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평지 마을. 초가집 돌담마다 감나무가 솟았다. 푸른 하늘에 주황빛 감들이 보석처럼 박혀 가을이 환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담길 골목도, 마을 한가운데 우뚝 선 커다란 은행나무도, 모두 선명한 가을빛에 감싸여 있다. 전남 강진군 병영. 얼핏 보아 남도의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보이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 마을 골목골목엔 어느 지역 이야기보다도 진한 사연들이 서려 있다. 조선 500년 동안 전라지역 육군 총지휘부가 자리잡았던 곳, 350년 전 이 땅에 표류해온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 일행의 발자취가 서린 땅이다.
가을나무들 사이로 벋은 1㎞ 흙돌담길 ‘병영’이란 ‘병마절도사영’의 준말이다. 조선 태종(1417년) 때 왜구 침입에 대비해 광주에 있던 지휘부를 이곳으로 옮겼다. 병영성은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 장군이 처음 쌓은 성. 둘레 1㎞ 남짓 되는 성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병영초등학교 터로 쓰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에 함락돼 성은 폐허가 됐다. 병영성에 얽힌 전설. 성을 쌓을 때, 자꾸 무너져내려 곤경에 빠졌다. 산천에 눈이 덮인 어느날 마천목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호랑이가 지나는 곳마다 눈이 녹더란다. 다음날 보니 실제 눈 녹은 자리가 있어 그곳을 따라 성을 쌓으니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병영성을 설성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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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멜 일행이 그늘에 앉아 쉬며 향수에 젖곤 했다는 병영면 성동리의 800년된 은행나무(위). 병영면사무소 앞의 거북상(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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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의 대표적 상징물중 하나는 ‘한골목.‘ 1.3㎞의 흙벽돌 돌담길이다. 크고 긴 길이라는 뜻을 지닌 운치있는 골목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돼 옛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집들이 흙과 짚을 이겨 돌을 쌓아올린 아름다운 돌담을 유지하고 있다. 빗살무늬 형태로 쌓아올린 돌담이 특이하다. 담의 높이도 2m를 웃돈다. 남자들이 떠돌이 행상으로 외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 여자들만 남은 집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높게 쌓았다고 한다. 병영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고장이다. ‘북 개성, 남 병영‘이란 말도 전해온다. 병영장을 보러 영암·장흥·강진 일대 상인들이 몰려들던 호남 남부상권의 중심지였다. “병영 사람은 고춧가루만 먹고도 물속으로 30리를 간다”고 할 정도로 주민들의 장사 수완이 뛰어나고 집요했다. 500년간 이어져온 군사주둔지 마을 주민들의 삶의 애환이 오죽했을까. 자연스럽게 장사에 대한 집념이 강해지고, 상업의 발달로 이어졌으리라.
이방인 하멜 일행의 정과 한이 서린 마을 병영면 성동리엔 높이 30m, 둘레 7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넉넉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800년 동안 마을의 풍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무다. <하멜 표류기>를 써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처음으로 상세하게 알렸던 하멜과 일행 32명의 병영 유배생활을 지켜본 것도 이 나무다. 하멜 일행은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중 배가 난파돼 1653년 여름 제주도 모슬포 바닷가로 흘러들었다. 한반도에서의 13년 생활중 7년(1656~1663)을 병영에서 지냈다. 남씨 성을 받은 이들은 스님들의 도움 속에 나막신 만들기, 돌담쌓기 등 노동으로 생활했고, 흉년이 들면 거리에서 춤판을 벌여 걸식하며 연명했다고 한다. 일부는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고 11명은 이곳에 뼈를 묻었다. 남은 이들은 좌수영·순천·남원 등으로 분산 수용된 뒤, 1666년 9월 여수에서 하멜 등 8명이 탈출을 감행해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개선을 뛰어넘는 감격의 귀향이었으리라.
하멜 일행이 남긴 자취는 뭘까. 일부 주민들은 마을 돌담의 빗살무늬 형태가 하멜 일행의 담쌓기 방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한다. 나무를 통으로 깎아낸 나막신 형태도 이들로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은행나무 밑에 앉아 동남쪽 수인산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랬다고도 한다. 병영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하멜 은행나무`로 부른다.
올해는 하멜이 표류해온지 350년 되는 해. 강진군은 병영에 네덜란드촌 건립을 추진중이고, 네덜란드의 영화사는 하멜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이다. 네덜란드에 입양됐던 한국인 여성 주인공이 고국을 찾아와 하멜의 발자취를 더듬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내년 2월 로테르담영화제 출품을 거쳐 국내에서 방영될 예정.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끝 목포에서 나와 2번 국도~영암 독천 거쳐 성전리에서 814번지방도~작전면 지나 병영면으로 간다. 호남고속도에서는 광산나들목을 나와 13번 국도 따라 나주~영암 거쳐 835지방도로로 좌회전(장흥쪽)해 간다. 광주에서 병영행 직행버스가 하루 10여차례 있다.
<먹을거리>
병영엔 수인산 산행객들이 하산길에 자주 들르는 식당이 있다. 남삼인리 엘지주유소 앞의 설성식당이다. 이곳에서만 12년 전통을 가진 고추장양념 돼지삼겹살불고기 전문 한정식집이다. 1인분에 5000원이지만 2인분부터 한상차림(1만원)으로 낸다. 월요일엔 가끔씩 쉬기도 하므로 전화확인이 필요하다. (061)433-1282.
<묵을곳>
영암의 월출산관광호텔은 온천탕을 갖춘 깨끗한 호텔. 월출산 전망도 좋다. 객실에도 온천물을 쓸수 있다. 온천탕엔 전망좋은 노천탕도 딸려 있다. 온천 5000원(평일). 객실 9만6800원(평일 7만8000원). (061)473-6311.
강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