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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 박철영
1.
건넛물 지나 정숙이네 집 울타리에 심어진 몇 그루의 개나리꽃이 시들고 나면 진달래는 어딜 가나 지천으로 피었다. 앞동산에도 있었고 거북 재 쪽 능선에도 군데군데 피어났다. 망골 동산에도 진달래는 어김없이 피어나 시골 아이들에게 화사한 봄을 알렸다. 형과 누나로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된 진달래꽃을 찾아다니며 즐겼고 먹는 꽃으로 알고 먹었다. 씁슬달작한 맛이 처음엔 이상했지만, 자꾸 먹다 보니 본래의 진달래꽃 맛으로 길들여졌다. 학교 갔다 오다 망골 동산에 흩어져 진달래를 신나게 따먹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공해란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는 중 누군가 진달래도 개꽃이 있고 참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개꽃이고 그것을 많이 먹으면 중독이 되어 죽는다는 말을 했다. 어린 마음이지만 무언가 께름칙한 뒷말이 엄습했다. 그런 말을 듣고 난 이후부터 나는 진달래꽃을 따 먹지 않았다. 진달래꽃이면 진달래꽃이지 도통 참꽃과 개꽃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이상하게 죽음과 연관 지어졌고 상여 나갈 때 보았던 상여 꽃의 붉디붉은 색깔이 진달래꽃 빛깔과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 진달래꽃을 보면 예쁘고 아름다운 이미지보다는 죽음의 그림자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나중 알고 보니 유달리 붉은 우리 고향의 진달래꽃은 요즘에 일컫는 산 철쭉이었다.
누나도 나와 마찬가지로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나도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시절이 눈에 밟히는데 누나는 나보다 더 어려운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누나랑 대나무로 만든 둥근 소쿠리에다 뒤안 울타리에 있는 아카시아 꽃을 땄던 기억이 있다. 그것으로 술을 담그면 좋다고 하니깐 아마 꽃을 따지 않았나 싶다. 그 꽃을 따면서 전해오는 향기가 진하고 순했다. 사실 우리 고향은 진달래꽃 부침도 해먹지 않았기에 아카시아꽃을 먹기 위해 따는 것이기에 더 즐거웠다. 뒤안 울타리에 심어진 아카시아 나무는 줏대도 없고 억세게도 자랐다. 아버지가 통나무처럼 커지면 커다란 톱으로 잘라 쪼개놨다가 쇠죽 끓일 때 장작으로 사용하곤 했다. 아버지의 속도 모르고 오질 없이 잘 자라주었다. 거기다 아까시아꽃은 왜 그리 진한 향기를 내 품는지 뒤 안에다 향수를 뿌려놓은 듯 진동했다.
우리 마을은 동네가 큰 만큼 실속이 없었다. 동네 방앗간이 있어도 쌀만 찧었지 떡 방아를 하지 않았다. 설이 돌아오면 작은 누나는 갈치로 가래 떡을 뽑으러 갔다. 그런 누나를 졸래졸래 따라 다녔다. 갈치 동네의 마을 회관 옆에 있던 방앗간은 평소에는 한가하지만, 그곳도 명절 앞이라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명절은 요즘 이상의 큰 행사였다. 그럴 때만 귀한 가래떡을 뽑아다 가래를 썰어 떡국을 끓여 먹을 수 있었다. 가래떡 이외에도 우리 마을은 팥을 넣어 시루떡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시루떡을 하려고 쌀가루를 빻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다. 다들 그때만큼은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을 것처럼 행복한 얼굴이었다.
