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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같던 시절
글/박철영
1.
상태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다. 나이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친구가 되어버린 상태와 나는 앞뒷집에 산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그러면서 둘은 희순이를 사이에 두고 간혹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정도지만, 당시는 그런 것이 큰일이라고 토라지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사이가 영 틀어진 것도 아닌 좋았던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상태는 동네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아버지로 둔 친구였다. 그 당시 60년대 선생님이라면 대단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사실 부모 세대들이 글을 깨우친 분들이 많지 않았고 우리 부모도 글을 읽지 못한 세대이다 보니 여지가 없었다.
상태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아 초등학교를 먼저 다니다 두 해를 되레 꿇려 학교를 후배 아이들과 같이 다녔다.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상태가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장고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 아버지가 바라본 상태에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추측해보면 학습 능력이 생각보다 부족했나 보다. 아마 중학교 시험을 생각해서 고학년이 되기 전 저학년 때 꿇려서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이후 중학교 진학 정책이 바뀌어 우리가 중학교 갈 무렵에는 어이없게도 시험이 폐지되었고 은행알을 돌려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괜히 상태는 아버지의 고민으로 학교를 두 학년이나 꿇렸지만, 이후에도 학교 공부가 나아지는데 크게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후에도 공부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상태와 한번은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아이 때 한 살 차이면 힘쓰는데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내가 몇 대 맞다 보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상태한테 맞은 원인을 찾아보니 묘하게 나이가 작은 탓이 원인처럼 느껴졌다. 울면서 내뱉은 말이 참 우습다. 상태 나이가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기 때문에 내년에는 두 살을 한꺼번에 먹어 널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런 경고도 며칠 후면 까마득히 잊어버린 듯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만나는 것은 여전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나이는 지금껏 따라잡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라 눈만 뜨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밥 먹듯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누구보다 상태와는 그래서 추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겨울이면 서서히 몸도 마음도 추위 때문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허약하다 보니 감기는 달고 살았던 것 같고 요즘처럼 감기 걸렸다고 병원에 데려가는 것도 아니어서 스스로 나을 때까지 허약한 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상태와 노는 것은 하루도 거를 수가 없었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콧물을 찍어 바른 소매 끝이 콧물이 말라붙어 반뜩거릴 정도였고 상태와 어울려 노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면서 상태와는 모든 면에서 지기를 싫어했다. 당시 유행하는 놀이 중 종이를 사각형으로 접어 패딱지를 만들어 따먹기 놀이를 참 많이 했다. 그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라 금방 멈출 수가 없었다. 내 눈에 보인 두꺼운 종이는 죄다 뜯어다 딱지를 만들었다. 그중 형들이 사용하는 지도책은 최고 좋은 재료로 꼽았다. 하지만 지도책을 찢어 썼다가 나중 학교 수업 시간에 펼쳤다가 알게 된 형에게 주워 맞은 적도 있었다. 몇 번을 망설여보지만, 광에 있는 두꺼운 비료 부대 종이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우리 고향에서는 종이로 만든 비료 부대를 종이 푸대라고 했다. 요즘 쌀부대처럼 당시에는 비료를 종이 부대에다 포장해서 팔았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것도 요긴하게 쓸려고 챙겨놓았다. 사용한 뒤 혼나는 것은 나중 일로 어린 마음으로 어쩔 수 없었다.
그것으로 밑바닥이 두툼한 딱지를 만들어 상태와 한판 붙을 때는 천하무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태 친구가 나이가 많아 그런지 패를 치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렵게 만들어온 왕 딱지를 허망하게 따먹히고 마는 경우가 발생해버린 것이다. 일종에 속임수인데 자신의 패딱지에다 물기 먹은 흙을 발라 밑바닥 쪽을 무겁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땅바닥에 착 달라붙어 잘 뒤집히지 않았다. 물론 나도 따라 해보았지만 그런 데는 영 서툴렀다. 그렇게 한 뒤 비료 부대로 만든 왕 딱지를 사정없이 밑 쪽으로 내려치면서 밀어버리면 아무리 큰 딱지도 순간 뒤집혀 버리는 것이다. 왕 딱지를 잃고 나면 속이 뒤집혀 흥분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또 다른 패착이 되어 연이어 딱지를 내주는 실수가 되었다. 핏대를 세우며 오기도 부려보지만, 번번이 밀렸다. 서운한 감정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하여간 상태는 패딱지를 치는데 그 정도면 달인이었다. 그 추운 날 누런 코가 입술까지 내려왔다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횟수만큼 코를 손 소매에 닦는 횟수도 많아졌다. 그 정도면 누런 코를 옷에 코팅하는데 나도 달인이었다고 자부한다.
