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자한 21장’과 ‘등왕각서’에 조명된 사람의 운수
사람의 삶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하는 일 마다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실타래처럼 꼬이는 사람이 있다.
이를 두고 흔히들 운수(運數)라 한다.
운수는 길흉화복이 이미 정해져 있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한다.
동양 철학에서는 천지의 운행에 의해 개인이나 집단의 길흉화복이 좌우되고, 역리나 오행의 사주 8자 의해 그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를 오늘날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성이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여 왔던 까닭에 오늘날에도 운수라는 말이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고대 중국 철학을 이해하려면 상수론(象數論)을 알아야 한다. 상수론에 의하면 1에서 9까지 각각의 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1 · 3 · 5 · 7 · 9의 홀수는 양이며, 2 · 4 · 6 · 8의 짝수는 음이다.
우주만물이 생성 ·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음양의 조화에 달려 있으므로 홀수와 짝수가 서로 대응하여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 변화가 완성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홀수 양인 1 · 3 · 5 · 7 · 9에 우위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홀수인 1은 하늘이며, 3은 인간, 5는 중앙, 7은 태양, 9는 만물의 완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고, 짝수인 2는 땅, 4는 사방, 6은 육대, 8은 팔방 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주역’의 역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상수론에 근거하며, 그 자체가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을 판단하는 근원이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역’의 성격은 이처럼 우주의 생성원리를 설명하는 자연철학의 근거를 제시하는 동시에 처세철학의 대표적인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전자는 기수학(氣數學)으로 발전되고, 후자는 점을 치는 복서역(卜筮易)이 되었던 것이다.
요즈음 진주향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논어 강의 ‘자한(子罕) 21장’과 고문진보 ‘등왕각서(滕王閣序)’ 강의를 들으면서 느낀 바가 있어 몇 자 기술해 본다.
공자께서 제일 아끼는 제자 안연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죽음이 정말 애석하구나, 나는 그가 전진하는 것만 보았지 중지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 말은 자한(子罕) 20장의 말이다. 이어진 자한(子罕) 21장은 다음과 같다.
子曰(자왈) 苗而不秀者有矣夫(묘이불수자유의부) 秀而不實者有矣夫(수이불실자유의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만 트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구나.”
공자의 이 말속에는 운명론(運命論)이 함축되어 있다.
공자께서는 주역의 십익(十翼)을 지으실 만큼 주역에 정통했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신 분이다.
안연의 요절을 자연현상과 연계지어 그의 운명을 상수학(象數學)으로 풀이하여 ‘자한(子罕) 21장’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3월 6일 공부한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왕발의 경우는 운수(運數)가 좋은 경우다.
주석(註釋)에 의하면, 당(唐)나라 때 천재시인이었던 왕발(王勃)이 젊었을 적에 백발신령이 꿈에 나타나 “9월 9일 등왕각에서 큰잔치가 있으니 그 자리에 참석하여 글을 지어라”는 선몽(善夢)을 꾸었다. 그날이 9월 7일이었는데 등왕각이 있는 남창까지는 700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곳까지 가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왕발은 꿈이 너무나도 신령(神靈)했기에 돛단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했다. 갑자기 순풍이 불어와 다음날 등왕각에 다다르게 된다. 마침내 왕발이 글을 지어 바치니 참석자들은 모두 놀랐다. 이름 하여 천하의 명문 ‘滕王閣序(등왕각서)가 그것이다.
사실 이 서문은 염백서가 자기 사위의 글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 꾀한 술책이었는데, 당돌한 21세의 서생 왕발이 서문을 짓겠다고 자청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던 것이다.
못 마땅한 심정으로 글 짓는 과정을 보고 받던 염공이 ‘落霞與孤鶩齊飛(낙하여고목제비) 秋水共長天一色(추수공장천일색)’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함께 같은 색을 띠고 있다‘
이 글에 이르러 무릎을 쳤고, 맨 끝 부분의 칠언 율시 ‘56자’를 읽고는 감격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滕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림강저),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畵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物換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서있는데
옥구슬 방울소리 요란했건만 노래와 춤은 그쳤도다.
채색된 기둥에 아침이면 남포의 구름 흩날리고
구슬발엔 저녁이면 서산의 비가 그친다.
한가로운 구름 그림자 연못에 비칠 때 해는 유유히 지나가고,
세상이 변하면서 별들이 운행 한지가 몇 해나 되었던가!
누각의 황제아들 등왕은 지금 어디에,
난간 너머 장강은 하염없이 흐른다.
중국의 고사에 ‘등왕각의 행운’과 ‘천복비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가 대비되어 전하고 있다.
時來風送騰王閣(시래송풍등왕각)이요,
運退雷轟薦福碑(운퇴뢰굉천복비)라,
“때를 만나니 바람이 불어 등왕각으로 보내주었건만, 운이 따르지 않으니 ‘천복비’에 벼락이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천복비(薦福碑)’에 얽힌 고사는 다음과 같다.
송(宋)나라의 한 가난한 서생이 있었는데 천복사(薦福寺)에 있는 천하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천복비(薦福碑)’를 탁본(拓本)해 오면 천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노잣돈을 얻어 천리 길을 달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천복사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 천둥번개가 몰아치더니 공교롭게도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서생의 꿈은 보람도 없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운이 나빴던 것이다. 천복비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천복사에 있던 비석으로 당대 제일 명필 구양순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두이야기는 “인간사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운명론에 입각한 견해다.
하지만 유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추구하는 귀결점을 탐구해 본 것을 한마디로 요약해 표현하면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이다.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면 흥하지만 거스르면 망한다는 뜻이다. 시세에서 바름의 편에 서라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