조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피할 수 없던 우상 숭배의 위험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난 뒤의 생각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투영시킨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면보다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이유로, 신명기계 편집 작업의 손질을 훨씬 덜 받은 13-19장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개개의 경계선과 각 지파에 속한 성읍 명단이 나열된다. 우리에게는 지루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부분은 이스라엘 지파 연맹의 구성원들이 가나안 땅을 나누어 받은 전통적 배분에 관한 아주 값진 문헌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윗 왕조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왕조 시대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후대의 첨가문들도 있다. 여호수아기의 편집 과정에서 신명기계의 편집 이외에 사제계의 영향도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몇몇 장에서는 엘아자르 사제와 그의 아들 피느하스의 역할이 여호수아의 역할을 대신하는 데까지 이르는데(14,1; 19,51; 21,1; 22,13.30.32),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 실로의 성소와 연관된다.
1.4 여호수아기와 역사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편집 작업을 염두에 두면, 여호수아기의 역사적 관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 혼자 지휘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료들을 그러한 방향으로 체계화시킨 데에서 기인한다. 실제의 사건들은 그러한 단순화-체계화 이전에 상당히 복합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베텔의 정복은 여호수아기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판관기에 가서야 다루어진다(1,22-26). 스켐을 빼앗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이 성읍의 원주민과 평화적인 협정을 맺고 그곳에 자리 잡았음을 드러내는 표시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헤브론과 드비르의 함락이 여호수아가 한 일로 나오지만(10,36-39), 다른 곳에서는 칼렙이 헤브론을 정복하고, 오트니엘이 드비르를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15,13-14.17; 판관 1,11-13).
이 시기의 역사를 더 잘 알기 위해서 가끔 고고학적 증거들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사실 고고학의 발굴로, 기원전 1200년경에 끝난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팔레스티나의 몇몇 도시가 격렬한 방식으로 파괴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시기를 대략 기원전 1230년경으로 잡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이 이 땅을 정복하면서 그렇게 파괴한 것이라고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떠한 통일 왕국도 이루지 않았던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 사이에 지속된 적대적 경쟁 관계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느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다른 침략자들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모습만 보여 줄 뿐 구체적인 사실이나 사건을 지목하여 설명하지 않는 고고학적인 논증을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고고학자들이 기원전 13세기 말경에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는 하초르와 같은 성읍은, 여호 11,10-11에 나오듯이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이 불살라 파괴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반면에 예리코의 경우, 이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럽다. 예리코 함락을 이야기하는 6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과정과 복합적 구성을 드러내는 이 6장이 예리코라는 성읍의 포위 공격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가 아님이 드러난다. 6장의 이야기는 일종의 ‘종교 의식’, ‘전쟁 전례’로 제시되는 것이다(6장 첫째 소제목 각주 참조). 성경 본문이 우리가 제기하는 의문이나 질문에 항상 시원한 대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1.5 약속의 땅
이 책의 중심인물인 여호수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이다. 모세 오경에서 이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대상이었다. 그 약속이 이제 여호수아기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이들은 이 책까지 포함해서 ‘오경’이 아니라 ‘육경’이라고 말한다. 땅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진실성과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이 실현되는 곳이다. 땅은 또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가시적 보증이다. 그리고 이 보증은 생기 없는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피조물들과 만나고 삶을 통해서 그것들을 성화시켜 나가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생생하고 간절한 초대이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선조들에게 주시고 또 모세를 통해 새롭게 하신 약속의 실현이다. 그래서 수많은 지명이 나열될 때에 그 가운데 서서 무미건조하게 관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신 상속 재산을 꼼꼼히 기술하는 성경 저자의 기쁨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약속의 땅은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늘 새롭게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호수아기는 말한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이 제거되지 않고 늘 존재한다. 이 긴장은 또한 하느님 백성의 실존을 구성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2. 판관기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구약 성경을 모세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눈다. 예언서는 다시 크게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갈라진다. 전기 예언서에서 여호수아기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판관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에서 가장 덜 알려진 시대에 지파들이 펼쳤던 생활의 일부를 엿보게 해 준다. 그 시대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때부터 왕정이 출현할 때까지이다.
2.1 판관기의 구조
이 책의 구조는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첫째 서문은(1장) 이스라엘 지파들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파들은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서로 협조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보다는, 저마다 따로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파마다 영토를 나누어 받았지만, 그 안에는 계속 가나안인들이 성읍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지파들은 이러한 가나안인 성읍들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2,1-5에서는, 가나안 땅을 쉽고 빠르게 차지하게 해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 반대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일차 설명이 주어진다.
가나안 정복 시대를 설명하는 이러한 예비 서술에 이어서, 판관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2,6-16,31). 이 판관 시대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역사 가운데에서 특별히 이 시기가 지니는 종교적 뜻을 밝히는 둘째 서문으로 도입된다(2,6-3,6). 모세에 이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여호수아의 시대는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께 충성을 다한 시대였다. 그러나 판관 시대는 한마디로 불충의 시대로 묘사된다. 이러한 내용의 서문에 이어, 판관들의 행적을 전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판관들은 모두 열둘인데(바락과 아비멜렉은 판관이 아니다), 그들에 관한 서술의 길이는 제각각이다.
