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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渚文集 卷之八/부록附錄/행장行狀
공의 휘는 동환(東煥), 자는 인백(仁伯), 백저(白渚)는 호이다. 배씨는 고려 말 흥해군(興海君) 휘 전(詮)을 처음 본관을 받은 조상으로 삼는다. 이분이 휘 상지(尙志)를 낳았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이고 호는 백죽당(栢竹堂)이며,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켜서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의 금계(金溪) 마을에 은거하였다. 중세에 휘 삼익(三益)이 계시니, 관찰사이고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다. 이분이 휘 용길(龍吉)을 낳았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겸열(藝文官檢閱)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향병 부장(鄕兵副將)이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금역당(琴易堂)이니, 공에게 있어 12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언주(彦周)이고 호는 송고(松皐)이다. 증조의 휘는 선응(善應)이다. 조부의 휘는 영두(永斗)이고 호는 계서(溪西)이며 문장과 행실로 향당에서 추앙받았다. 부친의 휘는 광직(光稷)이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통정대부 성교(性敎)의 따님이고, 근시재(近始齋) 해(垓)의 후손이니, 고종 기해년(1899) 8월 16일에 등현리(登峴里) 고가(古家)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빼어났고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니, 조부가 매우 기특히 여겨 아꼈다. 5세에 자학(字學)을 가르쳐 매일 10여 장을 가르쳤으나 어긋남이 없이 모두 외웠다. 조부가 공을 항상 자리 곁에 두면서 고인의 격언(格言)과 집안 선대의 족보와 유현(儒賢)의 사행(事行)을 이야기로 전수하자 밝게 깨우치지 않음이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았다.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선생이 공을 보고 큰 그릇으로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공의 집안의 인봉(麟鳳)일 뿐만이 아니라, 참으로 훗날 유림(儒林)의 명망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7세에 족조(族祖) 등와(藤窩) 공 연발(淵發)에게 나아가 배워서 글을 앞에 두고 강의를 받아서 구두(句讀)를 스스로 풀이하고 문의(文義)를 밝게 깨우쳤으니, 등와 공이 공의 영민함을 사랑하여 권면과 격려를 아울러 지극히 하였으며 단서를 들어 계발해 준 것이 매우 많았다.
12세에 관례를 행하였는데 서파 선생이 빈석(賓席)에 계시다가 자(字)를 지어주고 그 뜻을 풀이하여 축원하였다.
16세에 어버이의 명으로 서파 선생께 제자의 예를 갖추어 찾아뵙고 학문하는 요체를 들었는데, 매양 조용히 곁에서 스승을 모시면서 어렵고 의문스러운 점을 질문하고 모든 사행(事行)과 술작(述作)을 한결같이 그 법도대로 따랐다. 이 때문에 경사(經史)에 해박하여 조예가 더욱 깊어졌으며 문사(文思)가 매우 뛰어났으니 여러 벗들이 모두 앞자리를 양보하였다. 간간이 또 책을 안고 산정(山亭)에 들어가 혹 경서(經書)의 뜻을 강구하고 시문(詩文)을 일과로 지어 스승에게 나아가 보여 장려와 칭찬을 많이 받았다.
기미년(1919)에 선친이 병으로 앓아누워 병세가 계속 이어지자, 공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으며 의원과 약을 찾아 이르게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상을 당하기에 이르러서는 슬피 울부짖어 숨이 끊어질 듯 거의 지탱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집안의 실마리가 실추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억지로 미음을 먹고 처음과 끝의 예의절차에 정성과 공경을 힘써 다하였다. 장지가 당시의 법령에 의해 금지되었으나, 정성을 다하고 슬피 간청하여 마침내 안장할 곳을 얻었으니 대개 공의 효성에 감응한 결과였다. 이에 앞서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옹이 유림의 선각자로서 민족의 대의를 창도(唱導)하여 백성의 지각을 계발하고 국혼을 일깨우는 것을 당면한 급선무로 여겼는데, 공 또한 일찍이 세계의 대세와 나라가 쇠망한 연유를 듣고 개연히 구습을 개혁하여 더욱 새롭게 할 뜻을 품고는 마침내 대구 교남학관(嶠南學館)에 들어갔으니, 이 학관은 영남 사학(私學)의 효시(嚆矢)이자 실로 동산 옹이 영남의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도모하여 창설한 곳이었다.
