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품이 되어 돌아오는 어머니
양재일(시인, 본지 발행인 겸 주간)
겨우내 새끼 세 마리를 데리고 내 집을 찾아와 밥을 먹고 가던 어미 고양이가 허락도 없이 자식들을 고아원에 던져놓고 가듯 내 집에 버려두고 한 달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웃의 빈 집에서 어미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녀석은 제 새끼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고마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꼬리를 들고 다가와 제 다리에 스킨십을 했습니다.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멸치 한 주먹을 뒷춤에 감추고 새끼들에게 뿌려주며 어미가 있는 집으로 유인했습니다. 어미의 젖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듯한 녀석이 꼬리를 들고 어리광 묻은 울음을 울며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처럼 제 어미에게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어미는 굶주림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자식을 피부 빛도 눈동자의 색깔도 다른 해외로 입양을 보내던 우리 어릴 적 어머니들처럼 어금니를 악물고 눈물을 깨물며 돌아섰습니다.
새끼들이 어미를 쫓아갔습니다. 눈물길을 만들며 달려가던 어미가 속도를 줄이며 새끼들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어미는 식당에 갈 때마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먹잇감을 챙겨와 밥을 주는 나의 사랑을 잊지 말고 잘 살라는 눈빛을 새끼들에게 남기며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 어미는 100여 미터 거리에 자식들을 두고서도 스스로 지뢰밭을 만든 후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함께 굶느니 자식들 배곯게 하지 않으려고 내 고아원에 버려두고 모성애마저도 지워버린 길냥이들의 어미를 보며 어릴 적 해 질 무렵, 손나팔을 하고 수제비 불어 터진다고 우리들을 부르던 어머니의 슬픈 목소리가 수제비, 수제비, 수제비 하며 메아리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막냇동생 직장 따라다니며 밥해주고, 맞벌이하여 빨리 살림 불리라고 손자들 키워주며 칠십 년 세월을 소진해버려 이제는 물만두 피皮 같은 살만 삭정이 같은 뼈에 붙어있는 어머니, 어느 날부터 한 공간 안에서 유리벽에 갇힌 채 남처럼 살던 아흔여섯 어머니는 1분 1초가 지옥 같다는 막냇동생 가족들에게 떠밀려 칠십대 중반 독거노인인 내게로 반품이 되어 돌아옵니다.
어머니 젖 얻어먹고 자란 은혜 갚음을 해야 될 것 같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머니와 소꿉장난을 하며 살려고 합니다. 때로는 혀 짧은 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며 어머니를 엄마로 부르렵니다.
3월 말이 어머니의 반품 날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어머니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걸고는 3월 한 달 동안 어머니의 옷가지를 넣어둘 서랍장과 콩쿨 대회 때마다 일등을 했다던 어머니를 위해 노래방 기기를 준비했고 안마 기계도 마련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화목난로에 불을 피워 찜질방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참나무 장작도 한 트럭 사서 쟁여놓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황금심의 ‘홍콩 아가씨’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틀어놓고 어머니와 노래를 부를 것이며 마당에 상추, 쑥갓, 아욱, 오이, 가지, 딸기 등을 심어 어머니의 작은 농장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따금 여행을 갈 것입니다. 출발 전날엔 어머니께 멀미약을 먹여 어머니의 멀미를 잠재운 후 한계령을 넘어 동해안 바닷가에서 회를 먹을 것이며 어머니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여행의 추억을 만들 것입니다.
눈이 올 때마다 마당 한켠의 평상과 장독 덮개로 쓰는 가마솥 뚜껑 위에 손자 손녀의 이름을 쓰고 때론 딸의 이름도 써서 카톡을 보내곤 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일 수도 있는 낭만파 할아버지이고 애비인데 내가 보낸 편지는 늘 답장이 없었습니다. 카톡이 잡초처럼 무성하다 보니 솎아내어 읽지 못했을까요, 손자 녀석들에게는 내 피가 즈이 엄마 피보다 묽기 때문일까요?
이제는 손자 손녀들의 이름 대신 어머니의 이름을 쓰고 하트를 그려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보낼 것입니다.
며칠 전, 봄에 쫓겨가던 겨울이 마지막 눈을 뿌리며 툰드라 어디로 사라졌습니다. 눈에 덮인 평상 위에 어머니의 이름을 쓰고 하트를 그렸습니다. 고독이 깊었을까요? 전화를 넣을 때마다 신호음이 한 번만 울리면 받으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휴대폰이 없습니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의 효도폰을 사러 가야겠습니다. 내가 외출할 때는 기린 목이 되어버릴 어머니가 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고 투정을 할 만큼 전화를 드릴 것이며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려고 합니다.
카메라가 귀중품이던 우리 어린 날엔 이동사진사가 동네를 돌며 사진을 찍고는 잊어버릴 만하면 골목을 쓸고 간 바람처럼 나타나 인화된 사진을 건네고 돈을 받아 갔습니다. 그런데 해묵은 앨범을 다 뒤져봐도 어머니의 흑백사진은 단 한 장도 없습니다.
그 시절엔 사진 한 장이 밀가루 반 포대 가격이었습니다. 어머니께 사진을 찍자고 철없는 소리를 하면, 어머니는 기미 낀 얼굴에 어인 사진이냐는 말로 우리 가족의 빈곤을 묻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머니보다 스무 살도 더 많은 큰이모님이 아흔셋, 그 밑의 작은이모님이 아흔넷에 가셨으니, 장수 집안의 DNA를 가진 어머니보다 내가 먼저 저승으로 가 어머니의 십자가에 대못 하나 더 박을까 두렵습니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도, 아니 우리도 언젠가는 반품마저 받지 않으려는 자식들에게 인연의 탯줄마저 끊긴 채 요양원에 버려질 것 같은 예고편을 미리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큰딸이 세 살 무렵 아내는 젖 냄새도 지워지지 않은 녀석의 자립심을 키워야 한다며 아이를 독방에 보낸 후 우리 방의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아이는 밤새 문을 두드리며 어린 짐승처럼 울다 목이 쉬어 누군가에게 유기된 애완견처럼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단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제는 엄마가 아니라 딸이 되어버린 나의 엄마가 요양원에 간 첫날 밤, 내 딸아이처럼 울다 안락사를 기다리는 짐승처럼 잠들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