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회 스승의 날에 읽은 내 카페의 글 '줄탁동시'
줄탁동시(啐啄同時)에 의한 교육
어미닭이 수정란을 품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 주면 달걀노른자에 있는 흰 배아(胚芽)가 점점 자라 약3주 후면 병아리가 된다. 그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와야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에 병아리는 껍질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해 쪼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연약한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귀를 기울여 경청(傾聽)하고 있던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쪼아 병아리의 탄생을 돕는다. 이것을 줄탁동시(啐啄同時)라 한다. 한자로는 ‘빠는 소리 줄’ ‘쫄탁’ ‘한가지동’ ‘때시’자를 쓴다.
이 말의 원천은 중국 송(宋)나라 <碧巖錄>에 기록된 말로 수행불자가 깨우침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적 동기와 외적 계기가 동시에 병행되어야 가르침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교사의 ‘가르침’과 제자의 ‘배움’ 사이에도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이루어 질 때 학습효과가 높다.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이루어지려면 학습자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성취욕구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성장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교사는 따뜻함이 있어야 하고, 기다림이 있어야 하며, 타이밍을 헤아리는 안목(眼目)이 있어야 한다.
연약한 부리로 알의 껍질을 깨뜨리려고 혼신(渾身)의 힘을 다하는 병아리를 ‘학습자’라고 가정하면 타이밍에 맞춰 밖에서 쪼아 탄생의 계기를 돕는 어미닭은 ‘교사’라 할 수 있다. 어미 닭이 알을 따뜻하게 품고 기다린다는 것은 ‘사랑과 인내’를 뜻함이고, 귀 기울여 경청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찾아낸다는 의미’이며, 껍질을 쫀다는 것은 ‘희망을 일깨움’이다. 교사가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고 싶어도 학습자의 마음가짐이 이를 수용(受容)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학습효과가 저하되기 마련이다.
요즈음 교육현장에서 흔히들 교사 노릇하기 정말 어렵다고 한다. 못 말리도록 개성이 강한 학생은 교사가 품은 둥지를 마음대로 헤젓고 다니며 다른 학생의 공부를 방해해도 마땅한 제재(制裁) 수단이 없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규정을 만들어 엄격한 잣대로 제재를 가해야 할 사항에도 교사는 머뭇거린다. 제재를 가했을 경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보호자의 지나친 과민 반응에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고, 또 학생 가르침에 소홀함이 있더라도 말썽 없이 학생지도를 바라는 관리자의 암묵적(暗默的)인 암시(暗示)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그것이 학습현장 질서 파괴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바라는 역할기대(役割期待)도 과거와는 양상이 다르다. 과거에는 교사에게 학생관리, 생활지도, 학습지도를 전적으로 일임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교사는 사명감을 갖고 학생을 적극 지도하고 학생도 교사의 지도에 잘 순응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부모는 교육수준이 교사를 능가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교육에 관한한 모두가 전문가적 견해를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교사를 전문직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신세대의 부모들 중 혹자는 학교의 기능을 제도적 학력을 인정받는 학생관리 기관으로 생각하고, 공부는 학원이나 과외교사에게, 생활지도는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교육방법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학생의 내적 동기와 관계없이 과외 교사의 일방적 지도에 의한 주입식 교육은 진보가 제한적이다. 진취적인 학습은 학생이 자주적(自主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가 충만하고, 교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端緖)를 제공해 주어 학생이 주도적으로 학습을 해야 구조화 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생활지도도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질서를 존중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자녀를 편하고 귀하게만 기르면 심약하게 마련이다. 절약하고 부지런하며 검소한 삶을 살아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올바른 인성을 형성하는 밑거름이다. 부모의 의지가 강하지 않고는 자녀에게 절약하는 습관을 갖도록 지도할 수 없다. 「루소」는 “자녀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자녀가 가지고 싶은 것을 쉽게 손에 쥐게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자녀의 요구가 부모에 의해 쉽게 해결된다면 의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 늘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내 아이는 다른 집 자녀보다 총명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착각, 기(氣)만 살리면 리더십이 생길 것이라는 착각, 어릴 때는 잘못해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바로잡아 질것이란 착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녀만 특별한 존재로 대접 받기를 바란다. 내 자녀에게 궂은 일 시키는 것을 꺼려하며, 남의 자녀야 어떻게 되든지 내 자녀만 잘되면 눈 감아버리는 이기적 사고에 젖어있다.
기(氣)를 살리는 문제도 공부에만 국한해야 한다. 생활에서 기(氣)살리기를 고집하면 자라서 사회적응력이 부족하여 외톨이가 된다. 외아들 외동딸의 부모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생활에서 기(氣)를 살리는 문제로 비춰지는데 그것 보다는 친구와 함께 어울리고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정교육과 제도적인 형식교육(形式敎育)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정교육의 중추는 사랑이다. 자녀에게 사랑을 주되 옳게 주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즈음 자녀들은 영양상태가 좋아 신체충실지수는 높으나 체력은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던 시절보다 떨어진다. 문제는 체력저하가 정신력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하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힘이 들면 쉽게 포기하는 자녀가 많아졌다. 자신감이 적고 인내력도 약해졌다. 이처럼 나약한 몸과 마음으로 다가올 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자녀를 강하게 기르는 것은 부모와 자녀간의 인내력 싸움이다. 필요하다면 끈기 있게 노력하며 땀을 흘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땀은 사람에게 근면을 가르치고 지구력을 길러주며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교육도 자녀의 내발적 동기가 충만할 수 있도록 이끈 후에 사랑과 관심으로 지도하면 상승효과를 가져 오게 된다. 여기에도 줄탁동시(啐啄同時)는 성립하는 것이다.
교육은 누가 뭐래도 제도적 형식교육(形式敎育)이 주류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는 그래도 부모 다음으로 학생을 생각하고 진로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를 믿고 존경할 때 사명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교사를 존경하지 않고 일회용품을 대하듯 생각하면 학생이 진정성을 갖고 교사의 지도에 따르지 않게 된다. 교사와 학생 간에 존경과 사랑의 끈이 느슨해지면 교육의 성과는 반감된다.
교육은 학교와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크게 보면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다. 오늘날처럼 교육현장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교육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아노미 현상에는 사회 원로(元老) 그룹인 유림(儒林)에서 전통교육의 장점을 부각시킬 필요성이 제기된다. 전통적인 보수의 가치가 고리타분하고 낡고 불편한 것으로 여기는 젊은 세대가 있는데 이들의 생각이 잘못됨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과거는 현재를 포함하고 있고 미래를 배태하는 법이다. 오늘의 문화는 과거의 문화와 단절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된 것이며, 미래의 문화는 오늘날의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가 잉태될 것이다. 원로는 인생의 소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그룹이다. 그래서 비교적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고 균형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느 시대나 원로는 난세의 중심에서서 바른 가치를 지키는 버팀목이었음을 생각하면 유림의 역할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는 때이다.
교육에서 학생의 분발이 ‘啐’이라면 교사의 지도가 ‘啄’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만사가 줄탁동시(啐啄同時)다. 부모는 학교를 믿고 학생을 격려하여 학습하고자 하는 욕구를 북돋아 스스로 껍질을 깨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우고, 교사는 학생이 새로운 희망에 부풀 수 있도록 부리를 세워야 하며, 원로 그룹인 유림은 전통의 가치가 교육에 반영되어 민족혼이 잘 계승보존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교육의 본연이요 사명이다. 후세를 잘 교육한다는 것은 힘든 길이다. 그래도 그것이 가르치는 자에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첫댓글 스승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사모님과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제자 김길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