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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씀하는 오른쪽】
🔸요한복음 21: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Cast 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ship).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 편(the other)도 돌려대며
🔸이사야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한국인이라서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는다. 번역하는 이의 수준에 따라 책의 수준도 달라지므로, 우리가 보는 성경의 수준이 과거에 번역한 이들의 수준으로 번역된 것임을 알고 읽어야 한다. 즉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들이 오류를 범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오류도 주께서 허용하시는 이유가 있다. 늘 비유로 말씀하셔서 그 비유에 거쳐 넘어지게 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비유 안에 진짜 내용을 감추어 두셨고, 그 감추어진 비밀을 참 제자들에게만 계시하신다. 제자가 아닌 자들은 깨달아 회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성경번역자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도 일종의 감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오류와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제발 엉뚱한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마라! 그것이 지옥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래서 번역자들도 그들의 지식과 경험 이상을 뛰어넘어 번역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교인들의 수준은 그 목사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하늘의 양식을 목사가 먹여주는 것 만큼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정에서 자녀들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자녀들이 밖에서 외식을 하면서 다른 것을 맛보기도 하고, 교인들이 다른 곳에서 진짜 복음을 접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기도 하지만, 잘못된 불량식품을 먹었을 경우엔 장염이나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
만약 목사가 하늘의 것을 모른 채 땅의 것만 먹이고 있다면, 그 교회는 계시록 8장에 나오는 "깨진 배"여서 결코 세상인 바다를 항해할 수 없다.
비록 수많은 선교지에 선교사를 보내고 돕고 있을지라도 "주여, 주여"하면서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내쫓고 수많은 사역을 할지라도 그것은 생수가 아닌 독이 가득한 쑥을 먹이는 깨진 배이므로 주님과 관계없는 이름만의 방주 즉 그림의 떡일 뿐이다. 홍수가 내리면 깨진 배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다. 그림의 떡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결코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계시록 8:9, 11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성경에서는 "오른 쪽, 오른 편, 오른 눈, 오른 손" 등 "오른 쪽"에 대한 말이 무척 많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것은 문자 그대로 오른 쪽이나 오른 손을 말하기도 하지만, 어느 것은 "옳은 것"을 말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알고 묵상해야 하는데, 모르고 묵상하니 "슬피 울며 이를 갈" 뿐이다.
▪️요한복음 21장 6절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 편에 던지면 잡힐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는 "오른 편"은 "옳은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어 성경을 봐도 right side라고 하므로 right는 “오른쪽”과 “옳은 쪽”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므로 예언의 은사 즉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이 없으면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 해석하고 번역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른(wrong) 해석을 하여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이라는 헛발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하셨듯이 이 부분을 보면 그냥 "오른 편"이 아니라 "배의 오른 편"(the right side of the ship)이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배는 방주인 교회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교회에서 그물을 엉뚱한 곳에 던지므로 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방주의 항해사는 주님이시며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방주의 이름만 예수 그리스도라고 써있고 실제로 그 안에는 주님이 없는 배들이 너무나 많다. 주님 대신 다른 것이 교회의 머리가 된 깨진 배들이 너무나 많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교회가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선교나 전도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을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느라 정신이 없다. 일단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해서 그 다음에 전도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곳에 그물을 던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함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가 바다 즉 세상에 그물을 던질 때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올바른 방향으로 그물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밤새 애를 쓸지라도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역자들도 탈진하기만 한다. 매일 철야기도회를 하고 매일 새벽기도회를 하며 선교와 전도에 힘쓸지라도 세월을 낭비할 뿐이다.
게다가 잘못 던져서 못된 것들이 그물에 가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태복음 13장 48절에서 "못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 못된 것이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 중에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생선을 말한다.
🔸레위기 11:10-11
10. 무릇 물에서 움직이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그런데 "못된"이라는 헬라어 사프로스(σαπρός)의 어근 "세포"(σήπω)는 "타락(부패)하다, 망하다"(be corrupted, to destory, perish)는 의미의 동사이다.