우리 집에는 봄이면 뒤안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우며 봄을 알린다. 산수유 꽃이 피는 석별 난간은 아래에서 올려다보기에도 높았다. 그런 산수유꽃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것은 없다. 춘청이네 집 뒤 안 언덕에서 수양 벚꽃이 한 자태를 뽐내며 흐드러지게 피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봐도 맘껏 늘어뜨린 모양새가 어린 마음에도 신기하고 좋았다. 춘청이네 집 앞 골목을 지나며 봐도 높은 뒤 안에 심어진 수양 벚꽃이 꽃망울을 달고 가지마다 늘어진 모습은 대단하였다. 그런 수양 벚꽃을 왜 어린 내가 좋아하였는지를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수양 벚꽃을 통해 전해오는 여심을 읽어내는 원초적 본능이 미리 자리 잡고 있었나 싶다. 하지만 산수유나 수양 벚꽃 못지않게 대단한 왕 벚꽃이 꽃송이를 터뜨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병훈이네 대문간을 기웃거렸다. 아기 손만 한 왕 벚꽃이 하늘을 가렸으니 말이다.
봄을 그렇게 보내다 보면 머지않아 우리 집 오래된 감나무에서 감 이파리가 연한 연둣빛으로 움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러다 오월 경 아침에 일어나보면 뒤 안 감나무 아래에는 감 꽃이 하얗게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었고 목에다 걸고 놀았다. 그러다 어떤 때는 희순이에게 감꽃 목걸이를 서로 주겠다며 정성껏 만들었다. 둘 중 하나만 받아가면 누군가는 기분이 상해 있었다. 사실 시골에서 감 꽃은 놀이 대상도 되었지만, 감 꽃이 떨어져 꼬들꼬들할 때 먹어보면 달작한 맛이 났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 큰 동네에 망골은 너무 멀리 있어 그렇고 동로골에는 우리 집에만 있는 감나무는 대단한 유혹이었고 최고의 놀이터인 셈이었다. 뒷집 상태가 감꽃 피는 계절에 나에게 놀러 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동안을 놀이 삼던 감꽃도 싫증이 날 때쯤이면 대문간 앞 장동 떡 네 집 담 위에 심어진 때죽나무에서 하얗게 때죽 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때죽 꽃은 감꽃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가지에 하얗게 매달려 있을 때부터 아이들 마음을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하필이면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에 떨어졌다. 그토록 예쁜 때죽 꽃을 오가며 밟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깝고 싫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 내내 하얗게 떨어지던 때죽 꽃도 봄의 한 때를 우리와 같이했다. 희순 상태 나 셋이서 거의 뭉쳐 다니면서 때죽 꽃을 주워다 그것으로 감꽃처럼 까끔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것을 살림 밑천처럼 깨진 사금파리 조각 위에 올려놓으면 쌀이 되었고 반찬도 되었다. 소꿉놀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까끔살이를 한다는 말을 썼다. 그런 놀이를 하며 서로 배역을 정하는 데 내가 희순이와 부부가 될 때는 신이 나기도 했지만, 어떤 날에는 상태가 희순이와 부부가 되는 날도 있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런 날은 공친 날이었다. 보조 역을 하면서도 영 마음은 시들했다. 부부가 무언지도 모를 어린 나이에 막연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들이란 매일 매일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다니며 논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내일을 또 찾아 나섰다.
2.
장동 아지매네 집 난간에서 때죽 꽃이 하얗게 떨어지기 시작할 때면 봄은 한 번 더 요동을 친다. 어린아이들도 따라 잠시라도 가만있지를 않는다. 장동 아지매 집 마당을 감싸고 있는 앞동산 사이에 울타리로 심어놓은 배나무와 살구나무 꽃도 함께 피었다 지기 시작한다. 분홍빛 살구꽃이 환하게 피는 장동아지매 집 안쪽은 밤에도 환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장동아지매네 마당을 질러 앞동산으로 개구멍 같은 찔레꽃 가시넝쿨이 옷깃을 잡아당기는 울타리를 요리조리 피해 넘어가곤 했다. 동산과 맞닿은 상기네 대밭이 앞동산까지 자꾸 번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상기네 대밭을 들어가 보면 동네 닭들이 달걀을 낳아 놓은 것이 한두 개씩 있었는데 그런 것을 보면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꼭 그것은 먹어서는 안 될 신비한 기운이 서린 달걀처럼 느껴졌다. 그런 대나무가 이 씨들 조상 묘가 있는 곳까지 군데군데 뿌리가 뻗어와 죽순이 올라왔지만, 수없이 밟아대는 아이들 발길을 이기지는 못했다.