시루떡을 만들 때는 먼저 옹기로 된 시루를 깨끗이 씻어 물기가 마르도록 엎어 놓았다. 그런 뒤 떡가루를 빻아오면 동그란 무를 잘라 시루 밑바닥 구멍을 막았다. 그 위에다 쌀가루와 팥을 번갈아 넣고 솥 위에 시루를 안쳤다. 그리고 떡시루와 솥 사이에는 쌀가루를 반죽해서 번이라는 것을 붙였다. 솥 안의 물을 끓이면 뜨거운 증기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인 것을 번이라고 했다. 밑에 있는 솥의 물이 가열되면 증기가 올라가 익혀지는 방법이다. 이것도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떡이 설익어버린다. 사실 우리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설을 일 년을 시작하는데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혹시 집안에 재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지만, 되도록 뒤에도 말을 아껴 내색하지 않았다. 떡이 설익는다는 뜻은 떡이 안 익어 떡가루 상태로 있는 것을 이른 말이다. 어머니가 떡을 시루에 안쳐주면 나는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주었다. 한참을 아궁이에다 불을 지피면 떡 시루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고 더 한참을 지나면 어머니는 기다란 막대로 떡시루 뚜껑을 열고 골고루 찔러 보았다. 어머니가 머리를 갸우뚱거리지 않으면 떡이 잘 익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작은 누나도 시집을 안양으로 가버리고 떡방아를 찧으러 갈 때는 큰집, 작은 집 형수하고 서너 집 것을 모아 니어커에 싣고 월락초등학교가 있는 월락리까지 가야 했다. 월락리에 있는 방앗간은 쌀 방아도 찧고 떡 방아도 함께 했다. 여기는 갈치보다 더 큰 곳이라 방앗간은 가래떡을 하러 온 사람들로 메워 터질 정도였다. 고죽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백면 사람들도 많이 내려왔다. 가래떡을 뽑는데 줄 서는 것은 각오해야 하고 큰집과 작은 집 형수들하고 밤새워 기다린 적이 있었다. 가래떡을 한 뒤 형수들은 니어커 뒤를 따라오면서 든든한 내가 있어 좋다 하시며 명절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이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서울로 올라간 큰집 상기 조카님 복순이 조카 웃골 상용이 조카까지 거기에다 우리 큰형까지 내려올지 모른다는 기대에 나도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큰형은 경찰관이라 명절 때가 더 바빴다. 막연하게 내려올까 싶어 기대만 했지 온다는 연락은 없었다. 큰 형이 오든 안 오든 간에 명절이 되면 더 바빠졌다. 땔 나무를 정제 간에 가득 채워놓아야 했다. 되도록 먼 갈치 앞산이나 사랑 골에서 한참을 더 올라가면 문 바위까지 가서 불기운이 좋은 솔잎가리나무를 긁어 내려왔다. 문 바위는 차돌광산이 있는 곳으로 우리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였다. 거기서 나무를 해서 내려오면 하루의 반은 길에다 깔아버렸다. 산에를 가면 동네 사람들을 골짜기 사이에서 볼 수 있었다. 장동 아지매 네 정수형이나 병훈이네 삼촌 용모, 헌기 선배 그리고 인철이 아버지도 오가며 뵌 적이 있었다. 집은 달랐지만, 사람 사는 것은 똑같았다. 다들 고단한 삶에 대한 고통 속에서 좌절은 삭히고 꿈틀거린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등 뒤에 짊어진 나뭇동의 무게는 나의 작은 체구에는 무리였다. 거북 재를 힘들게 넘어와 우리 마을 골목 꼭대기에 까치집처럼 들어선 영도양반네 집 언덕에다 지게를 세워놓고 한참 있다 보면 줄줄이 흐르던 땀방울이 말랐다. 후들거리던 다리도 진정이 되고 지게에 짓눌려 끓어질 듯 아파 죽을 것 같더구먼 이젠 좀 살만해졌다. 영도양반네 집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동로골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클로즈업되듯 당겨지는 우리 집 뒤안 굴뚝이 눈에 들어오고 감나무에 덧 대여 쟁여놓은 나뭇동도 보였다. 경사진 바로 아래를 내려가면 작은 누나 동창 순덕이 누나 집이 있고 그 뒤로 전수라는 기억도 가물거리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고 그 안쪽으로 귀녀 친구 집이 대나무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했다. 곧바로 내려가면 옥녀네 집 고샅이 마당까지 이어졌다. 그 아래로 내려오면 왕 벚꽃 흐드러지게 피던 병훈이네 집이었다. 다음에는 웃골에서 이사 온 인철이네 집이고 그 아래를 내려가면 철순이네 오빠 집이 보인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 대문간이 보일 것이다. 영도 양반네 집 언덕에서 우리 집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하도 힘이 드니까 나뭇동을 구름다리 같은 곳에 올려 또르르 굴려 우리 집 감나무에 떨어지는 상상을 쉴 때마다 했다. 여하튼 이제는 마지막 100여 미터를 죽을 힘을 다해 가야 한다. 골목이라 지게를 바치고 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했다. 지금은 그런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 곧 즐거운 꿈이 되었다.
