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창조한 정신이 영혼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파르치팔과 성배찾기, 2012, 212)."
현재 우리 모두는 정신이 거의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여러가지로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인류가 발달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가진 '나'의식이 발달하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아주 먼 옛날에 인간의 '나'의식이 생겼고 육체에 수육하는데만도 오랜시간이 결렸다고 한다(슈타이너의 주장). 이때 '나'의식은 꿈과 같은 의식상태였으며, 점차 지금과 같은 명료한 의식으로 인류는 진화 중이다. 꿈과 같은 의식이란 어릴 때 가만히 돌아보면 뭔가 꿈처럼 흐릿한 의식을 지니던 때가 있었다. 혼자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반드시 누구의 도움이 필요했던 그런 시기, 누구에게나 있다. 인류의 의식이 그런 시기를 거쳤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인류는 집단의식을 공유하였다- 그런 시기를 거치고 점차 '나'의식이 뚜렷해지고 명료해져가는 시기를 슈타이너는 15세기 부터로 본다(발도르프 학교의 수학, 2016, 297). '나'의식이 명료해져간다는 말은 집단의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개인의식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나'의식은 앞으로 어떻게 발달할까? 슈타이너에 따르면 '나'의식이 뚜렷한 상태에서 우주에 닿는 것이다. 과거 꿈같은 의식을 지녔던 시기에는 인간의 영혼이 우주에 닿아 있었다. 그 의식이 꿈처럼 흐릿하였지만, 그런 상태에서 '신전'이 세워졌고, 실제로 인간이 신전을 통해 영적 정신적 정보를 우주로 부터 받았다. 그 당시 인류는 이렇게 받은 정보를 공유하였던 것이다. '나'의식이 명료해지면서 그런 정보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러한 '나'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다시 우주의 정보를 받는 것이 목표이자 진화이다.
'나'의식이 지금과 같은 명료한 상태에서 과연 인간이 우주 정보를 받을 수 있을까? 정신은 현재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또 우리도 모두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데에, 그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혁명이 우리나라에 막 불어닥친 시기에 교육을 받았다(1960년대),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정신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상태, 정신의 꼬리부분이 남아서 보이는 상태에 과학적인 사고,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시기가 합쳐졌다. 그래서 필자는 그 당시 -꼬리만 남은- 정신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가 있었던 듯하다. 분명히 뭔가 있는데 그것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의문이 증폭됐고, 그것을 찾은 것이다.
필자는 정신을 아주 조금이나마 경험했기 때문에 찾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정신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할까. 현재 인류가 의식혼 시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금과 같은 '나'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스스로 '이게 뭘까'라는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주장은 의식혼 시대가 서기 4000년 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인류는 감각혼 시대를 지나고 오성혼 시대도 지나 의식혼 시대로 들어섰다고 한다(슈타이너의 주장).
의식혼 시대란 인간의 영혼 중에서 의식혼이 활동하는 시기이다라는 의미이다. 영혼은 하는 일에 따라서 감각혼, 오성혼, 의식혼으로 나누어지는데, 감각혼은 몸의 감각 등을 파악하고, 오성혼은 생각을 하고, 의식혼은 대상의 진리를 파악한다. 대상의 진리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게 있으므로, 대상이 걸어오는 말을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대상의 진리는 우주가 공유하는 정보이다. 현재 우리 모두는 -당연히- 우주 정보에까지 이르러서 대상의 진리를 파악할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드러난 상황만 봐도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재는 우주 진리에 닿아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다. 그 예로 유튜브에서 살아 남을려면 그런 진리를 전해야 한다. 예술을 봐도 우주 진리를 표현하여야만 유튜브에서 살아남는다. 점점 우주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살아 남을려면 우주 진리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세상을 창조한 정신이 영혼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란 말은 영혼이 세상을 창조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영혼이 세상을 창조하도록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혼은 인간이라면 누구가 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지 못한다. 세상을 창조한다는 말은 '천지창조'와 같은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으로 보면 노래를 부르더라도 그 노래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럴려면 자신의 영혼이 우주에 닿아야 한다.
