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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암 이공 행장克菴李公行狀
공의 휘는 기윤(基允), 자는 집중(執中), 처음 휘는 기우(基祐), 자호는 극암(克菴)이다.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고려 개국공신 성산백(星山伯) 능일(能一)이 그 상조이고, 대대로 현달한 관원과 드러난 인물이 있다. 몇 대를 내려와 휘 여량(汝良)에 이르러 관직은 좌정언이고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선산(善山)에 은거하여 망국의 신하로서의 절의를 지켰다. 중세에 휘 정현(廷賢)이 있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고 호는 월봉(月峰)이다. 한강(寒岡) 선생 문하에서 배웠는데 불행하게 단명하니 한강 선생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 이분이 휘 수성(壽星)을 낳으니 호는 한포(寒浦)이고, 이분이 휘 달천(達天)을 낳으니 호는 백천당(白川堂)이고, 이분이 휘 이항(爾沆)을 낳으니 호는 성재(省齋)이고, 이분이 휘 석승(碩升)을 낳으니 호는 돌재(咄齋)이니, 공의 6대 이상이다. 증조는 원희(源禧)이다. 조부는 언상(彦相)이고 호는 선암(蟬菴)이다. 부친은 익희(益熙)이고 호는 간취(澗翠)이니 문행(文行)으로 대를 이었다. 전비(前妣)는 선산 김씨(善山金氏)이니 부친은 수화(秀華)이고 문간공(文簡公) 취문(就文)의 후손인데 일찍 세상을 마쳐 자녀가 없었다. 계비(繼妣)는 옥산 장씨(玉山張氏)이니 부친은 만련(萬鍊)이고 죽정(竹亭) 잠(潛)의 후손이다.
고종 신묘년(1891, 고종28) 4월 8일에 공은 선대부터 살던 대포(大浦) 집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청룡 황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아 아명을 원룡(元龍)이라고 하였다. 형상이 단아하고 자질이 영명하였다.
어린 시절 모친의 품에 있을 때 이웃집 할머니가 모친과 이야기하기를, 젖을 먹이는 것이 아이에게는 유익하지만 어머니 몸에는 해롭다고 하니, 공이 이 말을 듣고 다시 젖을 먹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아우가 태어났는데, 공이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아무개 똥은 내가 비록 먹더라도 더럽지 않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 천성이었다.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처음 글자를 배울 때 듣기만 하면 곧잘 기억하였다.
8세에 이미 글귀를 지을 줄 알았는데, ‘가뭄을 근심한다’라는 제목으로 시험하자, 공이 곧바로 답하기를 “사람 마음을 하늘이 알지 못하네.[人心天不知]”라고 하니, 어른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당시에 족숙 극와(極窩) 주희(澍熙)의 집에서 서예 선생을 맞이하여 자질들을 가르쳤는데, 공이 가서 보고 ‘묵와(默窩)’ 두 글자를 쓰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여 “글뿐만 아니라 글씨도 또한 재주가 있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청고(靑臯) 족형 기수(基秀)를 맞이하여 필법을 배웠다. 10세에 동강(東岡) 선생의 청천서당(晴川書堂)과 장사미헌(張四未軒) 선생의 구욱재(求勗齋) 편액을 쓰고, 11세에 시조의 사공정비(司公井碑)를 쓰고, 몇 년 후에는 한강 선생의 회연서당(檜淵書堂) 편액을 썼다.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퍼져 여러 집의 누정과 비갈 글씨가 공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다. 선친은 공이 너무 일찍 재주가 드러난 것을 염려하여 그만두게 하고, 혹 묵장(墨帳)을 설치하여 임서(臨書)하게 하고 글씨 뒤에 ‘한포동자(寒浦童子)’라고 적게 하였으니, 선친이 명한 바였다. 혹 ‘차심재주인(此心齋主人)’이라고 적기도 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꿈에 “생시에도 이 마음 사후에도 이 마음일세.[生亦此心死此心]”라고 하는 구절을 지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후에 ‘극암(克菴)’으로 자호한 것은 대개 그 이름과 자에 ‘윤(允)’ 자와 ‘집(執)’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극복(克復)의 뜻을 취한 것이다.
