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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사회사업가의 설 자리
앞서 소개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에서 주인공은
어려움 속에서 제대로 된 복지 서비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끝내 죽음에 이릅니다.
적절한 서비스는 존재했으나 당사자는 진보했다는 기술 사용에 접근이 어려웠던 겁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사자와 복지 서비스 사이에 있던 ‘사회복지사’의 역할입니다.
기계화·자동화된 시스템 안에서 사회복지사 또한 기계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관료주의와 인공지능의 결합’은 약자를 돕겠다는 사회복지사를 그 일에서 소외시켰습니다.
영화 속에서 선배 사회복지사(?)는 당사자에게 인간적 연민 따위는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즉, 그렇게 하면 ‘데이터가 오염’되는 겁니다. 사회복지사의 덕목으로 여겨졌던 ‘공감’이 쓸모없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사자를 서비스 수혜자의 위치에 고정한 채, 욕구를 사정하여 적절한 서비스를 파악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사회복지사.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결합은, 이런 구도에는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진행(처리) 속도 향상과 오류 감소를 위한 기술 개발로 느껴집니다.
지금은 당사자와 자원(복지 서비스) 사이에 사회복지사가 존재하고,
사회복지사의 개인적 역량, 즉 정보 수집과 자원 연결 능력에 따라 상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회복지사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사자가 직접 스마트폰 앱 따위를 통하여 서비스를 파악하고 스스로 신청하여 원하는 자원을 획득하게 될 겁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회복지학과는 이제 어떤 과목을 가르쳐야 하나요?
사회복지사의 주요 과목을 인공지능 활용 기술과 정보처리능력으로 바꿔야 할까요?
이제 사회복지사는 공공의 빅테이터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 정도의 단순 노무자가 될까요?
반면, 사회복지사의 일이 더는 ‘복지 서비스를 연결’하는 게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미래는 인공지능과 공존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과 같은 도구의 발전은 분명 사회복지사 업무에 도움을 줍니다.
인공지능이 잘하는 일이 있고 여전히 인간이 잘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회사업에서도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것이 편리하고 정확하며 빠르게 이뤄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인공지능에게 맡깁니다.
특히,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 즉 자연어를 기반으로 하기에
더는 정보를 전달하는 중간 단계에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빅데이터 자료를 분석하여 욕구를 사정하고 관련 서비스를 연결하는 일은 확실히 아주 빠르게 얼마 뒤 사라집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고 인간이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이해와 공감입니다.
인공지능 등장 이후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에서 해방된 사회복지사가 설 자리는 ‘공감’의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이 대신함으로써 확보한 시간으로 더욱 ‘당사자의 곳’에서 ‘당사자의 것’으로 이루게 도와갑니다.
이해와 공감은 ‘그 곳’이 어디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해줄 겁니다.
<AI 2041> 저자 리 카이푸Kai-Fu Lee는 미래에 사라지는 직업과 더욱 필요한 직업을 구분했습니다.
그가 보여준 화면에서 가로 축은 창의적이고 계획적creativity or strategy인지
혹은 그럴 필요는 없이 최적화만 하면 되는 일인지로 나눴고 ,
세로 축은 공감compassion하는 마음이 필요한 일인지 그렇지 않은 지에 따라 구분하였습니다.
창의적이거나 계획적일 필요가 없으면서도 공감도 필요 없는 일에 해당하는 3/4 분면이 만들어졌고,
여기에는 트럭운전기사, 전화판매원, 접시 닦는 일, 보안요원이 자리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제 곧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고 합니다.
반면, 창의적이거나 계획적이면서도 공감을 필요로 하는 일인 2/4분면에 위치한 직업이 사회복지사social worker였습니다.
카이 푸 리는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에 사회복지사가 더욱 사람들을 공감하는 일에 매진하길 부탁했습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두뇌와 가슴으로’ 일하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공감’을 비전문적이거나 쓸 데 없는 연민 따위로 여기며
매뉴얼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하는 사회복지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거나
혹은 인공지능 같은 사회복지사가 될 겁니다. 그런 기계 인간을 사회복지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회복지사의 업무 가운데 단순 반복적이거나 숫자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일은
확실히 진보한 기술의 도움으로 줄어들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더욱 당사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공지능과 사회복지사를 구별할 수 없고,
결국 사회복지사 자리는 인공지능으로 채워질 겁니다.
