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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서관 도착 안심증
그 갯마을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스승들이 많았다. 고목나무집 김동배 선생님은 당재 언덕 넘어 출근했고 유년의 딸기코 서무성 선생님은 신새벽부터 해당화 제방둑 양봉 상자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교감님이신 우리 아버지도 식전에 참나무보 고추밭 매다가 페달을 밟았다. 조무래기들은 자전거 짐받이를 잡고 탈탈탈 뛰다가 양조장 언덕바지에서 헐거워진 책보를 정리했다. 숨 고르며 책보를 묶다가 ‘소공자’나 ‘올리버 트위스트’ 삽화를 넘기다가 보리밭 너머로 종달새를 쳐다보기도 했다.
나는 4학년 때부터 동화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만화책과 작별하면서 성숙한 아랫도리 느낌만큼 새로운 문장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도서실이 없었으므로, 수업만 끝나면 대용공간인 김신배 선생님(김동배 선생님의 사촌 형)네 교실(5-2반)로 직행했다. 처음에는 우르르 몰리던 독서반 희망자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스무 명 남짓 아이들이 열 명, 다섯 명으로 줄어들다가 저물녘 마지막 한 사람으로 남게 되면서 스승과 제자가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일 대 일로 대면하던 나흘째, 선생님이.
“너는 어디 사니?”
“부석면 대두린데요.”
안데르센에 빠져있었고 ‘성냥팔이 소녀’를 읽는 중이었다. 섣달그믐이 배경이었고 성냥을 팔지 못하면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소녀가 주인공이다. 소녀가 눈보라로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한 개비씩 불빛을 터뜨릴 때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첫 성냥개비는 따뜻한 난로가 되어 시린 몸을 녹여주었다. 다시 켠 성냥불은 크리스마스트리와 칠면조 파티 식탁이 되어 화사하게 변신했다. 황홀했다. 불꽃들이 밤하늘의 은하수로 변신해 총총총 오를 즈음 시나브로 나타난 할머니의 손길이 그리도 따스한 것이다. 소녀는 ‘저도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간절하게 손등을 부여잡는다. 할머니를 놓치지 않기 위해 꺼질 때마다 호호 불며 불을 켜다가 마침내 성냥 한 통을 죄다 써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죽었다.
갸우뚱했다. 꽁꽁 언 성냥팔이 시신이 축복의 미소로 ‘천국의 새 해’를 맞이했다는 마무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눈알을 죄다 제비에게 뽑아준 ‘행복한 왕자’까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슬픈 이야기가 왜 아름답게 느껴질까’ 그런 궁금증의 말주머니가 꼬리를 이었다. 나는 과연 커서 무엇일 될까. 나도 언젠가 소녀처럼 성냥불만 켜다가 거리에 쓰러지게 될까. 아니면 ‘미운 오리 새끼’의 백조로 헤엄치며 으쓱댈 때가 올까. 책은 그렇게 성장의 나래를 펼쳐주었지만 막상 책을 덮으면 아무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내 얼굴만 빠드름히 쳐다보며.
“느이 아버지가 누구냐?”
“주소는 대두리 575번지고 아버지는 여기 핵교 교감 선생님인디유.”
그의 엇, 하는 표정 뒤로 썩은새 같은 어둠이 덮여졌다. 그날 밤 아버지가 김선생님의 교무실 소식통을 전해주며 모처럼 흐뭇하게 웃으셔서, 나는 책 읽기가 착한 행동임을 처음으로 간파했다. 책과 공부는 같은 부류니 야단맞을 일도 없었다.
1969년 중학교 1학년.
