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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놓고 말을 잃은 소설가 김승옥 — 등단 50주년 축하 모임에 가다(이승하)
김승옥의 단편은 한국 소설문학의 백미라고 해야 할까 절정이라고 해야 할까. 이 땅의 독자들은 이상의 「날개」를 읽고 황홀한 충격에 휩싸인 1936년 이후 26년 만에 다시 온몸이 떨리는 충격을 받는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생명연습」 이후 「무진기행」「力士」「乾」「환상수첩」「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서울, 1964년 겨울」「염소는 힘이 세다」「多産性」「내가 훔친 여름」……. 연속되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 소설가 김승옥. 5ㆍ16 이후 이 땅의 정치상황은 시민과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눈을 멀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었다. 김승옥과 이청준과 최인훈 등 4ㆍ19세대 가운데 김승옥은 선두주자였고 대표주자였다. 김훈은 무협지 작가였던 아버지 김광주의 늙다리 술친구들의 경악에 가까운 함성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야, 이놈 문장 좀 봐라. 이게 도대체 인간이냐!”
“걔는 인(人)이 아니야. 누구한테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된 놈일 거야.”
“좀 더 두고 봐야 할 거야. 아직 신인이잖아. 하여튼 놀랍고 또 놀랍다.”
그 ‘젊은 놈’의 출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어른들은 폭음했고 김훈 소년의 술심부름은 고달팠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 아버지는 담벼락에 머리를 부딪치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김승옥이라는 ‘젊은 놈’의 출현에 의해서 촉발된 울음이었다고 한다.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저녁 6시, 서울 거리에는 봄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학교 동문회 함춘회관 3층 연회장에는 ‘김승옥 선생 등단 50년 축하 문학 낭독회’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문단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실내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문학나무사가 한국작가소설총서 제2권 간행을 기념하여 마련한 이 자리는 동리문학원과 동인 모임 문학비단길, 문학나무 숲이 후원을 하고 후배 소설가 윤후명 씨가 개인적으로 뒤풀이 비용을 내어 마련한 자리였다. 행사의 사회는 『문학나무』 평론으로 등단했고 「김승옥 소설의 작가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서연주 씨가 맡아서 진행하였다. 곽광수, 김송현, 김치수, 권영빈……. 김승옥과 시대를 같이한 ‘동시대인’들이 속속 입장하였다.
김승옥이 「서울, 1964년 겨울」로 사상계사 제정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인연으로 『사상계』의 주간이었던 지명관 씨가 축사의 테이프를 끊었다. 한림대 석좌교수인 지명관은 표층의 역사와 심층의 역사를 구분하여 말하면서 김승옥 소설의 의의를 논하였다.
“당시에는 4ㆍ19혁명과 6ㆍ3사태 등 사회적 저항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표층의 역사라고 말씀드린다면 김승옥 선생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내면의 고뇌를 깊이 다루었기에 심층의 역사를 나타낸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소외의식을 보여주면서도 그 배경에는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는 김승옥 소설의 특성을 지명관 씨는 잘 짚어주었다. 그는 소설 뭉치와 함께 “이 소설이 보기에 영 신통치 않으면 버려도 좋습니다.”란 문구가 들어간 편지를 받는데, 읽어보니 손창섭과 장용학으로 대표되는 전후소설의 칙칙함이 사라진 대단히 참신한 소설이라 『사상계』에 실어준다.