🔸마태복음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σαπρός, the bad, corrupt)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타락하여 망할 자들만 가득 교회에 데려와 부흥시키면 그것이 부흥인가? 교회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를 보내셔서 가정교회를 제외한 큰 교회들은 모두 문을 닫게 하셨을까? ‘타락’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뜻과 완전 다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타락은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여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것 또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늘 신앙의 없거나 어린아이와 같던 “과거가 좋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애굽을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것이며, 그것을 타락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6:5-6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왜 주님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을 하셨을까?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먹어도 되는 정결한 동물과 먹지 못한 부정한 동물을 하나님께서 구별해 주시면서 부정한 동물을 먹을 경우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없는 성민, 성도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먹는 것으로 "성도"인지 아닌지를 구별하신다고 하셨다.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주님은 먹는 이야기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도 "먹고 마시는 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혼인잔치의 신랑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살과 피를 주시며 계속 먹게 하신다. 그분 안에만 거하면, 신랑과 하나가 되면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채워주신다.
주님은 그만큼 우리가 땅의 양식을 먹고 배부르기를 원하는지, 하늘의 양식에 굶주려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먹는 이야기만 하시는데, 땅의 것에 굶주려 땅의 것으로 배부르기를 원하는 자들은 땅의 것을 먹지말라고 하면 더 먹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매일 선악지식나무를 먹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목사들이나 교사들은 신약에 와서는 아무거나 다 먹어도 된다는 "거짓 증거"를 하며 "거짓말을 지어내며" 수많은 양떼들을 깨진 배로 인도하여 쑥이 된 물을 먹이고 있다.
🔸계시록 22: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주께서 우리에게 부정하므로 먹지 말라고 하신 것들 중에 육지에 사는 동물로는 개와 돼지와 뱀이 늘 대표로 나온다. 개는 이방인 또는 양들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치 않고 가짜 복음을 전하는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며, 뱀은 주님의 양떼를 미혹하여 자기의 배만 채우는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돼지는 누구보다 회개도 잘하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지만 회개한 것을 다시 반복하며 거듭나지 않는 교인을 말한다. 예수님 당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개들이며, 뱀들과 돼지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깨진 배 안에서 그 배로 항해하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 항해하려고 애쓰는 모든 교인들을 말한다.
돼지는 겉은 굽이 갈라져서 겉모습을 보기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지만, 새김질 즉 묵상을 하지 않아서 부정하다고 하신다.
사람들은 "묵상"이라고 하면 가만히 앉아서 명상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묵상은, 기억하고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새김질이라고 한다. 마음에 늘 새겨서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즉 늘 기억하며 계속 입으로 중얼거리며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기억하므로 자동적으로 지켜지는 것을 말하지, 지키려고 억지로 외워서 죄책감을 벗으려고 행하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입은 우리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것을 늘 중얼거리며 말한다. 그렇게 늘 누구를 만나든지 그들에게 다른거 말하지 말고 그 말씀을 중얼거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목사, 장로, 신학자들이나 교회 교사들이 만나면, 주님의 말씀만 중얼거리는가?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여러분은 어제와 오늘 무슨 말들을 중얼거리며 살았는가?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남자라는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기억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씨가 없는 자라고 하며 그것을 여자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인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억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남자이며 아들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입 안에 먹을 거리가 없어서 이빨끼리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양식은 "생명의 양식" 즉 진리의 말씀인데, 교회에 가면 하늘의 양식이 아니라 목사들이 땅에서 복받고 잘 사는 땅의 양식만 주므로 새김질을 할 수 없고 묵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지 못한 상태를 "이를 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며 그러한 상태를 지옥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상 지옥에서 "말씀의 기갈" 상태에서 이를 갈며 살아가는 자들은 죽어서도 지옥행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부자 즉 율법을 많이 알고있는 자들은 거지 나사로에게 부스러기만 주었다. 부스러기는 율법을 말하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율법을 많이 알고 있는 자를 성경은 부자라고 한다. 오늘날의 부자는 목사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인 율법을 진리로 풀어서 하늘의 양식으로 주어야 하는데, 대부분이 그렇게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해 갈급해 하는 심령이 가난한 이들에게 결코 하늘의 양식으로 배부르게 채워주지 못한다. 성령이 없기 때문에 땅 차원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만 찍어서 자기 입에 대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한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을 말한다. 즉 지옥에는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를 간다"는 것이다.
