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도의 날 제정을 위한 기도】 (4)이승만
구하라, 대한민국에 <국가 기도의 날>이 제정될 때까지!
🔹탈옥하다 사형언도를 받은 이승만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 감옥에 갇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이에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힌 이승만은 머리에는 칼, 손에는 수갑, 발에는 형틀을 씌워 탈옥을 하지 못하도록 감금되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을 보면, 그가 잡혀서 태장 100대를 맞고 종신형에 처해지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대동합방론을 주창하는 자들과 여러 번 비밀회견을 한 일이 있다. 일본의 정책은 첫째 러일전쟁을 하는 것이었고 그 후에 미일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은 동양을 서구 각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이러한 전쟁을 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국과 청국은 일본과 손을 잡고 생존을 위한 투쟁에 같이 참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주장을 일본사람이 쓴 '러일전쟁과 미일전쟁' 이란 책에서 읽은 바 있으며 또 그들의 이러한 전쟁을 준비하는 동기에 깊이 감명되었다. 이 일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인 1896년경이었다.
내가 체포된 것은 아슬아슬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체포된 후] 미국공사와 경무청의 고문관은 내가 고문을 당하거나 부당한 형벌을 받을까 염려하여 매일 [감옥에] 나를 보러 오곤 했다. 나는 이런 일은 독립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그들의 간섭을 싫어했다. 그러나 미국공사는 황제가 외국 사신들을 증거인으로 세우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였던 것이므로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다시 나서서 그들을 부르기를 원하고 있었는데 나는 주상호(주시경의 본명)로 부터 시국정세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탈옥하여 뛰쳐나오면] 민족주의자 군중이 감옥문 밖에서 나를 맞이하여 종로로 달려가서 군중대회를 다시 열기로 결정하였다. 권총이 [감옥 속에] 들어왔다. 어느 날 오후 최정식과 서상대, 그리고 나는 감옥을 뛰쳐나왔다.
두 사람은 감리교 컴파운드(Compaund: 선교사 주택지)로 뛰어갔으나 나는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너무 실망하여 쓰러져 버렸다. 나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서로 약속한 시간에 대한 오차가 있어서 바깥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 때 우리가 나갔던 것이다.
[탈옥할 때에] 나는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다[발사하지를 않았다]. 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하나님)의 손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나는 병영으로 끌려갔다. 칼을 뽑아 쥔 많은 병정들이 나를 둘러싸고 끌어갔다... 나는 경무청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박달북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는 왕당파로 나와 가장 원한에 사무치는 원수였었다... 그리고 나는 또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때 나는 그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죽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나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풀어대는 그들은 격분한 동물들 같았다. 족쇄, 수갑, 형틀…
어떤 늙은 죄수가 비밀히 감옥 속으로 들여온 신문을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주었다. 지난밤에 이승만이가 사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나의 부친은 나의 시체를 찾으려고 감옥 문 앞에 왔다 가셨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내가 품고 있던 질문은 꼭 한 가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예배실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하고 즉시로 목에 씌운 형틀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오 하나님, 저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저희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이승만
"성경책 한 권이 몰래 들어왔다. 죄수 한 명은 간수가 오는지 보기 위해 파수를 섰고 또 한 명은 책장을 넘겨주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7개월 동안 나는 형틀을 쓰고 있었다.
나의 정적이었던 홍종우가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의 앞에서 나의 형틀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홍은 보황회의 회장으로 나에게 가장 큰 정적 둘 중의 하나였는데 재판장이 되어 나의 사건을 결정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생명을 살리려고 온갖 힘을 써주었다. 참으로 인생의 야릇한 역전이었다.
나는 나의 죄와 도망간 나의 공범자들의 죄 때문에 법에 의하여 사형될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최정식이 잡혀서 형무소로 돌아왔는데 그가 잡혔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면할 것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그와 내가 재판을 같이 받게 된 날 나는 몸이 쇠약해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처지였었다. 그는 활기 있게 그리고 웅변조로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는데,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나에 대한 증언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하였다. 따라서 판사는 다음 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그가 전날 말한 말에 걸려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물질적 증거로 나의 권총이 제출되었는데 나는 한방도 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나는 재판과정에서 별로 할 말이 없었고 판사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결론을 지었다. 최고재판소의 재판장 홍종우가 나의 부친에게 나의 생명을 구해주기로 결정하였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는 소식은 퍽 후에 들었다.
최정식이 사형되는 날, 그는 교수대로 끌려가면서 나더러 "이승만씨, 잘 있으시오.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시작한 일을 끝맺으시오"하고 말했다.
나는 무기징역과 매 1백대를 선고받았다. 나의 부친은 매를 때리는 간수에게 돈 얼마를 주셨는데 그 자는 바로 우리가 파옥할 때 다리에 총을 맞은 자였다.(김윤길) 아버지는 돈을 주시면서 1백대를 맞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태형집행 준비가 되었을 때 입회하러 온 판사는 매 때리기를 시작하라고 명령을 하고는 창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 간수는 하나 둘 셋 세면서 몽둥이를 들었다 놨다 했는데 태형이 끝났을 때 내 몸에는 아무 상처도 나지 않았다."