그 방법이다. 일단 영혼이 힘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자신의 영혼을 발달시켜야 한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일상생활 모두가 그 방법으로 수렴이 된다. 인간이 언제나 자신의 영혼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하면서 내부에 연결되도록 하면은 된다. 불가에서 깨달음이란 '코를 만지는 것과 같다'란 말이 있는데, 일상생활에서 하는 그 일이 곧 영혼을 개발시키는 일이므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인재가 나오고, 그 인재는 자신의 영혼을 개발시킨 결과인 것이다. 다만 내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그 일상생활을 나의 내부 영혼에 연결시켜야 한다. 그 방법이 의문을 갖는 일이다. 내가 의문을 가지면 나의 영혼이 그 의문을 풀고자 안내하고 이끌어서 해결해 준다. 내가 간절하다면, 진실이라면, 영혼은 반드시 답을 준다. 그 영혼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부 영혼의 반응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이 끊는 온도처럼 한계점에 이르러야 한다. 그 전에는 전혀 반응을 알 수가 없다.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이유이다. 늘 내부에 초점을 마추고 꾸준히 하면 어느 순간 내부가 반응을 한다. 처음 노력(일상생활이다)을 할 때에는 그것이 내부에서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다. 이것이 정신의 속성인 듯 하다.
영혼의 힘이 길러지면 영혼으로 보고 듣고 행동을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필자는 음악을 들으면 영혼의 심장 부근 챠크라(영혼의 지각기관)가 움직인다. 음악을 영혼이 들었기 때문인 듯한데, 누구라도 음악을 들으면 영혼이 듣지만, 많은 경우 통상 영혼이 잠을 자기 때문에 영혼이 듣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 영혼의 잠을 깨워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결과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현장에 있을때 필자는 아이들에게 -수업 끝 부분- 5-10분 정도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했다. '음악그림'이 아니라 느낌을 그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것이다. 이때 필자도 칠판에 그 느낌을 그렸다. 이때 음악을 집중해서 들은 듯하다.
그리고 힘들 때도 음악을 들었고, 특히 거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음악을 듣는데 심장 부근이 우주에 연결되어 환한 빛이 조금 나는 것을 감지했다. 그 이후에도 음악을 계속 들었는데, 어느 날 심장의 챠크라가 회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음악을 표현할 때도 영혼이 표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악기(리코더)를 불 때도 노래를 부를 때도 영혼이 음악을 표현하였다. 영혼이 표현한 것은 음악의 정신이고, 우주 정보이다. 그러면서 느낀 점이 확실히 지구음악은 우주음악의 모사이고, 우주음악이 지구음악의 원 상이다라는 사실, 그러므로 지구음악을 우주음악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는 것도 파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정신의 속성으로, 정신을 배제하면 정신(영혼)은 곧 다시 잠을 자고, 다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다시 또 움직인다. 그러므로 필자가 다시 음악을 듣지 않고 배제한다면, 회전은 곧 멈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발달한 것에서 서서히 다시 빛을 잃겠지만,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 출발은 언제나 유효하다.
현 시대가 의식혼시대이므로 누구라도 자신의 의식, 정신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생활하면서 그 의식이 발전되나, 문제는 영혼이 어느 한계점을 넘어야 드러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영혼이 잠을 자는 상태라는 것이다. 개개인으로 보면 그렇겠지만, 인류로 보면 인간의 영혼이 점차 발전해 나아가고 있다. 개인이 여기, 거대한 의식의 흐름에 스스로 올라타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아주 쉽다. 언제나 자신의 내부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면 된다. 그리고 지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영혼이 말을 걸어온다. 결과는 영혼으로 듣고, 영혼으로 보며, 영혼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이 세상을 창조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