16세에 성균관에서 박사 시험이 있었는데, 공이 혼자 생각으로 응시하여 지은 글을 향교에 보냈다. 선친이 책망하기를 “지금은 선비가 응시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찾아오게 하였다. 이때에 포운(圃雲) 족형 기후(基厚)가 선친에게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재주 있는 젊은이를 널리 구하여 이들을 외국에 유학을 시켜 시국의 임무를 단련하게 하니, 입신양명할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선친이 말하기를 “학문이 근본이고 재주는 말단이니 시속을 따라 이름을 얻는 것이 옛 법도를 지켜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선친이 지극한 가르침에 복종하여 두려워하며 생각을 바꾸어 본원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약관에 회당(晦堂) 장선생(張先生)에게 제자의 예를 드려 학문하는 요체를 듣고, 이기(理氣)의 분변과 상변(常變)의 예설을 말하자마자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후로 직접 가서 여쭙고 편지를 드려 질의함에 여러 차례 장려와 인정을 받았다.
을묘년(1915)에 회당 옹을 모시고 남쪽으로 해상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각지에서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병진년(1916)에 선친이 병에 걸려 점차 위극하게 되니, 의원이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근심하여 애를 태우면서 밤이면 반드시 정화수로 목욕하고 하늘에 빈 것이 백여 일이었다. 마침내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슬피 울부짖으면서 스스로 부지하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기 전에는 상복을 벗지 않고, 훈채(葷菜)와 비린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고, 안채로 들어가지 않고, 빈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을 마친 후에는 집안일을 아우에게 모두 맡기고 날마다 책상을 대하여 글을 탐독하니 생업이 점차 영락하였으나 공은 평소의 뜻을 더욱 굳게 하였다. 스스로 먹고 입는 것은 매우 박하게 하였으나 편모의 음식을 공양하는 것은 혹 빠뜨린 적이 없었고, 한 아우와 함께 편모를 좌우로 받들어 오직 기쁘게 해드리는 일로써 힘썼다.
기미년(1919)에 유림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는 거사가 있었는데, 실로 성주에서 앞장서서 시작하여 원근에서 호응하였다. 공은 당시에 각산(角山) 문하에서 함께 이 일을 주선했는데 서명하기에 이르러 회당 옹이 말하기를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자네는 노모가 계시니 함께 서명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명에 들지는 않았으나 화가 닥치는 날에 또한 함께 왜경의 옥에 구금되어 한 달 남짓 있다가 풀려났다.
경신년(1920)과 계해년(1923)에 백부와 계부가 전후로 돌아가셔서 부친 대신 섬기던 자리가 일시에 다 비게 되니 제문을 지어 애통한 사정(私情)을 갖추어 기술하였다.
병인년(1926)에 회당 선생이 돌아가시니, 공이 의지하고 우러를 곳을 잃은 것을 통탄하고 가마(加麻)하여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임신년(1932)에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모친의 연세가 높아 힘이 점차 쇠약하게 되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무릇 원사(院社)의 초빙과 벗들의 초청을 모두 사절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은 의술을 알지 못해서는 불가하다.”라고 하고, 《동의보감》을 초록하여 살폈다.
갑술년(1934)에 아우가 병에 걸려 입원했는데, 의사가 전염되는 까닭으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의 아우인데 내가 두려워 피한다면 형제간에 우애를 다해야 한다고 하늘이 보인 뜻에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마침내 구하지 못하기에 이르러서는 상심과 애통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노모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고 너그럽게 마음을 달래었다.
정축년(1937)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장(喪葬)의 여러 가지 예절을 한결같이 앞서의 부친상과 같이하고 기일을 당해서는 슬피 울부짖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다. 어버이의 묘소는 백 리 떨어져 있는데 공은 평소에 차멀미가 있어서 봄가을로 걸어가서 성묘를 하였다.