이는 우리 일자리가 사라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약자의 그 마음과 모습을 알아주고 품어주는 존재가 사회에서 사라지는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사회적 고립 외에도 자발적으로 숨어들어 개인적 고립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다시 사회와 연결할 수 있는 존재는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지능으로써 풀어가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 질문에 인공지능이 자기감정을 넣어 답을 한다면 질문할 때마다 회신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표준화된 답을 정확하게 보여줘야 하는 인공지능의 오류입니다.
예측 가능한 답이 인공지능의 장점이라면, 예측 불가능한 답이야말로 인간지능의 장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어려움을 인공지능에 물었을 때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정보·자원·경로 따위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정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답을 알면서도 다시 묻기도 합니다.
그때는 잠시 답을 보류하고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듣기만 해주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그저 곁에 있으며 함께 기다리는 존재를 간절히 만나고 싶기도 합니다.
고진실 선생님 책 「오늘 출근합니다」에서 심리학과 교수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 연구를 인용하였는데,
인간관계에서 비언어적 표현이 93%였습니다.
심리학자 레이 버드휘스텔Ray Birdwistell의 연구도 함께 소개하는데,
역시 비언어적 수단이 65%에 달한다고 합니다.
끝내 인공지능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이라 했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가장 큰 차이는 호기심. 인공지능 또한 우리 호기심의 결과입니다.
당사자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사회복지사는 현상만으로 예측하여 속단하지 않습니다.
맥락context이 궁금할 겁니다. ‘맥락’을 알면 그 상황을 ‘이해’하고, 결국 이해는 ‘공감’하게 합니다.
공감은 사회사업의 시작입니다. 공감 받았다 느낀 당사자는 사회복지사의 제안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욕구 합의가 수월하니 함께 목표를 세워 나가게 되고, 함께 이뤄가는 가운데 어려움도 잘 이겨낼 겁니다.
이처럼 맥락은 전체를 보는 시선인데, 당사자 삶의 맥락을 파악해야 지금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덕에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는 있으나, 전체를 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양한 정보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으나, 상대를 깊이 들여다보는 지적 호기심은 키워지지 않습니다.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건 지적 호기심입니다.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쌓아 숙성하면 이것이 지적 호기심으로 넘어갑니다.
인공지능이 그 속도를 높여버림으로써 성숙한 호기심을 갖지 못한 채,
그동안 쌓은 통계로 만든 ‘프레임’으로 당사자의 욕구를 사정assesmen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서비스만을 연결할 위험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질문에서 답까지 이르는 과정을 단축시켰습니다.
즉각적인 답이 질문을 다듬고 생각을 나아가게 하는 숙성 과정을 없애버렸습니다.
결과와 답이 중요한 업무에서는 유용하지만, 당사자를 이해해야 바르게 도울 수 있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공지능으로 빅데이터에 접속하여 스마트하게 당사자를 사정하는 사회복지사.
그는 정말 스마트한 사람일까요?
인터넷 시대를 거처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시대.
이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집중력 저하와 건망증을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고하고 분석하고 통찰하는 지적 호기심은 사라지고,
다양한 정보에 실시간으로 접속하는 것만으로 당사자를 잘 도울 수 있을까요?
사회복지사의 일을 ‘서비스 연결’ 정도에서 벗어나 본래 우리가 출발했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갑시다.
실천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우정과 환대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술 진보 이후 더욱 더 사회복지사는 ‘사람 사이 관계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겁니다.
우리는 우정 인정 사랑 애정을 생동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회복지사
일 년 반 정도 지난 어느 날 동윤이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여자 친구가 임신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엄마 아빠랑 달라요. 버리지 않아요. 제 아이 제가 책임질 거예요.”
마음이 아팠지만, 그 다짐 대단하다 잘 할 수 있을 거라 응원했습니다.
“선생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그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이야기해준 동윤이에게 고마웠습니다.
내내 마음에 담아두고 학교 생각을 했을 동윤이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약속 기억하고 있어 줘서 고마워 동윤아. 문득 학교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겠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아이 키우다 힘들면 또 연락해야 해. 언제든지!”
“네, 선생님! 아, 선생님이랑 술 한잔해야 하는데~ 또 연락할게요!”
