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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기호의 통섭(通涉)과 ‘마음의 꽃’
-삶의 교시(敎示)와 그 묵언(黙言)의 시학
엄창섭(관동대명예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고문)*
1. 사유의 속도와 느림의 시학
푸른 생명의 언어를 좋은 인간관계의 소통기표로 사용하여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治癒)하는 따뜻한 심사(心思)로 서로의 자존감을 존중하는 행위는 존경스럽다. 말하기보다 사유(思惟)에 몰두하여 창조질서를 세워나가며 생명외경(生命畏敬)의 존엄성을 이행하는 일에 열중은, ‘나(我)’라는 존재가 존귀한 별처럼 생명적이기 때문이다. 곤핍한 삶의 현상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고, 꽃처럼 향기로운’ 『마음의 꽃』을 묶어낸 새롭고 이채로운 여유로운 행위는 가치를 지닌 창조경영이다. 하나같이 힘겨운 시간대를 살아가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이, 소외된 이웃의 곁으로 다가가는 실체로서 누군가에게 등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지극선(至極善)을 실천궁행하는 작업은 감사할 일이다. 깨끗하고 따뜻한 사회를 위해 고독한 수행자로서 뜻을 함께 한 높은 시격(詩格)의 소유자들이 [禪文學]을 중심 축(軸)으로 아득한 정신풍경에 삶의 ‘체득, 자성’ 등을 배경지식(schema)에 담아 눈물겹게도 감동의 회복으로 풀어내고 있다.
힘겨운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 필연적인 연(緣)이 닿아 모처럼 서로의 뜻을 함께 묶어 세속에 몸담은 이들을 위하여 깊은 사유를 통한 시문을 담백하게 꽃 피워 정신세계에 평안을 안겨주고 있다. 이 모임의 회장 일을 고맙게 수행하면서 스스럼없이 따뜻한 정신기후를 조성하는 원경 스님의 맑은 선시의 지평을 꼼꼼히 탐색하는 일상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유의미하고 보람 있는 예술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비워진 연못 속에 연꽃이 피고/물망초들이 푸르게 펼쳐 있고.//
아직 새순으로 그 환상을 드러내지 못하는/산목련의 합장은/채 해 떠오르기 전 새벽녘/단 꿈과도 같습니다.//
-<봄날 아침>에서
여명(黎明)이 걷혀 아아한 산자락이 심상(心象)에 선명하게 채색된 <봄날 아침>이나 담백한 시격(詩格)으로 “물빛은/고운님의 얼굴인양 맑고/꽃 볼은 수줍은 소녀인양 해맑아/가만 가만 발길 옮겨 돌면/떨군 꽃떨기 함께 따르고”라는 칙칙함이 말끔 씻겨난 <심곡암 4월>에서 발현되는 섬세한 시선(視線)은 투명하다. “꽃 보러 오는 이 없고/불러도 올 길이 어렵네.//저물녘 스산한 찬비/어둡게 나리고.(연일 비는 내려)”에서 명증되듯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지극히 자연친화적이되 순수서정미를 극명하게 열어 보이려는 지난한 애씀은 마침내 새로운 생명력을 발아시켜 <그대 나에게 숨결을 주오>나 <꿈 빛>에서 더없이 눈부시고 현란한 시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천지는 크되/나의 숨결도 채워 주지 못하나니.(그대 나에게 숨결을 주오)”나 “꽃 보단 꽃 그림자가/달보단 달빛 물그림자/더더욱 환희롭게 하나니(꿈 빛)처럼 자연의 순차(循次)를 거역하지 아니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허함, 깨끗한 투명성, 어울림의 유연성, 그러나 물과 기름의 융합을 거역한 공명정대하되 나뭇가지 끝으로 차 오르는 물의 생리(生理)’를 삶의 교시(敎示)로 일깨우는 원경 스님의 시작행위는 경이로움이 앞선다. 삶의 현장에서 인간의 고통과 번뇌를 몸소 체득하며 절박하게 토해 놓은 정제(淨濟)된 시문의 편린(片鱗)들은 인도의 격언에 “승려와 시인이 살이 찐다는 것은 그 사회가 불행하다.”