그들의 이름과 행적,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판관 오트니엘은 아람 나하라임 임금 쿠산 리스아타임으로부터(3,8 각주 참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3,7-11), 왼손잡이 에훗은 모압 임금 에글론을 죽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며(3,12-30), 여예언자 드보라는 가나안 임금 야빈에 대한 저항의 불꽃을 타오르게 한다(4,1-5,31). 이 뒤에 힘센 장사 기드온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6,1-8,35), 판관 입타의 인도 아래 동쪽 암몬족과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10,6-12,7), 그리고 삼손이 서쪽 필리스티아족에 대항하여 싸운 업적이(13,1-16,31) 소개된다. 대판관들로 불리는 이들 6인들은 소판관들인 삼가르(3,31), 톨라(10,1-2), 야이르(10,3-5), 입찬(12,8-10), 엘론(12,11- 12), 압돈(12,13-15) 6인을 사이에 두고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판관기는 왕정이 수립되기 전에 이스라엘에 팽배해 있던 무질서와 혼란을 보여 주는 두 개의 부록과 함께 끝을 맺는다. 첫째 부록은 단 지파의 이주와 단 성소의 기원을 이야기한다(17-18장). 그리고 둘째 부록은 기브아 주민이 저지른 악행을 서술하고, 이어서 범죄자들의 처벌을 거부하는 벤야민 지파와 그러한 벤야민인들을 징벌하려는 다른 지파들 사이의 전쟁을 이야기한다(19-21장).
2.2 판관과 “구원자”
이 책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전체적으로 “판관”이라고 불리는데, 이 명칭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칭호의 복수는 2,16-18에만 나오는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려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용례는 성경 본문 자체에서 흔하지 않다. 반면에, 왕정 이전의 시기를 ‘판관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의 전통에서 잘 알려져 있다(2사무 7,11; 2열왕 23,22; 룻 1,1). 사실상 판관들의 이야기 자체에서는 ‘판관’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명사와 같은 어근에서 나오는 동사 샤팟, 곧 우리말로 ‘재판하다’, 그리고 판관기에서는 특별히 ‘판관이 되다, 판관으로 일하다’로 옮길 수 있는 동사가, 이 책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활동을 서술하는 데에 상당히 자주 쓰임을 볼 수 있다(3,10; 4,4; 10,1-5; 12,7.8-15; 15,20; 16,31). 또 이 동사가 해당 판관 이야기의 틀을 이루는 부분에서 가장 흔히 사용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쓰임이 편집자들에게서 유래하는 것임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이 동사는 단순히 ‘재판하다’, 그래서 ‘정의를 펼치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지휘하다, 지배하다’라는 뜻까지 담고 있다. 이 동사를 일반적으로 ‘재판하다’로 옮기고, 판관기에서는 ‘판관이 되다’, ‘판관으로 일하다’로 번역해 오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넓게 이해해야 한다. 사실 히브리 말에서는 이 동사가 권위와 권한을 행사하는 실질적 직책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관으로 일한다.’는 것은 재판정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지도와 통치까지도 내포한다. 이러한 쓰임은 이웃 민족들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특정한 인물들이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재직하였다고 할 때, 이 판관기에서 무공을 전해 주는 이들이 모두 실제적으로 이 직책을 가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판관’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업적을 서술하는 또 다른 용어, 곧 ‘구원하다’라는 동사가 있기 때문이다(3,31; 6,15; 10,1). 오트니엘과 에훗이 바로 “구원자”로 불린다(3,9.15).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느님 자신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구원을 실현시키신다(3.9; 6,36-37; 7,7; 10,13). 이로써 ‘구원자 인간’과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표현의 이원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판관기를 봉독할 때에 드러나는 인간적 전망과 신적 전망의 이중성을 가리키는 표지가 될 것이다.
이 책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우선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 없이 형성되어 내려오던 여러 전통 또는 이야기 모음들이다. 이른바 ‘소(小)판관들’에 관한 기술은(10,1-5; 12,8-15) 간략한 내용만 전하는 옛 명단에서 유래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소판관들’의 명단 가운데에 자리한 입타의 이야기는(10,6-12,7), 어떻게 ‘판관’에서 ‘구원자’로 넘어갈 수 있었는지 확인하게 해 준다. 입타는 ‘판관’이면서 동시에 ‘구원자’였다. 다른 판관들의 이야기는 옛 전통들에 근거하여 확장되고 보충되고 합쳐진 것이다.
2.3 신학적 전망
판관기는 단순히 이러한 전통들과 모음들만이 아니라, 그 너머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 그냥 사건들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종교적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망은 특별히 서문(2,6-3,6), 6장의 앞부분(7-10절), 그리고 입타 이야기의 입문에서(10,6-16) 발견할 수 있다.
이 신학적 전망은 일련의 도식적 표현 정식에 따라서 특정지어진다. 첫 번째 정식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이다(2,11; 3,7.12; 4,1; 6,1; 10,6; 13,1). 이 말의 내용을,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는(2,13; 3,7; 10,6) 또 다른 표현 정식이 구체적으로 밝혀 준다. 그리고 이러한 불충의 결과는, ‘주님께서 그들을 적들의 손에 넘겨 버리셨다’는 말로 서술된다(2,14; 3,8; 4,2; 6,1; 10,7). 이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는 표현 정식이 나온다(3,9.15; 4,3; 6,6; 10,10). 당신 백성의 이러한 탄원에 주님께서는 판관(2,16) 또는 구원자를 세우심으로써 응답하신다(3,9.15).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종결 부분에 또 다른 표현 정식들이 나온다. 곧 ‘원수는 이스라엘의 손 아래 굴복하였다.’(3,30; 8,28. 그리고 4,23-24 참조), 또는 ‘이 땅은 몇 해 동안 평온하였다.’는 정식이다(3,11.30; 5,31; 8,28).
이러한 표현 정식들에서 네 단계로 된 종교적 논리가 나온다. 곧 죄-벌-회개-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은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오지만,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의 회심은 구원자의 파견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역사 신학을 보게 된다. 이는 후대에 와서 판관들의 이야기에 보태진 것으로, 전체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신학이다. 그러나 이 신학적 틀은 판관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과 항상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 신학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우선은 옛 전통들과 이야기 모음들을 수집한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편집자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편집자들을 신명기계 저자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미흡한 가설일 뿐이다. 신명기에서 열왕기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신명기계 역사’를 구성하는 다른 책들에서는, 위에서 말한 네 단계로 된 신학적 명제가 바로 그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없다. 이 밖에도 서문이 여럿이라는 사실, 가나안 땅 정복이 늦어진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들(2,6-3,6),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판관들의 수도 열둘로 끝맺으려는 편집자들의 의도 등은, 이 책의 편집 작업이 상당 기간,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아무튼 판관기에 나타나는 신학적 전망은 틀림없이 신명기계 편집자들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전망을 강화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직접 창출하였다고는 단정할 수가 없다.