무교동 뒷골목 그 학교는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중학교 야간부가 개설되어 있었다. 중고를 합치고 주야간을 더하니 4,5천여 명의 고슴도치 머리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바글거렸다. 야간중학생의 자취방엔 라디오나 신문까지 아무 세간이 없었으므로 아침이 되면 어디로든 나가야 했으니, 그 탈출구가 남산도서관이었다. ‘원효로 철길 →성남극장 →후암동 →미군부대 담길’ 지나 계단을 까마득히 오르면 땀 배인 교복 등허리로 소금꽃이 피기도 했다. 삼백 계단을 가까스로 넘어서도 이미 중고생들이 굴비 더미처럼 치렁치렁 늘어서 있었다. 일요일에는 낭떠러지 계단 저 아래 꺾어진 골목까지 아찔하게 늘어섰다. 한 차례 입장이 끝나면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므로 아예 책가방만 순서대로 늘어놓고 그 언저리에서 시간을 때웠다. 그 기다림은 지루하면서도 분주했다. 한 사람이 빠져나와야 한 사람이 빈 자리를 채우는 시스템이어서, 틈새가 좁혀지는 그 순간 재빨리 가방을 밀어 넣어야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나는 단어장을 넘기거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수학문제를 푸는 교복들을 곁눈질하며 그들의 미래를 재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책은 도서관 내에서만 대출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현진건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나도향의 문장이 사춘기 성장판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가장 충격적인 소설은 김동인의 ‘김연실전’이었다. 나도향의 ‘물레방아’에서 건드려진 민초적 사춘기 감성이 신여성 ‘김연실전’을 접하면서 심화되었다고나 할까. 계급성의 도약과 드라마틱한 전환 그리고 자유연애와 에로스를 넘나드는 행간들이 밧줄처럼 똬리 틀었다. 어른이 된 이후로도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 ‘신여성의 로망과 상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구내식당의 건더기 없는 국물로 점심을 때웠다. 라면스프와 멸치 국물 두 종류를 10원에 팔았는데, 파 몇 조각 떨어뜨린 국그릇에 맨밥을 말아서 꾸역꾸역 먹었다. 옆 자리의 소시지 반찬 도시락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굶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추호의 불만도 없었다. 그렇게 공복으로 책을 읽다 보면 해꼬리가 기울었다.
도서관 4층 옥상에서 계단 아래로 종이비행기를 날리기도 했다. 폐곡선은 아름답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땅바닥이 가까울수록 종이비행기의 하강 속도가 빨라지다가 담벼락이나 운동장 어디쯤에서 비둘기처럼 고개를 쿡 박고 쓰러졌다. 외로웠다. 가끔 내 삶도 그렇듯 너울너울 흔들리다가 수직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며 자학하기도 했다. 그게 내 인생에서 종이비행기 날리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오후 세 시쯤 남산에서 무교동 중학교까지 걸어가는 코스를 밟았다.
5원짜리 학생 버스표 절약으로 스무 날쯤 때우면 십 원짜리 지폐가 지갑에 채워지기도 해서 흐뭇했다. 문제는 자꾸만 책들의 문장들이 생동생동 튀어나오는 것이다. 관우와 조자룡이 싸웠고 임꺽정의 서림이 삼국지의 의성 화타를 잡아당겨 일합을 겨누는 것이다. 하굣길 시내버스에서 등장인물들을 나래비 세워놓고 ‘얍’ ‘물러서라’를 혼자 뇌까리니 옆 자리 사람들이 ‘쟤가 맛이 갔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김연실전’의 연애 장면이 유독 진하게 자리잡은 건 사춘기 때문이다. 동일 인물인 ’곰례와 동경유학 여대생‘을 번갈아 떠올리며 달아오른 몸을 달래다 보면 햇살이 거미줄 되어 치렁치렁 목을 감았다.
유신 말기 70년대는 장발족 대학생이었다.
캠퍼스로 개나리 노란 빛이 지천으로 번지는 춘삼월이었다. 문제는 재수생 출신 신입생에게 그 지방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혼자만이 아니었다. 나는 본디 이 대학에 다닐 사람이 아닌데 하며 죽상으로 돌아다니면 다른 벗들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술청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초등학교 시절 1등의 캐리어를 지니고 있었고, 순간의 헛발질로 한 계단 미끄러졌노라고 꺼이꺼이 토로했다. 자학이 리펫되면서 술자리는 금세 진부해졌다. 철둑길 기차를 향해 굉음을 지르던 어느 날, 도서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서재의 책냄새가 예전의 향수를 자극했단 것 같다. 마치 가겟방에 처음 들어간 꼬맹이처럼 나는 여기저기 서성거리며 책장 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빼면서 냄새도 맡아보았다. 그때 B사감 스타일의 사서가.
“학생 이리로 와 봐욧.”
가방을 열어보며 히스테릭을 터뜨렸다. 책 따위를 훔칠 열정 따위는 가당치도 않았고 단지 예전의 감회를 떠올리며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책 한 권과 도시락뿐 당연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도서실에서의 싸움에는 주눅이 들어서, 작대기 하나 갓 단 이등병처럼 군기가 바짝 든 채 가방 속을 침탈당했다. (대흥동에서 대전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동생 강병준과 하숙을 하고 있어서 날마다 도시락을 넣고 다닐 즈음이다.) B사감 사서는 가방을 쏟아버릴 듯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책 좀 가지고 다녀횻.”
주근깨를 ‘빠샷’ 흩뿌리며 자신의 실책을 덮었다. 소심증 청년은 얼굴만 발개진 채.
“네.”
