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2) - 온유(溫柔)하며
“사랑은 온유(溫柔)하다”(고린도 전서 13:4)고 한다.
‘온(溫)’이라는 글자는 ‘그릇(皿)에 물(氵= 水)을 담아 죄인(囚)에게 목을 축여 주니 온화하고 따뜻하다’는 뜻이며, ‘유(柔)’라는 글자는 ‘창(矛)끝처럼 뾰족하게 돋아난 나무(木)의 새 눈(순)이 부드럽고 연약하다’는 뜻이니 ‘온화하고 유순함’,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움’ 이라고 풀이한 국어사전의 뜻과 맞아 떨어진다.
또 ‘온유(溫柔)’는 그리스어로 크레스튜오마이(χρηστευγομαι, hresteuomai)라고 하며 ‘선한, 온화한, 자애로운, 유순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은혜를 모르는데도 계속해서 친절과 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어 성경의 “kind”를 ‘온유(溫柔)’라고 번역하였다.
“kind”는
1.[사람이] […에게] 친절한, 마음씨 고운, 인정 많은, 관대한[to ‥]
2.[언행·표정 등이] 부드러운, 친절한 마음에서 우러난, 충심으로부터의
3. (비격식) [날씨 등이] 온화한; 기분 좋은(agreeable); [촉감이] 부드러운, 감촉이 좋은; 도움이 되는’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온유(溫柔)”라는 말의 겉에 드러난 뜻은 ‘따뜻하다, 부드럽다, 순하다, 온순하다’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해를 끼치는 죄수에게까지 계속해서 물을 주는 순한(연약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온유(溫柔)”가 사랑의 중요 속성이요 본질이라면 날씨로 친다면 ‘봄날과도 같은 따뜻함, 부드러움’이 그것이요, 사람으로 친다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움’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온유(溫柔)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본다.
우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실패할 것이 뻔히 보이는 길을 우겨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됨이 곧 드러날 길을 걷고자 하는 자녀가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문제를 일으키고도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다. 손해날 것이 분명한 길을 당당하고 용감하게 걸으려는 이들도 있다. 이들을 향해 어머니가 거듭 말썽만 피우는 아들을 대하는 마음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원수 같은 말썽쟁이에게 계속해서 갈증을 해소하는 물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욕(忍辱)과 인고(忍苦)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하다’는 말로는 “온유(溫柔)”의 뜻을 다 담아낼 수 없는 듯하다. 사람들에게 부드러우려면, 친절하려면 타고난 성품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말썽만 피우는 자들이 어찌 눈에 거스르지 않겠는가. 어찌 손해를 입고도 마음이 편하겠는가. 잘못하고 실패했는데 어찌 곱게만 보이겠는가. 이들에게 봄볕 같은 미소로 목 축일 물을 건네려면 인욕(忍辱)의 마음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속으로 꾸욱 꾹 누르고 눌러 참고 또 참으며 견디는 내면적 인고(忍苦)가 전제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온유의 의미라고 본다.
끝으로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관용(寬容) 곧 너그러운 마음이 없이는 어떤 부드러움도 따뜻함도 친절함도 불가능한 일이다. 남들이 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아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너그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잘못을 수없이 반복하는 사람을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끼친 손해가 큰 데도, 그래서 그 상처가 아직 선연한데도 또 손해를 끼쳤다면 누구 쉽게 용서하겠는가. 실패가 뻔한 짓만 골라하는 이들을 누가 달갑게 대할 수 있겠는가. 모두 하해(河海)같은 너그러움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사랑”이 ‘온유(溫柔)하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끝없이 참고 견디며 너그럽게 품에 안아 주는 마음을 가지다’의 다른 말이라고 본다. 이래저래 ‘사랑’이 온유(溫柔)한 것이라면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거듭 깨닫게 된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은혜를 모르는데도 계속해서 친절과 선을 베푸는 것이 ‘온유(溫柔)’라면 ‘사랑’이란 도(道)를 닦으며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