판관기의 두 부록(17-21장) 역시 옛 전통들을 이어받은 것인데, 유배 중에 또는 유배 이후에 첨가되었다. 이 부록들이 사제계 문헌들에(‘오경 입문’ 참조) 나오는 어휘를 쓰고 있는 데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옛 사료들을 내포하면서 유다 지파를 옹호하는 경향으로 특정 지어지는 1장의 서문이 어느 시대에 첨가되었는지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2.4 판관기와 역사
이렇게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판관기의 편집 과정을 둘러싸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역사가에게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왕정의 탄생에까지 이르는 시대에 관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판관 시대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 보고, 이스라엘 몇몇 지파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느슨하게 연결해 주는 열두 지파 동맹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통일성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역사는 결국 특정 지파들 사이의 친근성 또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여러 집단의 이야기, 이미 차지한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전쟁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단편적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좁게는 판관들을, 넓게는 판관 시대를 연대순으로 쉽게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이렇게 간략히 제시되는 연대 순서가 문제를 안고 있다.
판관기는 어떠한 역사적 연대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각 판관의 직무 수행 기간만 제시할 뿐이다. 각 판관이 활동하였다는 햇수를 합치면 410년이 되는데 이 수치는 이스라엘 역사의 다른 연대 사료와 들어맞지 않는다. 대부분이 편집자들에게서 유래하는 각 판관의 활동 햇수는 나름대로 논리적 근거를 찾아내어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40이라는 수가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은, 판관기에 나타나는 자료들의 대략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사실 판관 시대의 연대는 왕정 시대가 시작하는 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시기를 함께 고려하면서 계산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판관기에서 전해지는 전통들은 모두 기원전 1200년과 1020년 사이에 자리 잡게 된다.
2.5 이스라엘 신앙의 책
역사가에게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난해한 문헌인 판관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인들이 지녔던 신앙의 산물이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와(5장) 같이 이 책을 구성하는 가장 오래된 본문들에서부터 이미 이스라엘인들의 확신이 드러난다.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어려운 때마다 당신의 백성을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신학적 틀은, 계속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들려는 이스라엘의 나약성과, 억압당하는 당신 백성의 지파들을 구원하시려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보내시는 하느님의 인내를 먼저 강조하면서, 이러한 믿음을 더욱 강화시킨다.
물론 판관기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성인도 아니고 군자도 아니다. 관습들이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이고, 도덕 개념들이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시대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에훗의 계략(3,12-30), 야엘이 시스라를 살해하는 일(4,17-22), 자기 딸을 죽여 희생 제물로 바치는 입타의 행동(11,34-40), 그리고 삼손의 애정 행각(14-16장) 등은 우리에게 놀라움뿐만 아니라 당혹감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충격적 현실을 완화시키거나 부도덕한 현실을 미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신의 영을 받은 지도자들(3,10; 6,34; 11,29; 13,25; 14,6.19; 15,14), 인간적으로 볼 때에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보내시어 한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의롭게 인도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을 받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임금을 예시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은 다시 다양한 은사를 지닌 주님의 영을 충만히 받는 메시아를 예고한다(이사 11,2).
3. 사무엘기
3.1 책의 이름
사무엘기를 두 권으로 나눈 것은 최근의 일이다. 1사무 28,24에 대한 마소라 본문의 각주는 이 대목이 “책의 중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스 말 번역자들은 이 책을 두 두루마리에 옮기면서 ‘첫째 왕국기’, ‘둘째 왕국기’라고 아름을 붙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도 이 구분을 받아들여 이 책을 ‘제1열왕기’와 ‘제2열왕기’라 불렀으며(오늘날 우리가 열왕기 상권과 하권으로 부르는 책들은, 각각 ‘제3열왕기’와 ‘제4열왕기’로 불렸다), 15-16세기부터 히브리 말 성경도 두 권으로 분류되었다. 히브리 말 본문과 그리스 말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 중대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칠십인역의 역자들이 마음대로 그리스 말 번역본에 첨가나 삭제를 했을 가능성은 없다. 쿰란에서 발견된 히브리 말 본문 가운데 이미 출판된 희귀본들은 때때로, 칠십인역이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 본문에 더 가깝다. 그러나 수사본들이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원문”에 더 가깝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칠십인역이나 그 히브리 말 번역 대본은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문장들을 삭제하려는 경향을 지녔으며, 마소라 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본문보다 덜 까다로운 수정본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미 초세기 이전부터 두 개의 본문이 공존하였던 것 같다.
사무엘기라는 이름은 사무엘 예언자를 이 책의 저자로 여긴 옛 라삐 전승에서 비롯된다(바바 바트라 14b). 후대의 라삐들은 1역대 29,29-30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사무엘이 죽은 후에 그의 작품이 나탄과 가드를 통하여 이어졌다고 추정하였다(바바 바트라 15a). 비록 사무엘기라는 정의 자체가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다분히 인위적인 면이 있다. 특히 사무엘기 하권의 21-24장은 같은 문체와 의도를 지닌, 다윗 왕조 내부의 사건들에서 시작하여 솔로몬의 즉위에까지 이르는 이야기를 중단시킨다. 이 이야기를 이어 가는 열왕기 상권의 처음 두 장이 2사무 21-24장으로 말미암아 중단되는 것이다. 이 삽입 대목은 판관 17-21장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이 경우에도 구원자 판관들의 이야기가 판관 17-21장으로 중단되었다가 1사무 1장에서 다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3.2 책의 내용
일종의 “부록”인 2사무 21-24장을 떼어 놓고 보면 현재의 사무엘기는 연대순으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첫째 부분은(1사무 1-7) 사무엘이 태어나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자, 대판관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배경은 실로에 있는 계약 궤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이다.
