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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몇 년 전 러셀 커크(Russell Kirk, 1918~1994)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보수주의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러셀 커크는 그해 한국에도 번역되어 소개된 <보수의 정신> 등의 걸작을 통해 미국에서 보수주의 사상을 정립한 인물이다. 그곳에서 나는 커크의 부인 아넷 커크(Annette Kirk)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 즉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 보수주의의 회복을 이끌어낸 현대 보수주의의 주역들을 일부 만나볼 수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이제 노년이 된 보수주의 거목들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보수주의 청년운동을 시작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소개하며 정중히 물었다. “커크가 설파한 보수주의 사상을 친구들에게 한참 설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독교 복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도대체 맞는 겁니까?” 그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크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보수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네요.”
그렇다. 인간 상위의 초월적인 도덕적 질서와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것을 기본 태도로 삼는 보수주의는, 창조질서와 인간의 원죄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William Buckley Jr.)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종교적일 필요는 없지만 종교(기독교)에 적대적일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커크는 <보수의 정신>을 집필한 후 바로 이 보수의 정신과 기독교 가치관의 관계를 추적하기 위해 20년 동안 연구에 몰두한다. 인류 역사의 무려 3,500여 년을 망라한 그 놀라운 결과물이 1974년에 출간된 (미국 질서의 뿌리)이다. 그는 이 대작에서 보다 성숙한 보수주의 사상을 펴내는데, 보수의 정신이 미국에서 국가질서의 형태로 구현되기까지는 영국의 자연권 전통과 로마제국의 공화주의 실험, 그리고 헬라 문명의 정치철학적 고찰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도덕법’이 그 뿌리에 있다고 설명한다. 보수주의 질서는 ‘5대 도시(문명)’, 즉 예루살렘과 아테네와 로마와 런던을 통해 발전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고, 그 중추에는 다름 아닌 기독교 문명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커크가 정립한 이 보수주의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실 보수주의는 ‘기독교’라는 형용사가 붙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독교 가치관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단어 자체에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통이 담겨있다. 물론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다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정이 그 정신과 사회문명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앞서 언급한 행사장에서 나오기 전 보수주의 원로들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 전통의 바탕이 풍부한 미국과 달리 한국과 같은 세속적 사회문화 바탕에서도 커크가 말하는 보수주의가 과연 뿌리내릴 수 있을까요?” 그들 중 서울에 가본 적이 있다는 한 어르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되물었다. “한국은 교회가 정말 많지 않나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기독교의 역할이 크다고 알고 있는데요.”
미국 보수주의 원로의 이 짧은 마지막 말은 오랫동안 묵직한 충격으로 마음을 때렸다. 마치 이렇게 추궁하는 것 같았다. “그 많은 교회들이 한국사회에서 본연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대한민국의 건국도 미국과 다를 바 없이 기독교의 독립정신으로 가능했던 것인데 그 역할을 잊은 건 아닌가요?” “결국 한국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정치철학적 보수주의의 정신적 기반을 쌓아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참된 보수주의 정신은 결국 교회를 중심으로 크리스천들을 통해 사회에 확산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크리스천들이 먼저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보수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배우고 확립해야 한다. 우리가 보수주의를 굳이 ‘기독교 보수주의’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참된 보수주의를 몰라서 처참히 무너진 한국보수를 재건하기 위해 우리 크리스천에게 맡겨진 짐이 그만큼 막중하다. 분명한 것은 보수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은 크리스천 본연의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9635
보수주의의 ‘자유’와 기독교의 관계
1년 전인 작년 5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한미 자유 우호의 밤’이 열렸을 때다. 미국보수연합(American Conservative Union, ACU)의 관계자들을 초청해 한국 보수주의의 회복을 위한 자문을 구하는 자리였다. ACU는 미국의 정치권이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좌경화되어가던 1964년, 윌리엄 버클리(William F. Buckley Jr.)가 세운 보수주의 로비 단체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버클리는 ACU를 통해 보수주의의 지지기반을 다지고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인물을 키워내 공화당을 진정한 보수주의 정당으로 재탈환했다.