이후 같은 또래 졸업한 아이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많이 힘들어하다 결국 아이를 입양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곡선의 시선> 가운데 임세연 선생님 글 ‘동윤이
사실 이 모임의 최초 영감은 채 씨 어르신 메모에서부터였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 홍역으로 시력을 잃었는데 그때가 벌써 칠팔십 년 전, 이념 갈등으로 온 나라가 핏빛으로 물들었을 때다.
큰 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지역 경계를 꼭 넘어야 했다. 당시에는 그게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던 중 알게 된 게 바로 ‘보도연맹’이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도민증 검사 없이 지역을 넘나들 수 있었기에
이 말을 들은 어르신의 아버지는 큰 의심 없이 이에 가입했다.
우리 딸 빨리 병원 가자. 눈 고쳐줄게, 아버지가 고쳐줄게.
하지만 그 소망은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아니,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는 보도연맹 가입 탓에 한순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투옥됐다.
채 씨 어르신은 그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 갇힌 감옥을 몰래 서성였다.
“말이 감옥이지. 광목으로 둘러놓은 울타리 같았거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거야.
그래서 그 구멍으로 눈을 대고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어. 근데 아버지가 나를 딱 알아보더라고.
그 눈만 보고 말이야. 그때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라, 곧 갈게, 하며 나를 보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다음 날 새벽 채 씨 어르신의 아버지는 큰 트럭에 실려 뒷산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내 수십, 수백 발의 총알이 새벽의 적막을 깨부쉈다.
어르신은 마치 엊그제 일인 듯 온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 눈. 이 눈 때문에….”
삐뚤빼뚤 적은 메모와 어르신의 증언을 듣던 나는
입을 닫고 눈을 감고 그렇게 한참을 침묵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최우림 선생님 어르신 모임 ‘싱글생(生글)’ 일기 가운데
“그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입을 닫고 눈을 감고 그렇게 한참을 침묵했다.”
임세연 선생님과 최우림 선생님 기록에서 우리 현장 미래를 그립니다.
두 선생님 모두 지금 당사자 상황에 즉시 답하거나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함께 울기도 하고, 잠시 침묵할 뿐입니다.
‘인공’으로 할 수 없는 이런 ‘진짜’ 마음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부평초라고도 불리는 개구리밥은 뿌리 없이 물 위에 떠 있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몰려갑니다.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인공지능을 놀라운 발전으로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끄는 도구로 이야기하는 건 이해합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성찰과 한계 없이 인공지능을 진보한 기술로 강조하며 적극 사용을 주장하는 건 조심스럽습니다.
신기술을 주장하는 순간, 현장 사회복지사들은 ‘결핍’은 경험합니다. 부족한 실무자로 ‘규정’되는 겁니다.
매번 이런 식입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론이 등장할 때마다 적극 강조하며 주도권을 가져가는 전문가들에 의해
현장 실무자들은 지난 실천을 낡은 것으로 바라보며 또다시 새로운 도구 사용을 익히기에 시간과 힘을 씁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메타버스에, 그 전에는 구글이나 MS기반 스마트워크, 어느 때는 화상 도구나 영상 제작 송출이 그랬습니다.
그 때마다 부평초가 떠오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제대로 바르게 돕는 일에 어떤 기술과 도구가 얼마나 필요한 건가요?
도구와 기술의 결핍이 아니라 질문의 결핍을 생각합니다.
당사자의 질문에 굶주리고, 그에 대한 호기심이 강력히 발동하여 이해하고 공감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결핍의 힘을 바탕에 둔다면 도구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필요하다고 해도 방향을 잃이 않으니 유용하게 사용할 겁니다.
신기술이 등장할 때, 그 기술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기회도 얻고 위험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본질은 변하지 말고, 방법은 달라질 거라 말합니다. 변치 않는 사회사업 본질은 사람 사이 어울림입니다.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은
몸을 쓰는 일이며 사회적 관계와 관련한 일이라 했습니다.
사회복지사의 상징은 ‘발’입니다. 당사자의 삶터와 지역사회 곳곳을 다니며 당사자와 지역사회에 묻고 의논하고 부탁합니다.