사무엘이 늙자, 외부의 위협으로 불안해진 백성은 그를 찾아와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한다. 신정 제도를 옹호하는 사무엘 예언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선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이스라엘 원로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울을 임금으로 세운다.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물러난다. 왕정에 대한 논란과 사울에 관한 이야기들이 1사무 8-12장, 곧 둘째 부분을 이룬다.
셋째 부분은(1사무 13-15)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아말렉족과 벌인 전쟁들을 다룬다. 사울이 전쟁들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의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두 가지 죄를 범하고, 이 때문에 사무엘은 그에게 암시적인 말로 왕좌에서 쫓겨나고 다윗이 그 뒤를 이으리라고 알려 준다.
넷째 부분으로, 다윗이 사울 앞에 소개된 때부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성별될 때까지의 이야기는 1사무 16장에서 2사무 5장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다윗의 왕위 등극사”에서 그려진다. 다윗은 어릴 때 사무엘에게 성별되어 사울을 섬기다가 필리스티아 거인을 이기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쌓아 모든 사람, 특히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울은 병적인 시기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쟁자 다윗을 제거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자 결국 도망을 쳐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섬기게 되지만 군대를 이끌고 동족을 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마침내 사울과 요나탄이 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다윗은 사울의 후계자들과 싸움을 벌여 잇단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사울의 집안은 갈수록 약해진다.
다섯째 부분은(2사무 6-8) 사무엘기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는 2부작의 연결 부분이다. 다윗의 예루살렘에 실로의 궤를 안치하는데, 이는 자신이 점령한 성읍을 왕국의 수도로 성별하는 행위이다. 또한 나탄의 예언은 다윗의 편을 들어 다윗 왕조가 왕국의 중심이 되도록 뒷받침해 준다. 8장의 기록은 예루살렘 왕국의 창시자가 실제 왕국의 정복자였음을 상기시킨다.
2부작의 후반부는 2사무 9-20장의 내용인데, 여기에 1열왕 1-2장도 덧붙여야 한다. 여기에는 여러 사건들이 얽혀 있는데, 결국에는 솔로몬의 등극으로 끝을 맺는다. 솔로몬의 탄생과 이를 둘러 싼 여러 상황들, 그리고 솔로몬의 등극에 장애가 되었던 다윗의 아들들, 곧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등이 어떻게 제거되었는지를 들려준다.
“다윗의 왕위 계승”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삽입된 2사무 21-24장은 두 편의 시가와 여러 인물들에 관한 기록, 그리고 두 가지 자연재해와 그 액땜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이 이야기들은 역사적, 종교적 면에서 중요한데도 앞 장들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3 사무엘기와 이스라엘의 역사
사무엘기의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기간을 다루는데, 적어도 그 마지막 시기는 정확하게 밝힐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노년기, 곧 기원전 970년에 솔로몬이 즉위하기 몇 해 전까지의 기록을 보게 된다. 판관들의 역사에서처럼 초기의 일화들은 그 연대를 분명히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와 관련된 사무엘기의 전승들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필리스티아의 지배에 관한 정보, 특히 필리스티아인들이 독점했던 철기류 제조에 관한 기록(1사무 13,19-21),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장소들을 많이 언급하는 전쟁 이야기들(1사무 13; 17; 31), 도망 다니던 다윗에 관한 일화 등이 이에 속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다윗과 사울 집안 사이에 얽힌 이야기와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갈등은 한층 역사적 근거가 분명한 전승이다. 2사무 8장이 들려주는 다윗의 전투들도, 비록 외적인 증거들은 없지만 결코 거짓이라 할 수 없다. 기원전 10세기 초에 다윗 왕국이 건설된 시기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방어적 처지에 놓여 있을 때였고,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통치 아래 번영을 구가하며 그 세력이 지중해와 홍해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다윗의 신하들에 관한 언급과(2사무 8,15-18; 20,23-26) 2사무 24장이 들려주는 인구 조사는 영토를 조직적으로 정비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가진 것이라곤 군대밖에 없던 사울 시대 이후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 준다. 반면에 사무엘기에서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힘들다. 필리스티아인들의 위협이 원로들에게 사무엘을 찾아가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사울을 암몬인들의 정복자이자 야베스 길앗의 구원자로 소개하는 1사무 11장의 전승을 잘 살펴보면 왕정 시작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승이 사울의 즉위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과 역사적으로 일치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울이 어디에서 왕위에 올랐는가? 라마에서인가, 미츠파에서인가, 길갈에서인가, 아니면 여러 장소에서 거듭 즉위하였는가? 사울의 통치에 관한 기록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1사무 13,1은 그의 통치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음을 암시해 준다.
3.4 편집 요소들
사무엘기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기록한 연대기가 아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여러 자료들을 한데 모은 문학 작품이다. 이 자료들 가운데에는 대단히 오래된 것들도 있다. 이 작품은 사울과 다윗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두 전승들을 모아 놓고 있지만, 이 전승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본디 그 원초적 사료가 어떠했는지를 밝혀낼 수는 없다. 이 기록들은 아마도 솔로몬 치하에서 편집되고,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 보충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사무엘기가 “신명기계”(여호수아기-판관기-사무엘기-열왕기)라고 하는 역사학파의 작품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신명기계 작품은 어법과 문체로 쉽게 구별된다.