🔷이름 = 말씀
히브리어 알파벳에 "쉰(ש)"이란 알파벳이 있는데, 이 알파벳은 '이빨', '묵상', '부수다', ‘불’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름"이라는 히브리어 "쉠(שם)"은 이 "쉰(ש)"과 "멤(ם)"으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즉 이 단어를 파자하면, "말씀을 씹다" 즉 "말씀을 묵상하다", "구별된 말씀" 등의 의미이다.
십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해석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주님(아도나이 אדני)" 또는 "그 이름"(하쉠 השם)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아무리 잘 하면 뭐하나? 메시야도 몰라보고, 주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도 문자로만 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해서 다 천재인가? 아니다. "도레미"도 모르는 사람에게 한국말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 몰라도 주께서 계시(뜻: 커튼이 열리다)해 주시면 우리 눈에 덮여있던 비늘이 벗겨지면서 휘장(커튼)이 열리며 지성소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 길은 성령을 받아 성령께서 비추어주시는 그 빛을 보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름"이라는 히브리어 "쉠(שם)"은 "구별된 말씀"을 뜻한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모든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것이 없이 그 이름 안에 메세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다 그런 맥락이다. 아담이 사자, 토기, 기린 등과 같은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이 아니다.
🔷불(에쉬 אש) = 말씀
"쉰(ש)"이 들어간 단어 중에 "불"이라는 히브리어 "에쉬"(אש)가 있다. 성경에서 "불"은 "성령"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레미야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아칼 אָכַל) 불이시요
"소멸한다"라는 히브리어 "아칼"(אָכַל)은 "먹다, 삼키다, 불로 완전히 태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양식"이라는 "오켈"(אכל)이 유래되었다.
"쉰(ש)"은 "이빨"이란 뜻도 있지만 "불"이란 뜻도 있다. 그래서 "이빨로 씹어서 삼킨다"는 것과 "불로 태워 소멸한다"는 것이 같은 말이다. 따라서 하늘의 양식을 먹으면 우리 내면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모두 불로 태워 소멸된다.
🔸마가복음 7:21-23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래서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불을 던진다는 것은 말씀을 뿌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나타나셨고, 불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회개"를 의미하는 "슈브"(בושׁ)에도 "쉰(ש)"이 있다. "쉰(ש)"과 "집(성전)"을 의미하는 베이트(ב)가 있고, 그 가운데 “못” 또는 “연결하다”라는 “바브(ו)”가 있다. 이는 "집을 태운다"는 말이다. 우리의 옛 집인 부모, 자녀, 전토 등을 다 완전히 버려야 한다. 집을 태우도록 불과 집 가운데 연결고리인 “바브”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집”이나 “장막”은 “성전”을 의미한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또 “바브”는 주님의 십자가의 못을 상징한다. 즉 주께서 못박혀 죽으셨기에 과거의 옛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인 새피조물들이 주님 안에서 재창조되는 것이다.
이처럼 옛 성전을 완전히 불로 소멸시키는 것이 "회개"이다. 우리의 옛 성전을 구석에 놔두고 새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옛 성전인 옛 자아가 완전히 불로 즉 주님의 말씀으로 소멸되어 자기 부인이 되는 것이 회개이다.