당사자의 사회적 관계를 넓히는 데 마음 쓰고, 지역사회에 이웃이 있고 인정이 흐르게 합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이상이며 방법입니다. 이를 이루어가는 데 분명 인공지능이 유용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겁니다.
그때 그만큼 사용하면 될 입니다.
성직자이자 교육 철학자인 이반 일리치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으는 갖가지 가구나 물건이 결코 내면의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물건에 의존할수록 오히려 삶은 제약을 받습니다.
이해와 공감으로 때를 보아가며 당사자 마음에 닿기보다 인공지능으로 빅테이터에 신속하게 접속할수록
우연과 인연이 깃들 틈은 사라집니다. 침묵, 고요, 눈물, 고독, 슬픔이 머물지 못하면
사회복지사는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합니다.
이 시대에 모범 시민이란 필요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대안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접은 뒤,
표준화된 필요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느린걸음, 2017)
미래일기 (horror : 이 문제들을 성찰하지 못하고 맞이한 미래)
2053년. 한때 사회복지전문서점까지 차렸던 김구슬 씨는 이제 일흔 노인이 되었습니다.
가족 없이 홀로 지낸 지 몇 달입니다.
그래도 사회복지사로 살아온 삶이 있어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려 했지만, 이제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버티고 버텼습니다. 내일 아침을 기대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절박해 졌습니다.
20년 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도 사회복지사를 만나야 하는 일이 생길 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주민센터를 찾아갔으나 이제 그런 일은 집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앱으로 하게 되었다며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스마트폰을 들었습니다.
흐릿해진 눈으로 몇 번의 실패와 인내의 소진 끝에 온라인 방문 상담 신청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날, 담당 주민센터 공무원이 찾아왔습니다. 무표정한 그의 손에 날렵하게 생긴 스마트한 패드 하나가 들려있었습니다.
가벼운 눈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이것저것 노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항목들을 순서대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건조한 질문 속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모름…” 하고 체크한 뒤 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아마도 공무원이 되어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는 그렇게 훈련 받은 것 같았습니다.
철저하게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이 객관적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질문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에는 일체 반응하지 않습니다.
간혹 “그런 답은 항목에 없습니다.” 정도를 중얼거리듯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분명 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패드에서 벗어나있지 않아 대화를 한다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혹시 로봇이 아닐까?’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사회복지를 전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민센터에서 왔으니 공무원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런 전공이 대학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공감이 필요 없는 시대이니, 사회복지학과는 통폐합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스마트복지행정AI전산학과’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얼핏 들었습니다.
김 노인도 한때는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 옛날, 대학에서는 ‘공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당사자와 인지적 공감을 넘어 정서적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일할 때는 당사자의 삶과 모습이 어떠하든 그를 ‘개별화’하여 보려 힘썼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모습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도 이웃이 있고 인정이 있으면 그럭저럭 어울려 살아간다고, 어떻게든 서로 기대며 살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실천했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공감 같은 기술은 쓸모가 없습니다.
노인의 소비 패턴과 활동 동선, 평소 스마트폰 사용 정보와 집안 곳곳에 설치된 센서 반응 데이터,
아침저녁으로 인형로봇에게 내뱉은 말을 텍스트로 만든 정보 따위를 조합하여 깔끔하게 출력한
나에게도 낯선 ‘나란 존재’는, 단지 몇 가지 유형화 된 욕구로 표현되었습니다.
몇 번의 터치로 순식간에 파악한 나도 모르는 나의 욕구는,
저 젊은 공무원의 정형화된 몇 가지 질문으로 사정assesment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노인은 특정한 존재로 규정grouping 되었습니다.
이제 규범화 된 집단이 받는 규격화된 공통의 복지 서비스를 받습니다.
이것도 드론이 떨궈준다고 합니다.
부피가 큰 것은 복지관이 사라지고 그곳에 생긴 복지 서비스 전용 배달 업체 ‘웰팡’에서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이제 연명은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씁쓸합니다.
노인은 그저 당신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밥에 김치 하나라도 좋습니다. 때때로 함께 먹을 이가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서비스 항목에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2053년 지금, 표준화된 삶이 아닙니다.
반면, 부유한 사람들은 그 삶의 모습과 사회가 대하는 태도가 20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며 때때로 어울리고 자주 웃으며 대화합니다.
그들 둘레에 ‘인공’적인 것은 거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