는 그 가르침은, 지난(至難)한 현실 속에서도 불도의 세계에 정진하는 수행자라면 중생이 겪는 세대고(世代苦)에 사랑의 불을 짓 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인 행담 스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불안, 초조, 조급함에 익숙한 대다수 이 땅의 시인들에 비해 수행자로서의 그는 “황간(黃侃)의 유인(遊刃)에 견주어 예술의 품격을 향유할 줄 아는 천성적 시인”으로서 깊은 사유(思惟)와 삶의 현장에서 나태주의 <풀꽃> 같은 섬세한 사물의 응시에 의해서야 인간소외의 경계가 무너짐을 공감하고 있다. “존재의 깊은 색을 채우고//공약하지 않아도/허공의 순한 빛깔로/붉은 점 하나 찍었다(산수유)”나 “한낮에 작별한 낮달이/푸른 시간을 변형 시킨다/혼돈, 그리움, 이별/그리고 못내 절규다(푸른 시간)” 행담 스님의 일상적 삶은 마음의 꽃을 피워내는 몰두로 일관되어 더없이 빛난다.
“한낮 푸른 하늘 흰 구름 그림자/바람의 속도를 거스른다/작은 오솔길 따라 숲속/꽃들이 동행을 한다.(일소굴 가는 길)”에서 확인되듯 ‘일소굴 가는 도정(道程)’에서도 내면의식의 이법을 깨닫기 위하여 용맹 정진하는 수행자의 맑은 정신에, 때 묻지 않은 ‘푸른 하늘의 구름, 한 줄기 바람, 오솔길, 꽃들의 날개 짓’이 ‘먼 산 비껴 앉은 화엄의 풍요’로 담백하게 접목되는 현상은, “눈 속 나그네의 걸음이 바쁘다/여보게, 불이문(不二門)에/온통 순은(純銀)이 현란하네 그려(나그네)”에서 놀랍게도 미적주권을 확립하여 순백의 영혼 같은 순은으로 현란하다가 일순 득도의 황홀을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순수서정의 시격(詩格)으로 응축미를 살려내어 선시의 세계를 감미롭게 읊어내는 수산 스님은 <회향 길>에서, 마침내 한 사람의 진정한 구도자의 절박한 소망을 때로는 ‘피어오르는 향불’이거나 또는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기를 마음의 틈새를 열어가며 풀어낸 까닭에, 삶의 고뇌를 정화시켜주는 시적 역동성이 인식의 심부(深部)에서 불러내는 그만의 지극히 섬세한 오감의 접목과 몰입으로 놀랍게도 잇닿아 있다.
득도(得道)의 세계를 지향해 불전에 꿇어 엎드린 수행자로서 감당해야할 육체적, 정신적 갈등과 번뇌를 거짓 꾸밈없이 그의 선시 <회향 길>을 통해 자아의 진면목(眞面目)을 시적 형상화로 빚어 놓은 수산 스님의 이 같은 심적 발현(發現)은 설득력을 지닐뿐더러 인간적인 그의 친근한 일면은 <푸념>에서도 현현되고 있다. “힘겨움, 서러움, 긴 한숨도/이젠 모두 내 벗이다”는 가히 그의 시편 중 절창(絶唱)에 해당한다. 비교적 시어의 애매 모호성이나 난해함과 격을 달리하는 그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감정에 상충됨이 없이 친밀감을 불러줄 뿐더러, “그냥 바닷가 바위처럼/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 듯/그렇게 살아가면 되지(그냥)”나 “물소리 바람 소리/그대 가슴에 깨우침의 죽비의 소리여(수행)”에서는 그 실체가 선명한 시적 현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편, 그만의 ‘냄새, 육성, 기질, 느낌’을 가감 없이 해학적으로 풍자하여 우주를 관통하는 석연화 스님은, 일군(一群)의 시인들 중 톤이 굵은 편이다. “구름을 머리에 이고/좌선 한 체 눈을 감았다(팔공산 갓바위)”에서나, “사유하는 마음/천지를 품은 미소(부처의 미소)”에서의 시행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특히 정신적 생산물인 그의 시편에서 언뜻언뜻 잠식의 파상이, 불심(佛心)의 편린(片鱗)으로 형상화되지만 자유로운 바람처럼 고정된 관념을 허락하지 않는 점에 유념하고 있다. 큰 틀에서 불타(佛陀)를 축으로 윤무(輪舞)하고 있지만, <어느 날 생각>은 이 같은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충분조건이 된다. 또 시적 질료가 대조적이나 상충되지 않는 면은 “가질 것도//버릴 것도 없는/이래라 저래라 할 것도 없는 자유//그것이 무소유로다(무소유)”에서 “소유는...../끝없는 탐욕의 종자이다.(소유)”는 자못 흥미로운 발상이다.