여린 죽순을 꺾어 놀거나 대밭 주변을 살피다 보면 성질 급한 산딸기가 한두 개씩 빨갛게 익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고사리손들은 그런 산딸기를 가만두질 못했다. 손바닥에 한 움큼의 산딸기를 따 갖고 나올 때는 어린 마음이지만 그 즐거움이 넘쳤다. 여름이 가까워 지면서 파랗던 살구가 노랗게 익어갔다. 노랗게 익은 살구를 먹어본 신맛의 추억 때문일까. 입안이 시다. 동네가 제법 큰 곳인데도 기억으로는 살구나무가 많지 않았다. 아랫물에 갑봉 형님네와 웃골 옥련이네 집 그리고 동로골에 성구네와 장동아지매 집 정도였다. 나뿐이 아니고 모든 동네 아이들에게 몇 집 안 되는 살구나무에 대한 추억 정도는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어른이 되어버린 그 사람들 지금도 어디에선가 고향 집에서 봄이면 분홍빛으로 환하게 피워 오른 살구꽃을 잊지 못하고 익어 달콤한 향기까지 나는 살구 맛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길지만, 너무 짧았던 유년의 시기를 함께한 상태와 희순이 우리 셋이서 놀러 다닌 앞동산은 성장기 최고의 자연학습 장이 되어 주었다.
구정을 쇠고부터 우리는 산으로 들로 봄을 맞으러 쏘다녔다. 특히 앞동산은 우리들의 전용 놀이터였다. 거기로 가는 방법은 여러 길이 있지만 장동 떡 네 집 대문을 들어서 앞마당을 가로질러 찔레꽃 넝쿨이 있는 울타리를 넘어가기가 제일 쉬웠다. 선배들이나 아이들이 하도 많이 다녀 길이 개구멍처럼 나 있었다. 서툰 솜씨로 찔레 가지를 젖히며 넘어가다 가시에 찔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피 좀 난다고 시골 아이들에게는 그까짓 것은 큰일도 아니다. 그렇게 울타리를 넘어가면 우리 집이 훤히 보이는 앞동산을 갈 수 있었다. 거기서 우리 집을 내려다보면 신기하였지만, 울렁증이 났다. 맨날 올려다보았던 앞동산이기에 그랬다.
앞동산은 동로골과 아랫물에 사는 크고 작은 아이들의 집합 장소였다. 특히 방학 때나 토요일 또는 일요일 오후에는 이십여 명 넘게 모여 “진돌이”라는 놀이를 하곤 했는데 그야말로 앞동산이 떠나갈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보통 놀이는 우리보다 서너 살 위가 주축이 되어 진영이 짜졌다. 물론 우리처럼 작은 애들은 그런 놀이에서 주축이 되려면 몇 년은 더 따라다녀야 한다. 진돌이는 양 진영으로 나뉜 뒤, 동산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돌고 오는 동안 상대편에게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하고 잡히면 여지없이 우르르 몰려와 잡힌 사람을 들었다가 던지듯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것이었다. 바닥이 잔디밭이었으니 다행이지 싶다. 우리가 놀던 앞동산이 이 씨 종산이었기에 봉분이 여섯 기가 있었다. 봉분 양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망주석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도 아이들이 올라타 흔들어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것을 본 이 씨 어른들에게 몇 번을 혼났어도 아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토록 거친 아이들의 진돌이 놀이가 끝날 때쯤에 꼭 사달이 났다. 시합에서 지는 쪽에서 시비를 걸어 언성이 높아지고 급기야는 애들끼리 싸움이 붙곤 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도 해가 저물고 집집마다 저녁 먹으라고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하나둘씩 흩어지다 보면 금세 시들해졌다. 우리로서는 되도록 동로골 선배가 이기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그런 기대와 달리 매번 그러지는 못했다. 꼭 그런 일만 앞동산에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춘청이네 춘호 형이 앞동산 한쪽에서 숨어서 혹시나 어른들에게 들킬까 봐 두리번대며 뻐끔 담배를 피우던 순수한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때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라고 했다. 앞동산은 우리 식정리 모든 아이의 성장판이 되어준 그린 랜드였다.