을유년(1945)에 아들의 직장을 따라 멀리 호남의 강진에 가서 우거할 때 그 곳 후진들 가운데 학업을 묻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재능에 따라 가르치니 무리들이 모두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여 ‘해남부자(海南夫子)’라는 칭호가 있기에 이르렀다. 이해 가을에 광복이 되어 질서가 문란하니 공직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핍박을 당했으나 공의 아들은 직소에 있었는데도 지방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 극암 선생의 아들이니 삼가 범하지 말라.”라고 하고, 더욱 아끼고 보호하였다. 5, 6년을 지나 공의 연령이 점차 높아 노쇠하니 항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금하지 못하여 술회한 시를 그 아들에게 주어 말하기를,
어찌 천 리 밖에 如何千里外
부자가 나그네 종적 되었는가 父子爲客跡
너는 부지런하고 효도를 하여 汝則勤而孝
혼정신성 직분을 능히 다한다만 能盡晨昏職
네 아비는 홀로 무슨 마음으로 汝父獨何心
멀리 선묘 곁을 떠나 있겠느냐 遠離先墓側
라고 하고, 곧 험한 길에 산 넘고 물 건너 선영을 살피고 돌아왔다.
경인년(1950)에 살림을 거두어 대구로 돌아왔다.
계사년(1953)에 다시 경주로 우거하여 국오(菊塢) 이원봉(李源鳳), 계파(桂坡) 최윤(崔潤), 소강(小江) 김헌수(金憲洙), 송람(松嵐) 이은우(李銀雨)와 날마다 서로 모여 시를 읊어 심회를 펼쳤다.
병신년(1956)에 대구로 돌아오니 글과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이르니 사양할 수 없어 힘이 닿는 대로 애써 요구에 응하였다.
신해년(1971) 여름에 병으로 누워 점차 위독하게 되자 자질과 문생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타고난 것이 매우 박한데 나이가 팔순이 넘었으니 실로 유감이 없고, 생명을 잊고서 인욕을 따르는 것은 스스로 면한 줄 알겠다.”라고 하고 고요히 돌아가시니, 곧 9월 11일이다. 사림이 예를 갖추어 성주 선남 마현산 갑좌(甲坐) 등성이에 모여서 안장하였다. 강진의 인사 가운데 멀리 와서 장례에 제자의 예를 행하고 흙을 짊어진 사람들이 또한 많았다.
배위는 여강 이씨(驪江李氏)이니 봉구(鳳久)의 따님이고 회재(晦齋) 선생의 후손이다. 정숙한 덕이 있었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인석(寅錫)·호석(濠錫)·양자로 나간 대석(大錫)·정석(正錫)이고, 딸은 서영호(徐永昊)에게 출가하였다. 인석의 아들은 일영(一永)이고, 딸은 신영걸(申榮杰)·허동원(許東源)·류우하(柳宇夏)·최정덕(崔定德)·정인재(鄭寅載)·박연황(朴淵鎤)에게 출가하였다. 호석의 딸은 이상욱(李相昱)에게 출가하였다. 대석의 아들은 규영(圭永)이고, 딸은 권영(權鈴)·신복호(申福浩)에게 출가하였다. 정석의 아들은 우영(羽永), 지영(芝永), 민영(珉永)이다. 서영호의 아들은 정채(正埰), 정묵(正黙)이다. 일영의 아들은 근욱(根旭)이다.
공은 총민(聰敏)하고 영매(英邁)한 자질로 근면하고 독실한 공부를 더하여 훌륭한 가정의 부형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대가의 강석에서 훈도를 받았다. 일찍부터 뜻을 굳게 정하여 추향이 바르고 분명하여 이단의 말이 횡행해도 바르지 않은 길로 들어가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세상 변고가 거듭 생겨나도 그 심지를 굳게 가져 반걸음도 법도 밖으로 떨어지지 않고 일념으로 연빙(淵氷)의 경계를 항상 보존하였다. 남들과 어울리되 유속에 동화되지 않고 곧게 처신하되 시속과 단절하지 않았다. 80년 동안 부지런히 한 공부는 내면을 중시하고 외면을 경시하며 인륜에 돈독하고 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날로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살아계실 때는 뜻과 몸을 아울러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상례의 절차와 슬퍼하는 심정이 두루 지극하였다. 제사를 받듦에는 기일에 앞서 재계하여 혼령이 계신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와는 우애가 독실하여 보살펴 사랑하고 곤궁한 형편을 도와주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고, 아우가 죽자 자기 집에 빈소를 설치하여 3년 동안 궤전(饋奠)한 후에도 추도하여 마지않아 슬퍼하고 상심하는 정이 가끔 시를 읊는 가운데 드러났다. 마침 이씨 집으로 출가한 누이가 가난하고 자식이 없었는데, 집으로 맞이하여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 겪었다. 4종형 기정(基珽)이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 가산이 다하게 되었는데, 공이 자기 전답을 처분하여 치료하게 하였다. 종족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화목하게 하니,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큰 흉년을 만나 유랑하는 거지가 사방에서 이르니 마음을 다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안으로는 당내의 친족으로부터 아래로 밥 짓는 여아에 이르기까지 질병이 있으면 비록 밤일지라도 반드시 의원을 찾아 약을 썼다.
