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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왕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해당 인물이 죽은 후에 재위 기간의 활동에 대한 내용과 평가를 서술하여 정리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의 원본이 되는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항상 왕 주위에는 두 사람의 기사관을 두었고, 그밖에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따로 정리한 다른 기록들까지 참고하여 실록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기록들은 역사 기록의 초고라는 의미에서 ‘사초(史草)’라고 칭했으며, 왕이 죽은 후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초를 정리하여 재위했던 시기의 역사를 ‘실록’이라는 형식으로 구성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의 472년 동안의 기록들이 약 9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고종과 순종의 기록도 남아있지만,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정리되었기 때문에 정식 ‘실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된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국보 161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분량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기록의 중요성을 실증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을 건국했던 태조 이성계의 치세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가지 25명의 왕과 그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실록 편찬자가 아니라면 사초를 보거나 실록의 편찬 과정에 간여할 수 없도록 했는데, 이는 실록 편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었다고 하겠다. 비록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이와 함께 다양한 기록과 개인들이 남긴 자료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역사를 어느 정도까지 재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왕의 기록, 나라의 일기’라는 이 책의 부제는 <조선왕조실록>의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고 하겠다.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후대 사람들이 역사책을 거울로 삼아 보다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을 만들기를 바랐’던 의미를 실록은 정확히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잇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림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실록의 편찬 과정과 의미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실록은 ‘조선을 다스리는 정치에 관한 내용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임금과 주고받았던 신하들의 말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임금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일부 관료나 백성들은 상소문을 써서’ 올리기도 했는데, 이들 ‘상소문 또한 임금이 내린 답과 함께 실록에 기록’하였다. 이처럼 상세한 기록을 전하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의 정치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재구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먼저 평소에 왕의 행동과 말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임금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같이 있었’던 사관(史官)들의 존재가 주목된다. 임금을 말과 행동을 빠르게 기록해야 했기에, 사관은 항상 2명이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들이 기록한 내용과 사관들이 느낀 바를 정리한 자료들을 일컬어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라 하여 사초(史草)’라고 지칭했으며, 공정한 기록을 위해 사관들의 사초는 임금조차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당 임금이 죽으면 실록을 만들기 위한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세우고, 실록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모아서 적지 않은 관원들이 참여하여 여러 번에 걸쳐 검토하여 실록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실록은 화재나 분실 등의 염려로 인해서 4권을 만들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고(史庫)에 분산시켜 보관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보관 방법 때문에 전쟁이나 화재 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훼손을 당한 경우에도, 완전한 실록을 다시 베껴 지금까지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그림과 함께 소개하는 내용이라,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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