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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琴易堂 裵龍吉
公의 諱는 용길(龍吉), 字는 명서(明瑞) 號는 금역당(琴易堂)이다. 임연재(臨淵齋公)의 첫째 아들로 명종 11년(1556) 병진(丙辰) 9월 18일에 안동부(安東府) 치소(治所) 서쪽에 있는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과 자질이 영특하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15세 때에 춘추강목(春秋綱目) 80권을 보름만에 암송하였다. 부친인 임연재(臨淵齋)께서 중간중간의 내용을 물으시니, 금역당은 거침없이 옛 時代의 치란(治亂)과 人物의 현부(賢否)를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다. 평소 『孟子』를 즐겨읽었는데, 금역당의 문체(文體)는 의기(義氣)가 있어 작은 일에 구속되지 않아 자유자재(自由自在)하였고, 그 문장(文章)은 고상(高尙)하고 깨끗하며 건실(健實)하였다.
●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 선조 21년(1588) 무자(戊子)에, 구황(救荒)의 특명을 받아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된 부친 임연재(臨淵齋)을 따라 가셨다. 당시 임연재는 병이 있으셨으나 황해도 각지를 돌며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하다가 임지(任地)에서 돌아가셨다. 당시 황해도 내에서 부의(賻儀)가 매우 많이 들어왔는데, 당시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 김익현(金翼賢)은 부의(賻儀)로 들어온 재물을 배에 실어 집으로 보내주려 하였다. 그러나 금역당은 부친의 상(喪)으로 치부(致富)할 수 없다 하면서 받은 물품을 되돌려주게 하였다.
● 선조 25년(1592) 임진(壬辰) 4월에 왜란이 일어나서 온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로 영남(嶺南)에 내려오셨다. 이에 금역당은 앞장서서 안동 향중(鄕中)에 즉시 통문(通文)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근시재 김해(近始齋 金垓)의 의병과 합진(合陣)하였다. 근시재(近始齋)를 안동향병(安東鄕兵)의 대장(大將)으로 추대하고 금역당은 낙금헌 이정백(樂琴軒 李庭栢)과 함께 부장(副將)을 맡아 의병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안동향병은 용궁(龍宮) 전투에 서 패전하고, 경주 진중(慶州 陣中)에서 대장 김해는 돌아가셨으며, 금역당에 몸에 병이 생겨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금역당은 전쟁에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셨으나, 충의지심(忠義之心)은 굉장(宏壯)하셨다.
● 선조 27년(1594) 갑오(甲午)에 조정에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의 벼슬이 내려졌다. 옛날 정해년(丁亥年, 1587))에 부친인 임연재(臨淵齋)께서 명(明)에 사신으로 갈 때, 하인(下人)의 잘못으로 경인년(庚寅年, 1590)에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셨다. 이후 금역당이 신원소(伸冤疏)를 올려 직첩을 돌려받았다. 明年(1595)에 벼슬이 체직(遞職)되었다가 복직되었고, 시직(侍直)으로 옮겼다가 가을에 부솔(副率)로 옮겼다. 이 당시에 받은 벼슬은 모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소속이었다.
● 선조 30년(1597) 정유년(丁酉年) 조정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본과의 화의(和議)에 대한 공론(公論)을 듣고자 하였다. 이때 公이 상소하여 화의가 불가함을 7개조(七個條)를 들어 주장하였다. 또 임금이 세워야 할 대본(大本)과 지금 힘써야 할 급무(急務)를 6조(六條)를 들어 상소하셨다. 두 차례에 걸친 상소문이 조정에 들어가 직성(直聲)이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 선조 31년(1598) 무술(戊戌)에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그때는 임란(壬亂) 직후였기에 역로(驛路)가 허물어져 있었다. 비용을 줄이고 기강을 엄히 세우니, 역민(驛民)들이 두렵게 생각하면서도 앙모(仰慕)하였다. 공이 가역(家役)을 시작하니, 역민들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와서 일을 돕고자 하였다. 이에 공이 엄하게 꾸짖으니, 역민들은 새끼를 꽈놓고 모두 돌아갔다.
