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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게이볼그
아래 내용은 1차 고당 전쟁에 관해서 삼국사기 내용을 발췌하여 제 나름대로 상황을 해석해 본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텍스트는 임용한 교수의 "전쟁과 역사-삼국편"으로 잡았고, 여기에 나름대로의 생각과 덧붙이기를 했습니다.
뭐, 그렇긴 해도 제 레벨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훨씬 더 깊이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나름대로 글을 써 보았는데 보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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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당주(唐主)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자사 정천도는 이미 치사하였는데, 당주는 그가 일찍이 수양제를 따라서 고구려를 정벌하였기 때문에 행재소에 오도록 불러 물었다. 대답하여 이르기를 "요동은 길이 멀어 양곡을 수송하기가 곤란하고 동이는 수성을 잘하여 갑자기 항복시킬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더니 당주가 이르기를 "금일은 수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공은 (나의 의견에) 좇기만 하라"고 하였다.
형부상서 장량으로써 평양도행군대총관을 삼아서 강, 회, 영, 협의 군사 4만명을 거느리게 하고, 장안과 낙양에서 군사 3,000명을 모집하였으며, 전함 500척은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좌위솔 이세적으로써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아 보병 및 기병 6만 명과 난, 하 2주의 항복한 호병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니, 양군은 합세하여 유주에 모이게 하였다. 행군총관 강행본, 소감, 구행엄을 보내어서 먼저 군사들을 독려하여 안라산에서 운제와 충차를 만들게 하였다.
이 때에 원근의 용사가 응모하고...중략...숙사공비의 구는 태반을 감하고, 제군 및 신라, 백제, 해, 거란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 이를 치게했다.
4년 정월에 이세적이 유주에 이르렀다. 3월에 당주가 정주에 이르러 시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가 네 번 군사를 출동하였으니 취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정함은 중국을 위하여 자제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를 씻으려 할 뿐이다.
(말로만...)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아직 늙지 아니할 때에 사대부의 여력을 빌어 이를 취하려한다"고 하였다.
당주가 정주를 출발하며...중략...이세적 군사가 유성을 떠나 크게 형세를 벌이고, 회원진에 나오는 것처럼 하여 군사를 숨겨 북으로 용도(甬道-담장을 쌓아 보이지 않게 만든길)로 가서 불의에 나오려고 하였다.
4월에 이세적이 통정(지금의 신민촌 부근)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니 우리 성읍이 크게 놀라 모두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부대총관인 강화왕 도종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는데, 절충도위 조삼량이 10여기를 이끌고 성문에 핍박하니 성 안에서 놀라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영주도독 장검이 호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으며,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가서 아병을 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화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병 1(2)만 명과 양곡 10만 석을 노획하고 그 땅을 개주로 하였다.>>>>
===>이 시점에서 당군의 전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당군 선봉대를 이끈 이세적은 회원진에서, 즉 요동 방어선의 중간 부분을 뚫으려는 척 하며, 북쪽으로 우회 부대를 편성하여 현도성-신성-요동성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타고 고구려군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공세는 꽤 성공적이었던 듯 합니다.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아시다시피, 큰 중앙 성채들 주위에 작은 요새들이 분산되어 있고, 어느 한쪽이 공격받으면 네트워크를 타고 다른 성의 병력이 지원하러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 성이 공격받으면 작은 성의 병력이 적의 보급로를 끊고 버티는 사이, 다른 성에서 지원군이 돌아와 적을 쳐 물리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세적군이 통정진에서 나오는 척 하고 전혀 다른 북쪽에서 내려오며, 도종이 수 천기의 기병을 이끌고 교란 작전을 펼치자 고구려군의 전황 판단에 혼란이 있었던 듯 합니다.
(혼란이...)
성마다 모두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기만 했고, 신성 같은 북방 방어의 중심지도 겨우 10여명의 기병이 무력시위를 하는데도-아마 본대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공격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고구려의 산성 방어라인의 위력이 절감되었고 현도성과 개모성이 떨어지는 피해를 입습니다. 물론 고구려의 방어선은 어느 한쪽이 망가진다고해서 방어선을 뚫리는 개념이 아니라, 한쪽이 돌파되면 다시 다른 한쪽에서 적을 막고 보급선을 끊기 때문에 쉽게 돌파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옛적 수와 싸울 때는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성들이 점령되는 것을 보면 이 때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던 듯 합니다. 건안성이 기록은 좀 의문이긴 한데, 아마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을 이끌고 방어선이 교란된 틈을 타서 흔들기를 시도해 본게 아닌가 하군요. 후에 건안성의 병력이 약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패배가 영향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현절하여 오직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는데, 정명진이 밤에 군사를 이끌고 오자 부총관 왕대도가 먼저 올랐다. 5월에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함몰했다. 이세적이 진군하여 요동성 아래에 이르고 당주가 요택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00여리나 되어 인마가 통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 염립덕이 흙을 펴고 다리를 만들어서 행군을 멈추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넜다.>>>>
====>비사성의 함락은 고구려로서도 큰 손실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비사성은 요동반도의 끄트머리에 튀어나와있는 성채로 고구려 수군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비사성이 점령되면서 당의 수군은 평양으로 갈 수 있는 중간 기점을 얻은 셈입니다. 한편, 당태종의 군대는 요택의 뻘밭에서 시간을 지체했지만, 어쨌든 이를 건너는데 성공합니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보내서 요동을 구원하니 강화왕 도종이 4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군중이 모두 중과가 현절하므로 심구와 고루에 의지하여 당주의 거가가 이르는 것을 기다림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었으나...도위 마문거가...말을 채찍질하여 분격하고 향하는 곳마다 모두 풍미하여 중심이 점점 안정되었다.
