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어린 배움터에는 조미나선생님을 모시고 인문학을 공부합니다. 그 공부하는 시간에 썼던 글이 광주 교육청 후원, 새마을문고 주최 독후감 공모에 좋은 평가를 받아 함께 읽을까 합니다. 최우수상 8학년 심지호, 일반부 장려상 마을인생학교 박미란과 마을 아줌마 황선아입니다. -황선아님의 글은 본인의 소견으로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 순간의 소란}
마을인생학교 박미란
소설 <좁은 문>은 제롬, 알리사, 쥘리에트 세 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펼친다. 신중한 제롬은 자신을 ‘의심’했고, 우아한 알리사는 스스로를 ‘억압’했으며, 기쁨과 활력이 가득한 쥘리에트는 어둠을 ‘회피’했다. 신중함과 의심. 우아함과 억압. 긍정과 회피는 그렇게 동시에 존재했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말이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을 통해 삶의 이면성을 극대화한다. 그리하여 글을 읽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하나의 두 얼굴로 살고 있느냐고.
지난 한 달, 참 힘들었다. 거의 하루종일,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산골에서 사람을 드문드문 만나며 살아온 지난 시간만큼, 그 변화로 오는 자연스러운 힘듦이라 여겼다. 곧 익숙해질 것이라며 나를 달랬다. 그러나 서식지의 변화로 오는 어려움은 의지만으로 쉬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만한 대화에서 빈번히 발생되는 긴장과 갈등이 피곤했다. 대체로 내가 없던 시간 속에 묵혀온 감정의 부딪힘이었다. 터전을 바꿔 새로운 벗들과 같이 산다는 것은 관계없던 일들에 관계가 생기는 일이었다. 결국 헝클어진 기운은 ‘어지러움’으로 드러났고, 핑 도는 세상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휴가를 보내고 운전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오디오북으로 소로의 <월든>을 들었다. ‘온 몸이 감각기관이 되어 모든 땀구멍으로 기쁨을 들여마신다.’ 첫 구절부터 마음이 확 열렸다. 곧장 숲속을 뛰어다니던 시공간으로 접속되었다. 그렇게 이어진 소로의 글은 나를 대신하여 읊어주는 이야기 같았다.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워하는 나를 알아차렸다. 집에 도착해 책을 펼쳐보니, 내가 듣고 온 부분의 소제목이 바로 ‘고독’이었다.
그 순간 ‘집착’하여 ‘고착’된 그것이 보였다. 동시에 제롬과 알리사의 좁은 문이 떠올랐다. 그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킨 순수하고 신비스러운 천사의 것처럼 고결한 '좁은 문' 말이다. 나 역시, 소로우가 말한 '고독'을 추구하며 백석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을 동경하느라,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생생한 삶으로부터 나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순간, 고독과 소란이 삶이라는 하나의 두 얼굴로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기도문을 바꿨다. 이 순간의 소란을 사랑하게 하소서!
{지구의 꿈}
마을인생학교 박미란
몸이 노란 신호등을 깜박인다. 한 주를 조심조심하며 나를 먹이고 재웠다. 다행히 어지럼증도 줄고, 속도 편안해졌다. 기운은 오르지 않지만, 약속했던대로 농사짓는 서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기운이 없을 땐 땅과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그래, 가다 중지 곧 하더라도 그냥 가보자.
한때 나도 땅과 가까이 살기를 꿈꿨다. 스물하나에 귀농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바로 지리산 자락에 깃들었다. 마냥 그리 살았다면 나도 농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중1 때 장래희망에 농부를 썼다가 특별상담을 받았던 그 아이는 마흔을 넘기고도 여전히 농부를 꿈꾼다.
서와네 가족들과 가을 가뭄으로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밭에 양파모종을 심었다. 순간 내 체질이 메마른 땅에 풀 한 포기와 같다고 했던 한약사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너였구나. 물 한줄기 더 주려고 허술한 모터와 씨름하는 이들이 고마웠다. 양파야. 힘내라. 나도 힘낼께. 너와 나를 응원하며 한 번 더 흙을 북돋웠다.
북미 원주민이 쓰는 언어에는 땅과 마음의 어원이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땅을 가꾸는 이들의 마음이 풍요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싶다. 왜 기운이 없으면 땅사람들이 그리운지 그제야 알겠다.
서와네 마을에 사는 농부시인은 누구나 농부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고 하셨다. 농부의사, 농부교사, 농부가수, 농부대통령.. 모두가 땅과 생명을 가꾸는 날엔 북극곰도, 열대우림도,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리고 우리도 살 만해지지 않을까. 그제야 농부라는 막연한 내 바람은 내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나를 통해 지구가 꾸는 꿈은 아닐까. 우리 서로 기대어 같이 살자는 지구의 목소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양파를 심고 이틀 뒤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와! 살았다. 양파도 웃고 농부님도 웃고 나도 웃는다.