재물에 담박하였으니 하루는 인삼 장사가 왔을 때 값을 깎지 않고 사고, 후에 그 장사가 또 왔을 때 역시 그렇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의관을 차려 입고 와서 말하기를, “30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하여 국내를 거의 다 다녔지만 장사와 이(利)를 다투지 않는 사람은 선생 한 사람을 보았으니, 덕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 그 일을 버리고 농사에 힘썼습니다. 마음에 감히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와서 인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였으니, 인애(仁愛)의 뜻이 능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선의 단서를 감발시켰음을 볼 수 있다.
항상 자질에게 경계하기를, “규모는 마땅히 근졸(謹拙)해야 하고, 지기는 반드시 각려(刻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자하고 방탕한 데 이르기 쉽다.”라고 하였다. 또 경계하기를 “대사와 소사를 막론하고 일 분의 도리를 보았으면 문득 즉시 행해야만 하고, 일 분의 옳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문득 고쳐야만 한다. 만약 그럭저럭 지내면서 행하지 않고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행하고 고칠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은 곧 공이 일생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요결(要訣)이다.
평소에 자신을 엄하게 구속하지 않았으면서도 태만한 기운이 몸에 나타나지 않고 속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위의를 바라보면 얼음이 맑고 노을이 깨끗한 것과 같고, 그 언사를 접해보면 옥이 온윤하고 난이 향기로운 것과 같았다. 온 세상이 머리를 깎았으나 홀로 두발을 보존하고 항상 옛 의관을 착용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일부러 남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졸박함을 지키고 은거하여 이미 시풍(時風)을 따를 수 없다면 차라리 나의 본색(本色)을 보존하는 것이 마음에 스스로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독서에 있어서는 사서와 육경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제가(諸家)를 널리 섭렵하되 반드시 낙건(洛建)과 도호(陶湖)의 책으로 돌아갔다. 문장을 짓는 것은 평이하고 전아하였다. 무릇 남의 선대를 드러내는 문장은 반드시 고찰하기를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여 평가가 각기 알맞게 하고 특히 충효열(忠孝烈)에 더욱 뜻을 다하였으니, 대개 난세인 까닭으로 더욱 강상(綱常)에 치중한 것이었다.
성리설에 있어서는 선유의 정론(定論)을 따르기에 힘쓰면서 또한 홀로 터득한 묘리가 많았다. 공산(恭山) 성와(惺窩) 두 선생의 문하에 변론하고 질의하여 남긴 글이 권축을 이루었는데,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은 하나인데 선유가 이로 말한 곳도 있고, 기로 말한 곳도 있고, 이기를 합하여 말한 곳도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마음의 바탕은 구멍 속의 방촌(方寸)인데 오행(五行)의 기가 여기에 모이고 오성(五性)의 이가 이 가운데 걸려 있다. 그 이에 나아가 말하면 마음의 ‘본체(本體)’이고, 그 기에 나아가 말하면 마음의 ‘자구(資具)’이고, 통합하여 말하면 마음이 이기를 통합한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는 기가 아니면 마음을 이룰 수 없다. (중략)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을 논하는 데는 이에 나아가 논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이기를 합하여 논하는 것보다 완비한 것은 없으니, 반드시 ‘본체’는 ‘이’이고 ‘자구’는 ‘기’라고 말한 후에 빈주(賓主)의 구분이 있음을 절로 볼 수 있어서 세상이 선비가 근본을 둘로 하는 병통을 거의 면할 수 있다.”라고 한다.