나무를 하러 갈 때 우리 동네 주변은 깊은 산이 없어 갈치 앞산으로 다녔다. 갈치 마을은 우리 마을보다 산촌이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여러 가지가 우리 마을보다 앞선 점이 많았다. 떡 방앗간도 그렇고 산동네라서 그런지 양잠을 많이 했다. 양잠을 했기 때문 갈치 주변 산 밭에는 뽕나무들이 많았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없는 꾸물거리는 애벌레가 누에라고 해 신기했다. 누에 먹이로 주는 뽕나무에서 오디가 열리는데 여름이면 도시락에 시커멓게 생긴 오디를 잔뜩 은자가 가져왔다. 언젠가 오디를 따 먹으러 형태 상일이 종욱이 그리고 은자와 봉순이 여자아이들과 하갈치 근처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오디를 따 먹다 보면 뽕나무에서 하얀 실 같은 것이 옷이나 얼굴에 묻어 난감했다. 오디를 먹는 즐거움 이후가 문제였다. 뽕나무는 절대 농약을 하지 않는다. 누에게 치명적이 때문이다. 그래서 곰팡이가 뽕나무에 붙어살았다. 연한 뽕잎을 먹은 누에가 마지막 다섯 잠을 자면 하얀 고치가 된다. 그것을 얻기 위해 누에치기를 하는 거였다. 이수네 집에 가서야 잘게 썰어 올려준 뽕잎을 먹고 있는 시렁에서 하dis 누에를 볼 수 있었다. 아 이걸 무어라 해야 하나 저 무수한 애벌레들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삭삭삭삭 고요하게 들여왔다. 누에가 드디어 고치가 되었단다. 학교에 하얀 누에고치를 가져와 마음에 있는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때 갈치 아이들은 인기가 좋았다. 식정리 아이들은 그것 하나 얻으려고 갈치 아이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을 해야 했다. 나도 어렵게 얻은 두 개가 한집에 들어있는 쌍 누에고치를 집에다 가져다 놓았다. 며칠이 지나 그게 또 나비처럼 부화했다. 그 나비 같은 나방이 종이 위에다 무수히 많은 알을 낳았다. 그것이 나중 깨어나 누에가 된다고 했다. 요즘 말하면 자연학습관찰이었다. 집에서는 그것을 보는 즐거움이 아주 컸다.
갈치에는 우리 마을 앞 요천수처럼 큰 냇가가 없었다. 멱을 감고 놀 만한 곳이 없다 보니 우리 마을로 멱을 감으러 넘어왔다. 그날도 모퉁이 논에서 벼 포기 사이 풀을 뽑고 있었다. 갈치 여자아이들이 무리 져 내려왔다. 상순이 봉순이 순영이 그리고 조무래기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논 방천을 지나갔다. 그런 상순이와 눈이 마주쳤다. 몇 마디 말도 못 건네고 수줍어 고개를 외로 돌렸던 기억이 아직도 우리 논 방천가에 남아있다. 그 아이들은 모처럼 큰 냇가에 나와 맘껏 놀다 갈 것이다. 운 좋으면 돌 틈에 붙어있는 시커먼 다슬기도 제법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향 요천수에서 볼 수 있는 다슬기를 대수리라고 했다. 여름이면 틈나는 대로 대수리 잡기를 좋아했다. 그것을 잡으려 돌을 들추면 바다의 새우처럼 생긴 징게미가 집게발을 쳐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 커서 지레 겁먹은 적도 있었다. 대수리를 줍다 징게미를 몇 마리 잡으면 기분 짱이었다. 도둑놈이라는 고기도 제법 재밌었다. 요놈은 배짱이 두둑해서일까 손으로 덮쳐야 그 때 움직이는 습성이 있었다. 다 잡은 듯해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도망가도 꼭 눈 앞에서 놀았다. 고놈이 물 밖 사람들을 환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우리 고향 요천수는 모래무지 빠가사리 피리 같은 고기들이 동네 아이들만큼이나 참 많았다.
