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 민담집> 읽기, 이번 주 모임에서는 44번째 이야기 '대부로 삼은 저승사자'와 45번째 이야기 '엄지둥이의 여행' 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난 사람은 엄혜숙, 최영미, 임서빈, 신승임, 이고영, 이진달래, 전명주, 김수민, 이은영이다.
44 '대부로 삼은 저승사자' 발제 이진달래
45 '엄지둥이의 여행' 발제 임서빈
모임 방식은 먼저 <그림 형제 민담집>에 수록된 이야기를 한명이 맡이서 낭독한다.
그 다음 발제를 맡은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정리한 글을 읽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발제자가 생각하고 정리한 글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훨씬 깊고 넓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더구나 각자의 살아온 경험이 이야기되기 때문에 더 알차고 영양가가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44 대부로 삼은 저승사자> 이야기(발제 이진달래)
* 나눈 이야기 *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고 남 목숨은 살려도 자기 목숨은 어쩔 수 없다. 지인의 죽음을 보면 죽음 앞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하느님이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했으나 남자는 깠다. 그게 맘에 든다. 하느님도 까이네~ 재미있게 읽었다. 있는 자 없는 자 차별 없이 데려간다는 말이 맘에 닿는다. 여기 교훈은 하나가 꺼져야 새 것을 켤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진리다.
왜 하느님을 거절했을까. 가난함 속에서 불공평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가치 기준은 공정함이다. 자식을 데러간 것도 공정함이다. 공정함은 어떤 것인가 그것도 주관적이다. 잘 살고 못 살고가 아니라 노력한 만큼 가져가는 것.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의 타당성 보다 불만으로 인한 주관대로 행했는데 결국 자신의 자식이 죽게 되었다.
악마는 황금과 온갖 것을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다. 솔깃하지 않고 거절한 것을 보면 가난한 남자는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아들은 욕심이 많았다. 왕의 사위까지 넘보다 불행 초래.
아버지의 생각은 인간의 유혹, 지나친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을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저승사자의 공평함을 깬 것은 대자이다.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았다.
현대의학으로 삶을 연장하는 것. 죽음처럼 오는 상황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즐겁게 살자는 생각을 한다.
저승사자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는 인도하고 쟤네들은 덮쳐서 끌고 간다.
세 가지 다 우리가 선택한 일이다. 세 번째 삶의 비중이 달라졌다. 하느님은 자기 주도적인 삶, 악마는 치사하게 삶, 저승사자는 죽음을 보면서 삶.
만일 대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와 자식 때와 다를 거다.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누굴 할까. 다르다. 나의 대부는 악마, 자식의 대부는 하느님이나 저승사자로 택할 듯.
‘진정한 사랑’(아들러)에서 부부는 같이 우물 파는 사람, 인생의 과제를 같이 풀어가는 사람이다. 진정한 사랑과 불타는 사랑은 다르다. 우울증도 많다. 욕망을 부추기는 시대이다.
욕망에 꽂힌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데 마지막 순간 헌 것에 새 것을 붙이면 된다고 하는 순간 인간으로 애쓰는 장면이 웃기다. 실소가 나온다. 그런데 욕망이 시대를 바뀌게 만든다. 욕망은 어디까지 일까. 우울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잘 도닥이면 된다. 삶의 동반자이다.
죽음은 다 똑같다. 산다는 게 별건가. 즐겁게 살다가 가는 거지. 열정, 욕망은 삶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다. 요즘 아무 생각이 없다. 내 촛불이 뭔지 물어볼 용기가 있었을까.
저승사자는 불공평하다. 죽을 놈은 안 죽고 살아야 될 사람이 죽는다. 지들 맘대로 데려간다. 모두 죽는다는 게 공평하다는 뜻인가. 난 하느님편 할래.
후견인, 그 당시 권리이자 의무. 세례명부를 통해 존재하는 방식. 교회로부터 영향이 크니까 세례로 등록하는 것이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그 당시 정신적인 아버지가 대부이다. 초기 우리 카톨릭도 그랬을 것이다.
공평, 뜻이 우리 생각과는 좀 다르다.
45 '엄지둥이의 여행' (발제 임서빈)
* 나눈 이야기 *
발제자의 한 마디 : 아들이 도우면서 “엄만 그렇지 않아. 난 자유로운 영혼이야.” 라고.
이 글은 찐한 부성이 녹아 있는 이야기이다.
‘몸은 작아도 용기는 제법이었다’ - 똘똘하고 재기발랄. 뜨개바늘로 검을 만들어 주며 용기를 불어 넣는 아빠.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하다. 도제로 들어가서 음식타박을 하고 입맛에 맞지 않아 차고 나온 점을 보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인물. 애는 잘 크고 있으니 나나 잘하자. 곁쇠가 뭘까? 열쇠가 없을 때 대신 쓰는 열쇠이다.
옳은 얘기다 아들아, 이런 말하는 부모가 옳은 부모다. 걱정되고 불안했지만 과감히 믿고 내보내 주었다. 든든한 빽이다. 아들이 크면서 아빠를 더 좋아해서 약 오르고 샘났는데 얘를 위해서 뭘 줘도 아깝지 않다는 글 속 아버지를 보며 난 다 줬나? 생각해봤다.
엄마 ‘네가 직접 보렴’ 이 말도 좋았다. 작은 이가 보는 세상은 더 섬세하다. 우리가 못보는 영역까지 다 본다.
길을 떠나고 자기 왕국 만들고 돌아오지 않는 게 대부분인데 여기에서는 돌아온다. 부모가 그랬기에 돌아올 수 있었다. 주저 앉히려 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같이 살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다. 내가 작가방 만든다 했을 때에 세 가지 반응이 있었다. 첫째는 “일 저질르네”하며 말리는 사람들과 둘째는 “니 맘대로 해” 했던 반응, 셋째는 “왜 하려는데? 그래 그거 필요해. 근데 ~하니까 생각해봐” 결국은 반대였다. 그런데 대응 방식이 달랐다. 일단 들어주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아들 둘 키우며 거친 말하면? 손님처럼 존중하며 물러서는 게 필요하다. 무심하기 거리두기
아이들은 스스로 독립하도록 놓아주는 부모가 되어야
나부터 시작하기. 아들과 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보면 불편하다.
아이들이 적어서 더 그렇다. 예전엔 신경 쓸 틈이 없었지. 어느날 아버지가 “우산 가져갔니?” 하고 전화하셨을 때 심심하시구나 하고 생각했다. 애정이 있더라도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다. 작은(어린) 아이가 커도 작은(어린) 아이처럼 생각한다.
배타적인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거부감이 든다. 나는 낯선 것에 대한 궁금증이 많고 호기심이 많은데 한국인 민박은 배타적이어서 싫었다. 벽을 치고 산다. 오픈마인드가 아니었던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기억.
자녀를 키울 때 내가 단속할 때 들었던 얘기 : 애태우지 말고 해줄거면 그냥 해줘. 모든 결정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책임도 아이들이 지도록 해야 한다.
엄마 아빠는 나를 강하게 지키는 것이 맞다. 이거 굉장한 육아교육이야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