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매 깡통 돌리고 놀던 시절/박철영
설을 쇠고부터 슬슬 동네 아이들은 들로 나가 불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도 재미있었고 깡통에 관솔이나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넣고 돌리면 연기가 서서히 불꽃으로 바뀌었다. 깡통을 돌릴 때 불꼬리가 길면 멀리서 보아도 완벽한 원을 그려낸다. 깡통도 귀한 때였다. 당시는 꽁치 통조림을 먹고 버린 깡통이 눈에 띄면 주워다 마루 아래 안쪽에 던져놓았다. 되도록 두세 개 정도 챙겨 놓고 필요할 때마다 못으로 구멍을 뚫어 사용했다. 구멍은 깡통 바닥에도 뚫지만 위에도 네 개씩 쌍을 이뤄 몇 군데를 뚫어주었다. 그러면 깡통을 돌릴 때 불씨가 약해도 불기운이 금방 살아나 좋았다. 그러고는 깡통에다 마지막으로 삐삐 선을 구해다 최종 묶어주면 최상의 불꽃놀이용 깡통이 만들어졌다.
깡통으로 불을 살려 노는 것은 보통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들판이 아니어도 영도 양반네 집 뒷산은 풍화된 화강암이어서 놀기에는 최적이었다. 단단한 돌로 풍화된 화강암을 톡톡 내리찧으면 한 참 후엔 옴폭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작은 확독처럼 생긴 구멍을 하나씩 만들어 노는데 어린 마음에 재미가 상당했다. 구멍에다 화강암에서 부스러진 모래를 채우고 불기운이 가득한 깡통을 올려놓기를 반복하면 서서히 구멍 안 모래가 달궈졌다. 뜨거워진 구멍 속 모래에다 집에서 가져온 가래 떡을 묻어두고 오목눈이 새떼처럼 조잘거리다보면 금새 볼록하게 익었다. 친구들과 그것을 나눠 먹으며 불 깡통을 돌리고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지금도 놀던 바위에 올라가 보고 싶다. 추억의 돌 구멍들이 지금도 그대로 불기를 안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노는 날은 잘 넘어가지만, 또 며칠이 지나면 몸이 근질거렸다. 깡통을 돌릴 때 그려지듯 한 동그란 불의 환상을 보고 싶은 것이다.
밤이 되기를 고대하는 마음에 몸이 근질거렸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눈치껏 집 대문을 벗어나 아랫물 망거래로 나가면 인호 상훈이 병훈이 상근이 친구들이 나와 있었다. 여타 선 후배들과 어울려 물 건너 앞 논으로 나아가 놀기 좋은 곳으로 훑어졌다.이제 들판 한가운데 논에서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자기 깡통에다 낮에 준비한 관솔을 넣어 불씨를 살리느라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때 솔방울도 불 살리는 데 좋은 재료가 되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성냥갑에서 찢어온 성냥 딱지와 성냥 알은 주머니 속 귀중한 필수품이었다. 어른 눈을 피해 우리는 위험천만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녔다. 깡통 안에 불감을 넣고 돌리고 놀다 보면 깡통 안에 불타고 남은 재에 불씨들이 가득했다. 그런 깡통을 공중에서 힘껏 돌리다 잡은 줄을 놓아버리면 순식간에 깡통이 하늘로 치솟았고 그야말로 최고의 불꽃놀이가 하늘에서 펼쳐졌다. 불씨를 안은 재들이 하늘로 흩어지면서 다들 탄성을 질러대곤 했다. 이후 다른 애들의 깡통이 연이어 하늘로 치솟았다.
어딜 가나 아이들의 세계는 알게 모르게 영역을 확장하려는 심리가 온재되어 있다. 특히 부모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난 깜깜한 밤 들녘에서 깡통을 돌리고 놀다 보면 순한 아이들도 거칠어져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백면 외동마을 아이들도 요천수 건너에서 깡통 돌리기를 했다. 어느 쪽에서 먼저였는지 모르겠으나 한판 붙겠다고 함성이 올랐고, 우리 마을 선배의 지휘를 받아 요천수 둑을 경계로 늘어서 고함을 질러 전투 의지를 불살랐다. 저쪽도 맞고함이 넘어오고 그러다 서로에게 불 깡통을 날려보지만, 요천수를 건널 수는 없다. 물론 지금처럼 둑이 정비되기 전 요천수는 폭이 좁은 곳이 있었다. 환희와 절정의 여운을 남긴 채 아이들의 탄성도 서서히 사그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도 식고 저 멀리 보이는 동네의 불빛을 쫓아 돌아갔다.