그 밖에〈독예기(讀禮記)〉, 〈중용약고(中庸畧攷)〉, 〈산록(散錄)〉 등의 저작이 있으니 공부한 것이 정밀하고 깊어서 사문(斯文)의 우익(羽翼)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교제에 조심스럽게 하여 사귈 만한 무리가 아닌 사람과는 함부로 사귀지 않았고 긍와(肯窩) 이능학(李能學), 가산(柯山) 김형모(金瀅模), 화강(華岡) 장상학(張相學) 등 여러 공에게는 스승처럼 섬기고 의옹(毅翁) 임홍재(任弘宰), 학음(鶴陰) 권효술(權孝述), 문암(文巖) 손후익(孫厚翼), 회계(晦溪) 장조현(張祚鉉), 학천(鶴川) 김병문(金秉文), 중재(重齋) 김황(金榥) 등과는 강론하고 연마하여 서로 바탕을 삼아 유익함이 가장 많았다.
저서 《한중자험(閑中自驗)》 20여 권이 상자에 간직되어 있다.
아! 공의 재능과 덕으로 만약 태평한 시대를 만나서 세상에 나아가 쓰였더라면 힘든 일을 능히 처리하는 것이 혹 공이 능한 바는 아닐지라도 학문을 일으키고 문풍을 확산하는 것은 곧 그 직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대를 잘못 만나 끝내 초야에서 늙었으니, 자못 개탄스러운 심정이 절실하다. 그러나 생시에는 완명(完名)이 이지러지지 않았고 사후에는 유문(遺文)이 후세에 전하니 또한 무슨 유감이랴?
동환이 남쪽으로 와서 우거한 후로 처음으로 형원(荊願)을 이루어 십수 년 사이에 학문의 서여(緖餘)를 얻어 듣고 세한(歲寒)의 기약을 의탁했는데, 인사가 크게 어긋나 공이 갑자기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떠나니 갈팡질팡 갈 길을 잃은 저물녘 길에 상질(喪質)의 슬픔을 견딜 수 없다. 공의 아들 형제가 나에게 가전(家傳)을 주면서 행장을 부탁하니, 내가 평소에 공과 서로 안 것이 깊기 때문이었다. 뒤에 죽는 이의 책임을 마땅히 사양하지 못할 것이지만 도리어 나의 식견이 얕고 정신이 흐려 덕의 아름다움을 능히 형용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이에 굳게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지고 온 가전을 바탕으로 수정을 더해서 차례로 기록하여 다만 효자의 간곡한 정성에 답할 뿐이니, 문필을 맡은 사람이 채택할 자료가 있을지 모르겠다.
파리장서(巴里長書) :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을 때, 우리나라의 유림 대표 곽종석(郭鍾錫, 1846∼1919) 김복한(金福漢, 1860∼1924) 등 137인이 연명(聯名)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탄원한 문서이다.
각산(角山) 문하 : 장석영(張錫英, 1851∼1926)의 문하를 말한다. 장석영이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가마(加麻) : 문인이 스승의 상에 수질(首絰)을 쓰는 것을 말한다.
연빙(淵氷)의 경계 : 깊은 연못과 얇은 얼음처럼 위태한 세로(世路)를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낙건(洛建) : 송(宋)나라 때 이학(理學)이 흥성했던 낙양(洛陽)과 건양(建陽)을 말한다. 낙양에는 정자 형제가 있었고 건양에는 주자가 있었다. 정주학(程朱學)으로 대변되는 이학(理學)을 뜻한다.
도호(陶湖) : 도산(陶山)과 소호(蘇湖)를 아울러 말한다. 도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학문을 강론한 곳이고, 소호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학문을 강론한 곳인데, 각기 영남학맥의 종주인 퇴계와 대산을 뜻하는 말이다.
공산(恭山) :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의 호이다. 자는 순좌(舜佐), 본관은 야성(冶城)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정(高山亭)에서 살다가 만년에 김천의 원계(遠溪)로 들어가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저서로는 《공산집》이 있다.
성와(惺窩) : 이기형(李基馨, 1868∼1946)의 호이다. 자는 맹원(孟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이기윤의 종형이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성와집》이 있다.
형원(荊願) : 형주 자사(荊州刺史)를 알기 바란다는 뜻으로 한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을 알기 바람을 말한다. 당(唐)나라 원종(元宗) 때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자사일 때 이백(李白, 701∼762)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에 봉할 것이 아니고, 다만 한 번 한 형주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2 與韓荊州書》
세한(歲寒) : 변함없는 지조나 우정을 말한다.
상질(喪質)의 슬픔 : 절친한 벗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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