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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처치 논박 : 교회의 크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1)
신광은목사 (열음터공동체)
아, 메가처치!
세계 최대의 교회,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가 모두 한국에 있다.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 교회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은 메가처치의 천국이다. 천지사방에 붉은 십자가가 물결을 이루고, 수 천, 수 만 명의 인파가 몰려드는 메가처치가 즐비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한국 개신교회는 ‘개독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굳이 여기서 개독교로서의 한국 교회의 죄악상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공공연한 진실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다소 과장되거나 오류가 있을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의 죄악상에 대해서는 이미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죄악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메가처치(megachurch), 곧 초대형교회이다. 전체 교회의 숫자 중 메가처치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메가처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다른 교회들도 한결같이 메가처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논자는 이를 ‘메가처치 현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광풍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모두가 메가처치의 영(spirit)에 사로잡혀 있다. 60평 정도 되는 본당에 1,600와트 스피커를 최대용량으로 키워 소리질러 설교하는 개척교회 목사의 영혼 속에는 이미 메가처치의 영이 들어 있다.2) 아마도 한국 교회의 절대 다수가 이 메가처치의 스피릿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메가처치와 그것이 만들어 낸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광풍이 바로 한국 교회의 부패, 무능력, 타락의 주원인이다.3)
하지만 이상하게도 메가처치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4)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많은 목회자, 신학자, 예언자들이 있지만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메가처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이들은 모두 ‘일부’ 잘못된 메가처치와 몇몇 문제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을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메가처치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크기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그들의 비판의 칼날은 한국교회의 바알주의, 맘몬주의, 배금주의, 성공주의, 성장주의, 세속주의, 혼합주의 등을 향하지만 교회의 크기를 향하지는 않는다.5) 하지만 메가처치와 메가처치 현상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할 수 없고, 참된 교회 갱신을 모색할 수도 없다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메가처치 현상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고,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메가처치의 출현
1) 새로운 교회, 메가처치
하워드 스나이더는 메가처치를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교회라고 말한다.6) 그러나 이는 메가처치 현상이 전적으로 근대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통상 메가처치는 교인수가 1,000~3,000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킨다. 규모면에서만 본다면 스나이더의 말대로 이 정도 규모의 교회는 일찍부터 존재했다.7) 하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초대형교회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인 현상으로서의 메가처치와는 비교할 수 없다. 또 혹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완성된 로마 가톨릭교회를 메가처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논점만 흐리게 할 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메가처치는 비범하게 크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글에서 문제 삼는 메가처치는 바티칸을 중심으로 세계 교회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의 지역교회(local church)를 가리킨다.8)
메가처치는 전적으로 새로운 교회며, 메가처치 현상도 전혀 새로운 현상이다. 메가처치는 과거에 있었던 몇몇 초대형교회와 다른 교회다. 그렇다면 메가처치를 과거의 초대형교회와 구분하게 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장의 한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회는 아무리 성장한다고 해도 불가항력적인 성장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회중교회가 보편적이었던 지난 1,700년 동안 예배당의 외피(外皮)는 가시적인 교회의 한계였으며, 개별 교회의 성장의 한계였다. 두 번째로는 인간의 신체적 능력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어느 집회는 거의 3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 정도가 전자매체가 없는 상황에서 모일 수 있는 최대인원이었을 것이다. 전자매체가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의, 그것도 일상적인 모임은 신체 능력상 불가능했다. 셋째로 사회적인 상황을 들 수 있다. 예컨대, 19세기 이전까지 도시는 극히 예외적인 생활 공간이었으며, 도시 인구도 별로 많지 않았다. 1,800년까지 세계 인구는 6억을 넘지 않았는데 이 수의 90% 이상의 인구는 비도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때문에 메가처치가 일상화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넷째로, 신대륙 선교 이전까지 교회는 대체로 교구제를 준수하는 편이었다. 중세 가톨릭교회 1,000년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 역시 비교적 교구제를 잘 지키는 편이었다. 교구제 하에서 개교회들끼리의 경쟁은 존재하기 어려웠으며, 이것이 과거에 메가처치 현상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였다.9) 이처럼 과거의 교회는 이러저러한 성장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메가처치는 더 이상 이러한 성장의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2) 사라져 버린 성장의 한계
