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호찌민)시를 가면 벤탄 마켓
(벤탄시장)이 있습니다.
호치민 가신 분들은 아실거에요.
그곳에서 베트남 전쟁때 쓰던 라이터라고
팔기도 하지만 사실은 가짜 라이터일
가능성이 많은. .^^;;
가짜 메이커 옷도 많이 팔지만
베트남 커피도 많이 팔죠.
근처에 2000년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으로 베트남
첫 방문시 들렸다는 2000이라는
쌀국수 식당이 있는데. .
아마도 지금도 있지 않을까요?
일본애들 관광코스이기도 하니까..
맛은 그다지. .
이 앞 로터리쪽에 베트남의
영웅 쩐흥다오 장군의 동상이 서있죠.

전 세계에 몽골군이 휩쓸때 몽골의 침입을
끝내 막았던 곳이 3곳이 있었습니다.
이집트, 일본. 베트남.
(☞거의 끝까지 막다가
몽골에 복속되거나
몽골과 강화한 나라는
남송과 고려가 있습니다.)
일본은 자기들이 떠드는 신풍이라는
태풍이 막아준거지만. .
진짜 싸워서 이긴 나라는 .베트남과
이집트 정도입니다.
(이집트는 지금의 이스라엘쪽,
다윗과골리앗이 싸웠다던
갈릴리 아인잘루트에서
키트부카가 이끌던
몽골군과 싸워 이기죠.)
하지만 베트남의 몽골과의 싸움에서
승전은 이런 이집트보다 대단하죠.
쩐흥다오는 베트남 쩐 왕조의
태종(太宗, 타이똥)의 조카로,
1257년 원나라 제1차 침입 때
베트남의 북방을 굳게 지켜
공을 세웠습니다.
원나라 장군 우리양카다이
(Uriyangkhadai, 兀良合台)가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베트남에 길을 빌려달라며
사신을 보내자,
(침략자들은 꼭 길을
빌려달라하네요.
임진왜란때 일본도 그랬죠.)
쩐 태종은 사신을 옥에 가둡니다.
쩐흥다오가 이 때 변경
방비의 임무를 맡게 되죠.
이에 우리양카다이는
군사를 이끌고 홍 강(紅江)과
로 강(Lo 江)을 따라
현재 하노이인 탕롱
(Thăng Long, 昇龍)성에
입성하였으나,
식량 부족과 기후 문제로
군사들의 사기가 위축되고
베트남을 정복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곧 철수를 시작합니다.
이에 베트남 측도 이듬해
12월 동 더우 보
(Dong Dau Bo, 東頭步)에서
반격을 시작했지만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몽골에 사절을 보내
화약을 맺고, 3년에 한 번
입공(入貢)할 것을 약속합니다.
고려때 초기 몽골의 1차침입
이후 입공 약속과 같네요.
이후 세월이 흘러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이
군대를 보내 참파를 침공하여
당시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함락시키고 베트남에게
참파 정벌에 동원시킬 병사를
요구합니다.
참파는 오늘날 베트남 남부
지역입니다.
베트남 측은 이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쿠빌라이 칸은
해로를
통해 베트남 침공을
시도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합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1285년에
다시 아들 토곤(Toghon 脫驩)을
시켜 50만 대군을 이끌게 하여
다시 베트남을 침공합니다.
위급함을 느낀 당시 황제 인종은
쩐흥다오를 국공(國公)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덕망있는 촌로들을 모아
항복을 할 것이냐,
항전을 택할 것이냐를
물어보게 됩니다.
쩐 흥 다오가 이끄는
쩐 왕조의 군대는
토곤의 몽골군을 맞아서
열심히 싸웠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수도인
탕 롱(Thang Long)성이
함락되고 . . .
태상황 태종과 인종은
겨우 탕 롱을 탈출합니다.
다행히도 이내 다시 전열을
수습해서 탕롱을 점령한
원나라군을 사방에서
공격해서 수세로 몰아넣습니다.
이 때 쩐흥다오는
"항복을 하려거든 신(臣)의
목부터 먼저 베소서!"라고
강력항전을 주장합니다.
어차피 태상황 태종의 조카이자
인종의 숙부인 쩐흥다오를
벨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이런 격문을 날리죠.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해둔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
(逢蒙: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이나
후예(后羿: 봉몽의 스승)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 :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 : 쿠빌라이의
아들인 토곤)의 살점을
고가(藁街 :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던
거리,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에서
썩게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
(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너희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이 격문을 날리자 사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리고 탕롱성을 수복합니다.
결국 토곤은 철수를 합니다.
1287년.
원의 군대가 다시
침략하자
쩐흥다오는 군사를
탕롱성에서
철수시키고 원의 보급선을
격파시킨 다음 바익당강
바닥에 말뚝을 박고
썰물이 될때까지
기다린 후 원나라의
함선을 궤멸시킵니다.
이에 원의 군대는 퇴각하였고,
이후 인종은 화해의 뜻으로
원에 포로를 되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원나라.즉 몽골은
그 이후 베트남 침공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1300년.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쩐흥다오는 사망합니다.
오늘날까지 쩐흥다오는
베트남을 몽골로부터
구한 영웅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과거 남베트남 정부에서 발행했던 500동
화폐의 인물이었던 쩐흥다오.
첫댓글 바캉스형님 덕에 베트남에도 눈길이 가던 차에 몰랐던 이야기 올려주셔서 신기방기하네요.
@_ @
베트남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보통 원나라 칸이 세상을 떠나면
정벌이 중단되죠 .
어느 칸의 죽음때만 그런것이
아니고 대체로 칸들이
죽을때마다 승계를 위한
쿠릴타이를 위해 원정을
나간 왕위 승계후보자들이
원정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죠.
이집트 원정도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러 온
뭉케가 왕위승계문제가
터지자 몽골로 돌아가고
키트부카에게 약2만 병력을
맡기고 갔는데 맘루크 군대에게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키트부카는 포로가 되어 처형
되었죠.
아마 도넙서님이 이야기하신것은
레그니차 전투일겁니다.
지금의 폴란드에서 몽골의 바투가
이끄는 원정군과 슐레지엔공
하인리히가 지휘하는 폴란드 기사들과 유럽기사 연합군과의
전투였죠,
오고타이칸이 승하하여서
바투가 쿠릴타이 참가를 위해
돌아갔죠. 그러지 않았다면
신성로마제국 오늘날
오스트리아까지 침공하려
했겠죠.
저런 몽골을 꺾은 베트남이 대단한
것이죠.
그래서 서남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이 침략군의 무덤.
동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침략군의 무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