🔸누가복음 14:26-27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불"을 의미하는 "에쉬"(אש)는 "쉰(ש)"과 "알레프"(א)가 합해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이쉬(אִישׁ)와 이샤(אִשָּׁה)도 "에쉬"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남자를 뜻하는 이쉬(אִישׁ)는 "불"이라는 단어 사이에 "유드"(י)가 있고, 여자인 이샤(אִשָּׁה)는 "불"이라는 단어 끝에 "헤이"(ה)가 있다. 보통 단어 끝에 "헤이"(ה)가 오면 "소망하다"는 뜻도 되지만, 여성형이 된다.
즉 남녀가 결혼하면, 남자는 "불" 즉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또는 불 가운데 연단받아 "유드"(י) 힘써 사역을 해야 하며, 여자는 "불" 즉 하나님의 말씀을 "헤이"(ה) 소망하며 또는 불 속에서 연단받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남자에게 들어있는 “유드"(י)와 여자에게 있는 “헤이"(ה)를 합하면 “여호와”의 줄임말 “야”(יהּ)가 된다. 남자 혼자 독처하는 것을 성경은 “악하다”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만 “야” 즉 여호와 하나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남자에게서 "유드"(י)가 빠지고, 여자에게서 "헤이"(ה)가 빠진다면, 즉 부부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사라진다면, 둘다 "불"만 남아서 서로 태워 소멸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남자는 반드시 땀을 흘려 일해야 하며, 여자는 반드시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께서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창세기 3:16-17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에서 “여자” 즉 교회는 남편이신 주께서 통치하심 속에서 남편되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의 나라만 소망하며 주님의 자녀인 복음의 씨를 잉태하여 복음을 낳아야(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소망을 가진 여자를 성경은 간음하는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얼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참 빛이 오셨는데 어둠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얼굴을 몰라보고 영접지 않았다고 한다.
민수기 6장 24절 이하의 "아론 대제사장의 축복기도"를 보면 "여호와의 얼굴빛", "여호와의 얼굴"이 두번이나 나온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얼굴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실까봐 노심초사한다.
얼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마주 보는 것으로 서로 관계하고 있다는 말이며, 얼굴을 돌렸다는 것은 관계가 끝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얼굴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여호와의 얼굴은 다른 말로 여호와의 임재를 말한다. 우리는 늘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과 한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31: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44: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102: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들에게 주께서 직접 오셔서 얼굴을 보여주셨으나 불행히도 아무도 그렇게 뵙기를 원했던 얼굴을 몰라보았다. 몰라본 정도가 아니라 배척했다. 왜냐하면 주님은 빛이셨고, 그들은 어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빛의 얼굴이 아니라 어둠의 얼굴을 원했다. 낮을 비추는 해(은혜)가 아니라 밤을 비추는 달(율법)을 원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여기에서 오른편 뺨을 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세상에 찾아오셔서 그분의 얼굴을 보여줬더니 그분의 얼굴을 때렸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잡히셔서 진짜로 뺨을 맞으셨다.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께 질문하는 안나스에게 주님은 다른 이들에게 그 동안 말씀하신 것을 들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속이 예수님께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말하느냐"며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진짜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신데, 어둠에 속한 그들은 하늘의 대제사장을 몰라보고 땅의 대제사장 운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얼굴을 쳤다는 것은 관계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들이 그렇게 여호와의 얼굴을 뵙기를 원해서 직접 찾아와 대면했더니(브니엘 פְּנוּאֵל 페누엘), 그 얼굴은 아니라며 그 얼굴 치우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왼 편도 돌려대며"라고 번역했으나, 원문에는 “왼편”이란 말이 없고 "다른 것"으로 나와있다. "다른 것"이라는 헬라어 "알로스"(ἄλλος)는 "different, other, another, more" 등의 뜻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번역할 때, 오른쪽을 때렸으니 당연히 다른 것은 왼쪽으로 생각해서 "왼쪽을 돌려대며"라고 번역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부분 역시 주님에 대한 이야기 즉 복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더니 참빛이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배척하므로 (옳은 얼굴을 때리므로) "다른 얼굴"로 주셨다는 말이다. 그 "다른 얼굴"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왼 편도 돌려대며"(turn to him the other)라는 말은 '브니엘'을 파자한 것과 동일한 뜻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의 '브니엘'(페누엘 פְּנוּאֵל)은 '파나'(פָּנָה)와 '하나님'을 뜻하는 '엘'(אֵל)의 합성어이다. '파나'(פָּנָה)는 '돌아가다, 맞닥드리다, 준비하다, 보다(to turn, face, prepare, look) 등의 뜻을 갖고 있다.