주석가들은 “다윗 왕위 계승사”(2사무 9-20과 1열왕 1-2)가 비교적 일관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창조 이야기로(창세 2) 시작하는 옛 민족사를 전해 주는 오경의 “비사제계”(야훼계) 전승과 거의 같은 문학적 특성을 보여 준다는 데에 동의한다. 압살롬의 반란 이야기를 보면 구체적이고 생생한 세부 묘사로 가득한데, 이 사실로 미루어 이 이야기는 후대에 편집되었다기보다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쓴 작품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계승사”의 핵심을 이루는데, 솔로몬의 탄생 이야기로(2사무 9-12) 시작하여 아도니야의 패배 이야기로(1열왕 1-2) 끝맺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솔로몬의 등극사”라 부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전체적으로 객관적 상황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저자의 개인적 성향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나탄의 예언과(2사무 7) 계약 궤 이야기에(2사무 6) 들어 있는 오래된 요소들을 포함하여, 다윗 왕위 계승사 앞에 나오는 기록의(1사무 16-2사무 5) 기원을 밟아 올라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등극사 또는 다윗의 왕위 등극사가 생각보다 더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볼 때, 중복 기사들은 매우 특이하다. 다윗이 사울을 섬기기 위하여 입궐하고, 다윗을 해치려는 사울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며, 요나탄이 다윗의 편을 들고,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피신하는 이야기, 또 지프 주민들이 다윗의 피신처를 밀고하고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 주는 일화 등은 모두 중복되어 나온다. 이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다윗의 등극사가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사료”들을 확장한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는 이미 구두로 정착되거나 부분적으로 기록된 여러 전승들이 들어 있었는데, 이야기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이 전승들을 보존하면서 고정된 표현 정식이나 틀을 유지시키고, 핵심 낱말을 사용하여 각 대목의 주요 주제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중복 기사가 있지만, 다윗 왕위 등극사와 다윗 왕위 계승사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아서 두 저자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볼 수 있겠다. 곧 예루살렘 궁궐 서기들이 다윗 임금을 찬양하는 구두 전승들을 뽑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다윗 임금의 이상화(理想化)과정은 편집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어진다. 이 사실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1사무 16장의 의도가 이 두 번째 임금을 첫 번째 임금과 같은 차원에 놓고자 하는 데 있으며, 분명히 후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15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울이 벌인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들은 하나의 편집 작품이다. 여기에서 사울 시대에 필리스티아인들과 치른 전쟁들에 관한 옛 전승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전승들에서 진짜 영웅은 다윗의 친구인 요나탄이다. 그리고 이 전승들은 대체적으로 사울에게 적대적인 경향을 보인다(1사무 13-14). 아말렉과의 전쟁 이야기가(1사무 15) 옛 전승에서 비롯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탓에 사울 왕가가 멸망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도입된 것으로, 문학적 손질 작업을 거쳤을 것이다. 사울의 파멸은 그를 이어 곧 임금이 될 다윗의 이야기에 꼭 필요한 서막이다.
왕정의 기원을 다루는 1사무 8-12장도 꽤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여기에도 다양한 기원을 가진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있다. 이 가운데에서 어떤 것들은 비록 손질을 거치기는 했지만 분명히 옛 전승들이다. 벤야민 지파의 설화에서 나와 각색된 것임에 틀림없는 암나귀 이야기(9,1-10,16), 미츠파에서 제비로 임금을 뽑은 전승(10,17-27), 사울을 적국 암몬을 물리친 영도력 있는 판관으로 그리는 11장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들이다. 8장은 왕정의 제정과 함께 야기된 신학적 문제점을 곧바로 보여 준다. 비록 주님께서 임금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의 청을 끝내는 승낙하시지만, 이 장은 그러한 백성의 간청을 단죄한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사무엘이 동족들에게 경고한 이른바 “임금들의 권한”을 이스라엘 임금들의 악습을 미리 단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원전 이천 년대 말기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행해졌던” 임금들의 관행을 상기시킨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8장의 근간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옛 전승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8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연설은 사무엘기의 다른 연설들과 마찬가지로 신명기계 역사가의 손질을 거쳤다는 사실을 유념해야할 것이다. 연설은 이야기를 늘리는 데 가장 적합한 문학 유형이다. 12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고별사 역시 전형적인 신명기계 역사가의 작품이다. 이 모든 작품에서 사울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라는 사실만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될 뿐이다. 저자의 관심은 누가 첫 번째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왕정 제도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사무엘기의 첫 부분에서(1사무 1-7) 중심인물은 사무엘이다. 이 인물은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소개되는데, 때로는 성소와 관련지어지며 예언직의 사명을 받는다. 동시에 저자는 그에게서 당대의 참된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1,27-28 참조). 이것은 사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사무엘의 선택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임금을 성별한 그가 진정 주님의 마음에 드는 심부름꾼임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1-7장의 다른 요소들은 사무엘기 전체의 주요 관심사들을 고려해야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일례로서 계약 궤에 얽힌 사건들이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이 사건들이, 다윗이 세운 도성의 보호자로 삼은 거룩한 궤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2,27-36에 나오는 “믿음직한 사제”에 대한 예고는 솔로몬 시대에 제정된 차독 가문의 사제직에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2,7에서 간결하게 표현된 높임과 낮춤이라는 반명제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에게 맞서는 사무엘의 이야기뿐 아니라 사울과 그의 집안에 맞서는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렇게 사무엘에 관한 일화는 이어서 나오는 일화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1-6장을 구성하는 옛 전승들의 편집자는 왕정 지지파로 볼 수 있다. 7장에서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관심과 문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역사가가 판관기의 역사를 완성하려는 의도로 7장을 재편집한 것이다.