다소곳이 군기를 풀었을 뿐이다. ‘앗싸, 혐의가 벗겨졌다’ 총총총 계단을 내려오다가 엉덩방아 찧고 절룩절룩 빠져나왔다. 그 후 책 냄새 싸-하게 쏟아지는 그 자리로 풀방구리처럼 돌아다녔다.
광주항쟁 직후 복학생 아저씨가 되어 돌아왔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취사장 병장으로 제대할 때까지 나는 ‘광주’를 몰랐다. 엉뚱한데서 시국논쟁이 터지면서 쬐끔씩 눈을 뜨기도 했으니 벗 황재학, 권영주 등과 ‘김득구 논쟁’을 벌인 것도 그 중 하나다. 1982년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결정전이 시발이다. 헝그리복서 김득구는 라스베가스의 팰러스 호텔 특설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14회전에 맨시니와 소나기 펀치를 주고받다가 의식불명에 빠지는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애인 혼자서 영혼결혼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매스컴마다 연일 대서특필된 점이다. 벗들은 적극 옹호했고 나는 반발했다. 언론에 도배된 순애보는(사랑의 수순성을 인정하지만) 신군부의 폭압을 덮기 위한 ‘매스컴의 멜로디 술책’이라고 강하게 밀어부쳤다. 그러나 막판에.
“너도 사랑을 해봐라.”
퉁 던지며 희석시켰다. 애인이 없는 자는 순정을 모른다는 주장이다. 그 문장이 한동안 뜸했던 도서관 안착행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하긴 그 즈음 청춘남녀의 러브 스토리들을 모조리 신파쯤으로 폄하하긴 했다. 특히 도서관의 경영학과 벗들이 주로 내걸던 ‘先 공부 後 로망’의 실리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다. 성공만 예쁜 여성들 틈에서 화려하게 축포를 쏠 수 있다고 믿으며, 더 중요한 무엇을 찾아 바둥거렸다. 다시 도서관 선수로 본격 입문했다.
그 대학 도서관은 새벽 다섯 시부터 밤 11시까지 개방했었는데, 나는 4시 45분에 경비 아저씨를 깨워 15분 빨리 자리 잡았고 바둥바둥 15분을 더 버텨서 11시 15분에 마지막 퇴청자가 되어야 안심이 되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거기서 머리 처박아야 자존감이 싹텄다.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뽀드득뽀드득 어금니 깨물며 글자를 팠으니 그게 ‘도서관 도착 안심증’이다. 화창한 햇살과 음울한 회색빛 모두 차단하고 오로지 글자 수 맞추기에 몰입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남의 책만 읽는 내 모습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읽지만 말고 나도 한번 써보자. 낮에 읽고 밤에 쓰자.
복직교사로 등장한 공주 땅 그리고 중년의 사내.
‘아픈 세상 그리고 깨어있는 교사’를 자처할 즈음이다. 시국에 눈을 뜨고 최루탄 냄새에 익숙해졌는데도 자꾸 옆구리가 허전한 것이다. ‘정의와 바로세움’을 설파하는 벗들과 가슴을 나누다가도 혼자 있을 때면 ‘나 홀로 잠꼬대’에 빠지는 것이다. 그 허전함의 간극은 소소하며 깊어서 혼자서 이유를 찾아 헤매야 했다. 아무도 물상의 변화무쌍함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바가지나 주판이 벽에 걸면 장식품이 되고 고장 나면 장난감이 된다는 문장 따위는 나 혼자 훌쩍훌쩍 삼킬 수밖에 없었다. 글보다 해방세상이 우선이라는 일침을 따갑게 느끼면서 조금씩 ‘독고다이 면벽’이 굳어졌다.
주로 대학도서관으로 몸을 옮겼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는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 그때만 해도 시립도서관 출입자가 거의 없어서 호젓하고 고요했다.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피우다 보면 꽃이 피고 낙엽이 떨어지고 여름태풍과 시베리아 눈보라가 번갈아 풍경을 바꾸었다. 베란다가 금연구역이 되면서 바깥 벤치까지 연기를 뿜다 보면 부지런한 계절들이 피고 지었다. 새벽 다섯 시에 도서관에서 글을 썼고 여섯 시 삼십 분에 돌아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볶고 조이고 총총거리며 가까스로 출근 시간을 맞췄다.
아들 딸과 함께 도서관에 동행하면서 장벽에 부딪쳤다.
