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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 푸대 비옷을 입은 아이들
박철영
1.
아이는 시간을 다퉈 성장한다. 마냥 철없던 시절에 머물러 있을 것 같지만, 나도 어느덧 남들처럼 학교 가는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여덟 살에 왼쪽 가슴에다 손수건을 달고 요즘으로 치면 예비 소집하는 날 학교라는 곳을 처음 가 보았다. “월락 국민학교” 그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그래서 내가 첫 학교를 갔던 곳이 “월락 국민학교”였다. 학교 운동장 오른쪽으로 어른 허리만 한 비자나무가 두어 그루가 있었다. 선생님이 비자나무 앞에다 우리를 줄 세우더니 한 명씩 호명하여 각기 다른 비자나무 아래로 가 있도록 했다. 그렇게 줄을 세워 반을 나누는 절차를 밟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하여 나는 월락리에 있는 월락초등학교에 여덟 살에 입학했다. 우리 집에서 4km는 될 거리였다. 내 위 창수 형하고 4년 터울이니 이년 동안 학교를 같이 다녔다. 형이 1학년 때 내 교실을 한 번씩 와서 둘러보다 가곤 했다. 어린 동생이라고 혹시나 해서 그랬던 형의 마음이 지금 생각해도 애틋했다.
학교 갈 때는 요즘처럼 혼자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단위로 몇십 명이 모여 대오를 갖춰 걸어갔다. 학교에서 어떤 목적이었는지 토목대장을 뽑아 선임을 해주었다. 학년이 바뀌면서 토목 대장이 누구누구라며 설왕설래했던 기억이 있다. 왜 토목 대장이란 명칭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6.25 전쟁이 종전되고 십여 년이 조금 지난 시기니만큼 그런 영향이 많이 있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우리 식정리는 형 또래의 창원 형이 대장이었다. 그 형 키는 작달막해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땡글땡글하고 자존심이 매우 강한 인상으로 기억된다. 마을에서 당산 고개까지는 열과 대오를 갖춰 심호흡을 가다듬듯 천천히 걸어가며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갈치 입구 삼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갈치 마을 쪽 아이들이 대오를 갖춰 나오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쪽보다 앞서 학교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날은 다행이었다. 처음부터 갈치 아이들보다 뒤처진 날엔 죽으라 뛰어야만 했다. 그러나 갈치 쪽 아이들의 토목 대장도 만만찮았다. 순순히 뒤처져 준다면야 좋지만, 그렇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거의 군 구보 행군 수준이라고 보면 되었다. 뛰면서도 6~7개의 군가를 반복해 부르며 갔다. 숨은 가빴지만 군가를 따라 하면 기분이 서서히 달아오르기도 하였고 식정리 마을 선 후배 간 소속감도 다질 수 있어 하여간 나쁘진 않았다. 기억으로는 향토예비군 노래와 가짜 간첩 이수근을 상기하는 노래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고죽리 아이들과 또 한판을 붙었다. 우리 마을 쪽으로 분교 되기 전 2학년 말까지 그렇게 아침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비록 초등학교를 힘들게 다녔어도 그때를 돌이켜보면 다시는 올 수 없는 내 생애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
등교는 그렇게 하였지만, 수업이 끝나고는 개별 학년별로 집으로 갔고 다른 제약이나 구속력은 없었다. 친한 아이들과 끼리끼리 뭉쳐 다녔다. 신작로 길을 걸어오다 보면 꼭 목이 말랐다. 그러면 고죽동 세환이네 집 입구 쪽 몇 년 위 선배인지는 모르고 암수라고 하는 선배네 집 우물에서 갈증을 면했다. 그 집은 신작로가였고 울타리로 측백이 심어져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이었다. 간혹 주인과 맞닥뜨려도 그냥 사람 좋은 정도로 느껴졌다. 세환이랑 고죽리까지 이야기하며 오다가 그 집에 들러 물을 마시곤 했다. 그 집 우물은 시멘트로 된 둥근 롯깡으로 되어 있는 낮은 우물이어서 줄에 묶인 두레박으로 퍼서 마셨다. 물맛이 마시면 시원하였고 단맛이 나서 좋았다. 지금은 그 집이 도로가 넓혀지며 헐려버리고 없지만, 그 집 앞을 지나면서 혼잣말로 암수 선배가 살던 집이고 그 집에서 우물을 퍼마셨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학교 다니는 것도 일이다. 날씨가 좋으면 괜찮아도 꼭 그런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어머니는 부산해졌다. 시골이라 우산도 여의치 않았고 여름에는 잦은 비로 곤욕스러웠다. 그놈의 비는 꼭 아침에는 억수로 내렸다가도 학교가 끝날 즈음이면 말짱하게 개는 날이 많았다. 비가 오는 그런 날이면 어머니가 비료 푸대를 꺼내 목과 양팔이 잘 빠져나오도록 잘라내 그것을 비옷처럼 입혔고 그러려니 하며 다녔다. 그 정도면 최고의 비 가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우습겠지만, 싫다고 앙탈을 부렸다가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불만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여름은 아이들에게 입는 옷도 간편해서 좋았다. 