귀빈들과의 조찬 자리에서 나는 ACU의 사무총장인 댄 슈나이더(Dan Schneider)를 만날 수 있었다. 슈나이더에게 한국 보수의 위기상황을 간략히 소개하고 지금 한국에 윌리엄 버클리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며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Can you define conservatism in five words?(보수주의를 다섯 단어의 문장으로 한번 말해볼래요?) 한국의 청년 보수주의자가 보수주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테스트하려는 질문이었다. 일종의 면접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재빨리 머리를 굴려 엉겁결에 대답했다. “All men are created equal.”(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슈나이더는 제법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더니 자신이 생각하는 답도 공개 했다. “Sovereignty resides in the person.”(주권은 개인에게 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두 문장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토마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에 쓰고 에이브러햄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재천명한 그 짧은 문장이 보수주의의 핵심 전제인 ‘창조질서’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진 개인의 존엄’을 표현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고, 슈나이더도 바로 그 창조질서에 따라 ‘각 개인에게 부여된 권리’가 보수주의의 핵심 원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핵심 가치를 전제한다면 보수주의는 다양하게 정의(표현)될 수 있다. 사실 보수주의가 하나의 정의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ideology)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보수주의를 정립한 러셀 커크(Russell Kirk)는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부정(negation)”이라고 말했다. 보수주의는 현실과 괴리된 어떤 추상적인 이론을 강요하고 이에 집착하여 사회를 설계하려 하는 경직된 교리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이건도 보수주의를 “추상에 대한 맹목적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정치적 관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보수주의는 무엇을 지키고 보전(conserve)하려는 것일까? 권위 있는 보수주의 학자 폴 켄고르(Paul Kengor)는 이렇게 정의했다. “보수주의의 본질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마땅한 이유로 그 사회와 시민과 국가와 질서를 위해 유효성이 증명된 가치들을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다.” 또 레이건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보수주의는 사람들이 한 세대, 혹은 열 몇 세대 정도에 걸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그동안 경험해온 모든 것을 종합해 발견한 것들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보수주의가 옳을 뿐 아니라, 보수주의가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바르게만 전달된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인류의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유효성이 증명된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유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삿21:25)” 방종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질서에 입각한 책임 있는 자유(responsible freedom)다. 러셀 커크는 이를 “질서 있는 자유”(ordered liberty)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자유)과 광야의 율법(질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대-기독교 가치관이다.
결국 보수주의는, 세상의 사회질서를 피조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계관(worldview)이자, 인간의 한계와 인간 상위의 도덕적 질서(창조주)를 겸허히 인정하는 태도(attitude)이며, 그렇게 자유로이 터득한 경험적 지혜와 신앙에 기초해 삶을 살아가는 방식(way of life)인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보수주의를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자유(freedom)와 신앙(faith)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의 정신을 단 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을까? 미국의 저명한 보수주의 학자 유벌 레빈(Yuval Levin)은 주저 없이 보수의 정신을 ‘감사’(gratitude)라고 말한다. 창조주와 그 주권, 그리고 역사의 경험과 그 주인공인 선대에 대한 감사에서 보수의 정신이 비롯된다는 것이다. 감사는 창조와 역사 앞의 ‘겸허함’이나 선대의 경험을 단순히 ‘존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다.