그 소도시 국립대학 도서관은 초중고생들만 보이면 필사적으로 쫓아내었다. 아들 딸 손잡고 행복하게 공부하려는 청사진이 공익청년만 나타나면 와르르 흔들리는 것이다. 완장 찬 사내들이 뚜벅뚜벅 걸어오면(물론 그들의 임무였으나) 중고생들은 오케이목장 소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특히 여고생들이 알타리무 종아리로 종종걸음 치면 형광등도 안쓰러워 흔들리지 못했다. 도서실에서 쫓겨난 아들 역시 대학 빈 강의실에서 몰래 도둑 공부하다가 자정쯤에 또 쫓겨나기도 했다. 당연히 완장청년들과 수도 없이 싸웠다.
“국립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도록 당연히 개방해야 합니다.”
“분실불이 많아지거든요. 그리고 잘 데 없는 불량아이들 노숙터가 된다니까요. 화재라도 나면 누가 책임집니까?”
아닌 게 아니라 새벽녘 휴게실 소파에서 새도록 널브러진 불량사탕 고교생들을 보긴 했다. 그러나 물건을 훔치거나 화재 운운은 모욕적이었다. 눈에 핏발이 섰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도 우격다짐으로 덤비기 직전이어서.
“아이를 데리고 오지 마세요.”
“당신 공부나 열심히 하시오. 멀쩡한 공부 방해하지 말고.”
“선생님을 보면 교육의 절망을 느낍니다.”
급기야 푹푹 터지는 마음으로.
“심심하면 그냥 젊은 친구 혼자 노세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고. 나도 고등학교 도서실에 있거든.”
그랬다. 나 역시 열 번 이상 학교를 옮기면서 절반 이상 도서실에 근무했고 주변의 벗들 역시 도서계가 다반사였다. ‘56년생 조’와 ‘57년생 조’가 그랬고 ‘가객 황선생’ ‘시인 유선생과 전선생’ ‘교과서 시인 최선생’ 교사문학회 ‘신, 이, 박선생’까지 모두 도서실지기로 영역을 구축 중이었다. 어쨌든 ‘나랏말 훈장’들은 저마다 영역을 지키면서 이따금 도서계 연수에서 만나 각자 화상 특유의 포즈로 딴전을 피우고 있다.
학교 도서관 보직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인터넷의 비약적 발전 때문이다. 그 현란한 정보망의 스피드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수기로 대출 기록할 때는 우수 교사였던 내가 컴퓨터 앞에서는 파죽지세로 헤매는 것이다. 간신히 한 가지를 배우고 익혀서 ‘흐유’ 숨을 돌리는 순간 새로운 시스템이 ‘요건 몰랐지’ 하며 도입되었다. ‘산 너머 산’을 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나는 도서계를 떠나기로 했다. (이건 핀트가 빗나간 얘기였고.)
지금 나는 서해안 신흥공업단지가 밀집된 소도시 아파트에 얹혀사는 중이다.
그리고 3개월 차에 우연히 단지 내 도서실을 발견했다. 회오리에 쏠리듯 ‘저 안에서 초로를 지내야 하느구나’ 하면서 전율이 부르르 오는 걸 보면 필시 천생연분이다. 어느 새 나는 경비 아저씨에게 ‘몇 시부터 개방하느냐’고 묻는 중이다.
“아저씬 누구쇼?”
뚝배기처럼 구수한 어투인데도 느닷없이 불신의 문장으로 변모할까 봐 조마조마하다. 어쨌든 겉으로는 무심한 척 5월의 벌판을 바라보며.
“여기 소재지 고등학교 국어선생입니다.”
겨우내 쌓인 눈들이 영원히 걷힐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 새 온통 초록 더께다. 하늘나라 어디쯤에서 초록 뼁끼통을 엎질렀거나 초록색 보자기로 덮어씌운 게 틀림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갸우뚱하더니.
“헤어스타일이 아닌 것 같은데 ……에이 ……선생님답게 머리 좀 다듬으쇼.”
2개월 전에 깎았으므로 괜찮은 외모인 줄 알았는데 또 홍두께 한 방이다.
“아무튼 저는 훈장 노릇 30년이 넘었습니다. 이발도 두 달밖에 안 됐구요.”
그는 너털웃음으로 여전히 자기 기획에만 몰두하는 체질을 보여준다.
“에 -, 여기 도서실은 남녀 학생이 분리되어 있는데 남학생들이 문제요, 가끔 여학생들이 남학생실 좀 정숙시켜 달라고 SOS를 치네요. 지금까지는 내가 잡아줬는데 앞으로 선생님이 동석해서 장내 정리 좀 해주세요. 대부분 선생님네 학교 학생들이니까 딱이네요. 딱. 으흐흐. 이제는 해결됐다.”
나는 몸을 풀기 위해 도서실을 찾았는데, 그가 야간자습 감독으로 임명하려 하니, 그게 동상이몽이다. 아무래도 출입이 녹녹치 않을 것 같아, 뺄까 말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