갑자년(1924)에 동산 옹의 장자 준희(浚熙)와 함께 안동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우고, 공과 곽상훈(郭尙勳) 공이 교무를 전담하여 자못 학교를 진작시킬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왜정(倭政)의 탄압을 당하여 폐교하고 말았다. 이해에 서파 선생이 문득 후생을 버리고 돌아가셨으니, 공은 의귀할 곳을 잃어버린 것을 가슴아파하며 초상에 바삐 달려가 문하의 여러 공들과 삼월장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정묘년(1927)에 동산 옹이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고 안동에 지부를 설립하니, 공과 여러 공들이 그 회의에 참석해 의논하여 사회단체를 통합해서 드디어 하나의 큰 항일 세력을 이루었지만, 끝내 이 일 때문에 왜구의 감옥에 구금되어 1년형을 받았다.
무진년(1928)에 동산 옹의 병이 위독해지자 공은 바삐 달려가 영결을 고하고, 뜻을 함께하는 여러 공들과 사회장 절차를 논의하여 예장(禮葬)하였다.
임신년(1932)에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936)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예제를 지켜 어긋남이 없는 것이 부친상과 같았다. 상화(喪禍)를 겪은 나머지에 가세가 또 쇠락하여 다른 지역으로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두루 겪었다.
을유년(1945)에 광복이 되자 온 백성이 기뻐서 뛰고 춤을 추었지만, 공은 “반평생 포로살이에 비로소 하늘의 해를 보게 되었으니 몹시 기쁘지만, 지금 남북이 대치하여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앞으로 닥칠 일이 우려스럽다.”라고 하였다.
경인년(1950)에 군사(軍事)의 소요가 크게 일어나 공의 말이 과연 적중하였으니, 시사(時事)를 말하지 못할 것이 있었다. 공은 드디어 고요한 곳의 한 채 집에서 몇 권의 책을 가져다 돌려가며 익숙히 반복해 읽으면서 세상의 근심을 떨쳐내었고, 지루해지면 산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들에서 김을 매며 산 밖의 소란은 모르고 지낸 지 꼭 몇 년이 되었다.
계사년(1953)에 비로소 대구로 옮겨와 우거하니, 대개 학교 일을 보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분주한 나머지에 환도(環堵)가 더욱 쓸쓸해졌지만 신경 써서 다스리자 가계(家計)가 조금 나아졌으니, 일이나 외물(外物)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않고 서사(書史)를 스스로 즐겨 오직 선조를 추모하고 후손을 도와주며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을 일상의 절도로 삼았다. 선조 임연재(臨淵齋) 선생에게 나라를 빛낸 높은 공훈이 있었으나 훈부(勳府)에 기록이 빠져 공로와 사적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하였기에, 곧 원래 문집에 있던 〈조천록(朝天錄)〉에 이후에 올린 문장을 첨부하여 모아서 한 책으로 만들고 여러 대 선조들의 원고를 합쳐서 간행하였으며, 서파ㆍ동산 선생 양대의 유집(遺集) 및 고을 선배들의 글을 간행하거나 교정하는 일에도 모두 공이 참여하였다.
기해년(1959) 회갑 때에 집안사람들이 술자리를 열 것을 청하자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감회가 많으니, 어찌 차마 기쁨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다음과 같이 율시 한 수를 읊었다.
