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자아가 드러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아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나'라고 느끼는 의식이다.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을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나'의식이 현 인류에게는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자아와 본질자아이다. 원래는 자아만 존재하는데, 이 자아가 현실의 깨어있는 의식상태에서 상 속에 들어가므로 어쩔 수 없이 상 속에 들어가지 않은 자아를 본질자아로 구별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현 인류는 자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인류가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다. '나'의식이 더 이상 발전은 커녕 상처받아서 병까지 들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의식이 병이 들지 않고 나아가 발달할까가 질문이다. 더불어 발달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담으로 불교단체에서 주최하는 경기북부음악제(2022, 6, 9)가 경기도 양주시에서 열렸다. 거기에 필자가 합창단원으로 참여하였는데 느낀 점이 많이 있다. 총 3부로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1부는 여러가지 어려움(전쟁, 코로나 등등)으로 인해 죽은 사람에 대한 위령제, 2부는 박도현 지휘자가 이끄는 플레이 오케스트라에 맞춘 연합합창단 공연과 국악가수 두 사람의 순서, 3부는 이찬원가수와 트롯가수들의 무대였다.
그런데 2부와 3부를 비교해보면 관중들의 호응이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2부는 '가야지'와 '홀로아리랑'을 우리나라 전통음악, 창과 같은 창법(?)으로 불렀고, 이어서 플레이 오케스트라(국악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춘 연합합창단이 공연을 하였다. 통상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창법으로 부르는 공연에 관중들의 호응이 더 커야 한다. 그런데 3부 이찬원가수와 비교하면 비교 대상 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음악, 국악이 외면받는 이유, 클래식도 마찬가지로 일부 대중에게만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가 궁금하다.
2부에서 가야지를 부른 가수는 국악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는데 실력이 있는 가수임은 분명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지만, 호응은 크지 않았다. 홀로아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국악을 누가 할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국악이 대중에게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분명히 우리 정서에는 우리 음악의 피(DNA)가 흐른다. 그러므로 국악에 관중들의 호응이 더 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응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3부에서도 호응의 차이는 있었다. 이찬원가수가 나오기 전에 트롯가수 두 사람이 나왔는데 이찬원가수와는 분명 차이가 컸다.
연합합창단원 중에는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 5-6명 있었다. 필자가 자세히 들어보니 음정, 박자는 정확했지만, 마치 기계가 노래하는 듯하다. 감정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합창 연습 중 지휘자 선생님도 '흥분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 감정이 들어가면 음정, 박자가 조금 불안할 수도 있기에 그렇게 훈련받은 듯하다.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그럴까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요컨대 누구 할 것없이 연습은 부족하지 않았다는 의미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즉 무엇이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가. 국악 노래, 연합합창단의 합창, 오케스트라 연주, 트롯 가수 중에서 관중들의 호응이 다른 이유가 질문이다. 바로 말하면 본질자아가 드러나서, 본질자아가 그 일을 했을 경우에 관중들이 호응을 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자아가 드러난 만큼, 꼭 그만큼 관중들이 화답을 하였다. 연주 쟝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자아에 가깝게 연주한 사람에게 관중들이 열광하였다.
그 이유를 말하면, 모든 사람들의 자아가 현실에서 상 속에 있으므로, 누구라도 자신의 본질자아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원초적 본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쟝르에 관계없이 본질자아가 드러나면 열광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신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봄 노래를 부르면 봄의 느낌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모든 연주자들이 봄의 느낌을 드러내고 싶지만 안 되는 것은, 자신의 본질자아가 상속에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가 않는다. 더 문제인 것은 현 인류가 자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속에 있는 자아마저도 배제된다. 결과 외부만 보고 따라하는 상태, 흉내 정도만 낸다고 보면 된다. 외부, 물질(악보 등등)을 보고 자신의 본질자아에게 닥아가서 본질자아가 하도록 해야 하는데, 제 3자의 시각에서 보면 몹시 어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아가 인정되지 않는데, 나아가 그 자아가 상속에 있으니 본질자아가 드러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사자성어로 어불성설이다.
각 쟝르에서 본질자아가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국악하는 사람들이다. 과거 국악은 자신들의 정신, 혼을 드러내는 것이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평생동안 자신의 정신을 찾아서 하는 것이 노래였기 때문에, 정신이 노래에 담겼다. 현재는 국악 악보 등 보이는 것을 보고 찾아야 하는데, 보이는 국악 악보 등에는 당연히 정신이 없다. 자아(정신)를 인정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찾는 것은 과거보다 더욱 어려울 것임은 불을 보듯 환하다.