이윽고 합군하자 행군총관 장군예가 퇴주하여 당의 군사가 패배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아군의 진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효기병 수천 명으로써 이를 치니,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도와 아군이 대패하여 죽는 자가 1,000여명이었다. 당주가...강화왕 도종의 노고를 치하하고, 마문거를 중랑장에 초배하였으며 장군예를 베어 죽였다. 당주는 친히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이 흙을 져다 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그는 특히 무거운 것을 나누어서 마상에서 이를 가져다주니 종관들이 다투어서 흙을 져다가 성 아래에 두었다.>>>>
====>이쯤 되면 고구려도 당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신성과 국내성의 병사 4만 명을 보내어 일단 도종의 기병을 쫓아낸 후, 성 안의 병사와 합동하여 당군을 교란하고 성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었던 듯 합니다. 여기서 행군총관 장군예가 등장하는데, 흔히 1군이 1만명이라고 해도 도종 군은 4천 밖에 없는데 행군총관X1만 병력으로 당군을 추산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닌 듯 싶군요. 아마 당군이 정예병을 선발해서 왔으므로 병력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듯 싶습니다. 어쨌든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리 당군의 장수들이 경험이 많고 뛰어나다 해도 고구려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유행성동맹의 모 장군님도 병력이 여섯 배만 있으면 반드시 이겨 보이겠다고 했지요-ㅅ- 어찌되었건 군이 무너져 패주하는데, 이 때에 당군의 강점이 발휘됩니다. 경험많은 병사들은 초전에서 밀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경험이 많다면 이럴 때 대처법을 알고 있는겝니다.)
도종의 당군은 일단 고지대에 올라 군을 정돈한 뒤, 추격, 혹은 적의 물자를 약탈하느라 흐트러진 고구려군에게 역습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대열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당하는 역습을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도종 군이 고구려군에게 돌격하는 사이, 하필 이 시점에서 이세적이 등장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합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동시에 당군의 전투력도 뛰어났던 듯 합니다.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로 측면 공격을 받은 꼴이 된 고구려군이 무너졌고, 전사자가 1천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대전은 전사자만으로 전황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전사자가 1천에 이르렀다고 해도, 당군의 기병이 마갑을 줄이고 기동성을 높였기 때문에 추격전도 거셌을 것입니다. 죽은자 외에도 부상자, 포로도 있을 것이고 군대가 무너지자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뿔뿔이 달아나 통제 불능이 된 병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1천 명이 죽었는데도 후에 이 군대의 기록이 없고 당군이 요동성을 공격하는데 큰 방해를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사자는 적지만 포로나 이탈자 비율이 높아 전투가 불가능할 피해를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적 앞에서 등을 보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분 앞에서 우홋, 멋진 등짝을 보이는 아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거군요-_-;;)
특히 신성과 국내성 연합군이라는 사실도 주목해볼만 한데, 아마 이 연합군 체제라는 것도 고구려의 단결력을 떨어트렸을 듯 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전투에서 당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요동성은 이세적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어 버립니다.
<<<<이세적이 밤낮을 쉬지 않고 요동성을 공격하기 12일에 당주가 정병을 이끌고 합세하여 성을 수백겹으로 둘러싸니 북과 고함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중략...적이 포차를 불여놓고 대석을 날려 300보를 넘으니 맞는 곳마다 곧 무너졌다. 우리 군사는 나무를 쌓아 누를 만들고 그물을 얽어서 쳤으나 막을 수 없게 되자 충거로 성 위의 집을 쳐서 부수었다. 이 때에 백제가 금휴개를 바쳤고, ...중략...남풍이 급히 불자 당주가 날랜 군사를 보내어 장대 끝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니 불이 성중에 연소하였으며 장사가 지휘하여 성에 오르니 우리 군사가 역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자가 1만 여명이고 붙잡힌 승병(정예병)이 만여명, 남녀가 4만명, 양곡이 50만석이었다. 그 성을 요주라 하였다.>>>>
====>요동성은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정문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중심지입니다. 물론 이 성은 수대 부터 숱한 공격을 받았지만, 평지성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무너진 적이 없는 성입니다. 고구려군은 포위되었음에도 강력하게 저항하여 이세적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까지 유리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선 포차의 사정거리가 어지간한 활의 사정거리보다 길었고, 이 돌덩이리들은 성벽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위에 설치된 나무로 된 누각이나 건물, 기타 방어구들을 부수는데도 일조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의 고구려 용사들은 버텨내고 있었습니다만, 당군이 누각에 불을 지르자 남풍을 타고 불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누각에 불을 지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불을 지르기 위해서는 누각에 접근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고구려군의 화살비를 막아내야 하는데, 어찌되었건 당군의 공성전도 매우 위력적이었던 듯 합니다. 누각에 불이 붙자 불이 성 내부로 번졌습니다. 이 때에 타죽은 자가 1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엄청난 피해였을겁니다. 거기다 성 내부에 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는 병사들이 교대하기 어렵고, 필요한 곳에 원할하게 병사가 투입되지 못한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구려 병사들은 방패를 세워 적의 공격을 막고, 그 아래로 창을 방어 찧듯 내질러가며 끝까지 저항했다고 합니다만, 결국 성의 방어진이 무너지고 당군이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12일간의 치열한 혈투끝에 요동성은 함락되었으며, 고구려는 막대한 물자 손실은 물론 요동 방어선의 중심지가 붕괴되어 버리는 전략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물론 요동 방어선의 특성상, 성이 몇개 함락된다고 뚫리지는 않습니다만 고구려군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겁니다.