● 선조 35년(1602) 임인(壬寅)에 별시방(別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 선조 36년(1603) 계모(癸卯) 3월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몇 달 뒤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모친을 뵈었다. 6월에 또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검열에 있었던 기간은 5개월이었다. 임금이 경연(經筵)에 오실때에 공은 바른말과 공명정대한 공론(公論)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을 분발하게 하였다[無非格君心而激筵臣]. 당시 선조 임금이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 지은 효경발문(孝經跋文)을 강(講)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권근(權近)은 ‘충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효를 알겠습니까[不知忠安知孝]’라고 하니, 임금 이 강(講)을 그만두게 하였다.
● 선조 38년(1605) 을사(乙巳)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除授)하고 병오(丙午)에 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고향에 수년동안 있으면서 장육정사(藏六精舍)를 지었다. 여기에 송조 7현(宋朝 七賢)의 화상(畫像)을 걸어놓고 매월 초하루에 생도들을 모아 향을 피우고 재배(再拜)하며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講)하고, 술을 부어 술잔을 차례로 돌리고 이남(二南)의 詩를 읊었다.
● 선조 40년(1607) 정미(丁未)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의 벼슬을 받았다. 이때 천아(天鵝)를 진상하는 것이 호서지방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는데, 금역당께서 순찰사(巡察使)에게 글을 올려, 천아(天鵝)의 진상을 그만두게 하였다.
● 선조 41년(1608) 무신(戊申)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 선조 42년(1609) 기유(己酉) 5월 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54세였다. 그해 9월에 임하현(臨河縣) 도목촌(桃木村) 우모동(寓慕洞) 자좌원(子坐原)에 장례하였다.
● 인조 8년(1630) 경오(庚午)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춘관수찬관(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의 직첩(職牒)이 내렸다.
공(公)은 성질이 강명엄정(剛明嚴正)하고 재기초매(才氣超邁)하여 어릴 때부터 명예와 절조(節操)에 부지런히 힘썼다. 자신의 바른 뜻을 굽혀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가지 아니하였고, 이름을 더럽힐까 경계하고 반성하였기에, 당시 사람들은 봉황(鳳凰)이 천길을 날아 오르는 기상(氣像)이있다고 말하였다.
퇴계선생이 도산에서 강도(講道)하셨으매 공은 나이가 어렸으나 향모(向慕)하였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불행히도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는지라, 임연재(臨淵齋)께서 퇴계 선생에게 전수받은 것을 받들어 닦았다. 또 일찍이 학봉(鶴峯)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고, 때때로 월천(月川), 서애(西厓), 비지(賁趾)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송소(松巢) 권우(權宇),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등의 선생들과 같이 학문을 토론하며 닦아 나갔다. 이를 통해 공의 학문이 그 근원(根源)을 짐작할 수 있다.
재상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소생(小生)의 자부심이 졸렬한 것일지라도 꺾이지 않는다면 재상의 집안에 객(客)다운 객이 있을 것이고, 상공(相公)이 능히 수용하신다면 재상에게는 인재(人才)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선비가 재상에게 굽히거나 재상이 선비에게 굽혀야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亢拙不屈則相門有客 相公能容則宰相有人 曷嘗見士屈於宰相 宰相屈士而天下治乎]라고 하였다. 이런 기상을 가졌기에 문과에 급제하지 않았던 낮은 관료(官僚)였으나, 임금의 실책(失策)을 빠짐없이 상소하셨으니, 하급관원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임금의 하문(下問)에 서슴없이 직언(直言)을 하였기에,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고 전한다.
공이 또 윤리(倫理)와 기강(紀綱)에 독실(篤實)하였다. 6세에 모부인(母夫人)이 감두(㔶頭)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감두는 노인이 쓰는 것인데 어머니께서 벌써 늙으셨나요?”라고 하셨다. 평소 생활할 때에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참고하시고, 퇴계(退溪)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의 제사의식(祭祀儀式)을 정하였다. 중삭(仲朔. 25811)이 되면 반드시 가묘(家廟)에 제사을 지냈는데, 그 의례(儀禮)와 제물(祭物)이 가지런하고 깨끗하였다. 집안을 예법(禮法)과 검약(儉約)으로 다스려서 자제(子弟)가 옆에서 모실 때에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였다. 평소에는 조용히 앉아 경서(經書)나 전적(典籍)을 보시면서 이치를 생각하시고, 몸소 실천하기에 힘을 쓰셨다. 또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셔서, 천문·지지·역법·병전·참동계·의방(天文·地誌·曆法·兵典·參同契·醫方) 등을 모두 깊이 이해하셨다.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造詣)가 깊어 당시의 명사(名士)들이 많이 찾아 오셨다.