우리 집 뒤안에는 울타리로 심은 대나무가 무성했다. 요즘 들어 대나무가 별로 쓸데없지만, 당시는 용도가 다양했다. 마당을 쓰는 빗자루를 만드는 데도 꼭 필요했다. 대나무 가지를 베서 묶어 쌓아두면 잎사귀가 저절로 썩는다. 그때 가지를 탈탈 털어 잎사귀를 발라낸 뒤 아버지는 거뜬히 빗자루를 만들어 냈다. 그 빗자루가 나중 나에게 집 마당을 청소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는 아직 일렀다. 대 빗자루로 주기적으로 대밭에서 날라 온 대이파리를 청소해야 하는 것이 보통 곤욕이 아니었기에 그렇다. 우리는 그런 대나무밭을 들어가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대나무를 골라 피리를 만들었다. 한 마디를 잘라 한쪽을 45도 각도로 깎아내고 낫으로 틈을 벌려 대나무 이파리를 사각형으로 잘라 삽입하면 피리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싫증날 정도로 불고 다녔다. 구멍 몇 개를 뚫어주면 구성진 노래도 가능한 피리가 되었다. 순수한 시절 리듬이 단순해서 더 좋았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대밭에 들어서면 대나무마다 마디마디 색깔이 달랐다. 그중 2년 이상 자란 대나무는 노란빛을 발하며 마디도 단단하고 낭창낭창해 활을 만들기에 제격인 휘는 탄력이 좋았다. 그런 대나무로 활을 만들어 대문간 초가지붕 처마에 박힌 삼나무 하얀 속대를 아버지 몰래 뽑아 하늘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가운데 동산이나 방앗간이 있는 판새형 네 논에서 쏘았는데 하늘로 솟구치는 화살을 보면 기분이 나는 듯해 쾌감을 느꼈다. 한없이 날 것 같던 화살이 힘이 부쳤는지 지상으로 방향을 틀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런 광경은 만져볼 수 없는 무한 공간이었던 하늘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포물선으로 그려진 유년의 상상 공간을 여태껏 채울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3.
한 끗발 하던 동로골에는 인근 다른 골목 선배들과도 꿇리지 않던 선배들이 있어 쟁쟁했다. 왠지 그 선배들을 따라붙으면 듬직하고 믿는 구석이 생겨 좋았다. 어린 마음에도 돌아가는 판을 읽고 있다고 봐야 한다. 위로 삼 년이면 시골서는 나이 차이도 그렇고 알게 모르게 위계란 게 있었다. 동로골에 사는 상태네 형 상석 희순이네 오빠 상희 그리고 금수 그 셋이 지나가면 집 뒤 고샅이 요란했다. 그 선배들 때문에 웃골에 사는 선배들도 몰려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놀이 문화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그렇다고 그 선배들이 우리를 챙겨 주며 놀이를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자기들 할 것 다 하고 놀다 우리가 하는 것을 못 마땅해하며 몇 마디 던지고 빨리 들어가라는 것이 전부였다. 조금은 자기들이 선배고 무엇을 좀 안다 이거였다. 우리 또래가 노는데 희순이 동생 또냄이가 끼면 불편한 것처럼 선배들도 그랬을 것이다. 연 만드는 것도 그 선배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했을 뿐이다.
당시 시골 아이들에게는 연 하나씩은 꼭 갖고 싶은 요즘으로 치면 게임기 이상의 로망이라고 보면 된다. 연 만드는 것이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요령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푸른 생대나무를 잘라 살을 깎아 연을 만들어 띄웠는데 대가 마르지 않아 무거워 잘 날지를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빨랫줄 받치는 마른 간짓대를 가져다 잘게 쪼갠 뒤 최대한 대나무 속살을 깎아내고 겉대만 남도록 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어린아이들한테는 만만치가 않았다. 어린 손으로 조선 낫을 다룬다는 것이 무리였고 대나무를 잘게 자를 때 손가락을 다치기도 했다. 거기다 속살을 대패질하듯 조선낫을 사용하는 것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익숙해졌다. 그러한 노력을 거쳐 비로소 연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 연이 바람을 타고 잘 날아오를 수 있었다.