파나 + 엘 = to turn, face + God(Him)
왼편도 돌려대며 = turn to him (the other)
그들이 원하는 얼굴은 예수님의 의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뺨을 때렸으나, 주님은 그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른 얼굴로 계속해서 그들을 마주보셨던 것이다. 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사야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얼굴"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밧세바가 아들 솔로몬을 찾아갔을 때 "내가 한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소서"라며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말라"고 말했고, 솔로몬은 어머니에게 "내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괄시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씀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 눈과 눈, 코와 코, 그리고 입과 입도 마주 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상대의 얼굴을 더욱 가까이 대고 입맞춤을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입과 인간의 입이 맞닥드릴 때(파나 פָּנָה), 주님의 호흡(루아흐 רוּח)이 인간에게 들어와 흙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살아있는 존재(being)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상태를 "야다"라고 한다. "야다"는 부부관계를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고 하나가 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던 것이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므로 지성소를 훤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 임재하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른 얼굴"을 돌려댔다는 것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이다. 이보다 놀라운 복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수많은 설교자들이나 주석가들은 주님의 참 제자라면, 오른편 뺨을 누가 때려도 잘 참고 왼 뺨도 때리라고 "나 죽었소"하며 참으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복음과 관계없이 자기의 의를 이루도록 했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실제로 그들이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예수님께서 안나스에게 대꾸하자, 건방지다면서 주님의 뺨을 때렸을 때, 예수님은 다른 뺨도 돌려대며 묵묵히 맞지 않고 한 마디 하셨다.
🔸요한복음 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여기에서는 "왜 나를 치느냐?"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는 것과 모순된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해 보았어야만 한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복음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7, 31, 33, 38, 43절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께서 태초부터 말씀을, 율법을 주셨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모두 잘못 전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잘못 듣고 잘못 이해하여 엉뚱하게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쳤다는 말씀이다. 그 내용은 "간음, 이혼, 맹세, 보수, 이웃 사랑, 원수"에 대한 내용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렇게 들었는데, 모두 잘못 들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해줄테니 잘 들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나씩 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분의 "입이 열린다"는 것은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며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의 뜻은 "커튼(휘장)이 열렸다"는 뜻이다. 즉 지성소가 열렸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계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알려주신다.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목사나 신학박사라고 할지라도 하늘이 열리지 않아서 땅의 것으로만 가르치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설교자나 가르치는 자들이 하늘이 열리지 않아서 땅의 것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주님은 지금도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라고 하시며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3:9-15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당신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는가?
필자는 어릴적부터 꿈을 잘 꾸었다. 그래서 이왕에 꾸는 꿈이니 요셉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시고 그 꿈을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잘 해몽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라는 말씀대로 성령께서 필자 대신 알아서 간구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에게 그러한 은사를 주시려고 주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간구하게 하신 것이다.
얼마 전 주일 새벽에 하늘이 열리는 꿈을 꾸었다.
동서남북 끝이 보이지 않고 넓고 푸른,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초원 위에 내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그 초원 중앙에 한 집이 있고, 그 집 옆에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뉴욕에서 목회하실 때 알던 매우 순수한 권사님과 남자 한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아는 사람인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단지 오래전에 알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즉 한 사람은 오래 전에 알던 사람, 또 한 사람은 최근에 안 사람이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 각각 한 사람이다. 또 여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며 순수하게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이고, 남자는 사역자이다. 모두가 대표성으로 보여주신 것 같다.