<<<<이세적이 진군하여 백암성의 서남을 공격하고 당주가 그 서북에 임하였는데, 성주 손대음이 몰래 복심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에 임하여 도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삼겠다하고 "내가 항복을 원하지만 성중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당주가 당기를 그 사자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하려거든 마땅히 이것을 성 위에 세우라"고 하였다. 대음이 기를 세우니 성중 사람은 당병이 이미 성에 오른줄 알고 모두 이에 따랐다. 당주가 요동성을 이기자 백암성이 항복을 청하였다가 이윽고 후회하였다. 당주가 그 반복함을 노하여 군중에 명령하여 이르기를 "성을 취하면 마땅히 모든 인민과 물자로써 전사에게 상을 주리라"고 하였다.>>>>
====>백암성 전투 기록 서술이 좀 애매하게 되어있는데,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초에 요동이 함락될 적에 벌음이 항복을 빌고 나서 다시 후회하자 태종은 그의 반함에 분노하여 성 안의 사람과 물건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다가 손벌음이 항복하여 이를 취소하자 이 때 이적-이세적-이...후략)]] 즉 손벌음은 항복을 했다가, 성 내부의 반발이 심하자 이를 번복했다가, 당태종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자 결국 항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좀 더 다음 기록을 살펴 봅시다.
<<<<이세적이 당주가 장차 그 항복을 받으려는 곳을 보고 갑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사졸이 다투어 시석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보지 않는 것은 노획을 탐내는 때문이온데,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에 어찌하여 그 항복을 받아서 전사의 마음을 외롭게 합니까" 하였다. 당주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지만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할 바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는 내가 고물(庫物)로써 상을 줄 것이니 장군은 이 한 성을 속죄하여 주기를 바란다"하니 세적이 물러갔다.
성중의 남녀 만 여명을 얻어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은 후, 이어 음식을 주며 80세 이상에게는 차등을 두어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와 있는 자도 모두 위로해서 양식과 무기를 주어 마음대로 가게하였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내용은 "다른 성"의 병사들입니다. 원래 고구려의 방어선은 그 성과 인근의 군사들이 전투에 임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백암성에서 "다른 성"의 병사들이 나오는 걸까요? 이는 당시 고구려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대신 100여명-일본서기에는 180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철권의 통치자)
그러나 연개소문이 기존 체제를 완전히 뒤흔들고 올라섰으나 자신의 세력도 강하지 못했습니다. 즉, 연개소문은 자신의 반대파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막상 보장왕만 해도 그렇습니다. 김춘추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빌려 보장왕을 농락하고 달아났지만, 막상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선도해입니다. 즉, 보장왕은 연개소문을 반대하는 세력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다만 연개소문의 강력한 힘에 밀려있을 뿐이지요.
왕부터가 이런데 휘하 귀족 세력은 어떻겠습니까? 그 귀족들과 사적으로 연결 되어 있던 지방 세력들은? 연개소문은 이들까지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시성주지요. 아마 손벌음도 안시성주처럼 연개소문에게 반대하는 세력가 중 한 명이었던 듯 합니다. 보시다시피, 손벌음은 애초부터 항복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휘하 장수들은 반발하고 있구요. 이는 아마 "다른 성"에서 온 지원군이 반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다른 성" 병사들이 손벌음에게 반발할 정도로 세력이 컸던 걸까요? 아마 연개소문은 요동의 불안한 방어선상에 다른 병사들을 섞어서 뿌려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시성이야 결국 함락에 실패했으니 그런다쳐도, 백암성 같은 자신의 반대파가 성주로 있는 성에는 견제책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성의 장수와 무사들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실제 백암성은 이들의 지휘로 꽤나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다시 구당서를 보겠습니다.
[진영을 백암성에 베풀고 성을 공격하였다.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노시를 맞자, 태종은 친히 피를 빨아주었다. 장사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바짝 닿아 있는데다 사면이 험하고 가파랐다. 이(세)적이 충차로 때려 부수니, 돌과 화살이 성중에서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사마 외에도 계필하력등도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손벌음의 항복으로 백암성이 떨어지고, 당군은 남녀 1만 명과 병사 2,400명을 손에 넣고 이곳을 암주로 개칭합니다.
아마 이 병사들은 친 연개소문파라고 봐야 옳을 듯합니다. 또한 손벌음이 반 연개소문파였을 확률은 다음 기사에서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는데, 그 성사가 장사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쳤다. 당주는 그의 의로움을 어여삐 여겨 비단 5필을 주고, 장사를 위하여 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라 하고 손대음으로 자사를 삼았다. 처음 막리지가 가시성 사람 700명을 보내어 개모성에 진수케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를 모두 노획하니, 그들이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당주가 말하기를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으니 너희가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히ㅡ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자 한 집안을 멸함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하고 모두 곡식을 주어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하였다.>>>
(자신의 크고 아름다운 자비심 있음을 과시하려는 시도)
====>보시다시피, 요동성 내부에 뭔가 분란이 있었습니다. 왜 부하가 상관을 살해할 정도로 치명적인 분란이 있었을까요? 단순한 사적 관계 였을까요? 성사가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쳤을 정도로? 요동성은 요동 방어선의 중심입니다. 연개소문은 이 성에 신경써서 정예 병사를 배치하기까지--위에서 보시다시피, 그 병사들은 정말로 잘 싸웠습니다.--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성 내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대충 이런 상황이지 않았나 싶군요.