3.5 왕정에 관한 교훈
이야기 저자들의 정치적, 종교적 경향을 살펴보면 사무엘기의 구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사실 사무엘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를 들려주는 긴 이야기라기보다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왕정이다. 저자는 왕정 제도의 애매모호함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통치자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는 왕정 제도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풀려 나갔다. 주님과 그분의 대리자인 사무엘이 결국 사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왕정을 먼저 요구하였던 백성이 즉각 단죄를 받은 것은 아마도 왕정이 인간적 원의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의 군주 제도는 민주적인 것도 전제적인 것도 아니라 오직 신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사울은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듯 백성이 ‘요구하였기’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경건한 사람의 권위를 드높여 준다. 사무엘기는 사울의 파멸을 불러온 잘못들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무엘기는 예배의 대상과 관습과 인물에도 관심을 가진다. 만져서는 안 될 계약 궤와(2사무 6,7) 예루살렘의 제단에(2사무 24) 관한 일화는 그 좋은 예들이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임금은 다윗이다. 저자는 다윗이 용맹한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음을 드러내고 그가 거둔 전공들,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호감, 그의 관대함과 겸손 등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애초부터 이상적 인물로 부각시킨다. 이 이상적 임금이 주님께 보인 순종의 정신과 그의 탄원,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의 뜻을 묻고자 한 사실 등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기에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난 뒤에 나탄 예언자의 질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탄은 이스라엘에서 임금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윗에게 일깨워 주었다. 한편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후손은 벌을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식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리를 물려받으리라는 보장을 받는다. 이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태어 날 때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서서히 부상한다. 사무엘기는 결국 유다 왕조를 옹호하는 작품이다. 나탄의 예언에 따르면(2사무 7) 임금들이 개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기는 해도 다윗 집안이 예루살렘의 왕좌를 끝까지 지키게 되어 있었다. 이 예언의 골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편집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유다의 군주 제도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믿었던 시기에 나왔을 이 종교적 이념은 다행스럽게도 사무엘기가 구원 역사 안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훗날 언젠가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큰 잘못을 저질러 왕국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에 결정적 심판이 내려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 주신 영원한 보증을 계속 믿으면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약속에 합당한 인물이 나오기를 고대하게 된다. 그분이 바로 이상적 임금이신 메시아로서, 인성으로 볼 때 그분은 분명히 기원전 천 년경에 주님께서 뽑으신 이의 후손이시다.
4. 열왕기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긴 기간을 다룬다. 열왕기가 다루는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은 다윗의 말년에 일어난 일로서(1열왕 1-2,10), 그 연대는 기원전 970년경이다. 반면에 열왕기의 역사에서 가장 나중에 일어난 사건은 기원전 561년 여호야킨 임금이 바빌론 임금의 특전을 받은 일이다(2열왕 25,27-30). 그러나 열왕기를 전기 예언서로 분류한 히브리 말 성경의 목록이 시사하듯, 이 책에 수많은 역사적 자료가 나온다 해서 독자들은 이 책을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이스라엘 임금들이 통치하던 이스라엘 역사의 일정 기간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라 할 수 있으며, 크게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가. 다윗의 통치 말년과 솔로몬의 통치(1열왕 1-11)
나. 왕국의 분열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까지(1열왕 12-2열왕 17)
다.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유다 왕국의 마지막까지(2열왕 18-25)
4.1 열왕기의 기원
우리에게 전해진 열왕기는 뚜렷이 둘로 나뉘어 있지만, 히브리 말 성경은 한 작품이다.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 말 번역자들이 이것을 둘로 나누어 옮겼다. 이후 이 분리는 점차 굳어져, 유감스럽게도 아하즈야의 통치 시대와(1열왕 22,52-54에서 시작하여 2열왕 1장으로 끝남) 엘리야 이야기를 (1열왕 17장에서 시작하여 2열왕 1장으로 끝남) 두 권에 갈라놓게 되었다.
열왕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성경의 다른 책들과 완전히 독립해서 쓰이지 않았다. 열왕기는 본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를 포함하는(여기에는 신명기도 포함될 수 있다) 하나의 역사 문헌에 속해 있었으리라고 본다. 한 가지 좋은 예로 1열왕 1-2,11은 다윗의 통치를 전하는 사무엘기 하권과 곧바로 이어진다. 사무엘기와 열왕기가 왜 구분되었는지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열왕기를 분석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다른 색깔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열왕기 저자 자신이 이전의 기록을 이용했음을 밝히며, 자기가 의존한 사료들 가운데 몇몇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이는 이 작품이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쳤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1열왕 11,41; 14,19.29 등은 각각 ‘솔로몬의 실록’,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 ‘유다 임금들의 실록’을 언급하는데, 이런 사료들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본문을 편집할 때 출발점이 되었던 문헌들이다.
그러나 행적이나 실록을 언급하는 단편들은 이 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작품을 쓰면서 다른 사료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성전 문서고에 있던 자료들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열왕 4,1-6.7-19; 5,7-8 참조). 이 자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문헌으로 정리되어 있거나, 아니면 구전 전승에서 유래한 것들일 수 있겠으나 정확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1열왕 10,1-13) 별도의 전승에 속한다. 아합 임금과 관련된 일화들은 전혀 다른 관점의 두 사료에서 나왔다. 한편에서는 그를 맹렬히 비판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를 용감한 임금으로 묘사한다(1열왕 22,9.35). 요시야 임금에 관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기록은(2열왕 22-23,30) 부분적으로 공식 실록이 아닌 다른 사료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어떤 대목들은 특별히 예언자들의 행적을 다루며, 이런 대목들은 예언자들의 제자들이 간직한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와 합쳐진 이유는, 이 이야기들이 같은 시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예언자들이 임금들을 위해 수행한 중개 역할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열왕기 안에는 아히야나 이믈라의 아들 미카, 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들에 관한 단편들은 말할 것도 없고(1열왕 13; 2열왕 21,10-15), 엘리야와 엘리사와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그러면 서로 다른 이 요소들이 어떻게 하나로 모아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열왕기와 관련된 가장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여호야킨의 유배 모습을 전하는 2열왕 25,27-30의 저자와, 솔로몬과 동시대 인물로서 계약 궤를 묘사하고(1열왕 8,7) 그 밖에 다른 사실들을 전하고(1열왕 9,21) 저자는 결코 동일 인물일 수가 없다. 솔로몬 시대와 유배 시대 사이에는 사백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열왕기를 썼을까? 여러 가설들이 나왔지만, 대다수 주석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먼저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서 여호수아기와 판관기와 사무엘기가 있었을 것이다(어떤 학자들은 신명기도 포함시킨다).
