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은 서럽다 50]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농사짓는 솜씨가 달라지고 농사마저 사라질 지경이 되니까 농사에 딸린 말도 더불어 달라지거나 사라지고 있다. 경운기, 이앙기, 트랙터, 콤바인이 나오니까 극젱이(훌칭이), 쟁기, 써리, 고무래(곰배), 홀케, 도리깨가 모두 꼬리를 감추고, 따라서 따비와 보습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 목숨의 바탕인 농사가 사라질 수 없는 노릇이라면, ‘이랑’과 ‘고랑’은 끝까지 살아남을 낱말이다. 하지만 이들마저 뜻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고, 국어사전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밭농사는 반드시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야 한다. 밭의 흙을 갈아엎어 흙덩이를 잘게 부수고 고른 다음에 괭이로 흙을 파 올려 높아진 데와 낮아진 데가 나란하게 만든다. 흙을 파 올려 높아진 데는 비가 와도 물에 잠기지 않고, 낮아진 데는 비가 오면 물에 잠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위로 높아진 데를 ‘이랑’이라 하고, 여기에 종자를 넣거나 모종을 옮겨서 남새(채소)나 곡식을 가꾼다.
한편 아래로 낮아진 데를 ‘고랑’이라 하는데, 고랑은 낮아서 이랑의 곡식을 돌보는 사람의 발에 밟히기나 하는 신세다. 그러나 세상 이치는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 하는 속담처럼 때가 되면 신세가 뒤집히게 마련이므로, 이랑과 고랑은 단짝이 되어 잘 지내 왔다.
▲ 이랑과 고랑은 단짝이 되어 잘 지내 왔다.(그림 이무성 작가)
그런데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 침략으로 농사마저 바뀌면서 ‘두둑’이 판을 치며 이랑을 밀어냈다. ‘두둑’은 본디 흙을 끌어 올려 논이나 밭의 가장자리를 둑처럼 쌓아 놓은 것이었다. 두둑은 논밭을 갈라놓는 구실을 하고, 사람이나 마소가 걸어 다니는 길 노릇도 했다. 그런데 이랑이 고랑과 가지런히 짝하지 않고 제 홀로 몸집을 불려서 자리를 널찍이 차지하여 남새나 곡식을 여러 줄씩 키우도록 탈바꿈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니까 그것의 이름을 ‘두둑’이라고 불렀다. 논밭 가장자리를 둑처럼 갈라놓던 본디의 두둑과 몸집이나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두둑이 이랑을 밀어내고 고랑과 짝을 하니까, 국어사전도 이랑을 “두둑과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아주 어처구니없이 풀이를 하기에 이르렀다.
고랑은 ‘골’에서 왔을 터다. ‘골’은 산골이니 골짜기니 하는 바로 그 골이다. 논밭에 농사를 지으려면 흙에서 물기를 빼야 하므로 바닥에다 골을 타야 한다. 골을 타면 골에 있던 흙이 이랑이 되고, 이랑에 흙을 빼앗긴 골은 물기로 눅눅한 고랑이 된다. 고랑이 ‘골’에서 왔다면 이랑은 ‘일’에서 왔다.
이랑의 바탕이 될 만한 ‘일’은 이름씨에서는 찾기 어렵고, 움직씨 ‘일다’가 그럴듯하다. ‘일다’는 “없던 것에서 생기다, 여리고 흐리던 것이 튼튼하고 뚜렷해지다, 겉으로 부풀거나 위로 솟아오르다.”라는 뜻을 지금도 지니고 있으며, ‘일어나다’나 ‘일으키다’ 같은 말의 뿌리이기도 하다. 골을 타서 흙을 끌어 올려 쌓으면 땅이 솟아오르니 그게 바로 ‘일앙’, 곧 ‘이랑’이다.
그런데 물에 다니는 배에는 ‘이물’과 ‘고물’이 있고, 고려 노래 <동동>에는 ‘님배’와 ‘곰배’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들 모두 ‘이랑’과 ‘고랑’처럼 서로 짝을 이루고, ‘이’와 ‘고’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의 이물은 위로 추켜든 앞머리고 고물은 아래로 내려앉은 뒤축이라, 이랑이 위로 오르고 고랑이 아래로 내린 것과도 닮았다. 그렇다면 고려 노래 <동동>에 있는 ‘님배’와 ‘곰배’도 그런 뜻으로 풀이해야 옳은 것인가 생각해 볼만 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