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후집 수강'에 덧붙여
2024년 5월 20일부터 진주향교에서 ‘고문진보 후집’ 강좌가 개설되었다. 지도는 경상국립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이신 이영숙 교수님이시다.
교수님께서 강의해 오던 ‘사기영선’ 강의가 지난주에 마무리되어 수강생의 의견을 수렴하여 채택한 교재가 '고문진보 후집'이다.
'고문진보 후집' 강좌는 우리 향교에서 두 번째다.
첫 번째는 2019년 양보 이창호 선생님께서 강의를 담당하셨는데 '고문진보 후집'에 수록된 글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글 10편을 골라 강의를 하셨다.
후에 '맹자' 강의로 옮기는 바람에 마무리를 다 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아쉬움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강의를 맡으신 이영숙 교수님께서는 책에 수록된 목차대로 빠짐없이 강의를 하겠다고 피력하셨다. 기대를 갖고 열심히 공부를 해볼 작정이다.
‘고문진보’는 중국 전국시대에서 당송시대까지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책으로, 전집에는 시류가, 후집에는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교수님이 강의할 영역은 후집인 산문에 국한하여 강의를 한다.고 하셨다
책의 제목에 담긴 ‘고문(古文)’이라는 말은 ‘옛날 글’이라는 뜻이며, ‘진보(眞寶)’라는 말은 ‘참된 보배’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문진보’라고 하면 ‘옛날 글 가운데서 참된 보물만 모아 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글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된 것일까?
‘고문’이라는 말에는 본래 옛날 글이라는 뜻이지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요즈음 글’이라는 의미의 ‘금문(今文)’에 대한 반대의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대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에 지어졌던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의 글들 또는 그보다 조금 뒤인 전한(서한) 때 사마천이 지은 『사기』 같은 책에 적힌 글을 고문이라고 하고, 후한(동한) 이후부터 위진 남북조를 거쳐 당나라 초기까지 문단에서 크게 유행했던 변려문(駢儷文)을 금문 (今文) 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당나라 중기 이후부터 한유, 유종원 같은 이른바 당송 팔대가들이 나타나서, 대구를 많이 사용하고, 전고가 많으며 문장에 담는 내용보다는 문장 형식의 꾸밈새에만 치중하는 변려문(駢儷文)을 반대하고, 다시 ‘고문’을 모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이들이 쓴 글을 다시 '고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책에 담긴 ‘고문’은 문장 형식의 아름다움에만 치우치지 않았던 글로서, 문장 안에 인생을 꾸리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알맹이 있는 내용, 즉 ‘옛사람들이 생각하던 올바른 도(道)를 담은 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문진보’는 중국에서 원나라 초기에 처음 편집된 이후,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많이 읽혀 왔다. 그러나 이 책이 정확히 언제쯤 중국에서 처음 편집되고 간행되었으며, 후세에 누가 계속하여 이 책을 증보하고 주석을 달았는지, 또 누가 계속하여 그것을 간행하였는지 체계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흔히 황견(黃堅)을 이 책의 편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에 이미 몇 가지 판본이 수입된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문진보’ 목판본과 활자본이 나왔고, 점필재 김종직이 쓴 ‘고문진보’의 서문이나 퇴계 이황이 쓴 비평 등이 전한다. 퇴계 이황은 “사람들은 시를 공부하기 위하여 ‘고문진보’를 보통 6백 번씩 읽으면서 암송하는데, 나도 몇 백 번을 읽고 암송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한결 시를 쉽게 지을 수 있었다”고 말하며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나는 고문진보의 가치를 나의 선조이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할아버지께서 성종3년(1472) 간본 발문에서 밝히신 글을 인용함으로써 그 가치를 가름하려 한다.
詩文(시문)을 올바로 공부하되
“또한 周敦頤·張載·程子에서 이루어진 성명지설(性命之說)을 참작함으로써 후세에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이 그 뿌리를 둔 바가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진실한 보배'가 된 까닭이라 하겠다."
“又且參之以濂溪關洛性命之說, 使後之學爲文章者, 知有所根柢焉, 嗚呼! 此其所以爲眞寶也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