오늘날 메가처치는 무제한적 성장이 가능한 교회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대형교회와 구분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우선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의 출현이다. 오르테가 이 가제트(Jose Ortega y Gasset)의 말대로 19세기 어간에 갑작스럽게 엄청난 규모의 인구 폭발이 있었고, 그 인구가 순식간에 특정 지역으로 밀집하게 되었다. 이로써 ‘양’(量)과 ‘수’(數)로 승부하는 거대한 무리들, 곧 '대중’(mass)이 출현하게 되었다.10) 그리고 이와 함께 대중이 세상을 지배하는 대중사회(mass society)가 탄생했다. 대중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거대화이다. 오페라 홀, 식당, 백화점, 공원 등 모든 것이 커졌다. 그리고 교회도 커졌다. 즉 메가처치는 대중 교회(mass church)이다.11)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와 도시 집중으로 전통적인 도시는 마비되고 말았다. 소위 도시 폭발(urban sprawl)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도시가 필요하게 되었다. 새로운 도시는 전통적인 도시와는 규모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또 성곽과 같은 외부 경계가 없고 도시의 평면도 환상(環狀) 모양에서 격자(格子) 모양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근대 도시의 중요한 특징은 도시가 사람들이 사는 일반적인 생활 공간이 된 것이다. 1,800년까지 도시 인구는 전체의 10%를 넘지 않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80%에 육박한다. 신도시 개발 및 재개발, 아파트 건설, 새로운 유행과 문화, 부동산 가격, 인구 분포, 경제 수준 등 도시의 여러 요인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역학관계는 메가처치가 생겨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12) 바로 이 도시 한 복판에 도시를 본 따 세워진 도시 교회(urban church)가 메가처치이다.13)
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시 메가처치를 가능케 한 요인이다. 교통의 발달은 이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며, 이러한 이동성이 모임의 자유를 증가시켜 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제주도 교인이 서울에 있는 교회에 매주 출석할 수도 있다. 또 전자 매체의 발전은 모임의 크기를 무제한적으로 키울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소리가 작으면 볼륨을 키우면 되고, 너무 멀어서 목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초대형 스크린에 목사의 얼굴을 비춰주면 된다. 때문에 수 백 만 명이 모이는 집회도 가능해졌다. 또 굳이 모임이 본당에 제한될 필요도 없다. 음향과 영상 시스템이 갖춰진 부속실에 모여도 얼마든지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예배당의 외피가 교회의 크기를 제한하지 않는다. 심지어 라디오, 케이블TV, 인터넷 등으로 집에서 재택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또 위성을 통해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동시에 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교회의 성장을 제한하는 장벽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렸다. 메가처치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에 의존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없다면 메가처치도 없다. 그래서 메가처치는 테크노처치(techno-church)이다.14)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가처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서 출현한 시장 교회(market church)이다. 마치 사람들이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고 사는 것처럼 교회도 종교 상품을 내다 팔고 구매하는 시장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15) 메가처치란 이러한 자유로운 판매 경쟁에서 성공을 거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기업으로 치면 대기업인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특별히 개신교회는 시장 자본주의의 정신과 질서를 여과없이 받아 들임으로써 시장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개신교회가 시장 자본주의의 질서에 속절없이 편입되고 만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회 분열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불합리한 교회의 권위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목숨을 건 투쟁을 감당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교회의 일치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 종교개혁과 함께 하나이던 교회는 크게 구교와 신교 진영으로 양분되었고, 신교 진영은 다시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재침례교 등으로 나뉘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신교회는 마치 핵이 분열하듯 무한분열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열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더욱 가속되었는데 이와 함께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성장을 위한 경쟁을 하기에 이른다.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교파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경쟁적 성장을 통해 진리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16)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그의 책, 「이단의 시대」에서 이러한 상황을 신앙이 운명의 문제에서 선택의 문제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17) 이제 신앙은 교회나 국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시여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와 교인은 기업과 고객의 관계로 변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교회의 분열은 극단으로 치닺는데 이제 교회는 순전히 개교회로만 존재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 함께 ‘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투쟁’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 상황이 만개하게 된 것이다.