선조 36년(1603) 계묘(癸卯)에 조정에서 역해국(易解國)을 설치하였다. 그때 공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계셨는데, 부모를 뵙기 위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래서 판서 김시헌(判書 金時獻)이 공과 함께 선임되지 못한 것을 많이 애석해하였다.
공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도 말씀하시는 것이 간항(簡亢)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의리(義理)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또 입효출제(入孝出悌)하며 시속(時俗)의 속된 행실과 말을 하지 않으시니, 같은 고을의 동네 사람이라도 하더라도 공에게는 공순(恭順)하였다. 옳지 못한 것을 보시면, 준척(峻斥)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상례(喪禮)와 장례(葬禮)의 예절을 삼가지 않는 것을 보면 사족(士族)이라도 풀을 베는 목동이나 소를 키우는 늙은이로 대하였고, 선(善)한 일을 보면 반드시 칭찬하고 인정해주셨다.
일찍이 풍수변(風水辨)을 지었다. 천하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효자는 순(舜) 임금과 주공(周公)인데, 고수(瞽瞍)나 문왕을 장사지냄에 풍수설(風水說)에 따랐다는 기록이 없다. 이로 볼 때 풍수설은 곽경순(郭景純)이 처음 내놓은 말이며 문서라고 하셨다. 곽경순이 형육(刑戮=死刑)까지 당했는데도, 풍수설(風水說)의 황홀(恍惚)하고 거짓된 주장이 유행하여 걷잡을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라고 하셨다.
또 도생서당(道生書堂)을 창건하여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본립도생(本立道生)’의 뜻으로 기문(記文)을 지어 여러 학생들을 힘쓰게 하였다. 이 당시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이 홍수의 피해를 크게 입었다. 그때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을 중심으로, 여강서원을 병산(屛山)으로 옮겨 병산서원과 합치자는 주장이 있었다. 공이 강력히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서 합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도 안동부사(安東府使)나 관찰사(觀察使)에게, 폐단을 고쳐 백성을 구제할 것을 바라는 글을 여러 차례 올렸다. 또 명(明)나라 장수와 군무(軍務)와 병법(兵法)의 운용 등에 대해 편지를 서로 의논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자연 속의 삶을 즐기셨다. 선친(先親)인 임연재(臨淵齋)께서 도목촌(桃木村) 입구에 잇는 검암(儉巖) 위에 임연대(臨淵臺)를 쌓고 건물을 지으려고 하니, 퇴계(退溪) 선생께서는 그 건물에 걸 현판(懸板) 글씨를 써 주셨다. ‘도목촌 임연재(桃木村 臨淵齋)’라는 큰 글씨인데, 임연대 위에 건물을 짓지 못하여서 걸 수가 없었다. 후에 공은 임연대(臨淵臺) 남쪽에 서당을 짓고 금역당(琴易堂)이라 하였다. 차마 선친의 호(號)로 당호(堂號)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역당(琴易堂)은 거문고와 주역(周易)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면서 호연(浩然)한 성정(性情)을 종신토록 기르고자 하는 공의 뜻을 담은 당호(堂號)이다.
공은 본래 어릴때부터 문장에 힘을 얻어서 길거나 짧은 글에 짜임새가 있었고, 넓고 호쾌(豪快)한 기상이 있어 다른 사람의 문체를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문인(文人)과 거장(巨匠)들이 모두 두 손을 여미면서, 한유(韓愈)에 버금가는 문장이라고 일컬었다. 이 때문에 서애(西厓) 선생도 깊이 인정하였다. 『가례어류(家禮語類)』, 『계집(溪集)』, 『계몽전의(啓蒙傳疑)』, 『참동계(參同契)』 등에 대한 고의(考義)가 있고, 아울러 저술한 시(詩) 및 문(文) 몇 권이 있으니, 공의 학문이 착한 마음을 기르고 성(性)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실제가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문집(文集) 4권은 간행되었고 속집(續集)도 3권이나 있다.
