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김경미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결심을 베이커리처럼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건 나의 결심들
가령 하루를 스물네 개로 치밀하게 조각내서 먹는
사과가 되었다든지
밤 껍질 대신 뼈를
혹은 뼈 대신 고개를 깎겠다는 것
사람의 양쪽 얼굴에는 국자가 달렸으니
무엇이든 많이 담아 올리리라
국자가 아니라 손잡이라든가
그렇다면 뭐든 뜨겁게 들어올리리라
여하튼 입을 벌리고 살지 말자
나를 나보다 더 잘아는 건 결심들
한밤의 기차에 올라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입안이 감당 안 되는 느낌처럼
무엇보다 창피한 건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이상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소원
다람쥐가 되게 해달라고 빌면
간판의 두 글자가 떨어져 나가
쥐가 되고
지난날을 돌아보지 않게 해 달라면
목이 안 돌아가고
사람 품을 그릇을 달라고 했더니
금 간 유리 그릇을 주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항상 구석에 서 있었더니
영화관 맨 구석자리
화재경보시 바로 옆이 비상대로였다
구분법
염소와 양을 구분하는 방법은
뿔이 있고 없음
화가 났을 때
엉덩이를 쓰는지 머리를 들이받는지
온순이 먼저 인지 고집이 먼저 인지
나와 양의 구분법은
양들은 단체로 빽빽이 앉는데
나는
옆구리에 살처럼 찰싹 붙는 거
가방을 싫어해
인질극이 아니라면
멱살 잡는 게 아니라면
간격
화가 났을 때
나이나 반말이나 뿔과 엉덩이 말고
간격을 쓰는 것
제일 좋은 접근법이자 구분법이다
카페 게시글
시집 속의 시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김경미/민음사(2023)
양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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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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