외롭게 홀로 남아 구차히 지금껏 살았으니 㷀然孤露苟延今
오늘 비통한 심정 더욱 깊네 此日悲懷一倍深
겪어 온 풍상에 짧은 머리털 남았고 閱歷風霜餘短髮
어긋난 세월에 처음 먹은 마음 저버렸네 蹉跎歲月負初心
살아갈 계책을 묵은 책에 장차 부치려 했더니 擬將活計陳篇付
쇠잔한 몸이 수역에 이른 것이 도리어 우습네 還笑殘骸壽域臨
다만 자손들 탈 없이 자라 但願庭柯無恙茁
선인의 집에 무성한 가풍 이루길 先人宅畔厚成陰
기미년(1979)에 정부의 낙동강 둑 공사로 인해 도원(桃源)의 옛집이 모두 수역(水域)에 들어가게 되자, 공은 세상의 변화가 무상하여 선대의 자취를 지킬 수 없음을 가슴아파하였다. 이에 족제(族弟) 덕환(德煥)과 백방으로 힘써서 안동의 송천(松川)에 터를 얻어 사당과 종택, 여러 대의 선영을 옮겨 마련하였고, 각각 제전(祭田)과 석상(石床)을 설치하였다. 연세가 이미 높아 기력이 쇠하였지만 몸소 성묘를 행하였으니, 여러 자제들이 대신하기를 간절히 청하자 “내 지금 늙었으니 비록 자주 가보려 한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남쪽에서 우거한 뒤에 벗들이 더욱 많아져서 상탑(床榻)이 빌 때가 없었는데, 각기 정성과 은혜를 다하고 공경히 예모를 차려서 비록 나이 어린 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몸소 배웅하고 맞이하였으며 말을 자상하고 곡진히 하여 조금도 소홀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단정한 선비와 문장을 하는 이에게는 온 마음을 기울여 친분을 맺어서, 편지를 주고받는 겨를에 간혹 초청하여 며칠 머물게 하여 종일 담론하면서 노년의 심회를 달래었으니, 야인(野人) 류동수(柳東銖)‧주서(洲棲) 류석우(柳奭佑)‧청계(聽溪) 이동식(李東軾) 같은 이들이 모두 마음으로 교유한 벗들이다. 또 산수에 깊은 취미가 있어서 청량산(淸凉山), 금오산(金烏山), 가야산(伽倻山), 내연산(內延山)의 뛰어난 승경들과 장릉(莊陵), 부여(扶餘), 경주(慶州), 한산도(閑山島)의 고적들을 두루 찾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창수한 시도 많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청수(淸秀)하고 약하였는데 몸조리하는 데에 바탕이 있어서 질병이 적었지만, 80여 세의 고령이 되자 쉽게 몸이 손상되었다. 계해년(1983) 겨울에 우연히 감기를 앓아 점점 기운이 약해졌는데, 위독하여 병석에 누웠어도 여전히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다. 혹자가 조금 멈추기를 청하면, “이것이 아니면 병든 심회를 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시중드는 이에게 명하여 다른 집안의 기록을 정리하게 하였고, 간혹 병 때문에 힘이 들어 마치지 못한 것 역시 입으로 불러주어서 책을 완성시켜 깨끗이 필사하여 부치게 하였다.
이듬해 1월이 되자 병세가 더욱 무거워졌는데 때마침 부인 남씨가 오랜 기간 앓아오던 고질 때문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비통하고 경황이 없던 나머지에 그 일로 인해 공의 병세는 더욱 위독해져서 숨이 끊어질 듯하고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말을 하지 못했지만, 맑은 정신이 내면에 쌓여 방문한 친척과 친구들을 마음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마침내 2월 15일 유시(酉時)에 정침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86세였다. 이달 21일에 사림의 예로 왜관읍 삼청동(三淸洞) 신좌(辛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니 원호(遠鎬)의 따님이다. 정유년(1897, 고종 광무1)에 태어났고 완숙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워서 여인의 행실이 자못 갖추어졌다. 2녀를 낳았다. 몰년은 임신년(1952) 12월 17일이다. 묘소는 가수천(佳水川) 건좌(乾坐)이다. 계배(繼配)는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니 정국(廷國)의 따님이다. 계축년(1913)에 태어났고 유순하여 부녀자의 덕이 있었다. 몰년은 갑자년(1984) 1월 16일이다. 묘소는 공의 무덤 아래 신좌(辛坐)이다. 4남을 낳았으니 재혁(在赫), 재훈(在薰), 재국(在國), 재건(在建)이다. 사위는 정창진(丁昌鎭), 류종봉(柳鍾鳳)이다. 재혁의 아들은 호균(鎬均), 호준(鎬儁)이고 3녀를 두었다. 재훈의 아들은 호범(鎬範)이고 2녀를 두었다. 정창진의 두 아들은 준(準), 활(活)이다. 류종봉의 두 아들은 인승(仁承), 철수(哲洙)이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덕성이 온후하였다. 이미 어진 가정의 의로운 방도를 따른 데다 또 대방가(大方家)의 가르침에 훈도되어 이른 나이에 명성이 이미 문단에 성대히 알려졌다. 그러나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나라가 쇠망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드디어 신학(新學)을 마음에 두고 사회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국론이 갈라져 틈이 더욱 심해짐을 보고 세상에 나서려는 뜻이 권태로워졌고 노경이 또 닥쳤다. 이에 물러나 처음의 뜻을 이루어 자취를 감추고 경전에 잠심하여 고금을 널리 살폈으며 여러 학설을 궁구하면서도 취사에 정밀하여 반드시 우리 유학의 법도로 귀숙하였다. 연구하고 함양하는 공부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 게으르지 않았으니, 대개 자질이 높고 학문의 힘이 있었던 점을 또한 속일 수가 없다.