교구제는 무너졌고, 교단은 무의미해졌다. 개교회의 성장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완벽히 제거되었다. 대중 사회의 도래, 근대 도시의 출현,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 자본주의 질서의 범람 등으로 개교회의 성장을 막았던 모든 제한이 사라지고 무제한적인 성장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18) 이것이 바로 메가처치가 과거의 교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교회라고 하는 이유다. 그리하여 한 교회의 교인이 여수시 전체 인구의 2.5배나 되는 기묘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론상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메가처치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교회다. 이러한 현상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다. 더욱 문제는 메가처치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모두 잠재적 메가처치가 되었다는 데 있다. 모든 교회에 메가처치 DNA가 심겨진 것이다. 개교회나 목사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오늘날 모든 교회는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상황’ 가운데 있으며,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19)
3) 메가처치의 역사적 기원
초대교회 300년 간 대부분의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다. 때문에 메가처치를 지향하는 개교회란 존재할 수 없었다. 중세 가톨릭교회 1,000년 간 교회는 바티칸을 정점으로 하나의 교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간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았고, 메가처치도 존재할 수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개신교회 역시 신앙속지주의(信仰屬地主義)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에 신앙은 영주와 국가에게 속했다. 가톨릭교회의 교구제는 그대로 개신교회로 넘어와서 비교적 잘 지켜졌다. 이러한 이유로 18세기 대부흥운동이 있기 전까지 교회가 규모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18-19세기 1, 2차 대부흥운동과 함께 교회는 규모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종종 몇몇 학자들은 현대교회의 규모에 대한 불건전한 관심의 원인을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신학에서 찾으려고 한다.20) 그러나 규모에 대해서 최초로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깔뱅주의자(Calvinist) 조지 휫필드였다. 그는 최초로 스타 시스템 등 각종 마케팅 기법을 자신의 집회에 동원한 장본인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집회를 연출했다.21)
휫필드의 뒤를 이어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찰스 피니(Charles Finney)가 등장한다. 피니는 다른 누구보다도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될수록 많은 사람들을 집회에 참가시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수의 회심자를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소위 ‘새로운 방법(new measure)’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에 다르면 부흥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기보다는 농사와 같은 인간적 기술이다.22) 그러니까 부흥이란 조건만 맞으면 언제라도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인 셈이다. 따라서 조건을 충족시켜 부흥을 촉발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있게 된다. 이를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음악을 사용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위협하고, 정교하게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도 있다. 피니의 방법론은 무디(D. L. Moody)에 의해서 좀 더 감성적이고 세련된 이벤트로 발전한다. 이처럼 1, 2차 대부흥운동이 전개되면서 교회는 점차 규모와 숫자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러나 대부흥운동은 개교회의 성장보다는 될수록 많은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영혼구령의 의도가 더 강했다. 대부흥운동 때 눈을 뜨게 된 숫자와 규모에 대한 관심이 개교회의 성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19-20세기 세계 선교 운동을 살펴보아야 한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로부터 시작된 개신교회의 현대 선교 운동은 대부흥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대부흥운동은 교회와 신자의 최대과업을 영혼구령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영혼구령을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할 책무가 교회와 신자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이러한 주장은 지상명령(至上命令, the great commision)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 현대 세계 선교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세계 선교 운동에 따르면 교회와 신자에게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서 모든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신자와 교회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이것이 윌리엄 캐리의 ‘현대 선교 헌장’의 골자다.23)
이 때문에 개신교의 현대 세계 선교 운동은 본성상 대단히 방법론적이다.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치 선교 전략의 역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선교 운동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한 후, 모든 수단과 에너지를 이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상명령의 완수라는 목표는 지리적으로나 종족 단위로 구체화되었으며, 이 목표 성취를 위한 합리적 수단이 모색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상명령은 반성과 비판을 불허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상명령의 성취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절대선이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개신교의 세계 선교 운동은 지속적으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과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다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에 이르게 된다. 맥가브란은 최선의 선교 전략은 교회 성장이라고 못박는다.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세계 선교 전략이라는 것이다.24) 도날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과 함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경영 이론이 도입되고, 다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에 이르러서는 개교회를 위한 교회성장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개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야 말로 최상의 선교 전략이며,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 된다.