그들은 사람들이 오길 기다리며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 밖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집은 꽤 큰 주택이었는데, 교회 같았다. 가정 교회.
나는 그분들을 보며 반가와서 그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위로 높은 하늘에 갑자기 새까만 새들이 떼로 몰려드는데, 동그란 원 모양으로 모여들어서 빽빽하게 원을 만들더니, 순식간에 그 원 모양이 뻥 뚫려서 놀라서 쳐다보니 하늘이 동그랗게 열린 것이었다.
성경에서 새는 제사장을 상징한다. 하늘과 땅 즉 성전(하늘)과 성전 뜰(땅)을 왕래하는 이들은 레위 제사장들 뿐이었다. 까마귀와 독수리 모두 까만 새이다. 이 둘은 긍정과 부정 두 가지 모두 인용되는 새이다.
꿈에 본 하늘은 우리가 보는 하늘의 약 10배쯤 더 높았던 것 같다. 정말 높고 높은 하늘이었다. 꿈에 깨서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손을 뻗으면 잡을 것처럼 그렇게 낮게 보일 수가 없었다.
뻥 뚫린 열린 하늘에서는 금빛 찬란한 빛이 비취더니 흰 옷 입은 이들과 천사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주님은 늘 "가운데"에 서 계신다. 십자가에서도 가운데에 계셨듯이. 예수님은 흰 머리카락에 흰 드레스를 입고 허리에 금띠를 두르고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셨다.
다른 이들은 모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이 '흰옷 입은 사람들이구나...' 라는 느낌의 모두 똑같은 모습인데, 주님은 흰옷을 입으셨는데도 너무나 빛나서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환한 빛 그 자체였다. 그래서 늘 내가 보던 모습 그대로 흰 머리카락이 금발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두 세 배는 더 커 보였다. 주님의 얼굴은 보이는데, 다른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뻥 뚫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놀라운 장면이라서 나는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만 쳐다보았고, 그 집 옆에 있던 두 사람도 하늘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순간 내 시선은 다시 그 넓고 푸른 초원의 한 가운데 있는 그 집과 그 집 바깥에 서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 모든 것은 1분도 안 되는 매우 짧은 시간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나는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푸른 초장에 왜 저 두 사람밖에 아직 안 왔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을 향해 뛰어가는데, 내 뒤에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나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수많은 먼지 덩어리가 (말들이 달려갈 때 일으키는 먼지처럼) 끝도 없이 내 뒤를 따르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군중들의 소리는 들리는데 내 눈에는 먼지 덩어리들만 보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듯이 먼지(dust)로 만들어진 자들이었다. 성령이 임해야 사람이 되는 먼지 덩어리들...
그러다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과 흰옷 입은 자들과 예수님까지 직접 다 보면서도, 아까 그 까만 새들이 너무 멀리 있어서 새들로 보인 것이고 하늘에서 쇼를 하는 이들이 그렇게 분장하고 저런 멋진 쇼를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꿈의 하늘과 비교할 때, 우리의 하늘이 손이 닿을 것처럼 정말 낮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낮게 느껴지는 하늘도 비행기를 타보면 매우 높은 하늘이다. 그런 하늘보다 10배나 높은 곳에 사람이 올라가서 어떻게 쇼를 하겠는가!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눈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시는데도,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예수를 팔라는 생각을 넣어준 것처럼, 우리의 생각은 마귀에게 늘 노출되어서 믿음과 반대의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있구나...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지인 중 한 분이 며칠전에 기도하며 본 것이라며 메세지로 보내왔는데, 하늘이 열린 것을 빼고는 내가 본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글은 다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김수경 목사 Pastor Esther Soo-Gyung Kim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