열왕기의 첫 번째 편집자는 1열왕 1장에서 2열왕 20장을 저술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한편으로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연대기에, 다른 한편으로 솔로몬의 행적기와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이 담겨 있는 문헌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 편집자는 구전 전승의 요소들도 이용하고, 나아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 사건을 묘사하였을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팔레스티나의 한 사제가 기원전 580년경에 이 책을 썼다고 여긴다.
첫 번째 편집자보다 한 세대 뒤에, 곧 기원전 550년경 아직 바빌론 유배가 풀리기 전에 같은 장소인 팔레스티나에서 두 번째 편집자가 나타나, 자기가 수집한 다른 일화들과 전승들을 이용하여 선임자의 작품을 보완하였을 것이다. 그가 첨가한 내용으로는 다윗과 그의 후계에 관련된 이야기와(1열왕 1,1-2,11에 계속되는 2사무의 왕위 계승 대목), 예루살렘 포위를 다루는 본문을(2열왕 18-19; 이사 36-39) 들 수 있다. 스바 여왕의 방문에 얽힌 전승도 그가 이 책 안에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들과 모세 율법이 그의 편집 안에서 각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연결되는(여호수아기에서 열왕기 하권까지 이어진다)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번째 편집자를 예언자들의 집단에 속한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레미야의 제자가 아니었나 추측한다.
끝으로 기원전 6세기 말경 레위 지파 출신의 서기관들이 이 책에 몇몇 부차적인 요소들을 첨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4.2 열왕기의 연대
열왕기에 나오는 연대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연대는 이스라엘 역사와 고대 근동의 역사가 분명히 연결되는 경우 말고는 정확하게 정립할 수 없다. 그러나 몇몇 이집트 문헌들과, 아시리아-바빌론 임금들의 실록과 관련된 문헌들은 열왕기의 몇몇 사건들에 관하여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점들 말고도 열왕기의 자료들은 해설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선 유다 임금들의 통치 연대를 보면 언제나 이스라엘 임금들의 통치 연대와 함께 언급되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부정확한 연대 체계를 끌어들이는 원인이 된다. 그다음 필경사들의 오류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원래의 문헌에 나오는 숫자를 뒤바꾸어 놓거나 다른 숫자와 혼동하여 여기저기서 연대의 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솔로몬과(1열왕 1) 요탐이(2열왕 15,5) 선왕과 함께 나라를 공동으로 통치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듯이, 또 다른 공동 통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과, 이로 말미암아 임금들의 통치 연대를 정확하게 나누어 배치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대 측정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열왕기 안에 서로 겹치는 여러 연대 체계가 있기 때문인데, 이 상이한 연대 체계는 저마다 다른 사료들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은 연대를 측정하는 데서 세 가지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유다의 통치에 근거한 연대, 둘째는 이스라엘의 통치에 근거한 연대, 셋째는 둘을 조화시켜 얻은 연대이다. 예를 들어 왕국 분열에서 아합 통치의 끝에 이르는(기원전 933-853년) 기간을 우리는 80년으로 보는데(부록의 ‘성경 연대표’ 참조), 유다의 연대로는 84년, 북 왕국의 연대로는 78년, 그리고 둘을 조화시켜 얻은 연대는 75년이다. 우리는 연대를 측정할 때 되도록 최근의 고고학 발견들을 참작하려고 한다.
4.3 열왕기의 신학
열왕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임금들의 역사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다. 열왕기에 나오는 역사 자체는 대체로 매우 간결하다. 예를 들어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므리 임금의 통치를 매우 간단하게 다룬다(1열왕 16,23-26). 그리고 세 해 동안 계속된 사마리아의 포위와 북 왕국의 붕괴는 불과 몇 절로 처리한다(2열왕 17,3-6; 18,9-12). 앞서 살펴보았듯이 열왕기에는 신명기계 어휘와 표현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 작품을 신명기계 신학이 (그리고 이를 통하여 예언자들의 신학이) 배어 있는 위대한 역사 문헌으로 여길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열왕기의 중요한 주제 몇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1) 왕정 제도
이 책은 신명기계 저자와 예언자들이 생각하는 왕정 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참다운 임금은 주님의 규정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분의 법규와 계명과 규정과 명령을 따른다(1열왕 2,3). 임금의 임무는 백성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1열왕 3,8-9 참조), 그 백성을 지혜와 정의로 다스리고, 동시에 백성을 “섬기는”(1열왕 12,7) 것이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데에 전념하는 일은 임금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의무를 기준으로 모든 임금의 통치마다 짧은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임금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단호한 비판을 받는다. 열왕기 저자는 서른네 명의 임금들에 관해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후렴처럼 되풀이한다. 그는 실례들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주님에 대한 불충은 여러 가지이다. 이를테면 우상을 숭배하고, 거짓 신들에게 신전이나 제단을 세워 바치며, 이민족 신들에게 문의하고, 온갖 억압과 폭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동의 없이 전쟁에 나서며,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 등이다.
저자가 임금들, 특히 북 왕국의 임금들에게 던지는 가장 큰 비난 가운데 하나는, 율법을 거스르는 경신례에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죄를 짓게 했다는 점이다. 때때로 어떤 임금들은 뉘우치고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암울하기만 하다. 열왕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멸망은 결국 임금들의 죄와, 그들이 백성들에게 짓게 한 죄에 대한 마땅하고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2) 다윗과 그 왕조
유다 임금들의 맨 앞에는 때때로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는(1열왕 3,6; 8,24; 11,13 등), 이 왕조의 창시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자리 잡는다. 다소 이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주님에 대한 다윗의 충성과 열성은 그의 후계자들의 평가 기준이 된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살고(1열왕 3,3), 아사는 자기 선조 다윗처럼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1열왕 15,11), 요시야는 자기 선조 다윗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2열왕 22,2). 요시야에 관해서 저자는 1열왕 13,2에서,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 요시야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의 불충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나 저자는 역대 임금들이 다윗과 일치했다는 증언에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아히야 예언자는 예로보암이 다윗과 같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1열왕 14,8).