하지만 피터 와그너의 교회성장학은 한 단계 진화하여 로버트 슐러식 천박한 교회성장학으로 달바꿈한다. 목사인 슐러는 탐욕과 야망의 교회성장학을 목회현장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는 윌리엄 캐리의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위대한 성공’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엄청나게 큰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바꾼다. 나아가 그는 교회성장을 싸구려 상술로 바꾸어 버렸다. 그는 노골적으로 ‘당신도 큰 교회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며 다녔다. 또 그는 교회 성장을 원한다면 주차장을 확보하고, 목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즐비한 프로그램을 구비하고, 외형과 형식에 투자하며, 과감한 현금 융통을 하라고 조언한다.25) 비록 그의 교회성장학이 18-1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 20세기 세계 선교 운동, 그리고 맥가브란의 선교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의 교회성장학은 기업의 판촉 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도무지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는 교회가 교회성장을 지상명령과 동일시하고, 또 이를 절대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26)
교회의 크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교회의 규모는 가치중립적인가?
옥성호는 그의 책,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세속적 마케팅 기법까지 동원하는 맹목적 성장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어이없게도 교회의 크기는 가치중립적이라고 단정한다.27) 과연 교회의 규모는 가치중립적인가? 교회의 크기를 중요하지 않게 보는 이들은 자주 본질론을 들고 나온다.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지 크기는 비본질이라는 것이다. 또 혹자는 역할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달란트의 비유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큰 교회는 다섯 달란트 받는 교회이고, 중형교회는 두 달란트를, 소형교회는 한 달란트를 받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에 맞게 맡겨주신 대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혹자는 성서에서 메가처치의 전범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의 크기를 문제 삼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교회의 크기를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모두가 한결같이 큰 교회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범하게 성장한 교회의 사례나 목사의 지도력, 프로그램 등은 기독교 시장에서 높은 가격이 매겨져서 거래된다. 심지어 교회의 크기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큰 교회는 선이고 작은 교회는 악이다. 큰 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종이고 작은 교회 목사는 무능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크기에 관하여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교회의 크기가 비본질적인 문제인가? 본질과 비본질에 대해서 다룰 때 우리는 자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개념을 차용한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것이 빠지면 더 이상 그 사물일 수 없는 것은 본질이고, 어떤 것이 빠져도 그 사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비본질이다. 예컨대, 영혼 -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 은 사람의 본질이고, 피부색은 사람에게 비본질이다. 이렇게 본다면 키도 사람에게 비본질이라고 할 것이다. 키가 크거나 작다고 해서 사람이고 아니고를 말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한 설명이다. 변증법적 철학자들이 ‘양질전화(量質轉化)’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했듯이 양이나 크기는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28) 사람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키는 2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 안에서 키는 사람됨과 무관한 비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10미터나 100미터되는 인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를 쥐와 코끼리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생죄는 생죄로서 존재할 수 있는 적정 크기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로서 살아 갈 수 있는 적정 크기가 있다.29)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는 모두 적정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교회성장학자들이 종종 모든 생명체는 성장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은 또 한 가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는 성장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의학박사 이희대의 「희대의 소망」에서는 암세포를 ‘통제되지 않는 성장’(uncontrolled growth)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성장은 병이다. 멈추지 않고 키가 크는 사람을 거인병 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가처치는 정확히 통제되지 않는 성장병에 걸린 병든 교회다. 더욱 나쁜 것은 메가처치는 마치 암세포처럼 주변 교회에 자신의 성질을 전이시킨다는 것이다.30)
2) 크기의 종교현상학적 의미