평소 볼 수 있던 행실에 대해 논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따라서 즐겁게 해드렸고 어버이의 몸에 따뜻하고 시원함을 적당히 해드렸으며 맛난 음식을 곤궁하다고 해서 혹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선친의 기일이 되어서는 마루와 방과 뜰을 깨끗이 청소한 후 재계하고 마음을 밝게 하며 제기를 깨끗이 닦아 일체의 먼지를 몸에 닿지 않도록 하였으며, 반드시 기일 전에 제수를 미리 준비하여 제사에 임하여 군색하거나 급박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제사를 받들 때는 애모(哀慕)하는 모습이 마치 웃옷을 벗어 매고 풀어 헤친 머리를 묶었던 초상 때와 같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조를 흠향하는 도리는 정성이 주가 되고 의식과 제물은 그 다음이다. 《가례》에 ‘그 정성이 있으면 그 신(神)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제사가 만약 정성스럽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선대의 아름다운 사적은 비록 먼 조상이나 방계의 친족이라 할지라도 모두 그 언행을 찬술하여 일가의 문헌을 갖추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형제가 없이 자매만 있는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겼지만, 또한 선친이 돌아가시자 매양 남매간의 정을 잊지 않았으며 말이 거기에 이르면 번번이 오열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집안 식구들을 다스릴 적에는 관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니, 한 가지라도 잘한 일이 있으면 기쁨이 얼굴에 드러나서 반드시 드러내 칭찬하고 장려하였으나, 잘못이 있더라도 또한 갑자기 노한 음성과 안색을 짓지 않아서 스스로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집안은 화목하였으며 남들이 의심하는 말이 없었다.
후생을 장려하고 진보하게 할 때는 깨우쳐 인도해 주는 말이 상세하여 그 재능과 자질에 따라 이루어 주었으니, 만일 경(經)의 뜻과 예(禮)의 의문점을 묻는 이가 있으면 자신의 견해를 먼저 주장한 적이 없었고 반드시 선배 유학자들의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아마도 이와 같을 것이니 참조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복식과 기물은 검박(儉朴)함과 완실(完實)함에 힘써서 일찍이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빈한함과 소박함은 우리 가문의 본모습이니 어찌 차마 너희들이 그것을 무너뜨리겠느냐?”라고 하였다.
평소 지낼 때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안석과 책상을 정리하여 책과 글들을 어지럽지 않게 배치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빈객을 접대할 때 외에는 늘 책상을 마주하고 글을 소리 내어 읽어서 그냥 허비하는 시간이 없었다.
동작과 언행은 조용하고도 여유 있어서 일찍이 일일이 단속하지 않아도 절로 법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 모인 자리에 있을 때 간혹 말소리가 시끄럽고 시비가 어지러우면 무덤덤하게 들리는 것이 없는 듯이 하였으나, 의리에 관계된 부분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구차히 동의하는 법이 없고 또한 반드시 일의 조리를 끌어와서 갖추어 말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숭정(崇禎)의 절의는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것이라 숭상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니, 이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당시의 사정으로 말하자면, 옛날 중국과의 관계는 우선 놓아두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우리나라를 다시 살려준 은혜가 있은 지 일찍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랑캐와 화친하여 명나라에 대해 군사를 일으켜 칼날을 돌렸으니, 이 어찌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기수(氣數)에 눌려 비록 창을 거꾸로 들고 오랑캐에게 항거해 천하에 대의를 부르짖을 수는 없었더라도, 군신 상하가 피를 뿌리고 눈물을 삼키며 진령(榛苓)의 생각과 풍천(風泉)의 비통함을 발하는 것은 천리(天理)와 민이(民彝)에 그만둘 수 없는 바이니, 어찌 오직 대국을 섬기는 일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흐르고 일이 지나가버려 천추에 씻기 어려운 치욕을 설욕할 힘이 없어, 한갓 왕도(王道)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의리를 한 부(部)의 《춘추》로 삼아 명나라의 일월을 읊고 숭정의 연호를 따라 쓰기만 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훗날 토벌하고 복수할 계책을 세우기를 조금도 생각지 않고 부질없이 처사(處士)의 상담(常談)만 행하는 것은 그 무슨 의리인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당시는 당시이고 후세는 후세이니, 나의 우견(愚見)은 늘 이와 같다.