어차피 입을 옷이 많지 않았고 다우다로 만든 빤스는 나에게 학교 다닐 때 입을 수 있는 괜찮은 반바지였다. 요즘 말하면 속옷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것을 입고 학교에 갔다 집으로 오는데 고죽리 앞에서부터 먹구름이 끼더니 기어이 소나기를 퍼 부어 비를 흠뻑 맞은 적이 있었다. 점촌까지 뛰어오는데 검정 다우다 빤스에서 배어 나온 감물 같은 먹물이 무릎으로 번져 드는 것을 보았다. 햇살은 어느새 비구름을 비집고 나와 있었다. 이후 파란 비닐우산도 간혹 사용할 기회가 한 번씩 있었다. 서서히 상업주의의 영향이 농촌으로까지 스며든 것이다. 좋아는 보였어도 비바람에 쉽게 뒤집히고 찢어져 오래 사용할 정도가 아니었다. 한동안은 비료 푸대 비옷을 가끔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나무로 우산 살을 만든 파란 비닐우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어찌 보면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
그때는 학교마다 소사라는 직책을 가진 분이 있었다. 듣기로는 전쟁 때 부상을 당하거나 국가에 유공이 있는 분들이 근무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월락초등학교에 있는 황씨라는 소사 아저씨도 발을 절었다. 나중 우리 친구 아버지기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를 마치고 월락 초등학교 소사가 운영하는 매점이 있는 솔밭 사이 샛길로 내려오면 중학교를 못 가고 월락 파출소에서 심부름하며 지내는 일성 선배 집 앞을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집은 신작로에서 날아온 뽀얀 흙 먼지를 뒤집어쓴 이십 평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선배는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그 선배가 뒷집 상태네 상석 형하고 친구이니 궁금도 하다. 상태네 형은 군산기계공고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으니 더 궁금하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오면 월락 파출소가 있었다. 그 파출소 앞을 지나면 꼭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고개를 반대로 돌려 지나왔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곳은 죄를 지면 잡아간다는 무서운 곳으로 인식된 곳이었다. 가끔 순경이 보이기라도 하면 가슴이 맥없이 콩닥대다 졸아들었다. 참 순수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해동이란 친구는 바로 파출소와 집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순경하고 웃으며 이야기도 하고 겁먹은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대단한 친구라고 여겼다. 그렇게 해서 월락동을 빠져나오다 보면 이발소가 보였다. 참 신기했다.
이발소 문이 열려진 틈으로 이발하는 아저씨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던 것도 우선은 신기했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집에서 머리를 깎지 않고 이발소에서 깎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발소에서 머릴 깎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주로 머리는 아버지가 깎아 주셨는데, 나보다 위 형은 백호라는 칼로 중처럼 머리를 반질반질 밀어줬다고 했다. 백호라는 칼은 요즘 남원에서 나오는 유명한 식칼하고 모양은 비슷한데 크기는 아주 작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머리 깎는 기계를 사와 형들도 보기에 좀 나은 머리 모양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머리 깎아 주는 것도 서서히 형들이 해주는 횟수가 늘었다. 주로 머리는 집 뒤안에서 깎았다. 기계를 오래 쓰다 보니 이빨이 일부 깨지고 무디어지면서 머리카락이 기계 날 사이에 번번이 씹혔다. 그럴 때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으니 몸을 뒤틀게 되고 머릴 쳐드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다고 또 둘째 형은 꿀밤을 쥐어박곤 했다. 나이 들어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며 웃곤 하지만 깐깐한 그 형이 싫었다. 사실 치수 형이 깐깐해 머릴 깎는다고 나서면 머리를 맡길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형한테 머릴 깎다가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치수 형의 실력도 문제지만 사실 머리 깎는 기계가 수명 이상을 사용하고 있어 당연했다. 다행스럽게 그때 씹혀 빠진 머리카락이 이마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은근히 어린 동생들이 눈꼴신 짓을 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워낙 성깔이 깔끔하여 그랬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감기를 심하게 앓아 장기화하다 보면 기침이 천식처럼 연달아 터졌다. 