아직도 흥이 남은 아이들은 신작로 가에서 모여 깡통을 돌렸다. 깡통에서 빠져나간 불씨가 하늘로 날아가 곡성 양반 네 집 담에 덧대어 쌓아 놓은 짚단에 자칫하면 옮겨붙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들판에서 깡통을 돌리다 논에 쌓아놓은 짚단을 몽땅 태워 먹은 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 곡성 양반은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몇 번의 경고가 고함으로 바뀌다 급기야는 화가 난 곡성 양반이 대빗자루를 들고 쫓아 나올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또 슬금슬금 도망가고 거리는 이내 짖던 개들마저 조용해졌다. 식정리의 겨울밤이 아이들 꿈속에서 깊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깡통을 돌리는 것도 연날리기 하는 것도 관례상 정월 대보름날 전까지만 행해졌다. 대보름 밤에는 꼬맹이부터 선배들까지 역할 분담이 되어 곡성 양반네 집 앞 아랫물로 가는 도랑 위에 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를 얼기설기 걸치고 그 위에 집집마다 선배들과 꼬맹이들이 한 조가 되어 들고나온 짚단을 쌓아 올렸다. 쌓아 올린 짚단은 상당해서 어지간한 집 가을걷이를 한 정도는 되어 보였다. 짚단을 내주는 집도 있지만 더러는 대나무를 베어가도록 한 집도 있었다. 자기 키의 몇 배 되는 대나무를 통째로 끌어다 놓으면 선배들은 짚단 위에 깃처럼 세웠다. 그러고 사이 사이에 소나무도 세워 달집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 동네 달집은 상상 이상으로 컸고 갖출 것을 다 갖춘 모양새였다. 어제까지 날리던 연을 갖고 와 아이들은 대나무에 매달았다. 조금 후면 태워질 자신들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달집 주변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로골 새집 꼭대기에서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듯 아랫물을 내려다보던 오수 아지매도 정갈히 옷을 입고 주변을 서성였다. 기다리던 대보름달이 앞산 쪽에서 떠오르면 함성과 같이 달집에 불을 붙였고 지난해의 액운을 다 태우고 새해 기운이 활활 치솟듯 맹렬히 타올랐다. 짚단이 통째로 타면서 검붉은 불꽃이 생소나무를 덮치고 기어이 대나무 가지를 타고 연 꼬리를 삼켰다. 그런 불기운에 새해 간절한 소원을 염원하듯 오수 아지매의 다소곳한 고개가 두 손을 합장한 채 몇 번을 더 조아려졌다. 마지막으로 동전이 불꽃 속으로 던져 졌다. 지금도 궁금하다. 오수 아지매의 간절한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새집에 들어와 낳았던 유일한 핏덩이 생규형의 순탄한 앞날을 기원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속속 들이를 알고 보면 가슴 아픈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으로 지어진 달집도 불꽃이 사그라져갈 즈음 동네를 요란히 휘젓고 다니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곡성 양반네 집 옆으로 동청이란 곳이 있었다. 동청은 일본 강점기에 마을 회관을 지칭하는 말로 요즘으로 치면 마을 회관 자리였다. 해방되고서도 마을에서는 그대로 동청이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얹혀가는 틀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틀에다 무명천을 감아 상여꾼들이 상여를 맸다. 동청은 일부는 허물어졌고 밤이면 그곳도 시커멓게 웅크린 듯해서 무서웠다. 거기다 허물이지는 황토 건물 한쪽에다 길쭉한 1미터는 족히 되는 산소통을 잘라 만든 것처럼 생긴 종이 매달려있었다. 그 종은 마을에 연락수단이었고 마을에 불이 났을 때는 더 화급하게 울렸다. 종소리는 깊은 울림은 없었고 쇳덩이가 깨지는 듯 소리가 좀 요란했다. 다들 초가집이라 불이 나면 금방 불길이 집을 덮쳐버렸다. 그러면 누군가 달려가 종을 울렸고 종소리는 타종의 속도와 힘만큼 멀리 마을 안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면 집집마다 양동이를 들고 나와 물을 퍼 날라 불을 껐다. 나도 웃골 홍엽이네 집에 불이 났을 때 물을 퍼 날랐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기억은 마을 구판장이 불길에 휩싸여 애꿎은 사람까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그때가 아마 중학교 1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정도로 초가집이 많아 불에 취약했다. 우린 밤이면 동청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숨는 곳은 너무 넓었다. 곡성 양반 집에 숨어들거나 동청 뒤 진 회장 댁으로 숨거나 아니면 큰집 사촌 동수 형님 집까지 숨어들었으니 우릴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숨바꼭질을 숭구생끼라고 했다. 나중 알고 보니 숨바꼭질이 바른 말이었다. 그런 것으로 봐서 우리 동네만 쓰던 독특한 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작로를 가리키는 망거래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 식정리란 지명을 신건젱이라 불렀다. 당시 어른들은 신건젱이라고 말하면 쉽게 알아먹었고 모퉁이를 모테라고 말했다.