"그보다 저 밖의 당군을 봐줘. 저놈을 어떻게 생각해?" "크고...아름답습니다." "...항복 하지 않겠는가." "푹!" "(칼이) 드...들어갔습니다!" 여기에 당태종은 죽은 장사의 시신을 정중하게 대접했을 정도였으니, 아마 그 장사는 당군에게 항복을 주장하다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처자는 하필 손벌음의 백암성으로 달아났구요. 뭔가 커넥션이 있지 않을까요? 연개소문의 반대파들의 내분 말입니다. 단순히 이것이 이쪽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전투 초에 점령된 개모성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가시성 사람들 700명이 그들입니다. 아마 연개소문은 자신에게 반발이 심한 가시성 사람들 중 중요한 사람들을 뽑아 자기편 성채인 개모성으로 파견 한 듯 합니다. 그래야 가시성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가시성에는 자기편 병사들을 섞어놓았을 겁니다. 보시면 아시다시피, 가시성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연개소문에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종은 그들이 따르면 연개소문이 그 처자를 죽이려할 것이라고까지 하지요.
물론 태종이 정말로 마음씨가 비단결같이 보드랍고 고운 우홋 좋은 남자는 아닙니다. 그는 철저한 계산에 의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거지요. 여기서 정리를 해볼까요? 고구려 내부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심각한 분열이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당태종은 죽은 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여러 곳에서 배신이나 유사한 징후가 엿보입니다. 당태종의 행동은 이렇게 하여 고구려 내부의 분열을 더더욱 야기시키겠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백암성에서 병사들을 놓아준 행위도 비슷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온화함과 자비심 많음을 강조하고, 국내 통합에 실패하고 자비심 업ㅂ어 뵈는 연개소문과 대조하려는 것이지요. 이런 행동 때문에 요동 방어선의 여러 성채들이 크게 뒤흔들린 듯 합니다. 백암성의 항복으로 당은 요동 방어선 중심지의 위협을 제거했습니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면 큰 성은 안시성, 건안성, 오골성 등지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물론 등 뒤에서 지그시 바라보는 신성의 존재가 부담스럽기는 합니다만, 결코 상황은 고구려군에게도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당주가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누살 고연수와 남부 누살 고혜진이 아군과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려 하였다. 당주가 시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연수에게 방책이 있다면 세 가지가 있다. 군사를 이끌고 직전하여 안시성과 연결하여 누를 만들고, 고산의 험한 곳에 의거하여 성중의 양식을 먹고 말갈병을 놓아 우리의 우마를 노략하면 이를쳐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려면 이료가 장애가 되어 앉아서 오군을 괴롭힐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오, 성중의 병을 빼어 밤에 함께 도망함은 중책이다. 지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움은 하책이다. 경들은 보라. 저들이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포로가 됨은 내 눈안에 있다"하였다.
이 때에 대로 고정의는 연로하고 사물에 익숙하여 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당주)은 안로 군웅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융적을 정복하고, 홀로 서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에 출중한 사람이다.(*제가 가진 이병도 해석본에는 ~입니다,를 씁니다만 아마 고정의가 고연수보다 상급자였다는 말은 맞을 듯 하여 높임말은 바꿨습니다.) 우리로서 취할 계략은 군사를 멈추어 싸우지 않고 시일을 오래 끌면서 기병(奇兵)을 분견하여 그 양도를 끊는다면 양식이 떨어져 적은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였으나 연수는 듣지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장 나아가니 안시성과 40리 거리에 있었다.
당주는 그가 머뭇거리고 오지 아니할까 두려워하여 대장군 아사나두이를 명하여 돌궐의 기병 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유도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당군이 거짓 달아나므로 연수가 어울리기 쉽다하고 (당병이 패주함을 따라) 다투어 진격하여 안시성 동남 8리 되는 곳에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평양이 위험합니다. 연개소문은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맡겨 북쪽으로 올려보냅니다. 물론 고연수와 고혜진의 등급이 욕살이므로 이 대군을 지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북부와 남부의 광역 지방관인 욕살이라면, 아마 5부 중 남, 북부의 군대의 상당수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고연수와 고혜진과 연개소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고정의가 진짜 그 군대의 총사령관일까요? 그건 모릅니다. 고정의가 등급이 높지만, 역사상 얼굴마담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고정의의 등급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대로, 신당서에는 대대로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연로한"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역사상 노익장을 발휘한 사람은 많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아마 고연수가 나이가 들어 실제 군사를 지휘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반대파 대신들을 살해했지만 완전히 정국을 쥐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15만 대군을 동원하려면 연개소문 개인 세력으로는 도무지 무리입니다. 당연히 반대파의 귀족들도 어떻게든 끌어 모아야 되는데, 이 와중에 고정의가 뽑히지 않았을까요?
고정의가 진짜 연개소문파인지 어쩐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명목상으로 반 연개소문파의 불만을 낮추기 위한 총사령관이고, 실권 보유자는 고연수와 고혜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모든 것은 추정일 뿐이고, 정말로 고정의가 사령관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고정의의 기록이 전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제 전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고정의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충고를 주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챕터를 서술하면서 계속하겠습니다.
<<<<당주가 제장을 불러 계획을 물었다. 장손무기가 대답하기를"신이 들으니 적과 싸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졸의 정을 살핀다고 합니다...이는 필승의 병입니다. 폐하께서...기계로 승리를 거두셨음은 모두 위로 성모를 품문하여 제장이 성산을 받들 뿐이었으니, 오늘 일은 폐하의 지휘를 바랍니다."하였다. 당주가 웃으며 말하기를 "제공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제공을 위하여 헤아려 보리라"하고 이에 무기 등과 더불어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고, 산천 형세의 복병할 수 있는 곳과 출입할 수 있는 곳을 살폈다.