하여간 선배들 하는 것은 모두 다 따라 했다. 그렇지만 선배들처럼 만들고 싶은 방패연은 단번에 만들어내질 못했다. 이리저리 어설프게나마 모양을 낸 방패연에 먹을 갈아 태극을 그려 넣고 대한민국을 윗머리에 쓰고는 구멍을 뚫어 바람을 타 잘 날아오르도록 했다. 그렇지만 하늘로 띄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했고 그것은 한참이 지난 나중에야 가능해졌다. 가오리 연도 깎아 놓은 연 살을 마지막으로 활처럼 둥글게 휘도록 하여 붙여야 한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럴 때 상태의 도움이 필요했다. 둘 중 하나는 모양을 잡고 끝부분이 잘 고정되도록 종이를 잘라 밴드로 손가락을 감싼 것처럼 가오리연 살대 끝을 감싸 붙여주어야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만 있다고 연을 날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줄을 감아 줄 연 자사를 만들고 엄마가 사준 이불 꿰맬 때 쓰는 굵은 실타래를 풀어 감아 의기양양 앞동산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연을 시험 삼아 날려본 뒤 수평을 잡아주는 일이 남아있다. 이것이 잘 안 될 때는 연이 한쪽으로 처박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반대쪽으로 연 꼬리를 더 붙여 중심을 잡아주었다. 그럴 것을 예측하고 연 꼬리를 여분으로 잘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것마저 준비를 못 했을 때는 방법이 또 있었다. 주변에 흔한 지푸라기라도 가져다 꼬리 대신 매달아 주면 되었다. 요즘은 휴대용 딱풀 하나면 끝나겠지만, 당시에는 밥알이 딱풀이었다. 집에서 밥 한 주먹을 몇 겹의 종이에 싸서 다녔다. 연에 붙인 대나무 살도 떨어지면 밥 덩어리에 푹푹 찔렀다가 뺐다를 반복하면 찰기가 범벅되어 잘 달라붙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우리는 앞동산에서 연을 날리면서 최고의 기분을 맛보곤 했다. 그 낮은 언덕에서 연을 띄울 바람을 찾는다고 몇 번씩 산꼭대기로 뛰어올랐던 앞동산 앞쪽으로는 오래된 방앗간이 있었다.
더 멀리는 장가실 떡 네 널따란 논이 있었다. 운 좋게 날아올랐다가도 연줄이 끊어지면 연이 점술이 형 네 집 너머 근처 전봇대에 걸리곤 했다. 운 좋게 전봇대에서 연을 풀어내 가져오면 다행이었다.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전봇대에서 겨우내 연 꼬리를 흔들고 있을 때면 아이들은 철영이 연이라고 놀린 듯이 말하곤 했다. 온갖 노력으로 만든 연날리기도 실이 끊어져 버리면 시들해지고 만다. 그런 날은 서로가 심란해졌다. 그때처럼 상태나 나나 연 날리는 것을 보겠다고 따라나선 희순이가 다시는 그런 것을 볼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래전 추억을 일부나마 기억하며 아름다운 시절을 위안으로 삼으며 살고 있을 뿐이다. 다시는 동심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연을 날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내 놀던 앞동산에서 연은 더는 날아오르지 않는다.
4.
겨울이라 춥기도 하고 그럴 때는 상태와 희순이 셋이서 앞동산에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언덕에 있는 아궁이에다 불을 지폈다. 그 아궁이를 성일 선배가 만들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궁이는 들판에서 보아도 시커먼 두 개의 작은 굴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언덕 비탈진 곳을 무엇으로 파냈는지 모르지만, 부엌 아궁이처럼 크기가 비슷했다. 그곳에다 불을 피워 상태네 집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은 아닌 반 정도 익은 고구마를 입이 시커멓도록 먹으며 즐겁기만 했다. 그 이후에도 겨울이면 상태네 고구마 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지금도 껍질이 하얗던 기다란 물고구마 맛이 생각난다. 요즘은 그런 고구마를 볼 수 없다.
