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주변 국가에서 신라의 왕이 여자라고 무시하자 선덕여왕이 향기날 분, 임금 황을 써서 분황사라는 절을 지어 나도 향기가 나고 강력한 왕임을 증명했다. 분황사 안에 있는 모전 석탑은 9층 정도로 예상하는데 이것은 신라의 국력이 약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덕여왕은 분황사 말고도 첨성대, 황룡사 등을 지어 남성주의 세상에서 여자라는 한계를 부숴 당시 사람들에게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없애 준 것 같다.
동궁과 월지: 동궁은 신라 시대 세자가 생활하던 곳이고 월지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 오리 압 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렸다가 유물 발굴 결과 신라 시대 월지라고 불렸던 것이 드러나면서 다시 월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궁의 위치는 월성의 동쪽에 있어서 동궁인데 세자가 다음에 태양이 될 사람이라고 해서 해가 뜨는 동쪽에 위치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옛날 사람들도 이런 작은 것에 큰 의미를 두는데 나의 생각은 이런 생각에 반절도 닿지 않는다. 조상님들의 지혜에 감탄만 나온다.
석굴암, 불국사: 석굴암은 통일 신라 시대 김대성의 주도로 축조된 암자이다. 실제로 가보니 크기가 생각보다 컸었다. 본존불인 석가여래 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38체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국사는 금동 비로자나 불상, 청운교, 백운교 등 총 7개의 국보가 있는 엄청 큰 절이다. 오늘날에는 너무 편리만을 추구하다가 건축도 쉽게 하려 한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지금 기술로도 복원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건물이다. 그 건축물을 신라 시대에 만들었다는 것이 대단하다.
문무왕릉: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죽는데 자신은 죽어서도 신라를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동해바다에 묻혀 용이 되어 끝까지 신라를 지키겠다고 하여 묻힌 곳이 문무왕릉이다. 이미 삼국 통일이라는 큰 업적을 남겼고 문무왕 인생이 전쟁이었는데 죽어서도 싸우겠다는 것이 문무왕은 나라를 위해 살고 나라를 위해 죽는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남산: 4 일차 경주 남산 산행을 하였다. 여행을 가기 전에 1박 2일 경주 남산을 산행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그곳에선 일곱 가지의 보물들이 나왔다. 우리가 산행을 할 곳은 난을 오르다가 금오봉에서 점심을 먹고 용장골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상에서 나온 일곱 가지 보물들중 마애 보살상과 칠불암은 보지 못하지만 5개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2가지 보물들을 찾지 못해서 3개밖에 보지 못했다. 남산에만 6가지 불상들이 있는데 이정도면 불상들을 조각한 사람은 남산 전체를 부처님의 땅으로 조각하려 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흥무대왕릉: 흥무대왕은 김유신 장군이 죽고 나서 붙여진 시호이다. 김유신 장군은 높은 지휘에 있음에도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신라 안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금관가야의 왕이었던 김구해가 신라에게 나라를 바치고 그의 아들인 김무력은 백제의 왕이었던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를 하여 공을 세웠고 그의 손자가 김유신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공을 세워 귀족들의 마음을 얻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렇게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해서 나중에 흥무대왕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비록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신라인들이 김유신에게 했던 차별이 오히려 김유신을 더 강하고 탄탄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일상이 역사다. 이 주제로 이번 여행을 하였다. 내가 지금 사는 이 순간이 훗날 역사가 된다. 위에서 나온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우리가 볼 땐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내가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