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단 내 선배 목사님들과의 악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악연들로 인해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억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학과 시절 학교와 봉사하는 교회에서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동료들보다 좀 튀게 보였던 나는 나를 너무도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목사님이나 교수님들도 많았지만 반면에 나를 무척이나 고깝게 생각하며
질시하는 목사님들과 몇 교수님들에 의해 눈 밖에 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 신학과에서 1등을 해야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
나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거듭남을 경험하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기초가 없는 수학과 과학 등으로
고교 시절 애를 먹었으나 대학교에는 그러한 과목이 없는데다
외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나에게 대학 시절 공부는
별로 어려움 없이 거의 전 과목 all A플러스를 맞을 정도였고
재수 없으면 가끔 그냥 A학점이나 B플러스 한 두개 정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과 1등으로 전액 장학금을 몇 번 받으며 공부를 했고
당시 비싼 대학 등록금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에게 효도를 한 셈이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 대한 교수님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처음으로 받으셨던
신아무개 교수님은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셔서 내가 신학과 4학년 시절
[침례와 입교]라는 교회 초신자들을 위한 교리책을 나에게 맡겨
내가 책을 다 써서 그 교수님 이름으로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나를 너무도 사랑해 주셨던 박아무개 교수님은 시험을 치룬 직후
나를 교수실로 불러서 오전에 내가 시험 본 바로 우리 신학과
전체 시험지를 나에게 주면서 점수를 매기라고 하시고 당신은 자리를
떠나시면 나는 동료, 선후배들의 시험지에 점수를 매기고 나서
내 시험지 한 장만 맨 위에 그냥 놓고 나오곤 했습니다.
대학교 시험은 주관식이기에 어떤 답안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수님은 그 답안지가 내 안에 있다고 믿고 맡기실 만큼
저를 신뢰해 주셨고 그런 일은 그 다음 해에도 반복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박교수님이 나를 얼마나 신뢰하셨으면,
선배들의 시험지까지 나에게 채점을 맡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료들이나 후배들은 그렇다고 하지만,
선배들이 본 시험지 채점까지 나에게 전적으로 맡기신 것은
나를 정말 진심으로 믿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은 당시 우리 동료들에게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나는 기숙사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대학 옆의 초등학교에서
야간 경비를 서면서 밤 새 교실의 연탄을 갈고 하는 잡일을 했고
잠은 교무실 책상을 두어 개 붙여 놓고 그 위에서 해결했습니다.
또한 주말마다 가서 봉사하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너무도 열정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 주시는 여러 집사님 등이 학비에
보태 쓰라고 당시로서는 큰돈인 수표 등을 건네주시기도 했고
가방, 넥타이, 양복, 와이셔츠 심지어 속 옷 등을 교회의
여자 집사님들이 모두 챙겨서 주말에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한 아름씩 안겨 주곤 했습니다.
나이 겨우 스무 살이 갓 넘은 교육 전도사가 교회에서
너무 교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나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침례 받고
종교를 개종하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일을 누구보다 가장 기뻐해야 할 담임 목사님들은
절대로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신학과 2학년 시절, 겨우 내 나이 스물 한 살이었을 때
내가 교육 전도사로 일했던 인천 중앙 교회에서는 정말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 내가 맡았던 송월동 구역반에 성도 단 한명에
구도자 한 사람을 놓고 시작한 그 구역방 예배가 6개월도 채 안되어
40여명씩 참석하며 개종자와 침례자 숫자가 여러 명 나오는 역사가
일어났고 학생 열네명을 인수 받은 학생반이 몇 개월이 안 되어
평균 80명 이상 참석할만큼 부흥했으니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신 역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 목사가 된 사람이 여러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담임 목사님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그러한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반기질 않았고 도리어 증오하였으며
조아무개 목사님은 나를 그 교회에서 내어 쫒아 내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도리어 교인들로부터 완전히 냉대와 홀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교단 내 몇 몇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나는 그 학생 시절부터
까닭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단 내 선배 목사님들로부터의 억울한 일을
또 다시 내 임시 목회지인 문곡 교회에서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 송탄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셨고 우리 문곡 교회의 예식 담임
목사님이셨던 김목사님은 처음에는 아주 다정다감하게 나를 대해 주셨고
전도사인 나를 목사라고 부르라고 교인들에게 명령을 내릴 만큼
호의적이었으나 내가 문곡 교회를 부흥 시키면서 침례자 숫자가
나올 때마다 몹시도 불쾌한 내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그 해 년도에 송탄 교회가 침례를 준 숫자가 3명인데 반해
송탄처럼 도심지도 아닌 조그마한 문곡리 교회에서 침례자 숫자가
거의 매 달마다 나오니 김목사님은 몹시도 못 마땅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단은 철저히 조직체인데다 예식 담임 목사가 아니면
