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12월 4일 아버지 요셉릴케와 어머니 소피 사이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아래 있던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남.
귀족의 후예라고 릴케 자신은 말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슬라브 민족의 피가 상당히 섞여 있는 것 같다. 부친 요제프 릴케는 군인으로 입신(立身)할 생각이 있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10년간의 군무후에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들어갔다.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이었다고 하며 65세로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친 조피아는 사치스럽고 허영심이 강한 여자였다. 이 부부 사이에는 처음 딸이 태어났으나 이내 죽고 이어서 아들이 태어났다. 카톨릭의 영세를 받고 르네 마리아 릴케라고 명명 되었다가 훗날 살로메의 권유로 라이너(Reiner)로 개명하게 된다. 그런데 릴케는 다섯 살 때까지 계집애 처럼 자랐다. 그래서 머리를 길게 기르고, 옷도 여자아이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죽은 딸에 대한 모친의 변질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마리아(Maria)란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1882년 프라하 카톨릭 재단의 피아리스트회 독일인 국민학교에 입학.
1884년 양친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10년동안의 결혼생활 끝에 이혼, 이후 어머니에 의해 양육됨.
1886년 부친의 희망에 따라 성(聖) 폴텐의 육군 유년학교에 국가장학생으로 입학.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서 이루어 보자는 부친의 희망이었다. 군사학교 시절을 나중에 릴케는 참담한 시련의 시기로 묘사한다.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시기로 1888년도 릴케의 수첩에는 <무덤>,<단념>,<묘지>등의 제목이 붙은 서투른 시가 적혀있다.
1890년 6월 육군 유년학교 졸업. 9월 메리시 바이스키르헨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891년 7월 부친을 설득하여 건강상의 이유로 사관학교 퇴학. 9월 말 프라하에서 대학입학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가 도나우 강변의 린츠 실업학교에 입학.
당시의 릴케는 시인이 되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변호사인 백부처럼 법률가나 의사, 아무튼 유능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Das interessante>지의 9월 10일호에 4행시 발표.
1892년 5월 연애사건으로 린츠 실업학교 퇴학.
이후 프라하의 백부댁에 기거하면서 프라하 국립 고등학교 과정을 개인 교수로 이수. 이무렵에 오스트리아 포병장교의 딸 발레리 폰 다비트 로온펠트(Valery von David-Rohnfeld, 통칭 발리)를 알게되어 서로 사랑한다. 이 관계는 1895년 까지 계속되었다.<Böhmens Deutsche Poesie und Kunst> 지에 시를 발표.
1894년 처녀시집 <인생과 소곡(小曲)>출판,애인 발리에게 헌정.
여기엔 73편의 감상적인 미숙한 연애시들이 실려 있다. 그해부터 <Jung-Deutschland und Jung-Elsass>,<Das Deutsche Dichterheim>,<Neue hiterarische Blätter>등의 잡지에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895년 7월 프라하 국립고등학교의 졸업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 가을에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여 겨울학기에 미술사, 문학사, 역사철학의 강의를 들었다.
1896년 9월말, 뮌헨으로 옮겨 뮌헨 대학에 등록, 야콥바서만을 통하여 알게 된 덴마크의 위대한 시인 옌스 페터 야콥센(Jens Peter Jacobsen)의 문학에 심취. 8월, 희곡 <지금 우리들이 서서히 죽어갈 때>가 프라하의 독일 국민극장에서 자선공연으로 상연 되어 각광을 받았다. 제2시집 <가신봉폐(家神奉幣)>를 출판. 시문집 <베크바른덴> 제1.2.3집을 자비로 출판.
1897년 3-4월중순, 이탈리아 여행. 5월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부인을 알게 됨. 단순한 애정관계로 시작한 두사람의 관계는 점차 정신과 영혼을 나누는 벗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한때 니체의 애인이기도 했던 루는 릴케의 삶에 있어서 어머니 같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으며, <생애의 회고>에서 “나는 릴케의 아내였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7월 희곡<빠른 추위>가 프라하의 독일 국민극장에서 상연. 제 3시집 <관(冠)처럼 꿈을 쓰고> 출판.