배(配)는 숙부인광산김씨(淑夫人光山金氏)인데, 호(壕)의 따님이요 절도사(節度使) 부인(富仁)의 손녀인데, 며느리와 어머니의 역할에서 어질다고 칭찬이 많았다. 3남4녀를 기르셨는데, 아들은 숙전(淑全), 택전(澤全), 윤전(潤全)이요, 사위는 정랑(正郎) 김회(金淮), 권인(權軔), 별제(別提) 한필달(韓必達), 박영(朴瑩)이다.
묘소(墓所)는 안동군 예안면 도목동(桃木洞)의 우모곡(寓慕谷) 자좌원(子坐原)에 합폄(合窆)이다. 셋째 아들 윤전(潤全)이 가장(家狀)을 지었고,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8대손 한주(翰周)는 가전유고(家傳遺稿)를 참고하여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선생에게 청하여 행장(行狀)을 받았다.
『興海裵氏世蹟』 p166~171
● 체직(遞職) : 정해진 임기가 차서 그 벼슬을 해임함.
● 제수(除授) :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
● 이남(二南)의 詩 : 시경(詩經) 주남(周南)·소남(召南) 편(篇)의 시
● 천아(天鵝) : 고니. 거위과에 속하는 백조
● 강명엄정(剛明嚴正) : 강직하고 명민(明敏)하고 엄숙하며 정대(正大)함.
● 재기초매(才氣超邁) : 재주와 기절(氣節)이 월등히 뛰어났음.
● 향모(向慕) : 줄곧 생각하며 사모함.
● 송소(松巢) 권우(權宇) : 1552(명종 7)∼1590(선조 23). 본관은 安東. 자는 定甫. 호는 松巢. 父 大器. 居 安東. 李滉의 문인. 1573년 式年試 2등으로 생원에 합격함. 敬陵參奉‧集賢殿學士‧世子師傅를 역임함. 左承旨에 추증됨. 鏡光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松巢集》이 있다. 權暐가 행장을 짓고, 金應祖가 묘갈명을 찬함.
● 감두(㔶頭) : 요즘 말로 감투. 머리에 쓰는 모자.
● 중삭(每四仲朔) : 2월, 5월, 8월, 11월의 초하룻날.
● 타만(惰慢) : 게으르고 느림
● 참동계(參同契) :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3권)의 약칭. 후한시대의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것으로 전함.
● 역해국(易解國) : 주역을 해설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 김시헌(金時獻) : 조선의 문신.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 1597년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부승지(右副承旨)ㆍ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그 후 대사간ㆍ도승지 등을 역임, 역학(易學)에 밝았음.
● 간항(簡亢) : 뜻이 크고 강직함
● 준척(峻斥) : 엄히 물리침
● 고수(瞽瞍) : 성인으로 추앙받는 중국의 순(舜) 임금의 부친
● 문왕(文王) :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부친
● 황홀(恍惚) : 사물에 마음이 팔려 정신이 팔려 어지러움
● 사탄(邪誕) : 간사하고 거짓되어 미덥지 않다.
● 본립도생(本立道生) : 근본이 바로 서면 도(道)가 생겨남
● 여강서원(廬江書院) : 지금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처음에는 안동부(安東府) 동북쪽 여산촌(廬山村)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는 백련사(白蓮寺) 절터에 세워졌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로 옮겨 지었다.
● 한유(韓愈) : 중국 당(唐)의 유학자, 문장가. 자는 퇴지(退之), 당시 당나라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보수파의 족벌 호족과 개혁파의 신흥 서족(庶族) 사이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의 문필 활동은 이 당쟁 하에서 전개되었다. 문장가로서 유종원(柳宗元) 등과 고문(古文) 부흥에 힘써,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유 [韓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