그 자신의 심상을 시편에 형상화 시켜 놓았듯이,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날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날개를 만들어낸다.”라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지적처럼, 주어진 창조적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시적 상상력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그 같은 연고로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수행자들은, 감내하기 힘겨운 세상의 질고를 온몸으로 이겨내되 “차라리 해가 뜰 때 눈을 감고 싶다(번뇌)”처럼 주어진 운명 앞에 절망하지 말고 창조적인 시인정신을 올곧게 지니고 사념(邪念)을 과감하게 불태워야 할 것이다.
장르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한시(漢詩)를 자기합리화로 수락하고 있는 도암 스님은, 순수서정성을 시종자로 발아시키고 있어 그 양상이 <白蓮>에서 쉽게 발견되고 있다. “계곡 흐르는 물줄기 선사에 기도 발원이기에/들! 중생 마음에 화엄의 빛 종자를 찾게 하네.(白蓮)”는 그 나름으로 한시의 정형성에 담겨진 글의 형태나 수용된 시 의미에 미적주권이 확립된 점은 주시할 바다. 그러나 한․일 간의 첨예한 정치현안으로 비화되고 있는 <獨島>에 대한 이해와 강한 역사의식을 불굴의 신념에 담아 격한 어조로 노래하는 그의 시적 행위는 충직한 독자의 가슴을 저미기에 실로 눈물겹다.
세속을 떠나 바람 끊긴 적요(寂寥)의 산사에서 머물며 수행의 길을 걷는 실체이면서도 “옛! 조상부터 지켜온 독도 하늘 바다도 아는 것을/獨島는 大韓民國 領土임(獨島)”을 의도적인 높은 육성으로 주장하는 도암 스님의 시적 미감을 주의 깊게 탐색하면, 미국의 독립영웅 나탄 헤일이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라는 역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역사의 정체성이 외면당하고, 열악한 국어교육이 홀대받는 일상에서 국민으로서의 최소한 자존감을 상실했다면 우리에게는 축복받을 미래가 보장되지 않을뿐더러 더 이상의 창조도 있을 수 없는 까닭에, “太白 젓줄 한강천리 긴 세월(漢江)”이나, “바다는 밝음을 탐해 깊은 적막 어둠에 무명을 남기고(落照)”에서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변형의 인자(因子)로 작용하는 것이다.
특히 비정한 사회현상에서, 오랜 날 불도에 정진한 수행자이면서도 존경스럽게 역사의 정체성(Identity)을 지속적으로 항변하며 ‘대륙의 심장’을 지닌 [선문학]의 고문인 혜민 스님은 불운한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실학자·서화가의 길을 걷던 완당(阮堂) 김정희에 관한 깊은 애정과 관심, 그리고 자긍심을 지니다 극명하게도 <阮堂頌>과 같은 도도한 서체의 맥을 시의 꽃으로 피워내기에 이른다. 그 자신이 수십 년을 묘소에 다도(茶道)를 올리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다 대하(大河)처럼 쏟아낸 “다만 용궁 고택 뜰 앞에/石年이 무심할 따름이니/삼십년 만에 썼다는 梣溪를/누가 헤아릴 수 있겠나.(완당송(阮堂頌))”의 예시처럼, 종교의 진리와 평화의 통섭을 강조하며 ‘바람처럼 자유롭고, 꽃처럼 맑고 향기로운 시혼의 소유자로’ 서도에도 조예가 깊은 혜민 스님은 “타락한 무리들의 영혼을/자비로 감싸주고 있으니/이름하여 그대 이름은/신의 어머니 라지브(라지브)”와 같이 휴머니즘적 경향을 몸소 실천궁행하면서도 초지일관,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인 ‘弘益人間의 精神’을 뜨겁게 불태우며 웅변적인 톤으로 토해내고 있다.