곡성 양반네 집과 나란히 붙은 동청 앞으로 버스가 지나가는 신작로가 있고 그 앞을 망거래라고 불렀다. 망거래에는 낮에도 동네 어른뿐 아니고 아이들도 나와 놀았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바퀴에 체인을 매단 버스가 하얀 눈길을 달려 지나갔다. 지나가는 버스 바퀴에서는 체인과 눈이 부딪치며 내는 특유의 소리가 불규칙하게 되풀이되며 멀어져갔다. 버스가 지나간 뒤 눈길에 난 바퀴 자국이 내 눈에는 꽈배기 과자를 뿌려놓은 듯 똑같아 보였다. 그렇게 신작로에 쌓인 눈이 다져져 단단해지면 아이들은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탔다. 눈밭에 미끄럼을 타다 또래끼리 뭉쳐 자신들의 똥 품 잡는 이야기로 주변 아이들을 끌어모았다. 그 중 인호네 큰형이 생각난다. 양호 형은 우리보다 다섯 살 위였다. 키는 작달막해도 체구는 단단하게 생겼고 택호가 주레기떡인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그런 양호 형이 시내에서 패싸움이 붙었단다. 한참 하다 보니 수세에 몰려 위기에 처했을 때 마침 가방 속에 심부름으로 사놓은 양초가 생각나 그것을 빼서 휘둘렀더니 칼인 줄 알고 삽십육계를 하더라는 당시에는 대단한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액션을 겸해서 이어가는 폼생폼사는 한참을 더 이어갔다. 어차피 동네 앞 망거래는 매일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뀔 수밖에 없다. 어느 날인가. 창원이 형은 월남에 간 바로 위 충원이 형이 보내준 군용 군화를 신고 눈밭에서 폼을 한껏 잡고 있었다. 내가 봐도 멋있었다. 끈을 과감히 풀어헤친 폼이 멋스러워 보였다. 저걸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거란 것을 짐작했다. 몇 년은 족히 신어도 닳아지지 않을 것처럼 군화는 완벽해 보였다. 창원이 형 주변에는 종주네 형 뾰쪽감 종만이 형이 붙어 다녔다. 머리가 뾰쪽해서 뾰쪽감처럼 생겼다고 그렇게 불렀고 우리 창수 형과는 사이가 별로였던 것을 눈치로 알아챘다. 여하튼 창원이 형네 충원이 형이 안타깝게 월남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다. 창원이 형이 군화를 신고 자기 형이 대장으로 계급이 올라갔다는 말을 들은 것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때가 아마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했단 뜻이 아니었을까. 충원 형은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얼굴도 멋지게 생겼었다. 그런 체격으로 내가 다닌 초등학교 때 부락 대항 달리기에서 갈치 부락보다 선두를 달렸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웃어도 조용한 표정이 멋있었는데, 타고난 시대가 나빠 좋은 사람을 앗아가 버렸다. 창원이 형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나이도 비슷해서 서로 마음을 나누며 지내는 사이였는데 안타까웠을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월남을 다녀온 분들이 충원이 형 말고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아들이 월남을 기술자로 다녀와서 월남 집이란 택호가 붙어버린 월남 집 아들이 있고 얼굴이 너무나 선하고 순해 빠져 싸움이라고는 못할 것 같은 웃골 이천 선배가 무사히 다녀왔다. 동인이네 하고 사촌 간이라 언젠가 놀러 갔다가 월남에서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후방 보급지원 업무를 맡았다고 들었다. 마지막 우리 큰집 사촌 동수 형님의 큰아들인 상기 조카님이 있었다. 상기 조카님도 월남에 장교로 지원 파병되었지만, 운이 따라 주지는 않았다. 내용인 즉슨 소대장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전우를 잃었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불명예제대를 한 것으로 들었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심리적으로 아주 힘들었던 것 같았다. 마음만큼은 선하디선한 사람들임은 분명하다. 월남전의 상처가 시골 한적한 우리 마을에서 아직도 아물지 못한 채 옛날이야기처럼 가물가물한 기억 같아 가슴 아프다.
첫댓글 회장님의 산문 잘 읽고 있습니다. 저는 고향이 전북이다 보니 기억속의 사투리와 약간씩 차이가 나네요 간수매도 저희는 간소매라고 불렀답니다. 통조림용깡통이죠? 불깡통 저희는 망우리라고 불렀답니다. 아마도 불망울을 늘어빼서 망우리라고 불렀나봅니다.
김작가님 고향이 전북이었군요. 반갑네요. 여기 전북 사람들이 몇 분 있지요. 사투리는 약간의 발음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래도 소통이 되는 것이 사투리라고 봅니다. 망우리란 말을 썼는데 정확히 맞는지 고민하다 이렇게 붙인겁니다.
그리고 전 15년 12월 31일부로 회장직을 그만 두었습니다. 신임 회장이 있기 때문 참고 하시고요.
항상 열시밓 글을 쓰는 열정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