(역시 태종의 계획)
아군은 말갈과 합병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였다. 당주가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안색이 있었다.--이 내용은 당서 시리즈에는 없고 삼국사기에만 있습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서 왕사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데 신에게 정졸 5,000명을 주시어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무리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당주가 응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이르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강신이 왕을 시해한 고로 와서 문죄하는 것이요, 교전하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이곳에 들어와서 추속이 보급되지 않는 것 때문에 수성(數城)을 취하였으나 그대 나라가 신례를 닦으면 잃은 것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하였다. 연수가 이를 믿고 다시는 방비를 하지 않았다. 당주가 밤에 문무신을 불러 일을 계획하였는데,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기병 15,000명을 거느리고 서령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은 정병 11,000명을 거느리고 기병이 되어 산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찌르게 하고, 당주는 스스로 보기병 4,000명을 거느리고 고각을 끼고 기치를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당주게 제군에게 명하여 고각의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가서 분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해서 항복을 받는 천막을 조당 옆에 치게 하였다.>>>>
====>삼국사기로 보자면, 안시성 앞으로 몰려와 전투를 벌인쪽의 고구려군은 15만이 맞는 듯 합니다.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서는 15만 대군이 40리에 걸쳐 당군을 역포위 했다고 했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저도 민족백서?d이 예전에 거론했던 문제제기가 맞다고 봅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고구려의 병력이 당을 포위했다기 보다는 진을 친 장면이라고 봅니다. 아울러 전당문에 기록된 행군총관의 수-장손무기가 24고 이세적이 14였던가요?-와 지위의 고하를 들어 장손무기의 군사가 이세적의 군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 설명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강력한 고구려군 등장!)
다음에 전투 진행과정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세적의 역할은 방어군입니다. 즉 포위망이 완성되기 까지 고구려의 공세를 버텨내야 한다는거지요.
(!!)
여기에 비해 장손무기와 도종의 군대는 우회 기동하여 적의 후미와 측면을 노린는 군대입니다. 어느쪽이 더 수가 많아야 한다면, 당연히 이세적군이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당태종도 4,000명 밖에 거느리지 않았는데 지휘로만 군사의 수를 파악하는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당군의 숫자가 여기에 보이는 3만명 남짓일리는 없습니다. 실제 당군에 기타 장군들도 여러 행군 총관을 거느리고 전투에 임하는데, 기본적으로 당군의 편제는 이정-당태종이 가장 신임하던 전략가-이 개발했다는 육화진입니다.
즉 중군이 있고, 그 중군을 남은 6군이 둘러싸고 보호하는 형태입니다. 거기에 이후 전황을 보니 당군은 기타 부대가 존재했다고 보는게 맞을 듯 합니다. 만약 당군이 육화진을 펴고, 한 부대가 이세적처럼 1만 5천 명이었다면 당군의 수는 약 9만명이 되고, 좀 더 적어서 1만 명이라고 하면 7만 명 정도 되니 실제 주필산 전투에 참가했던 당군은 이 정도 숫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날 밤에 유성이 연수의 군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연수 등은 홀로 이세적군이 적음을 보고 군사에게 명하여 싸우려 하였다. 당주는 무기편 군사의 먼지가 일어남을 보고, 고각을 불고 기치를 들게 하니, 제군이 북치고 고함지르며 일제히 나가는지라 연수등이 두려워서 군사를 나누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그 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때에 뇌전이 있었다. 용문 사람 설인귀가 기복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진에 깊이 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맞서는 자가 없어 아군이 뒤흔들렸다. 대군이 이에 덮쳐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져 사자가 3만여 명이었다. 당주가 인귀를 그 용전을 바라보고 유격장군으로 삼았다. 연수 등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을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하므로, 당주가 제군에게 명하여 이를 포위케 하고 장손무기는 교량을 모두 거두어 그 귀로를 끊었다.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여 군문에 들어와 배복하고 명을 청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얼마일까요? 포로 36,800명에 전사자 30,000이라는데, 실제 구당서에는 10,000명, 신당서에는 20,000명의 전사자가 확인되므로 실제 고구려군의 전사자는 최초 기록인 구당서를 신뢰하여 10,000명 수준이 가장 신빙성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실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구당서의 기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연수가 이(세)적의 군사만 보고 출전하려 하였다. 태종은 멀리 무기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을 동시에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그 진영이 이미 어지러웠다. 이(세)적이 보병 1만명에게 장창을 들려 공격하니 연수의 무리들은 패전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놓아 그 후미를 치고 태종이 또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적이 크게 무너져 참수가 만여급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의 "확인된 손실"이 46,800명...즉 5만명 가량의 고구려군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당시 전쟁에 무너져 달아난 병사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다는 군사를 당군이 모조리 죽일 수는 없을겁니다. 아직 고연수의 주군이 진을 유지하고 있는데, 끝까지 추살하기 위해 진을 흩었다가는 역습당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이를 보면 고구려군의 전력 손실은 더더욱 늘어날 겁니다. 7~8만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거기에 고대던 중세던 15만 대군이 천상 전투병이었을리는 없습니다. 아마 이 중에는 상당한 수의 치중대나 기타 비전투원이 섞여 있었을테지요. 그렇다면 실제 전투 가능한 고구려 인원은 더 줄어들고, 선봉대로 적과 교전한 부대는 그 중에서도 강력한 정예였을테니 이렇게 되면 고연수는 고구려 전력의 최소 절반 이상을 말아먹었다는 소리가 됩니다. 단순히 고연수가 선봉장이라고 보기에는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봅니다. 물론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김부식씨도 이쪽 기록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나중에 태종이 병상에서 밥숟갈 놓은 뒤 평하면서 이런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가 아니라)
[유공권의 소설에 말하기를 '주필산의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치었는데,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하였으며, 또 '6군은 고구려의 승리가 되어 거의 떨치지 못하였고, 염탐하는 자가 알리기를 영공(이세적)이 거느린 흑기(부대)가 포위되었다고 하니, 당주가 크게 두려워하였다'하였다. 비록 스스로 빠져 나왔으나 위험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구당서 및 사마공의 자치통감에는 이를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휘피한 것이 아닌가.]