그러다 배도 부르겠다 슬슬 딴짓을 할 때가 온 것이다. 불씨를 옮겨 다른 곳에도 붙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언덕에 있는 아궁이 속에서 불씨를 가져다 풀밭에 옮겨놓고 자박자박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면 마른 풀에 붙은 불기운이 주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돌풍처럼 강한 바람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상태랑 생솔가지를 꺾어다 불을 끄느라 혼쭐났던 때가 한두 번이 아녔다. 하기야 이 씨들 종가인 새집 뒷산에서 불놀이하다 봉분을 홀랑 태워 먹고 어른들에게 혼쭐이 난 경우도 있었으니까. 보통 불을 끌 때는 생솔가지를 꺾어 불 난 곳을 후들 겨 패듯 하여 껐다. 그런데 당황하다 보면 생솔가지마저 잘 꺾여지지 않는다. 여의치 않을 때는 웃옷을 벗어 불꽃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정신없이 그러다 불은 껐지만, 손이며 얼굴이 온통 시커먼 재에 범벅되곤 했다. 그런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다독였고 그만한 것을 안도했다. 당시에는 어린 우리도 어른들 몰래 주머니에 성냥개비와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는 성냥 딱지를 꼭 챙겨 다녔다. 불을 낼까 봐 부모님은 주의를 시켰지만, 우린 몰래 그렇게 했다. 산에 나무 갈 때도 꼭 갖고 다녔다.
약간 커가면서 노는 것도 조금씩 달라졌다. 선배나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면 해보고 싶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소나무 마른 이파리를 남원에서는 가리 나뭇잎이라고 했다. 이것을 가지런히 종이에 말아 어른들이 봉초로 담배를 말듯 침을 발라가며 엉성하게 모양을 내 태웠다. 일종에 무공해에다 무첨가 국산 솔잎 담배인 셈이다. 그것을 빨아 대면 화기가 혀끝으로 강하게 전달되었고 솔 이파리 향기가 입안에서 단내와 어우러져 맴돌았다. 우린 솔잎 담배를 피우며 즐거워했다. 언젠가는 상태가 집에서 아버지의 아리랑 담배를 몇 개비 가지고 나왔다. 소 풀을 캐러 간 들에서 진짜 고급 담배를 피워 몇 모금을 빨아댔더니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후 가끔 몰래 피운 담배 때문 소문이 돌아 초등학교 졸업할 때 나는 교육감 표창장을 받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깜깜이라 뒷집 선생님 아들인 상태네 형 상석이한테 풍문처럼 전해 들었다. 이후 중학교 가서도 그런 것을 친구들과 해본 기억이 있다. 지금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말이다. 그때는 성냥이 귀한 때였다. 우리 집에서 성냥이 떨어져 앞집에서 성냥을 빌려다 쓴 것이 기억난다. 물론 “우리 아버지가요 장날 사다 드린다고 성냥 좀 빌려 달래요”라는 전언이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8년 선배인 판새 형이 근처에 사는 상래를 귀엽다고 어렸을 때 역기처럼 들고 다녔단다. 그래서 별명이 역기 상래가 되어버린 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괴롭힘을 당했다. 모퉁이에 있는 역기 상래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서 겨울이면 울타리의 닥나무 가지를 잘라다 껍질을 벗겨 마루 아래에다 둘둘 말아 던져 놓았다. 나중 팽이를 돌리는 팽이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라 그랬다. 벗겨온 껍질을 오래 두면 말라서 물에다 담갔다가 사용했다. 촉촉해진 닥나무 껍질을 팽이채에 매달아 팽이를 치면 딱딱 내리칠 때마다 딱딱거리며 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팽이는 손목보다 큰 소나무를 잘라 집에서 조선 낫으로 깎아 만들었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어설프기 마련이다. 몇 번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팽이가 되었다. 문제는 쇠 구슬을 밑바닥 뾰쪽한 곳에 박아줘야 최고의 팽이가 되었다. 아쉽게도 시골에서 그것이 있을 리가 없다. 궁하면 통한다고 없을 때는 못을 박아 시멘트 바닥에 박박 문지르면 못대가리가 쇠 구슬처럼 다듬어져 둥글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팽이에다 크레용으로 예쁜 색을 덧칠하면 최고의 팽이가 되었다. 팽이가 빠르게 돌면서 보여주는 색감은 그야말로 더 선명해지며 현란했다. 거기다 팽이를 치는 묘미는 팽이채로 팽이를 감아 올려 순간에 공간 이동을 시키는 재주에 있었다. 이런 기술도 팽이가 쓰러지지 않고 회전이 잘되도록 요령을 터득한 것처럼 서서히 익숙해져 순간 이동시키는 실력이 나도 만만치 않았다. 겨울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팽이는 친구들과 어울릴 때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팽이로 쌈을 붙이며 놀았다. 상대방의 팽이가 내 팽이에 맞아 쓰러질 때 기분은 짜릿한 그런 것이었다.
