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13
5. 역사(김승옥) 줄거리
나(외화)는 언젠가 어느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가 우연히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허풍도 섞이고 이야기의 본론과 결론이 어긋나 있지만 상징적인 부분도 있어 다음과 같이 그대로 옮겨 본다.
나(내화)는 새로 이사한 깨끗하고 정리된 방에서 아침에 잠을 깨자 어리둥절해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 빈민가인 창신동에서 하숙을 하다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창신동과 다른 이곳의 모습에 당황하지만 곧 깨끗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나(내화)는 병실처럼 깨끗한 방에서 기거하며 마치 시계처럼 정확한 주인집의 생활을 관찰하게 된다. 이 집의 식구는 영감과 노파, 대학 강사인 아들과 며느리, 여고생인 여동생, 아들 부부의 세 살 난 딸, 그리고 식모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매일 정확한 시각에 깨어 밥을 먹고 일을 나가며 노파와 며느리는 미싱을 돌리고, 오후에는 며느리가 피아노를 치고 저녁에는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이러한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세계를 접하게 된 나는 창신동 빈민가를 떠올리게 된다.
창신동의 판자로 얽어서 만든 작은 집에서 영자라는 창녀와 깡마르고 절름발이인 사내와 그의 열 살 난 딸, 사십대 막벌이 노동자 서씨가 살았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눈이 가느다란 영자는 나에게 광화문의 유명한 성명철학자에게 함께 가 보자고 조르기도 하고 ‘미스 코리아’선발대회 때에는 마당에서 한복을 입고 자칭 미스 코리아가 되기도 하는 창녀다. 절름발이 사내는 매일 밤 딸을 교육하며 구타를 일삼는다. 그리고 막벌이 노동자 서씨는 매일 밤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술친구다. 그러던 어느 날 서씨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누운 나를 깨워 동대문으로 끌고 간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대문을 빠른 속도로 올라 그 위에 금고만 한 돌덩이를 번쩍 들어올리는 놀라운 모습을 나에게 보여 준다.
나는 서씨로부터 그가 가문 대대로 역사(力士)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그 힘은 서씨로 하여금 공사장에서 남보다 약간 더 많은 보수를 받게 하는 기능밖에 못하기 때문에 밤마다 그 기운을 동대문의 돌들을 옮기는 데 쓰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힘이 유지되고 있음을 선조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창신동의 모습과 서씨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차 이곳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권태와 혐오를 느끼게 된다. 곧 나는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약국에서 흥분제를 구입해 와 주인집 식구들이 먹는 음료수에 탄다. 여느 때처럼 식구들은 같은 시각에 잠이 든다. 나는 흥분제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을 식구들을 생각하며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거칠게 두드린다.
그 후 주인집 영감이 나와서 그를 억세게 끌고 갔다며, ‘어느 쪽이 틀렸을까요?’라고 묻는 젊은이의 질문에 ‘나(외화)’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도 틀려 있는 사람은 없고, 다만 그 두 가지 생활이 내 곁에 공존한다면 조금 멍청해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핵심 정리
배경 창신동 빈민가와 깨끗함 양옥집
시점 외화―1인칭 관찰자 시점 /내화―1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 현대인의 기계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풍자
구 성
발단 ‘나(외화)’가 그의 이야기를 옮기고자 함
전개 ‘나(내화)’가 깨끗한 양옥집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함
위기 ‘나(내화)’가 창신동 빈민가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함
절정 서씨가 동대문의 돌을 옮기는 것을 보고, 그가 역사(力士)임을 알게 됨
결말 ‘나(외화)’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도 멍청해질 것이라고 생각함
등장 인물
나(외화) ‘나(내화)’의 이야기를 듣고 전해주는 인물
나(내화) 생명력 넘치는 삶을 동경하면서도 현실적 안락 또한 저버리지
못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 주는 인물
서씨 돌을 옮기는 비능률적인 행위를 통해 생명력을 발산하는 인물
할아버지 양옥집의 가장으로서, 질서 의식을 강조하는 인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60년대 도시화된 삶의 형태에 대해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한 김승옥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서, 현대인의 꽉 짜인 기계적인 일상생활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한 일상생활은 능률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현대 사회의 일반적 성격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는 새 하숙집의 빈틈없는 생활 질서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그것이 생겨난 본래의 목적이 잊혀져 버린 질서라는 데 문제가 있다. 좀 더 나은 삶이라든가. 행복을 위해 생겨났을 그 질서는 이제 그냥 지켜져야 하는 규칙으로 변질된 것이다. 비록 이 작품에서는 질서를 지키는 목적으로 가풍을 내세우고 있지만, 가풍이 왜 하필이면 질서 정신을 통해서 성립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으며, 그 집의 가족들은 가풍과 무관하게 그냥 기계적으로 질서를 지킬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공은 빈민가의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생활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것의 불결함이나 부도덕함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있던 활기찬 생명력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명력은 역사(力士)인 서씨의 비능률적인 행위 속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비록 능률이 지배하는 대낮이 거리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동대문의 무거운 돌을 밤에 몰래 옮겨 놓는 그의 행위에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생명력이 발현되고 있다.
이 작품은 외화 속에 내화가 들어 있는 닫힌 액자 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외화와 내화의 시점은 모두 1인칭 시점(외화 - 1인칭 관찰자 시점, 내화 -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대립적 질서를 표상하는 두 장소가 나오는데, 이러한 이원적 배경은 작품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창신동의 그 지저분한 방’과 ‘병원처럼 깨끗한 양옥’이라는 상반된 분위기의 배경은 각각 ‘원초적 건강성과 개인의 자유 의지가 활성화되는 공간’과 ‘원초적 건강성과 개인의 자유 의지를 억압하고 근대적 규율 권력의 폭력성이 지배하는 공간’을 상징한다.
도회의 삶의 질서와 부르주아 일상성 세계를 표현하는 ‘병원처럼 깨끗한 양옥’, ‘일주일이라는 보수를 치르고도 여전히 서먹서먹한 느낌이 드는 방’에 대한 ‘나(내화)’의 지배적인 태도는 소외와 거부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새로 이사 온 양옥집에 대해 정신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 소외와 거부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새로 이사 온 양옥집에 대해 정신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 소외와 거부의 반응보다는 미약하지만 양옥집에 대한 동경과 편입 욕망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는 양옥집의 가족들이 마시는 음료수에 흥분제를 타는 행위에서 보여 진다. 즉 그는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라도 그들과 같은 생활을 더 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나(외화)’는 김승옥의 다른 소설들의 주인공들처럼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다.’라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결국 김승옥은 이 작품을 통하여 도시 생활을 하게 되면서 겪는 소외감과 어려움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편입하여 살아가야 하는 삶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인간 생활이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모색해 볼 수 있다. 또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면서 그 반대항으로 설정한 ‘역사(力士)’라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함으로써 작가가 모색하고 있는 대안적인 인간형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