저도 이 이야기가 맞다고 봅니다. 일단 이세적의 부대가 제압된 것은, 위에서 보시다시피 고구려 군대의 주력이 들이치자 이세적군이 그 강력한 공세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밀려버린 것을 뜻합니다. 후에 말갈병 3,300명을 파묻어 죽이면서 감히 천자의 본진을 위협한 죄를 묻는데, 이는 적어도 이세적의 부대가 크게 위축되었거나 일부가 무너졌기 때문에 말갈이 우회기동 하여 중군을 위협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게 하다 봅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날 고구려의 공세나 수준은 결코 약하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여기에 거점군이 이 정도로 밀려버렸는데 남은 후위군의 우회기동과 중군 4,000명으로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아마 남은 당군의 후군이나, 육합진을 쳤다면 기타 군대가 동시에 고구려의 측면을 들이치자 고구려군이 무너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를 잡히면 위험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용맹스럽게 싸웠지만 끝내 당군의 전술에 밀려 붕괴됩니다. 이 전투의 중요성에서는 당태종이 직접 하늘에 감사 드린것을 보면-물론 충분한 쇼맨십도 있었겠지만-, 실제 전황도 당군에게 위협적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날 패배는 고구려군에게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주가 누살 이하의 관장(官長) 3,500명을 가려내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인 3,300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노획한 말이 5만필, 소가 5만두, 명광개가 만 벌, 기타 기계(器械-기는 갑주, 계는 창,극,궁,모등을 뜻한다고 합니다.)가 이와 비슷하였다. 당주가 머물렀던 산의 이름을 고쳐 주필산이라 하고, 고연수로써 홍려경을, 고혜진으로 사농경을 삼았다.>>>>
====>이 이야기에 대해 고구려군 3만 명이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고 하는데, 으음...전 조금 무리라고 봅니다. 운동장에서 애들 줄서는걸 보시면 완전히 안구에 쓰나미 카오습니다. 물론 군대를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학교 애들보다야 훨씬 더 빠릿빠릿하게 군기가 잡혀있을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휘관이 없이 병사들보고 알아서 줄서라고 해도 지휘관이 있는것 처럼 빨리 되지는 않겠죠? 적어도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수뇌부들이 사로잡힌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포위망이 뚫렸을 때 고구려군 3만명은 "하급 지휘관"들이 주도로 탈출했음을 뜻합니다. 아니, 하급 지휘관이 남아 있었을까요? 관장, 즉 군대의 지휘관으로 1/10입니다. 제가 알기로 현대에서도 소대가 30~50명인데, 거의 소대장까지 잡아들였다는 뜻이군요. 로마식으로 쳐도, 대대장이나 군단장은 물론 백인대장도 싸그리 잡혀갔다는 뜻입니다......저기요...이 상황에서 탈출이 가능합니까?
(가능하단거냐! 로젠 특전대!)
좀 더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하나 소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나카옹의 은하영웅전설에서 버밀리온 성계 전투 말입니다. 그 초반에 라인하르트가 포도주가 어쩌구 식탁보가 어쩌구 하는 그 안구에 쓰나미 밀려오는 말도 안되는 전술 말고, 양웬리가 포위했다가 풀어주는 것 말입니다. 물론 안쪽의 라인하르트와 바깥쪽의 뮐러 부대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서 우당탕 충돌 안습이 벌어졌다고 해도, 사병만 있는 고구려군이라고 나을게 있겠습니까-_-;; 고구려군이 스파르타군처럼 개개인이 전술적 사고를 이해하고 있는 군대도 아니고 말이지요. 여기에 관장 3,500명이면 수뇌부는 물론이고 장군, 무사, 기타 귀족들도 상당수가 잡혀갔다는 뜻이됩니다. 고대전에서 특히 이들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쓰러지면, 아래의 병사들의 전술적 능력이나 운용의 폭은 줄어들고, 그대로 부대 자체가 해체되는 일도 많습니다. 즉, 무사가 부족하면 군대를 편성하지 못하는겁니다. 삼국지 할 때 성에 병사 10만이 있는데 무력 50짜리 장군 둘만 딸랑 있을 때의 안습 상황을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_-
안그래도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고대의 무사나 장군들은 국가에 의한 관료로서 선발되는 숫자도 있었겠지만, 귀족들의 사병과, 거기에서 편성된, 즉 귀족과 사적인 충성관계로 이어진 무사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이런 무사와 장군들의 존재는 오히려 군대 내부에 반란의 씨앗이 되는겁니다.
아마 이들은 사표쓰거나 멀리 한직으로 좌천되었겠지요. 안그래도 고구려에는 정예 무사와 장군들의 수가 부족한 시기에, 그나마도 뺏어가고 남은 군대를 놓아주는 것은 사실상 전투 부대 구성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남은 군사가 평양성으로 가서 뭐라고 중얼거릴까요? "태종 ?O아 조낸 마음씨 좋다" "역시 대인배는 다른거삼"수준이겠죠? 태종이 여태껏 마음씨 좋은 척 왱알왱알해댄 것도 이런걸 위한겁니다. 만약 평양성이 고립되었을 때 이 부대가 들고 일어날지, 적어도 성 내부를 분열시킬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고구려에게 유리한 방향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여기에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으면, 구당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국이 크게 놀라서 후황성 및 은성이 저절로 함락되니, 수백리에 인가의 연기가 끊겼다." 적어도, 함락되지 않은 성을 줏어먹었다고 뻥칠리는 없겠지요. 여기에 노획한 물품의 수도 단순히 선봉대로 보기에는 많습니다. 기계와 명광개는 그런다 쳐도, 선봉대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소 5만두를 끌고 한판 붙으러 올까요? 말 5만(구당서에는 3만)필은 어떨까요.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사실상 말갈군) 20만이 안습 되었을 때 얻은 마필이 3만 필이었다는걸 상기해 봅시다.