보수주의자는 그 감사를 바탕으로, 창조주를 부정하고 역사를 무시하며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세력들을 능동적으로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보수주의 운동의 아버지’ 윌리엄 버클리는 이렇게 말했다. “보수주의자는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공적영역에서 다시 등장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강경히 주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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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대기독교’ 가치관에 대해서
미국에서 보수주의를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수식어가 바로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이다. 서구문명을 이야기할 때도 보통 유대기독교 가치관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을 언급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서양철학이나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으로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보수주의에 비해, ‘유대기독교 전통’은 20세기 중반에 특히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비교적 최근 개념으로 그 의미가 뚜렷하지 않다. 때문에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등장한 배경과 그 의미,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유대기독교라는 표현은 어떤 종교집단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물론 19세기부터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뜻하는 말로 ‘유대기독교인’(‘메시아닉쥬’)이라는 명칭을 써왔지만, 유대기독교 가치관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범위는 특정 종교인들을 뜻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내포한다. 또 그렇다고 ‘유대기독교’라는 표현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보다 넓은 의미의 신학적 틀로 묶는 것도 아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분명 완전히 다른 종교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유대교인 것이고, 기독교는 유대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기독교 가치관’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갑자기 20세기 미국 정치 담론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유대인들은 미국 초창기부터 항상 함께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미국에 유대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은 1880년대이다. 당시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건너온 유대인들은 40년 만에 미국 내 1% 미만에서 3.5%로 증가한다. 이와 함께 KKK(Ku Klux Klan)와 같은 인종차별 조직이 부활하는 등 반(反)유대주의 운동도 한때 성행했지만,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미국사회가 유대인들을 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늘어난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을 통해 나치의 유대인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대도 커진다.
결정적으로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사건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2월 3일, 독일군 유보트(U-223) 잠수함이 격침한 미군 수송선 도체스터 호(SS Dorchester)에서 일어났다. 선상에는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된 902명의 미군이 타고 있었고, 그 중에는 군종장교로 자원입대한 개신교 목사 조지 폭스(George L. Fox)와 클라크 폴링(Clark V. Poling), 가톨릭 신부 존 워싱턴(John P. Washington), 그리고 유대교 랍비 알렉산더 굿(Alexander B. Goode)이 타고 있었다. 새벽 한시 경 나치군의 어뢰를 정통으로 맞은 도체스터 호는 불과 20분 만에 가라앉았고 무려 674명이 한겨울밤 바다에 수장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4명의 군종장교는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내어주고 배와 함께 수장되면서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위해 함께 손을 잡고 찬양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개신교와 가톨릭과 유대교라는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군종장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병사들을 위해 헌신하며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는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또한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림에 대한 소망을 한층 키워주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기독교’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1952년 12월 22일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 한 달을 앞두고 즉석으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 우리 국부들은 이렇게 설명했지요. ‘모든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그 권리들을 부여받았다.’ 즉 어떤 출생의 우연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정부형태는 어떤 아주 깊은 종교적 신앙 위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종교가 어떤 것이든 말이죠.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유대기독교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종교입니다.”
100여 년 전 남북전쟁 중 링컨이 미국의 건국정신을 재천명하며 노예를 해방시켰듯이,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 소련과 치열한 냉전에 돌입하며 미국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나라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1954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Pledge of Allegiance)에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했던 ‘하나님 아래서’(Under God)라는 표현을 법령으로 추가한다. 그리고 1956년에는 링컨 행정부가 미국 동전에 새겨 넣었던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미국의 공식 표어로 채택하고 모든 화폐에 새겨 넣는다.
결국 유대기독교 가치관이란, 고대 그리스 헬라철학의 ‘알지 못하는 신(행17:23)’이 아닌, 모세의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도덕률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세계관을 말한다. 미국은 초창기 정착부터 독립과 건국까지 이 세계관에 입각한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20세기 세계대전 중 유대인들이 처한 곤경과 무신론 세력과의 냉전을 통해 그 세계관을 재발견하고 미국의 공적 가치관으로 재천명한 것이다.
한편 유대기독교 가치관을 ‘아브라함 종교’(Abrahamic Religion)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일부 세속주의자들의 억지스런 경향도 있다. 그 의도는 우선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내포하고 있는 보편적 세계관을 특정 종교의 의식구조 개념으로 축소하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아브라함에게 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슬람권도 하나의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라는 가정부터 이슬람권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기독교 가치관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한참 후대인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미국 정치담론에 등장하게 된 것은, 미국의 건국정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미국 보수주의가 부활하게 된 배경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미국 보수주의와 유럽 보수주의의 궁극적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조평세 박사(북한학, 트루스포럼 연구위원)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0193
총선 이후, 보수의 각성이 시작된다 - 김성원 대표
https://www.youtube.com/watch?v=y-U8QpkINfc&t=2279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