이근배 씨는 김승옥의 감성적인 문체가 대학시절에 시를 많이 썼기 때문이라는 증언을 했다. 등단 이후 상당량의 습작시를 폐기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이는 시단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손실이라고 했다. 김승옥의 한글세대적 특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전시대에는 일본어로 교육받고 한글로 작품을 써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1941년생 김승옥은 한글로 교육을 받았기에 그런 이중언어가 주는 고통을 겪지 않고 자유롭게 우리말을 구사한 4ㆍ19세대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동인 ‘산문시대’의 일원이었던 김치수 씨는 대학 구내에서 만난 김승옥이 한국 소설문학사에 대해 너무나 정통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쉬는 시간이면 그의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들어 순천 사투리로 펼쳐놓은 한국문학사 강의(?)를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고 추억하였다. 유종호 씨가 명명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별칭이 한 천재의 탄생이나 돌연변이의 결과가 아니라 순천의 책방에서 책을 마음껏 갖다 읽은 엄청난 독서의 결과였다는 것. 김승옥은 고등학교 때 한국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섭렵하였고,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책방에 가서 밀린 외상값을 갚아주었다. 한국소설의 공백 지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예민한 그는 잘 알고 있었고, 그 앎에 기반하여 자신의 문체를 개발하였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안다고 외치면 그것은 기만이며 모른다고 하면 도피였던 1960년대, 4ㆍ19세대의 소설은 그로부터 시작되지만 작가로서는 단명하고 만다.
소설가 김승옥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다섯 분의 축사가 끝나고 답사를 해야 하는 시간에도 침묵을 지켰다. 작품 ‘이렇게 읽었다’ 시간에 정과리 씨는 김승옥이 창출해낸 ‘살아 있는 개인’의 의미를 짚어주었고, 시와 다를 바 없는, 아니 시보다 뛰어난 상징적이며 감각적인 문체의 특성을 언급하였다. 김도언 씨는 「서울, 1964년 겨울」의 의의가 새로운 인물 유형의 창조와 연극성에 있다고 하였다.
제1부 행사가 황충상 씨의 인사말로 끝났지만 주인공은 만면에 미소를 띠거나 고개만 간간이 끄덕일 뿐이었다. 간혹 어어, 아아, 감탄사인 듯 비명인 듯 내뱉을 뿐 짧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설을 쓰지 않고 있는 소설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김승옥.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함춘회관의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창밖으로는 비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대고 있었지만 문단사에 길이 남을 만한 따뜻한 행사, 흐뭇한 시간이 이어졌다.
김승옥이 말문을 닫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03년 2월 23일부터였다. 일산에서 주부 대상 소설 창작 강의를 하던 무렵이었다. 승용차에 오르는 순간, 운전대를 향해 몸을 기울인 자세로 쓰러졌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오랜 문우 이문구의 와병 소식에도 문병을 한 번도 가 서울 백병원으로 문병을 가려던 참이었다. 부인 백혜욱은 백병원이 아닌 일산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김승옥은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뇌경색 진단이 나왔다. 뇌 단층촬영 결과 좌뇌의 3분의 2가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8일간 치료를 받고 경희대 한방의료원으로 옮겨 6개월간 더 입원했지만 잃어버린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승옥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그의 많은 재주가 그에게서 펜을 일찍 거두어 간 것이 아닐까. 대학 시절에 그는 김이구(金二究)라는 다른 이름으로 <서울대학신문>에 삽화와 만평을 그렸다. 한국일보사에서 창간한 『서울경제신문』에 연재만화 견본을 그려 응모한 것이 채택되어 6개월 동안 만화 ‘파고다 영감’을 연재하였다. 『새세대』『경향신문』 등에도 만평을 그렸다. 아무튼 그 뒤에도 김승옥은 『선데이서울』에 「60년대식」을 연재하면서 삽화를 직접 그렸고, 콩트집 『위험한 얼굴』 속의 삽화도 직접 그렸다.