그런 나를 엄마 앞에서 어린 양을 떠는 것으로 알고는 마루를 지나가며 발로 지긋이 밟고 가는 때도 있었다. 묵언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어 기침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다. 일종의 시샘이었을까. 이런 것 말고도 둘째 형에 대한 추억은 참 많다, 나보다 7년 위니까 나는 항상 어릴 수밖에 없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 따라가면 그날도 불안했다. 키가 작은 형은 나뭇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 한쪽 지겟발이 길가에 있는 작은 잔솔에 꼭 걸렸다. 열 번이면 여섯 번 꼭 넘어졌다. 힘이 부친 것도 이유지만, 남들 집 지게보다 지게 목발이 길었다. 다른 집은 지게 목발을 아들 키에 맞춰 잘라주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이들이 클 것을 생각해 그것을 쉽게 잘라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꼭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 한두 번은 나뭇짐과 함께 처박히곤 했다. 처박히면 그냥 바로 세우면 되는 상황이면 그날은 운이 좋은 것이다. 나뭇잎을 갈퀴로 긁어모아 묶은 것을 우리 고향에서는 나뭇동이라고 했다. 그 나뭇동이 새끼줄이 끊어져 빠개져 버릴 때는 어린 마음이지만 불안했다. 처음부터 다시 묶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추억을 함께했던 치수 형은 사실 나와는 자주 부딪치지 않았는데도 추억이 많다. 사랑 골에서 나무를 하여 우리 집으로 오늘 길에는 거쳐야 할 난관이 참 많았다. 그만큼 우리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팍팍했단 이야기다. 사랑 골에서 나무를 해 산에서 내려오면서부터 길 가 잔솔가지에 걸려 홍역을 치러야 했고 이어 갈치 마을에서 내려오는 도랑이 또 한 번의 위험을 예비하고 있었다. 2미터 정도 높이의 둑을 내려와야 하는데 길이란 게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다니며 자연스럽게 난 길이라 아주 좁았다. 겨우 사람 발 정도 디딜 수 있는 곳을 위태롭게 밟고 내려온다. 그것도 지겟발이 걸리는 것 때문 뒤로 돌아내려 와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거의 묘기 수준이었고 아차 하면 넘어지는 것이 일이었다. 도랑을 아무 일 없이 잘 건너는 것은 순전히 백 프로 운이었다고 보면 된다. 방심하는 순간에 미끄러져 처박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고난의 행군처럼 무거운 나뭇동을 지고 거북 재를 넘어오는 데 이곳도 만만찮았다. 당시는 워낙 산을 발가벗길 정도로 나무를 베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산에 나무들이 많지 않았다. 벌거숭이가 된 우리 마을 뒷산을 넘어가는 재가 거북 재다. 그 거북 재가 아침 나무하러 재를 넘어갈 때는 황톳길에 서릿발이 작은 창처럼 솟아 있었다. 자박자박 밟히는 소리도 아침에는 좋은 듯했다. 그런 산길에 해가 들고 산에서 나뭇짐을 지고 넘어올 점심때는 서릿발이 다 녹아 진창이 되어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작은형은 나뭇동을 지고 힘은 부친 데다 조심해서 재를 올라가지만, 진흙 길에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처박기 일수였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그 날이 그랬다. 더는 둘째 형과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런 형이 1982년에 발표한 사법고시 24회 최종 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둘째 형은 성격이 깐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누구보다 여렸고 거북재에 잔솔가지 하나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쳤다. 죄 없는 나뭇가지의 상처 하나에도 마음 아파했지만, 누군가 소나무 주간柱幹을 잘랐을 때는 불같이 화를 냈다. 십여 년을 자란 소나무의 성장지를 잘라버렸으니 말이다. 나무가 관목류는 옆으로 번져 가지 몇 개를 쳐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나무는 달라 주간柱幹을 쳐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옆 가지 몇 개로 버티다 결국엔 죽고 말기 때문이다. 그토록 가슴이 여린 사람이 나의 둘째 형 박치수다. 요즘도 가끔 서울 근교 어딘가 산길에서 쓰레기를 줍고 내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나의 둘째 형 일지 모른다.
아름다운 시절은 힘든 시기를 묵묵히 감내한 뒤라야 알 수 있다. 고난이나 고통을 인내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시절로만, 기억될 뿐 아름다운 시절은 없다. 다행스럽게 나는 흘러간 과거의 시간이 죄다 아름답게 느껴지니 바보인가 나에게 되물어 본다.
첫댓글 이담이 대단하네. 줄줄줄 계속 써보게.
이시인의 끝없는 격려가 내 글의 원천이네. 하여간 두 손 들고 나올 때까지 지켜봐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