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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을 사색한다(1)(한홍구교수 )
2016년 1월 15일 오후 9시 30분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서울 목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성공회대학교 후배 동료인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지난 2006년 신 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그의 삶을 회고하며 쓴 글을 '추모의 글'로 싣습니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놓은 것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정년을 맞는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조그만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의 삶을 정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뵙는 사이에 정색하고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부분도 캐물어야 하는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살아내신 한국 현대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 한명숙 총리의 지명을 계기로 그의 부군인 박성준 교수의 전력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서 박성준 교수의 '상부선'이기도 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버렸다.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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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을다스리는조선인총독이된다는
장래희망이 ㅡ
포부가 남다른 얘깁니다.
한홍구님 귀한 자료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