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래가 널려 있다/이동 건조대 가득 큰 대자로/위쪽은 나란히 직수굿하고/아래는 넌출진 구비를 드리운다/세탁기 속에서 혼비백산/그 컴컴하고 거친 물살을 통과한 기억이/빨래에게는 없는 것 같다/머릿속까지 표백되었을지도 모르니//세상에는 매달려서 견디는 것들이 많다/나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외줄을 잡고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서 뒤채었다/씨앗이 여무는 시간도 그러했으리라/양팔 가득히 빨래를 걸치고 서 있는 건조대가/수령 오래된 한 그루 빨래나무 같다//은결든 물기와 구김을 다림질 해주듯/햇볕이 자근자근 빨래의 등뼈를 밟고 다닌다/어느 어진 이의 심성과 순교의 윤회일까/제 본분인 양 빨래는/모짝모짝 부지런히 말라간다/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그 배경에 잠풀 향기 은은하다
「파온」(2012, 최측의 농간) 전문
이 시를 읽고 나면 마치 지독스럽게 앓고 난 환자를 지켜보는 것 같은 감상이 남는다. 회복기 환자의 핼쑥하고 수척한 얼굴은 병을 앓으면서 그가 치른 정신적 고통, 아니 정신적 성장까지를 담고 있게 마련이다. “모짝모짝 부지런히 말라”가는 시에서의 저 빨래는 “빨래 끝!”이라며 만세를 부르는 텔레비전 CF의 경쾌함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시에서의 빨래는 “그 컴컴하고 거친 물살”이라 비유되는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고, 또한 “외줄을 잡”은 채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모질고도 질긴 시간을 견뎠으며, 고통으로부터 겸허함을 배운 사람의 숙인 이마를 닮아있다.
누구라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는 있다. 되돌이켜 보면 대체 어떻게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을까 아득하지만, 하나의 터널을 통과한 뒤에는 또 다른 터널이 기다리고 있는 게 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놓고 정신적 성숙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빨래는 “위쪽은 나란히 직수굿하고/아래는 넌출진 구비를 드리”우고 있다. 하라는 대로 복종한다기보다 체험의 뿌리가 깊어 함부로 나부대지 않는 삶의 자세다. 인디언들은 거센 물살을 건널 적엔 떠내려가지 않으려 제 몫의 돌을 안는다고 한다. “혼비백산”이던 그때조차 차라리 돌을 안고 건넜던 시간인 걸까? 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라고 시작했다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라며 변형된 수미상관의 형식을 취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 과거형은 ‘아무 일 없다는 듯’으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사윤수 시의 깊이가 여기서 비롯한다. 덧붙이자면 상처가 내부에 생기거나 원통한 일로 남모르게 속이 상한다는 의미의 ‘은결들다’라든가, 한쪽에서부터 차례로 모조리 혹은 차차 조금씩 개먹어 들어가는 모양의 ‘모짝모짝’과 같은 고유어는 겉돌지 않고 착착 감긴다. 삶의 그늘이 빚은 능청스러운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