라고 하였다. 동산 옹에 대한 제문에서는 말하기를,
세급(世級)이 날로 떨어지고 원기(元氣)가 날로 상해감으로부터 학술은 점차 허위를 이루고 풍속은 더욱 무너져 어지럽게 되어 대세가 어떻게 되는지 캄캄하게 알지 못하여 전에 없던 참혹한 화를 가만히 앉아서 받게 되니, 이것이 아마 《주역》에서 말한 “궁극에 달하면 변화하게 된다.[窮則變]”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선생이 남보다 먼저 통절히 깨달아서 변화해 도(道)로 나아가게 된 까닭입니다.
라고 하였다.
문장은 평소에 격식과 필력을 숭상하여 구질구질한 것을 떨쳐내었고 청신(淸新)하고 간결(簡潔)하여 세속의 진부한 말이 없었다. 시 또한 평이하고 담박하며 우아하고 웅건하여 의취가 멀리까지 미쳤으니 대개 그 성정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아! 공의 경행(經行)과 재주로 마땅히 당세에 쓰이고 사업에 드러날 수 있었지만 곧 시대의 운명에 구애되어 불우한 신세가 되어 마침내 드러나지 못하고 그 몸을 마치게 되었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겠는가? 원윤(源胤)은 공과 동향에 태어나 공의 명성을 익히 듣고 마음으로 아름답게 여긴 것이 일찍부터였다. 남쪽으로 우거한 후에 사는 곳이 처음에 공의 집과 인접하니 또한 공이 일마다 보살펴 주시어 인도하고 이끌어 주시는 정성을 두터이 받았으니, 어느 날인들 종유하면서 보익(補益)을 얻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문득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내가 갈팡질팡 갈 길을 잃게 되었으니, 저승에서 일어나기 어렵다는 탄식을 더욱 금할 수 없다. 근자에 공의 아들이 나에게 공을 따라 노닌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행장을 짓는 일을 부탁했는데, 이는 실로 세상에 남은 이의 책임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늙고 못난 글재주 없는 내가 공의 아름다운 덕을 형용할 수 없을까 두려워 이미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가져온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간간히 평소 목격하고 들은 바를 부기(附記)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하니, 세상에 붓대를 잡은 이가 나의 분수에 넘친 점을 용서하고 채택해 준다면 다행이겠다.
진성(眞城) 이원윤(李源胤)은 삼가 행장을 짓다.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킴을 말한다.
자(字)를……축원하였다 : 《서파선생문집(西坡先生文集)》 권11에 〈배인백자사(裵仁伯字辭)〉가 실려 있다.
환도(環堵) : 사방의 흙 담장이 각 면마다 한 발 길이가 되는 것으로 협소하고 비루한 집을 형용하는 말이다. 《예기》〈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집과 환도의 방을 둔다.[儒者有一畝之宮、環堵之室.]”라는 말이 있다.
숭정(崇禎)의 절의 : 명(明)나라에 대한 절의를 말한다.
진령(榛苓) : 개암나무와 감초. 성대(盛代)의 현왕(顯王)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山有榛 습지에는 감초가 있네 隰有苓
누구를 생각하는가 云誰之思 서방의 미인이로다 西方美人
라고 읊은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다. 《詩經 邶風 簡兮》
풍천(風泉) :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한 슬픔을 말한다. 《시경》〈회풍(檜風) 비풍(匪風)〉의 주제는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한 것에 대하여 현인이 이를 근심하고 탄식하는 내용이고, 〈조풍(曹風) 하천(下泉)〉의 주제는 왕실이 무너지자 소국이 곤폐(困弊)하여 주나라 서울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 두 시의 편명을 합하여 망국의 슬픔을 뜻한다.
궁극에……된다 : 《주역》〈계사전 하(繫辭傳下)〉 제2장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窮則變, 變則通.]”라고 한 말이 있다.
이원윤(李源胤) : 1906∼2002. 자는 계형(繼亨), 호는 백주(白洲),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저서로는 《백주집》이 있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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