● 윗글은 좁은문/앙드레지드를 읽고 인문학 세미나 후 쓴 글
● 아랫글은 공모분야 중 지구온난화 (탄소제로)와 연관된 주제가 있어 제출했습니다. 상은 독후감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지킬 앤 하이드}
[‘나’는 페르소나들의 집합이다.]
사랑어린 8학년 심지호
‘나’라는 단어는 집합명사이다. ‘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타자의 집합이 만든 하나의 퍼즐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퍼즐은 수없이 많은 가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면들 중 어느 것은 사라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새로 칠해지기도 한다. 나는 상황에 맞게 가면을 바꾸에 쓴다. 엄마 앞에서는 딸의 가면을, 친구들의 앞에서는 ‘심지호’의 가면을, 수업 시간에는 학생의 가면을 쓴다. 가면이라고 해서 가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위장하기 위해 쓰는 가면이 아니라,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가면들은 가짜가 아니라 나의 일부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가면들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어서 나에게는 없는 가면이 만들어지거나, 숨겨져 있던 가면이 나타나기를 바랄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가면은 어떻게 해도 얻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모조 가면을 만들어서 쓴다. 하지만 모조 가면은 내가 가진 진짜 가면이 아니기 때문에 조잡한 광대 가면처럼 우습거나 이상해 보일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가면이 있는가 하면, 내가 원치 않지만 나에게 주어진 가면들도 있다. 이런 가면들은 내가 거부해도 어느 순간 내가 쓴 가면 밑에 감추어 씌워져 있고 멀리 치워 버리려 해도 어느샌가 나에게 돌아와 있다. 최대한 관심을 두지 않고, 매번 벗어 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 가면을 직시할 때 비로소 나에게서 그 가면을 없앨 수 있다.
변화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찾아오거나, 어느새 갑자기 찾아온다. 있는 줄도 몰랐던 가면이 눈에 띄고, 처음 보는 가면이 생겨나고, 원래 가지고 있던 가면에 새로운 색이 덧입혀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어떤 가면이 있고 없든지 간에 그 가면을 나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페르소나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
{고도를 기다리며}
사랑어린 8학년 심지호
기다림은 성숙의 과정이다
살면서 한 번쯤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행 가는 그날을 기다리고,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고, 방학이 되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그 기다림이 초조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 기다림이 행복할 때도 있다. 기다림 끝에 찾아온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아주 만족스러울 때도 있다. 기다림은 그 끝에 무언가 결과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기다림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일에 대한 온갖 행복한 결과를 상상하며 기쁨을 느낀다. 또, 기다림으로써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도 있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 될 수 있다. 언제든 그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찾아와도 맞이할 수 있도록 매일 나를 준비시키고, 기대하고, 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에 온 결과가 실망스럽거나 허무하더라도 나는 그 기다림으로 인해 더 성숙해 있을 것이다. 기다림은 성숙의 과정이다.
Ⅱ
기다림의 최종장(고도)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기다림을 마주하고, 또 그 끝에 있는 결과를 마주한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기다린다. 이 모든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기다리는, 나의 ‘고도’는 무엇일까? 사람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우리의 생애 내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인생은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이다. 때로는 잔잔할 때도 있고, 때로는 초조할 때도 있고, 때로는 기다리는 데에 지쳐 이제 그만 ‘고도’를 맞이하고 싶을 때도 있다. 우리가 맞이하고 싶든 맞이하지 않고 싶든, 죽음은 나 뿐만 아닌 우리 모두의 ‘고도’이며 모든 기다림의 최종장이다.
{맥베스 }
[인간의 욕망은 양날의 검이다]
사랑어린 8학년 심지호
모든 동물에게는 기본적으로 식욕, 배설욕, 수면욕, 번식욕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것을 본능이라고 부른다. 본능은 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동물들은 본능을 이용해 생존한다. 본능에 따라 먹고, 배설하고, 자고, 후손을 남긴다. 우리도 동물이니 물론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고 이런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조금 다른 종류의 욕망이 존재한다. 권력욕, 명예욕, 재물욕 등등... 이런 욕망은 인간이 사회적 관게를 맺고 살면서 생긴 욕망이다. 이런 ‘사회적 욕망’ 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욕망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더라도 원초적 본능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짐승에 가까워 보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정의하려는 욕망, 알고 싶어하는 욕망,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한층 더 발전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만 욕망의 실현 방식에 따라서는 오히려 나에게나 남에게나 독이 될 수 있다.
세상에 가져서는 안 될 욕망은 없다. 하지만 그 욕망이 나를 발전시키는 동기가 될 것인지 그저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는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인지는 욕망의 실현 여부와 실현 방식에 달려 있다. 아무리 나를 망칠 것 같은 욕망이라도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나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나를 발전시키는 좋은 동기가 될 만한 욕망이라도 실현 방식이 잘못되면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따라 나를 망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내가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