갈치 마을은 마을 콩쿠르 대회도 해마다 열었다. 거기다 교회가 들어와 있었고 주말이면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회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갈치를 놀러 갔었다. 예배를 보는 예배당과 십자가도 신기했다. 우리 마을하고 똑같은 사람들인데 모여서 하는 모습이 달랐다. 시골 교회라 목사님은 없고 전도사님이 목회하는데 마침 전도사의 아들이 주연이라고 또래여서 한동안 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런 친구가 졸업은 함께하지 못했으니 아마 교회 전도사였던 아버지가 시골이라 살아가는 것이 여의치 않았나 보다. 갈치는 생선 이름이다. 마을 이름이 갈치라고 해서 특이했다.
나중 나이 들어 갈치 앞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 지형을 살펴보니 영락없는 생선 갈치처럼 기다랗게 생겼다. 산에 둘러싸여 농토도 별로 없고 마을도 신작로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갈치리를 하갈치 중갈치 상갈치로 나눠 마을 이름을 그냥 갈치라고 불렀다. 중갈치와 하갈치에 우리 박 씨 성받이 몇 집이 살았다. 우리와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그중 아버지와 어떤 연유로 각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원석 형님네는 하갈치 입구 목 넘어 길가 선산이 있었다. 그곳에다 우리 할머니 묘를 쓰도록 해주었다. 아버지는 할머니 봉분 터가 지네 혈로 머리를 쳐들고 있는 최고의 명당 터라고 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자기 앞가림을 잘하고 산다는 뒷이야기로 깔끔하게 명당론을 마무리까지 하셨다. 여하튼 윈석 형님네 종산이 좋아서 그런가 그분은 서울에서 전기 설비업으로 크게 성공을 하였다. 서울시 도급 순위 5위 안에 든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분도 겨우 용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곁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갖은 고생을 다 했을 것이다. 상경해서 긴 인고의 시간 속에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입신한 그분은 성공한 만큼 종중을 위해 금전적으로 지원을 마다치 않았다. 종친 모임에서 만나 뵌 적이 있는데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지 않는 겸허함이 몸에 배어 있다. 사람을 존중하고 조상을 모실 줄 아는 큰 분이란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했다. 우리는 스스로 깨우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에 그럴 수 없다면 남을 보고 깨우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오늘도 어느 쪽에 속하는가 생각해본다.
2.
생각해보니 갈치 동네보다 뒤진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갈치에 없는 두붓집이 상훈이 친구네 집 앞에 있었다. 두붓집을 주사 양반이라고 어머니는 불렀다. 말수 없던 주사 양반이 이른 아침 두부를 사러 가면 부인과 새벽부터 만든 두부를 판에다 엎어놓고 칼로 써억써억 그어 가장자리께 큰 것을 골라주었다. 두부 모는 손 가는 대로 잘라내기 때문 보기에도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가 확연했다. 운 좋게 큰 것을 가져오면 어머니는 두부를 도마에다 놓고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어 주셨다. 일종의 심부름에 대한 팁인 셈이다. 그런 주사 양반은 동네에서 한학을 깨우친 사람 중 한 분이셨다. 그래서 주사란 호칭을 붙여 주사 양반이라 불렀는지 모른다. 우리 할머니 제사를 지낼 때는 그 집에 찾아가 지방을 써 달라고 해서 제사상에 붙이고 제를 지냈다. 후냄이 누나 이름은 본래 후남이었을 것이다. 작은 누나가 그렇게 불러서 동네 이야기라 그냥 후냄이 누나라고 적었다. 두 살 위인 여동생은 나를 봐도 말도 없고 잘 웃지도 않았다. 그 여동생이 지금은 궁금하다. 아랫물 후냄이 누나 집에 두부를 사러 다녔던 것도 세월 지나고 보니 그것마저 아름답다고 느껴지니 세상사 좋고 나쁜 것이 따로 없다. 다만 세상살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 뿐이다.