1898년 3~5월 이탈리아 여행. 5월 <백의(白衣)의 귀부인>완성. 제4시집<강림절(降臨節)>출판. 단편집 <인생을 따라서>, 희곡 <현재없이> 출판.
1899년 4월 하순~6월, 살로메 부부와 동행하여 첫 러시아여행. 모스크바에서 톨스토이를 방문하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친 러시아 여행은 릴케의 생애를 통하여 획기적인 중대한 체험이었다. 드로신의 시와 체호프의 <갈매기>를 번역한 것도 이무렵이다. 소설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출판. 제5시집 <나의 축제에>출판.
1900년 5~8월, 두 번째 러시아 여행.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톨스토이 방문. 전원시인 드로신을 방문. 8월하순~10월, 독일의 화가촌 보릅스베데에 체재. 이곳에서 여류 화가 파울라 베커(Paula Becker)와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Clara Westhoff)를 알게 된다. 12월, 루의 집에서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hart Hauptmann)과 알게 됨. 소설집 <하느님에 대하여, 기타>출판.
1901년 4월29일,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 베스터베데에서 신혼살림 시작. 클라라는 1897년부터 1898년까지 조각가 막스 클링어에게 배웠고, 1898년 파리로 가서 로댕(Auguste Rodin)의 제자가 된 여류조각가이다. 12월 12일 장녀 루트(Ruth Rilke)가 태어남. 무남독녀이다. 12월 20일 희곡<일상생활>이 베를린의 궁정 부속극장에서 상연되었으나 완전히 살패로 끝남. 이후 릴케는 희곡을 단념하였다.
1902년 8월 하순까지 베스터베데에 거주. 부친에게서 경제적 지원이 끊어져서 생활이 어렵게 되자 8월 27일 가정생활을 해산. 딸 루트와 아내 클라라를 처가에 맡기고 혼자 파리로 옮기다. 경제적 곤궁을 타개하기 위해 <로댕론>을 쓰기로 함. 9월1일 로댕을 방문. 소설집 <최후의 사람들>, 희곡<일상생활>, 제 6시집<형상시집(形象詩集)>출판. 잘 알려진 가을날도 여기에 실려 있다.
1903년 화가평전 <보릅스베데>,<로댕론> 출판.
1904년 2월, 로마에서 <말테의 수기>착수. 6월 말~ 12월 덴마크와 스페인 여행.<하느님 이야기>출판.
1905년 3월이후 독일 각지를 전전. 9월 파리로 돌아와서 로댕의 집에 입주. 로댕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창작의 자세는 릴케의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 10월하순 ~ 11월 초순, 독일 각지에서 로댕에 대해서 강연. 제 7시집 <시도시집(時禱詩集)>출판하여 루 살로메에게 헌정.
1906년 3월14일, 부친 요제프 릴케 사망. 로댕과의 불화로 로댕의 집을 나오게 됨. <기수(旗手) 크리스토프 릴케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 출판. <형상시집> 증보판 출판.
1907년 10월 세잔느의 유작전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아내 클라라에게 세잔느 평을 보냈다. 1950년대에 <세잔느 서간>으로 출판된 이책은 <말테의 수기>나 <신시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근대의 회화론 이기도 하다. 11월 3일 로댕에게서 화해의 편지를 받고 기뻐함. 제 8시집 <신시집>출판. 로댕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시집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라고 릴케는 말하고 있다.
1908년 5월1일 파리로 돌아오다. 제 9시집<신시집 별권>출판 로댕에게 헌정.
번역시집 <엘리자베드 바레트 브라우닝의 포르투갈 소네트집>을 출판
1909년 3월 <노이에 룬트샤우>지에 <말테의 수기>1부 발표.