열왕기 저자는, 다윗 후계자들의 불순종을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분열과(1열왕 11,9-11) 유다 왕국의 멸망을(2열왕 23,26 이하 참조) 가져온 직접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1열왕 2,4에 담긴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다윗 집안에 내리신 주님의 약속은 영원하리라고 믿는다.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1열왕 2,4. 그리고 2사무 7,12-16 참조). 주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시어” 예루살렘에 “등불을” 하나(다윗 왕조의 왕자) 남겨 두신다(2열왕 8,19. 그리고 1열왕 15,11 참조). 마침내 열왕기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후손은 비록 칼데아에 유배된 몸이지만, 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바뀌어 가는 것을 체험한다. 바빌론 임금은 그에게, 죄수복을 벗고 날마다 임금의 식탁에서 음식을 들 수 있는 은혜를 베푼다(2열왕 25,27-30 참조).
3) 예루살렘과 성전
신명기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열왕기는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우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도성이다(1열왕 8,12). 그리고 그곳은 성전의 성읍이다. 1열왕 8,15- 19에 따르면 이 성전 건축은 원래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집 한 채 짓기를 간절히 바라던 다윗의 소원이었다(2사무 7,1-16 참조). 성소의 중요성은 성전 봉헌 때에 솔로몬이 바친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열왕 8,23-53).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생존 환경에서도 하느님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이다(탈출 33,7의 “만남의 천막” 참조).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관한 이야기도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열왕 22-23).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곳도, 우선 먼저 정화를 시도한 곳도 성전이며, 이후 이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제의 생활의 중심이 된다. 열왕기 저자는 이 개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나머지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예전에는 예루살렘 밖에서 제사가 바쳐졌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데(1열왕 3,2; 22,44; 2열왕 12,4; 14,4; 15,4.35), 사실 이러한 제사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었다(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올린 제사를 전하는 1열왕 18 참조).
성전을 제의 생활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까닭에, 사제들은 경신례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따라 제사를 바치는 권한은 오로지 사제들, 곧 레위 지파에 속한 사제들에게만 귀속된다. 1열왕 8,1-6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부터 이미 그들이 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묘사한다. 열왕기 저자는 나중에 아탈야가 다윗 가문의 혈통을 끊어 버리려 할 때에 다윗 왕조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 일도 사제들의 공적으로 돌린다(2열왕 11). 저자는 요아스가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게 된 것도 여호야다 사제가 그를 잘 지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열왕 12,3). 사실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도 사제였다(1열왕 1,39).
열왕기 저자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레위 지파 사제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예배를 철저히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 예로보암의 주도로 단과 베텔 같은 다른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온전히 배척한다. 저자는 “예로보암의 죄” 또는 “예로보암의 길”을(이런 표현은 스무 번 가량이나 나온다) 엄하게 단죄하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예로보암 자신과 그를 따른 그의 후계자들의 잘못을 고발하는데 이 역시 스무 번 가량 나온다. 열왕기 저자의 견해로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바치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서 한 왕국에 총체적인 단죄와 심판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그 왕국의 임금이 바알의 제단들을 철거하여 주님께 충성을 보인다 할지라도 죄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2열왕 3,1-3 참조). 이 같은 분열적 종교 의식은 사마리아가 함락되기까지 한탄의 대상이 된다(2열왕 17,32 참조).
4) 예언자들의 개입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한 개입은 열왕기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승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엘리야와 엘리사뿐 아니라, 나탄, 스마야, 아히야, 미카야, 이사야, 여예언자 훌다도 큰 권위를 지닌 이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이 일으킨 기적들(특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 못지않게 그들의 정치적 행적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나탄은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며(1열왕 1,11-17), 엘리야는 하자엘을 아람의 임금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기름 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1열왕 19,15 이하. 그리고 2열왕 9,1-3; 8,11-13 참조). 죽음의 신탁을 전하여 임금과 그 집안의 파멸을 선언하는 것도 예언자의 몫이다. 아히야 예언자와 예로보암 임금(1열왕 14,10-11), 엘리야 예언자와 아합 임금의(1열왕 21,21-24)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의 승리를 예고한다(2열왕 20,14-19). 그런가 하면 예언자들이 적대국과 싸우는 이스라엘 임금의 승리를 알려 주거나(엘리사: 2열왕 7,1; 13,17-19. 이사야: 2열왕 19), 군사 행동에 개입하기도 한다(무명의 예언자: 1열왕 20,13-14. 미카야: 1열왕 22,19-28. 엘리사: 2열왕 3,9-19; 6,8-7,20).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에 얽힌 이야기에서 스마야 예언자는 동족 간의 전쟁을 막는 자로 나타난다(스마야: 1열왕 12,22-24).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아합 임금 앞에서, 임금이 포도밭 주인 나봇의 조상 대대로 이어 오는 권리를 짓밟았다고 비난한다(1열왕 21,3-17 이하).
이 모든 경우에 예언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그분께 순종할 것을 호소하고, 주님께서 충성하는 이들을 보호하시리라는 약속도 선언한다.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과 규정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예언자들의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요시야 종교 개혁을 이끌어 낸 법전이 발견되었을 때, 여예언자 훌다가 한 역할이 그 좋은 예이다(2열왕 22,14-22). 이처럼 열왕기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종교 영역에서도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런 영역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한 분 “임금님”께 속하기 때문이다(이사 6,5; 44,6; 즈카 14,16. 시편 ‘입문’ 4의 “찬양 시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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