1966년, 「무진기행」이 김수용 감독에 의해 <안개>라는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본인이 시나리오 작업을 함으로써 김승옥은 영화계와 처음 관련을 맺게 된다. 다음해 그는 김동인의 「감자」를 각색하고 감독까지 한다. 부인의 결사적인 반대가 없었더라면 메가폰을 계속해서 잡았을 것이다. 1968년에 이어령의 소설 「장군의 수염」을 각색하여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한다. ‘60년대 작가’ 혹은 ‘4ㆍ19세대’의 제일 앞자리에 놓이는 김승옥은 이렇게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문단을 벗어나 영화계로 가 있게 된다. 그에게 이런 재주가 없었다면 더 많은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문단의 시각에서 본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1974년부터 시나리오 쓰기에 매진,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내일은 진실> <여자들만 사는 거리> <도시로 간 처녀들> <황홀> 등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거나 각색자가 된다. 70년대에 접어들어 그는 이와 같이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잖아. 더 이상 문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1970년에 김지하가 담시 「오적」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자 그의 석방을 위해 구명운동을 펼쳤다. 그 뒤에도 김지하가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의 주모자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되어 옥살이를 하자 소설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동갑내기 김지하는 70년대 거의 대부분을 옥에서 보내는데 자신은 상상력이나 허구에 매달린다는 것이 왠지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에게 최후의 작품을 쓰게 한 이는 『문학사상』의 이어령 주간이었다. ‘이상문상학’을 제정하여 1회 수상자를 김승옥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소설 안 쓴 지가 한참 된 그가 아닌가. 장급 여관에 투숙케 하여 펜과 원고지를 넣어주었다. 편집부원 서영은은 바로 옆방에 감시자로 투숙하였다. 행사 당일 네 번째 축사를 한 서영은 씨는 그 무렵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저와 다른 편집부 직원하고 둘이서 바로 옆방에 투숙했습니다. 천장 가까이에 아주 작은 창문이 있어 의자를 놓고 거기로 빠끔히 보면 옆방이 보였습니다. 방 안 가득 구겨진 원고지가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김승옥 선생님은 진행이 잘 안 되는지 손톱으로 한쪽 이마를 긁고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지 계속 긁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소설 쓰기가 그다지도 힘들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그는 소설 「서울의 달빛 0장」을 완성하였고, 이 소설로 1977년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김승옥은 몇 년 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한다. 1980년 「먼지의 방」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는데 마침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의욕을 상실, 15회 연재로 중단하고 만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된 일은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은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들어가고………. 폭음의 나날이 이어진다. 나중에 김승옥은 그 시절의 절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온 국민이 분노했다. 나 역시 얌전히 소설을 쓰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취해서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는 듯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부르짖기도 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불쑥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외침이 저절로 나왔다.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이 게재되기 시작했지만 분노와 충격 때문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았다. 군 검열에서 몇 줄씩 잘리기도 했다. 유신시절 10년 동안의 젊은 지식인들 이야기이니 계속 써봤댔자 나와 신문사만 골치 아프게 생겼다. 연재 15회 만에 소설연재를 중단해버렸다.
이듬해 부인의 권고에 따라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 종교적 계시를 받는 기적 체험을 한다. 이후 수필집 『싫을 때는 싫다고 하라』『내가 만난 하나님』을 내지만 지금까지도 소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승옥은 잊힐 수 없는 존재였다. 2010년에 순천시 교량동에 순천문학관이 세워졌다. 순천을 대표하는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을 높이 기려 세워진 문학관이다.
이날 행사 제2부는 각자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순천문학관 김승옥관의 이모저모를 촬영한 영상물을 보는 것이었다. 20분 넘게 틀어준 영상물을 촬영한 이는 김승옥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여전히 제작, 감독, 편집하고 있었다. 앞으로 오리지널 소설을 몇 편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어느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편 「서울의 달빛 0장」의 후속편을 쓰고 있고, 단편 「환상수첩」을 시나리오로 바꾸고 있습니다.”라고 필담으로 말하였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문학사적, 문단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나는 소설가가 필담용 종이에 ‘감사하다’, ‘미래 소설’이라고 적는 것을 보았다. 행사를 준비해준 사람들에게 그는 감사를 표하였고, 앞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각오를 마음으로는 하고 있었다. 김승옥 등단 50년, 우리 모두 마음으로 축하해야 할 일이다.
ㅡ『문학사상』(2012. 5)
* 2012년 3월 23일에 서울 함춘회관에서 김승옥 등단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그날 비가 왔는데 그 다음날 오전 한때 눈발이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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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승옥님의 근황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책은 잘 몰라도 '무진기행'아주 좋아하거든요.건강을 찾아가며 좋은 글 더 많이 집필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