<<<<당주가 백암성을 항복받자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맹이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불복하므로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맡겼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만일 불의에 나아가 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대가 먼저 건안을 치는 것이 좋겠다. 건안이 함락되면 안시는 내 복중에 있는 것이니 이는 병법상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하자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은 남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으며, 우리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인이 우리 양도를 끊으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진군하여 건안을 취할 것입니다"하였다. 당주가 이르되 "그대를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책략을 쓰지 않으리요. 내일을 그리치지 말라"하였다. 세적이 드디어 안시를 쳤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당주의 기치를 바라보고 곧 성 위에 올라서 북치고 소리지르니 당주가 노하였다. 세적이 청하기를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자는 모두 구덩이에 넣어 죽이자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공격하기를 오래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당주에게 청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안시성 사람들은 그 집을 돌보고 아끼어 스스로 싸우니 갑자기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고구려의 10여만 명의 군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궤패하여 나라 사람의 담이 꺾이었는데, 오골성의 누살은 늙어서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사를 여기에 옮겨 아침에 이르면 저녁에는 이길 것입니다. 그 나머지 통로에 있는 소성은 당의 군세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분궤할 것이니 연후에 그 자량을 거두고 고행하여 나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반드시 평양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도 또한 말하기를 "장량의 군사가 사성(비사성)에 있으니 이를 부르면 2일 이면 올 것입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틈타서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수를 넘어 평양을 직취함은 이 거사에 있습니다"하였다. 당주가 이를 따르려하자, 홀로 장손무기가 이르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과 다르니 위험을 무릅쓰고 향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이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니 만일 오골성을 취한 후에 장구하여 나아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하니 당주가 중지하였다.>>>>
(즉, 애니가 끝나고 토사구팽 당한다거나)
하다못해 성 안의 반대파와 고연수 군대 내부의 반 연개소문파와 커넥션이 형성된다거나...안시성주가 물론 당태종과 끝까지 싸워 고구려를 지켜낸 영웅입니다만, 실제 영웅 중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헌신적이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괜히 이순신장군이 존경 받는게 아닙니다. 실제 상당수의 영웅은 충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고연수가 안시성주에게 등을 믿고 맏기기 어려울겁니다. 나아가, 군 내부의 반발도 잠재워야 합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가 어째서 알프 아르슬란이 유리한 평화조건을 제시했음에도 강공을 선택했는지 생각해봅시다. 하다 못해 밑에서 헨리씨가 게클렝의 조언을 무시하고 흑태자에게 개돌한 이유도 생각해 봅시다. 아마 군 내부의 반대파는 시간을 오래 끌수록 껄끄러운 존재입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탈주자가 생기거나...오래 갈수록 고구려로서도 이들의 존재는 부담스러워집니다.
(부담스럽단 말이다!)
고연수는 이것을 막기 위해 적과 강공을 선택했다고 보여집니다. 단순히 유인작전에 걸린 것도 있겠지만, 이 뿐만은 아니고 위의 생각이 주요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군요.
====>건안성과 신성의 군대에서도 좀 아슷흐랄한 내용이 있습니다.
구당서에는 주필산 전투 후, "장량이 다시 고려와 건안성에 밑에서 싸워 이기고 성을 다 함락시키니, 이 때는 포위를 길게 늘여서 공격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반면에 신당서에서는 "건안성은 험절함을 믿고 있는데, 군량은 많으나 군사가 적으므로, 만약 불의에 나가 친다면 서로 구원해주지 못할 것이다. 건안성을 차지하면 안시성은 우리 뱃속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구당서든 신당서든, 삼국사기든간에 몇가지 차이-삼국사기에는 건안성의 군량이 없다고 하는데, 신당서에서는 많다고 하는군요-_-;;--는 있지만, "건안성에 병사가 없다"는 사실은 비슷합니다. 아마 초전에 장검의 공격으로 건안성이 손실을 입었고, 장량의 공격에도 손실을 입은 듯 싶습니다. 추측입니다만, 아마 이 때 장량이 건안성을 쳤다가 실패해서 다시 비사성으로 물러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건안성과 신성의 병력이 퇴로는 막고 양도를 끊을 수는 있겠지만, 당군의 직접적인 공세에 버텨낼지는 모르겠습니다.(신성은 버틸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만...)