후냄이 누나 네는 아들이 귀한만큼 딸을 귀하게 키웠던 것 같다. 후냄이 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했으니 당시 우리 마을로서는 대단한 것이다. 나와 여덟 살 위 내 작은 누나와 후냄이 누나는 동갑이었으니까. 우리 누나는 아버지 때문 저녁을 먹으면 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가능했지만, 전기도 안 들어와 컴컴한 골목 심부름을 작은 누나가 시켰다. 누나 동창들이 동네에 아랫집 옥자, 두붓집 후냄이, 동로골에 순덕이 누나가 있었다. 그 이외에도 몇이 더 있었다. 그 중 후냄이 누나하고는 무슨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피식 웃고 말 심부름을 번번이 시켰다. 하기야 작은 누나는 내가 아기 때 광목 띠로 동여 매 업고 동네를 다녔다고 했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 도리라 생각해본다. 두붓집 후냄이 누나네 집 심부름은 아랫물이니까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무서운 담뱃집 골목이나 방앗간이 있는 곳보단 쉬웠다. 그런 심부름도 정말 하기 싫을 때는 꼼짝도 하기 싫었다. 누나는 그럴 때면 갖은 말로 나를 꼬드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약해져 대문을 나서곤 했다. 뒤에서는 누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동안 지나면 후냄이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갔다. 옆에서 누나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아리송한 것이 많았다. 누나들의 젖가슴이 짝짝이라 고민이라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간혹 들었다. 그 뜻을 먼 훗날이 되어서야 알아졌다. 작은 누나가 후냄이 누나와 친하게 지내려 했던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중학교에 다니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은 누나는 월락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해 1등을 하였다고 했다. 중학교에 갈 실력이 있어도 아버지가 문제였다. 여자아이에겐 돈을 들이며 상급학교를 보낼 이유가 없다는 아버지의 완고함이었다. 누나는 아버지 몰래 돈이 들지 않는 지산중학교를 갔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아버지가 책 보자기를 빼앗아 버려 며칠을 울며 버티다 그만두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작은 누나의 마음을 그래서 헤아릴 수 있다. 후냄이 누나가 중학교에 다니기에 조금이라도 나은 지식을 얻기 위해 심부름을 보냈다. 그런 작은 누나가 오십 줄 들어 기어이 한을 풀었다. 중졸 고졸 대입까지 검정고시를 봐 조금 이나마 위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방송대는 영문학과를 택했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였던 1910년생의 우리 아버지 박종원, 열여덟 살에 청진 함흥을 거쳐 만주 봉천 신경 하얼빈의 중국을 다니시며 큰 세상을 보았지만, 변화되는 흐름을 잡아내지 못했다. 작은 누나를 진학시키지 않아 집안뿐 아니고 사회에 기여할 큰 기회를 놓쳤으니 안타깝다. 못 배운 작은 누나의 한은 치과 의사 딸을 키워 냈고 아들 둘까지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졸업시켰으니 그만하면 위로가 되었을까. 어차피 인생은 한 폭의 수채화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한 장의 화선지에 붓을 쥐고 태어났다. 그림은 붓을 쥔 사람의 몫이지 그림을 보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인생살이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이 순간도 붓을 잡고 어떻게 내 삶을 그려갈까를 고민해본다. 마찬가지로 끝까지 자신의 삶을 진중하게 꾸려가려는 의지는 죽음을 앞두고도 놓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생까지도 자신이 그린 인생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