먼저 상속에 있는 자아를 인정해야 한다. 자아를 인정하면 상속에 있는 자아도 본질자아이기 때문에 본질자아를 만나는 것과 같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창법에 맞게 표현하면 정신이 표현된다이다.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앵무새와 같이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그 날 창을 한 사람이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 했지만 관중들의 반응이 나올리가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현 시대 상황이 자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노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 클래식 성악, 합창이다. 인간의 자아는 세 상태로 존재하는데, 깨어있는 상태는 상 속에 있고, 꿈꾸는 상태의 감정은 자아와 만난다. 만나지만 꿈을 꾸는 듯 흐릿한 상태이므로 분명하게 만나지는 못한다. 마지막 잠자는 상태, 무의식 상태에 본질자아가 존재하나 현실의 깨어있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본질자아를-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요컨대 인간의 감정에서는 본질자아를 만난다. 그런데 노래의 감정을 억누르면 그나마 흐릿하게 만나는 자아를 억누르는 것과 같다. 자아를 만나야, 자아가 표현해야 정신이 전달되는데, 이를 더 어렵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서양 클래식 고장에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가란 질문이 생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감정을 절제하되 이성으로 본질자아를 만나지 않나 한다. 이성이란 감정을 절제한 사고기능이다. 사고를 통하여 정확한 박자, 정확한 음정을 통하여, 하지만 이것도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같다. 그러므로 본질자아를 만나는 것은 같다는 의미이다. -서양에서 음악은 거의 생활이다. 생활(음악)을 하면서 내면의 본질자아를 만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사람과 그 속성이 다르므로 우리나라 사람은 감정을 통하여 들어가되 정확한 음정, 박자를 지닌다면 조수미 선생님과 같은 경우, 음악의 정신이 표현될 것이다. 감정을 절제해서 음정, 박자만을 정확하게 한다면, 서양사람들의 흉내를 내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긴다
마지막 트롯가수이다. 이찬원가수와 다른 두 사람의 트롯가수의 노래를 겉으로 보면은 차이가 없다. 거의 똑같이 부르는듯 보이는데, 다른 두 트롯가수에 비해서 이찬원가수의 반응은 관중들이 거의 정신을 놓은 듯 뜨겁다. 역시 그 이유도 같다. 이찬원가수의 본질자아가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두 트롯가수는 (본질)자아가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하면은, 그렇지는 않다. 상 속에서 부르는 것, 본질자아가 상을 벗어난 정도의 차이이다. 인간에게 자아가 없으면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본질자아가 드러난 정도는 각각 다르고 그 정도에 따라서 관중들이 열광을 하는 것이다. 자아가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아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결론은 현실에서 상 속에 있는 자아가 드러난 정도에 따라서 정신이 표현되고, 또 정신이 표현된 정도만큼 관중들이 열광을 한다. 그 이유를 인간의 정신과학적 관점에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본질)자아는 에테르체와 하나가 되어 있고 에테르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빛과 같은 진동을 한다. 이 빛은 우주와 연결되어서 우주의 움직임과 진동을 같이 한다. 이것이 천체음악이고 우주 화음이다. 우주에서 별들의 움직임이 진동하고, 이것이 본질자아와 연결되어서 진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질자아가 드러난 사람, 깨달은 사람이란 본질자아가 우주 화음과 진동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공연자의 본질자아가 우주 화음과 같은 진동을 하면 관중들이 같이 진동한다. 이것이 열광이다. 여담으로 사이비 교주도 이런 진동, 파장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먼저 자신의 에테르체를 감지해야 하고, 이어서 자신의 에테르체가 우주화음에 맞게 진동해야 한다. 이 진동이 삼라만상의 생명의 힘이다. 어떤 쟝르라도 쟝르에 맞게 표현하면 이 진동에 부합하게 된다. 문제는 이 진동을 자신의 본질자아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자신의 영혼이 이 진동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이 진동에 부합할려면, 영혼이 육체를 통해서 드러내는 활동, 사고, 감정, 의지를 이 진동에 부합하도록 내가 해야 한다. 그 과정이 어렵고 지난하기 때문에 관중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사람이 지극히 드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본질자아가 같은 진동을 할 것이다란 사실이다.
이것이 '나'의식이 발달하는 방법이다. 우주 화음과 자신의 에테르체가 진동을 같이 하는 것. 구체적으로 삼라만상을 나와 같은 존재로 사랑(무의식에서의 사랑이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