“아침의 땅 조선이 백두산에 뿌리를 내려/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아무르강의 은빛 물결이/배달과 홍익인간을 노래했었다(해맞이)”가 장엄한 민족의 서사시로 확증되듯이, '원시의 신비를 간직한 광활한 대륙의 축복을 받으며 그 장엄한 민족의 역사는 시작했었다'로 그 응축미가 드러나고 있다. 차지에 세계화 인식의 오류로 민족의 역사요, 문화인 국어에 대한 관심이 퇴색된 현상에서 “시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로 정의한 『25時』의 게오르규가 “어떤 고난의 역사도 결코 당신들에게서 당신들의 아름다운 시와 노래와 기도를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왕자의 영혼을 지니고 사는 여러분! 당신들은 세계가 잃어버린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역설은 못내 심장하다.
2. 시인의 해명과 응시(凝視), 그리고 자아회복
오래된 성채(城砦)처럼 세월의 격랑을 잘 견뎌내며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작은 일상에서도 가슴 저며 오는 서정의 미감을 이렇게 맑은 영혼으로 빚어낸 건강한 행위는 감사할 일이다. 뒤늦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연이 닿아 [선문학]동인으로 뜻을 함께 하여 시의 꽃을 현란하게 피워 내고 있는, 묘광 스님은 ‘고통 받는 타자(이웃)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상징적 의미’를 음미하게 하는 작위이기에 숨죽임의 긴장 뒤에 생성된 정신적 집산 물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이지만, 그와 일체의 교감은 상처 받은 영혼에 내적 치유(healing)를 안겨주는 행위에 해당된다.
“내 코에 베인 그대의 향기가/바람이 되어 내게로 오고(사랑하나)”에서나 또는 시적 미감이 빛나는 “사랑 때문에 미움이 생긴 나에게/욕심으로 채워진/괴로움으로 우는 나에게 다가선다(새벽종소리)”에서나 “어머니를 생각하면/눈물이 적셔져/돌못 산 저 노을 속에/어머니 아름다운 모습을 숨겨 놓는다(옛 생각)”에서 확인되는 생명의 본체로 ‘바다(海)’와 연계된 모성은, 태고가 묻어나는 눈물이거나 아름다운 실체, 또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의 시편에 수용되고 있다.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시인은 세계고를 감당하기 위하여 세상의 극간(極艱)을 비집어야 한다. ‘정진, 존재, 禪의 세계, 수행자’와 같은 시제(詩題)를 축으로 홀로 사유하고, 시각화의 기법에 의한 시적발상이 불심(佛心)에 뿌리내려 순리 거스르지 않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존재감과 결속되고 있다.
한편, 청우 스님의 창조적 행위는 수수서정의 미적주권으로 확대기에, 가식이 없는 그의 정직한 섬세함은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시적 기교가 ‘깨달음이 선행되고 수행이 뒤따르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상을 변형시켜 끝내 빛나고 경이롭다.
부끄럽지 않은 먹빛 삶/경계를 이해한 채/자아를 달음질하며/옳고 그름 모두 품을 수 있어/마냥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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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명기호의 통섭(通涉)과 ‘마음의 꽃’ 잘 보았습니다
여명(黎明)이 걷혀 아아한 산자락이 심상(心象)에 선명하게 채색된 <봄날 아침>
멋진 표현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