5.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엿장수는 움직이는 작은 가게처럼 별것을 다 가지고 다녔다. 풍선도 그중 하나였는데, 딱딱한 종이 하단에는 다양한 풍선 모양이 매달려 있었다. 고물을 주면 종이에 그려진 손톱만 한 번호를 뽑게 해주었다. 번호를 잘 뽑으면 재수 있어 큰 풍선이 걸리기도 했고 반대로 꽝도 있었다. 꽝이 나오면 억울한 일이지만, 엿장수는 땡 잡은 거나 마찬가지다. 시골에서 귀한 풍선은 갖고 놀다 결국은 터져버렸다. 터진 풍선을 버리기가 아쉬워 그것을 입으로 빨아 작은 풍선을 만들어 놀곤 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때는 요즘 화투보다 좀 작은 모양의 패란 것이 있었다. 패에는 군인들 계급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어 그것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유행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카드 정도랄까. 그 패를 걸고 상대방 보다 유리한 별 자릿수가 나오는 걸었던 패를 따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며 패를 따는 아이가 있으면 반대로 잃은 아이도 있다 보니 놀이도 끝이 좋지는 않았다. 잃었다는 말을 우리 동네에서는 꼴았다고 표현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지만, 사행성을 조장하는 놀이라 그랬을 것이다. 자꾸 통이 커지고 판이 커져 상대방이 가진 만큼을 다 따 먹겠다고 왕창 찍어버리면 순간 희비가 갈렸다. 그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아이들도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왕창 꼴아 버린 아이의 낯은 흙빛처럼 어두워졌다. 그런 아이는 읍내에 다니는 중학교 형들에게 패를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언제 올지 모를 엿장수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 아이 기가 아주 꺾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엿장수가 가지고 다니는 상품 중 최고는 달짝지근한 엿일 것이다. 집에서 기껏해야 댓 병 짜리 큰 병이나 비료 푸대를 가져다주면 엿장수의 계산만큼 엿이 손에 주어졌다.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게 만들어진 엿도 있었지만, 엿판에 통째로 얹혀 있는 찰떡같은 엿이 있었다. 그 엿은 무디게 생긴 칼을 대고 가위로 딱딱 몇 번을 쳐대면 얇게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아이들 입에 침이 돌았다. 대다수 아이는 엿장수가 왔어도 어차피 눈 구경으로 끝나는 것이 허다했다. 매번 엿장수가 올 때마다 엿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맛있는 것을 눈앞에 두고 참는다는 것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어린아이들이란 게 인내심이 강하지를 못했다. 훔쳐먹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고 만다. 마침 엿장수 아저씨가 고물을 사러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때를 틈타 나도 아이들과 같이 엿 조각을 훔쳐먹다 정제 간으로 끌려가 어머니한테 부지깽이로 된통 맞았었다. 지금도 부지깽이가 우리 어머니의 손에 들려 내 엉덩이를 내리치는 모습이 또렷하다. 우리 어머니 왈 동네 부끄러워 못 살겠다며 나가 뒈지란다. 추운 날 대문간에서 덜덜 떨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엄마 말대로 목숨이 얼마나 질긴데 싶게 죽겠는가. 엿 먹은 입안이 텁텁해질 때야 어머니 맘이 좀 풀린 듯했다. 그것도 바로 위 형의 말 없는 눈짓으로 전해왔다. 어머니는 한동안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아랫목 이불에 덮인 복지게 속 밥그릇이 내 몫이란 것을 난 알고 있다. 뭐니 해도 따뜻한 방이 참 좋았다.
첫댓글 추억이라는 보물창고에서 꺼내서
쓰시는 글들이 참 재미있어요~
제 어릴적 모습과도 별반 차이가 없어서인지
옛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ㅎ
마지막 사명이라는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지워져가는 이름들을 가슴으로 불러보고 싶어 기억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