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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으나, 30~40여 년 전에는 주산학원이 매우 인기가 있었고, 초등학생들부터 학원에 주산을 배우러 다니곤 했었다. 주산을 배우면 머리 회전이 좋아지고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인해, 당시에 주산 학원은 성황을 누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주산학원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부터는 그 자리를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배우는 컴퓨터 학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주산학원이나 컴퓨터학원이나 모두 다 까마득한 이야기로 치부될 것이다. ‘주판’은 이미 사용되지 않는 도구이기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끼적여 보았다.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는 유학의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며, 때문에 그것은 흔히 도덕적인 가치를 제시한 문헌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주판’은 무엇인가를 계산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이기에, 요즘에는 ‘전자계산기’ 혹은 ‘컴퓨터’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예전부터 사용되던 ‘주판알을 튕기다’라는 관용구에는 냉철하게 상황을 따져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단어를 통해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에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판’이 상업 혹은 경제를 의미한다면, 경제 행위를 하는데 있어 <논어>로 대표되는 유학의 이념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을 들어내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실제 이 책은 사업가인 저자가 자신의 행동과 삶의 원칙을 유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일본의 경제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면서, 왜 제목에 ‘주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일본 자본주의 기틀을 만든 시부자와 에이치’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경제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도 도덕적 원칙을 지니고, 공존의 가치를 역설하는 저자의 태도를 통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경제의 일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저자의 철학이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의 일본 경제관념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상공인들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한국 재벌들의 그것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상도덕’이란 용어도 경제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도, 도덕적인 가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도덕을 이야기하는 책과 상인의 재능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본래 상인의 재능도 도덕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고위관료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경제계에 뛰어든 후 <논어>를 수차례 읽으면서, 이를 통해 사업가로서의 교양을 쌓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 책에는 곳곳에 <논어>의 구절들이 제시되면서,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해석들이 곁들여 있다. 이처럼 <논어>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자 자신의 경제 철학과 사업에 대한 인식들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때로는 당시 일본 사회의 특권 의식과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표출되고 있으며, 서양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외국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다양한 소감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의 경제 철학에 대해 접하면서, 왜 저자가 지금까지 일본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처세와 신조’, ‘입지와 학문’, ‘상식과 습관’, ‘인의와 부귀’, ‘이상과 미신’, ‘인격과 수양’, ‘주판과 권리’ 등 모두 7개의 항목으로 정리하여, 저자의 인식과 경제인으로서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각 항목을 마무리하면서, ‘핵심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해당 부분의 내용들을 요약하고 있다. 처음에는 <논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오히려 경제인으로서의 저자가 제시한 철학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야할 바람직한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저자의 철학에는 <논어>가 바탕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 그 자리에 자신의 철학을 대표할 다른 대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단지 <논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채워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그것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존의 가치를 전제하고 있을 때 더욱 소중한 철학이 될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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