여기에 군졸 10만도 좀 미슷훠리 한게, 큰 성이라는 요동성에서 죽은자 1만, 인구 4만, 정예병 1만이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10만이라고 해도 이 중 군사의 수는 훨씬 줄지 않을까요? 아마 이 숫자는 병력이 아니라 인구까지 다 합한 숫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시성에 10만이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대신 안시성에서는 주필산 전투에서 패배한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안시성이 오래 버틴 이유에는 이것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안시성이 가장 오랫동안 버틴 이유는 임용한 교수의 설명대로 안시성은 내부 체제가 잘 정비되고, 외부의 이질 분자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당한 시점에서 외부의 도입은 큰 도약의 발판입니다만, 단결과 융합이 중시되는 시점에서 외부 인사의 투입은 단결력을 해치고 명령 계통에 혼선을 가져옵니다. 아마 주필산 전투의 패잔병이 들어왔다고 치더라도 수뇌부는 죄다 잘려있으니 특별한 분란의 소지도 없겠지요. 이 시점에서 당태종이 본색을 드러내어 저놈들 싸그리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칩니다. 물론 태종이야 이제 슬슬 시간이 없어지니 그랬다고 쳐도, 안시성 사람들은 이제 고연수 말대로 "스스로를 아껴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안시성 사람들이 특별히 가족애가 큰 것도 아닐테고, 이는 안시성 내부의 토착 세력이 교체되지 않고 단결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제장이 안시성을 급공하였는데, 당주가 성중에서 닭과 돼지의 울음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하기를 "성을 포위한 지 오래어 성중의 연화가 날로 미약해지는데, 지금 닭, 돼지가 심히 시끄러움은 반드시 군사들을 잘 먹여 밤에 나와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니 마땅히 군사를 엄히 하여 이에 방비하라"하였다. 이날 밤에 아군 수 백명이 성에 끈을 매달아 내려왔는데, 당주가 이를 듣고 스스로 성 아래에 이르러 군사를 모아 급히 치니 아군의 사자가 수십 명이요 나머지 군사는 퇴주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구석에 토산을 쌓고 성을 침핍하니 성중에서도 역시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의 사졸이 분번하여 교전하기를 하루에 6,7번 하고, 충거와 돌쇠뇌로써 그 성첩을 파괴하나 성중에서도 따라 목책을 세워서 빈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당주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는데, 도종은 토산 쌓기를 주야로 쉬지 않고 무릇 60일 동안 50만의 인력으로 완공하였다. 산마루는 성에서 수길 거리이며 성중을 아래로 굽어보았다. >>>>
====>아마 당군은 시간이 없으니 각종 공성구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연신 좌절되었던 것 같군요. 뭐, 중국 기록의 자의식 과잉은 심각하니까요.(사실 당시에 우리 기록이 남아있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특별히 달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뭐, 그렇다고 해도 주필산 전투나 살수 같은 큰 전투라면 힘들겠습니다만...어찌되었건 당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토산을 쌓기로 한 모양입니다. 여기서 연 인원 50만이 동원되었다는데, 사실 이게 전부 병력이겠습니까. 아마 적당하게 포로로 잡은 고구려 병사나 고구려 백성, 기타 사역병을 섞어서 이 숫자를 마련했을 확률이 큽니다. 그것도 50만이라는 숫자는 흔히 그렇듯 부풀린게 아닌가 싶군요.
(하지만 역시 부풀려서 크고 아름답다고 좆은게 아닌 모양이군요)
<<<<도종이 과의 부복애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산물에 머물면서 적에 대비케 하였는데 산이 무너져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복애가 사사로이 부소를 떠나 있었는데 아군 수백 명이 성의 무너진 곳으로부터 출전하여 드디어 토산을 탈취하고 주위를 깎아 지켰다. 당주가 노하여 복애를 순시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기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당주가 말하기를
"네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하겠으나, 나는 한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은 진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보다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트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용서할 뿐이라 하였다. 당주는 요동 지방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하여 군사를 거두게 하였다. 먼저 요주와 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서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병을 시위하고 돌아서니 성중에서는 모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하니 당주는 그의 고수했음을 가상하여 비단 100필을 주어 그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을 삼게 하고 요동성에 이르러 요수를 건넜다. 요택에는 진흙과 물이 있어 거마가 건너지 못하였다. 무기에게 명하여 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다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다. 당주가 스스로 말의 칼집에다 장작을 매어 일을 도왔다.
10월에 당주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길 메우는 것을 독려하였다. 제군이 발착수를 건너니 풍설이 사나워 사졸이 젖고 죽는자가 많았다. 명하여 길에 불을 놓아 군사들을 기다렸다. 무릇 현도,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협곡, 은산, 후황의 10성을 함락하였고, 요주, 개주, 암주의 3주 호구를 중국으로 옮겨간 자가 7만명이었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늘 분하여 탄식하더니 이어 근심으로 죽고, 혜진은 끝내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 건안, 주필의 3대전으로 아군과 당의 병마가 사망한자가 매우 많았다. 당주는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위징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사신이 논하여 말하기를 "당태종은 성명함이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 난을 평함은 은의 탕왕, 주의 무왕에 견줄만 하고 정치로는 주의 성왕과 강왕에 가까우며, 군사를 부릴 때는 기책을 냄이 무궁하여 향하는 곳마다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정의 공은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위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사기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아니하니 이는 양자에 이르기를 "제노(齊魯)의 대신이 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함과 다름이 없다. 심히 가석하다.>>>>
====>고구려는 끝내 힘든 당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이 때 고구려군의 사상자는 4만이고, 당군의 전사자는 육군 10만 중 천여명, 수군 7만 중 수 백명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의 사상자가 이렇게 적었을리는 없겠습니다만, 고구려의 승리는 엄청난 피해를 동반한 승리였습니다.
(누가 이기든 엄청난 피해가...)
막대한 양곡과 병마, 백성의 손실을 보충하기란 힘들고, 보충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당은 소규모 군대를 몰아 고구려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하여 당을 격퇴하지만 그게 마지막 저력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군요. 차라리 고구려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버텼으면, 토번과 기타 세력이 흥기 할 때까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쉬울 뿐입니다.
첫댓글 중간에 잡것들은 지우면 안되려나...읽기 짜증나는구만...
ㅋㅋ 저 짤방 나름 재밌는걸요?
한마디로 아주 지랄생쑈를 하고 자빠졌구만. 고구려가 겨우 이겼다? ㅄ같은 소설그만쓰고 자빠져라 ㅄ가튼ㄳ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