훗날 경제적 정신적 후원자가 되었으며 <두이노의 비가>완성의 결정적 역할을 한 탁시스 후작부인을 만남. 탁시스 부인의 소개로 프랑스의 여류시인 노와이유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12월에 헤어짐. 제10시집 <진혼곡>출판. <구(舊)시집>출판. 이것은 <나의 축제에>와 <백의의 귀부인>을 묶어서 한권으로 한 것이다.
1910년 1월 <말테의 수기 >완성. 4월 아드리아해의 두이노성 첫 방문. 11월 북 아프리카 여행.
소설 <말테의 수기> 출판. 파리에서의 죽음과 불안, 고통과 절망의 체험에서 나온 이 작품은 릴케의 대표적 산문이며, 자신의 내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신진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1911년 10월부터 두이노 성에 체제. 모리스 드 궤렝작 <켄타우로스>번역 출판.
1912년 <두이노의 비가> 제1, 제2 비가 완성.연작시 <마리아의 생애>완성. 10월말 스페인 여행. 번역 <막달레나의 사랑> 출판.
1913년 2월 파리로 돌아옴. 3월 로맹롤랑과 알게됨. 제 11시집 <마리아의 생애>출판.
<제 1시집>출판.<가신봉폐><관처럼 꿈을 쓰고><강림절>을 합치고, 거기에 새로 다섯편의 시를 추가하여 <제1시집>이라고 한다.
1914년 2월 베를린에서 피아니스트 하팅베르크와 사랑하게 되어 뮌헨, 파리, 두이노 성 등을 전전하다 5월에 헤어짐. 6월 1차 세계대전 발발. 파리에 있는 그의 재산을 모두 압류 당한다. 전쟁중 주로 뮌헨에 거주하며 여류화가 루 알베르 라자르와 함께 생활. 앙드레 지드의 <방탕아의 귀향>번역 출판.
1915년 11월 징병검사 결과 국민군에 편입.
1916년 2월부터 6월까지 빈에서 병역복무. 시인 호프만슈탈 방문. 7월 뮌헨으로 돌아감.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끝남. 번역시집 <리용의 여류시인 루이즈 라베가 쓴 24편의 소네트>출판.
1919년 6월 스위스로 이주. 제네바에서 여류화가 클로소브스카와 알게 됨. 그녀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가 유명하다.10월 ~11월 스위스 각지를 강연. 12월 부터 로카르노에 체제.
1921년 7월 뮈조트 성으로 이주. 친구 베르너 라인하르트가 제공한 이 성은 죽을 때 까지 릴케의 안식처가 된다. 작품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기(初期)에서>출판. 1894년에서 99년 사이의 시, 산문, 희곡을 수록한 것이다. <로테 프리첼 인형(人形)>출판. 잡지에 미켈란젤로의 번역시 발표.
1922년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부 완성. 10년동안 미완이던 <두이노의 비가> 10편 완성. 딸 루트 결혼.<C.W.백작의 유고에서>출판.
1923년 폴 발레리의 시를 번역. <오르페우스..><두이노의 비가>완성 후 릴케는 번역에 몰두했다.
8~9월 세네크 요양소에 요양. 12월 발몽 요양소에 다시 요양. 제 12시집 <두이노의 비가>, 제 13시집 <오르페우스에게 드리는 소네트>출판.
1924년 4월 폴 발레리와 만남. 이 무렵부터 프랑스어로 많은 시를 쓰기 시작함. <장미><창문>등의 시가 이때 쓰여진다.
1925년 파리에 체제하며 <말테의 수기> 불역에 협력. 10월에 뮈조트 성에 돌아와 자신의 유언장을 쓰다.번역시집 <폴 발레리 시집>출판.
1926년 10월 뮈조트 성에서 장미를 꺾다가 왼쪽 손가락에 가시가 찔려, 그것이 화농하여 백혈병 증세 나타남. 11월 30일 발몽 요양소에 들어감. 12월 29일 새벽 조용히 永眠에 들어감.
프랑스어 시집 <과수원>출판.
1927년 1월 2일 유언에 따라 라몽의 언덕위에 있는 교회옆에 묻히다. 그의 묘비에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묘비명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