그 어느 누구도 침례식 등 교회의 예식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문곡 교회가 침례자를 내면 반드시 예식 담임 목사님이 안식일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시고 침례식을 베풀어야만 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웃으시며 기쁜 낯으로 침례식을 행해 주셨는데
그 후 자주 반복되는 침례식에 오시도록 전화를 드리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오지 않으셨고
침례식을 딜레이 시키거나 못하게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매일 새벽 기도회를 통한 성령의 불길은 모든 교인들의
심령마다 옮겨졌고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던 성도들에게는
잃은 양들이 교회에 돌아오고 아픈 성도들을 통한 그 가족들이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영혼들이 거듭나고 침례를 받으니
전도에 대한 열망이 점점 강하여져서 나는 거의 매일 연세 많은
할머님 집사님들과 함께 이 동네 저 동네 곳곳을 방문하면서
영혼 구원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저 멀리 이웃 동네에서 과거 침례까지 받았으나 쉬고 있었던
가정들이 회복되고 교회에 출석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몇 달도 안 되어 교회 안이 가득 찰만큼 성도들로 붐볐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기뻐하고 성도들이 즐거워하는 이 놀라운 광경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한 목사의 심술이 결국 임시 목회에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고도 또 다시 콜링을 받지 못하게 하는
나에게 또 하나의 족쇄가 될 줄은 당시에 나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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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 내가 신학과 4학년 시절 당시 신학과장님이셨던
신현철 박사님 부탁으로 써서 신박사님 이름으로 출간했던 책


첫댓글 목사님은 조직이라는 그룻이 감당하기에는 벅찬인물이셨나 봅니다.
곽목사님... 목사님이 몇 번 문곡 교회 경험담을 부탁하였지만
시간을 지체하면서 망설였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자칫하면 내 자랑이 될 수 있고...
나를 이야기하다 보면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것이
개인사에 얽힌 사연들인지라..... 망설였던 것이지요...
카톡으로도 말씀 드렸지만 그래서 나는 훗 날 내 생전에 우리 주님이
오시지 않아(그럴리가 만무하겠지만) 내 생전 이야기를 쓴다면
'회고록'이 아닌 '참회록'을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글을 쓸 때..
거기에는 반드시 미화와 자화자찬이 묘사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박진하 그럼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던 것은,
나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분기하여 하나님 앞에 열정적인 기별자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믿음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글을 쓰고 보니...
내 자랑이 많이 들어간 것 같아 하나님 앞에 송구스럽습니다.
사실은, 내가 콜링되지 못한 근원적인 이유는
내가 그 일들을 위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도 40년의 광야 생활 속에
훈련을 시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네 목사님 잘 압니다. 목사님이 자랑하시는 분이라면 그 자리에 서지도 않으셨겠지요.
저는 목사님의 글을 읽고 목사님이 가지셨던 영혼구원의열정 목회열정을 본받고자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감동적인 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침례와 입교 책 잘 알지요 목사님이 쓰셨군요 ㅎㅎㅎ
목사님 !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목사님을 큰그릇으로 쓰시려고
성령의 단련으로 복음의 갑옷을 입게 하신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선 이미 택함 받으신 목자이시기에
주위에 시기하는자들이 더많았던것 같습니다
준비가 안된것이 아니라 더 굳은 성령의 갑옷으로 무장 하게 하시느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신 ~~어머님의 기도와 아버님의 기도속에
강하게 무장하여 훈련시킨 영혼의 구원자로~~
이미 택함 받으셨던 목사님 ! 좌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굳건하신 목사님 ! 존경 합니다
솔이 사모님, 이렇게 격려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흠이 많은 이 사람을 하나님은 여러 사람과 환경을 통해
많이 다듬어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요즘 들어 철이 겨우 드는 느낌이 들 정도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종인지 절감하게 됩니다.
솔이 사모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아름다운 품성이
글과 얼굴, 삶을 통해 보여져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종파, 교리와 교파, 교단의 모든 장벽을 넘어
이렇게 이 땅에서 예수님 사랑으로 하나된 우리가
저 영원한 하늘에서도 영원히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솔이 사모님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한국재림교회가 지금보다 더 크게 확장되고 부흥할 수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의 특유의 남 잘되는 것 못보는 옹졸한 열등의식이
하나의 폐단으로 작용했고 현재에도 답습되고 있습니다.
인재를 재목으로 키워서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해야 하는데
떡잎부터 짓밟아 버리고 잘라내려는 시기심과 질투심이
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최대의 요인이 되었지요. 지금도 여전합니다.
말을 안해도 잘 압니다.
이 안에서 3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1. 열심히 노력해서 그 속으로 들어간다.
2. 포기하고 마음 접고 산다.
3. 중도: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단계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