🔹종신형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옥중 생활
1899년 1월 30일에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힌 이승만은 종신형이지만 사형수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는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7개월 동안 나는 10kg(20파운드)쯤 무게가 나가는 나무로 만든 목걸이(칼 : 수판)를 목에 달고 두 손은 수갑에 채우고 발은 형틀(차꼬)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다른 죄수들은 몰래 감옥으로 들여온 조간신문에서 밤중에 내가 사형되었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준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선친은 나의 죽은 몸을 매장하겠다고 찾으러 오시곤 하셨다.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수가 나와 같은 형틀에 얽매여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간수와 사형집행리와 순검이 갑자기 감옥 문을 열고 우리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안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형집행리에게 넘겨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형틀을 열고는 살인수를 끌어내고 나는 다시 형틀에 잠가버렸다. 나는 "이 다음은 나로구나"하고 독백하면서 오히려 내가 먼저 끌려가서 빨리 끝이 나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서 수갑과 형틀이 벗겨지자 삶에 대한 욕망이 나에게 서서히 떠올라왔다. 내가 그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감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포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어떤 이들은 사형장에게 끌려가면서 마치 내가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듯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을 쳐주는 것이었다.
무거운 칼 소리가 들려올 때의 그 복잡한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장호익 장군도 우리 감방 바로 뒤에서 단수단했다. 그는 세 번째 칼 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하여 만세를 불렀다. 나는 요새도 꿈속에서 감옥시절의 이런 저런 일을 보곤 한다."
🔹청일전기 번역
이승만은 감옥에서 틈이 나는대로 성경책으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영한사전』을 편찬했고,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 서적인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했다([청일전기]). 뿐만아니라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도하며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기독교를 포교하며 전도인의 직무에 힘썼다.
이승만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신흥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글을 쓸 수 있는 그 무엇이나 책은 일체 못 들여오게 되어 있었지만 간수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묵인해주었다. 우남은 화영자전(일본어 - 영어)을 가지고 있었고 아펜젤러와 벙커씨는 잡지 '뉴욕 아웃룩(New York Outlook)와 '인디펜던트(Independent)를 들여보내 주었다.
죄수들은 일척직경쯤 되는 항아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은 그 항아리를 눕혀놓고 그 속에 몰래 들여온 양초를 켜고 공부를 하곤 했다. 간수들이 올 때는 그 항아리를 벽으로 돌려놓으면 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러면서 영어를 배웠다. 미국잡지들이 그의 교과서였다.
그는 또 붉은 물감을 몰래 들여와서는 잉크를 만들어 낡은 잡지에 글쓰기 연습을 하곤 했다. 그 후 그는 눈을 감고도 잡지에서 읽은 문장들을 외웠다. 그는 사전에 있는 영어단어를 모두 외웠다.
그는 수감되기 전에 '제국신문'을 편집하였고 감옥 속에서도 그 신문의 논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승만이 정규적으로 글을 쓸 때면 그 신문의 독자가 늘었고 정치적 압력으로 그의 글이 나가지 못할 때는 독자가 줄곤 했다."
🔹옥중 전도사가 된 이승만
한성감옥에서 어느날 자신도 죽으면 어떻게 되나를 생각하던 중 아펜젤러 선교사의 설교가 생각나서 자신의 영혼과 우리나라를 구해달라(Oh God, save my soul and save my country)는 기도를 간절히 하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된 이승만은 감옥안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사대부 출신 정치범인 이원긍·이상재·유성준·김정식·홍재기·김린·안국선 등과 한성감옥 간수장 이중진 등 40여 명에게 전도하였다.
이승만은 그가 목에 차던 칼에서 자유로와지자 독서와 글을 쓰며 전도하는 데 힘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감옥 안에 책을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독립을 외치는 이승만과 같은 애국자에게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면 누구보다 열심히 전도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옥으로 수많은 책을 넣어주었다.
감옥 안에서 그가 읽은 책들은 그의 미래를 향한 비전인 조국의 독립과 기독교로 세워지는 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을 만들어 주었다.
선교사들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도왔다. 그가 사형수가 되지 않도록 힘을 써서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며 또한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을 보살폈으며, 언더우드도 자주 찾아왔으며 에비슨 등은 콜레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감옥에 약품을 넣어주었다.
(계속)
🔺대한민국에 <국가 기도의 날>이 제정되도록 기도하자!
한국어머니중보기도회
대한민국 국가 기도의 날 제정을 위한
기도방 지킴이 김수경(Esther) 목사
Pastor Esther Soo-Gyung Kim
뉴 욕 퀸 즈 교 회
†he 2nd Life Foundation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