합리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크기와 수는 중립적이거나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인에게는 매우 낯선 관념이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크다, 혹은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함’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반 델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에 따르면 폴리네시아(Polynesia)인들은 보통의 사과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사과를 맺은 나무를 ‘마나(mana) 나무’라고 부른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매우 많은 수(數)’의 열매를 보면서 ‘신성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31) 이와 비슷하게 고대인들은 엄청나게 큰 산이나 나무, 바위, 폭포 같은 것을 보면서 신적인 기운을 느꼈다. 종교현상학에서는 이러한 산이나 나무, 바위, 폭포를 가리켜 역현(力顯)이라고 한다. 즉 신적인 기운을 중개하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인간이 성스러운 것(das Heilige)과 만날 때 누미노제(das Numinöse)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오토에 따르면 이 누미노제라는 신적 감정은 직간접적으로 크기와 강한 연관이 있다. 누미노제의 감정에는 뭔가 거대하고 숭고한 것에 압도당하는 느낌과 어마어마한 것 앞에 서는 피조물적 감정을 포함한다. 때문에 오토가 분명히 지적했듯이 장엄한 크기는 대단히 근원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촉발한다. 그래서 거대하고 장엄한 마스타바(Mastaba)의 방첨탑과 피라미드는 신적인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32) 그러니까 고대인의 의식 속에서, 그리고 현대인의 의식의 심연 속에서 크기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크기는 거대함, 숭고함, 위대함, 장엄함, 그리고 신성함을 의미한다.33)
이러한 점에서 메가처치는 이교적 영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교적이라 함은 신학이나 설교의 이단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메가처치의 그 거대한 크기와 장엄한 외형이 암시하는 이교적 영성을 뜻한다. 거대한 회중이 모여 연출하는 웅장하고 장엄한 몹씬(mob scene)은 그 자체로 강력한 신성과 종교성을 발산한다. 메가처치 교인은 그 거대한 군중 속에 왜소한 한 점으로 축소되어 오토가 말하는 ‘피조물적 감정’을 느낀다. 불행히도 예배자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누미노제의 감정을 성령의 감동으로 착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커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킨 맥가브란과 교회성장학자들의 논리는 메가처치를 위한 신학적 정당화의 구실을 하고 있다. 불량신학이 메가처치의 이교적 영성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3) 크기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성서는 여러 곳에서 크기의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앞서 말했듯이 크기는 단순히 연장(extension)의 문제가 아니다. 크기는 위대함 및 신성함과 불가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크다는 것은 왕(王) 및 신(神)의 속성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큰 사람은 왕이며, 나아가 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세기 3장을 읽어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담이 야훼의 시종이 아니라 홀로 왕이고자 했으며, 신의 크고 높은 영광을 탐했음을 알 수 있다.34)
아담의 반역 이후, 인간은 늘 크고자 했고, 왕이 되고자 했으며, 신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것을 미워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왕의 제도를 미워하셨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크시고, 참된 왕이시며, 홀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서의 일관된 주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이 크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경합하려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큰 것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웅장한 바벨탑을 미워하셨으며, 하나님과 맞선 애굽의 바로를 징벌하셨고, 장엄한 계단이 있는 웅장한 신전을 미워하신다. 도리어 지극히 작은 천막 안에 이스라엘과 함께 동거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신다. 부자는 빈 손으로 돌려 보내시고 가난한 자는 먹이신다. 방백들은 진토에 던지시고 비천한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신다. 35)
이처럼 하나님께서 스스로 큰 체 하고 강한 체 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그들에 의해서 억압받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야훼의 전쟁의 의미다. 야훼의 전쟁은 큰 자를 쓰러뜨리시고 작은 자를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진정 하나님만이 홀로 크신 분이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이다. 때문에 야훼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반드시 작고 적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300명을 택하신 이유, 열방 중에서 가장 수가 적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 그리고 다윗을 택하신 이유는 언제나 동일했다. 그들이 가장 작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중심 주제는 크기였다. 즉 이 이야기의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큰 자를 버리시고 작은 자와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만군의 야훼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36)
신약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관점은 유지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의미하는 바는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작고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큰 자가 작은 자가 되어 작은 자를 섬긴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불학무식한 자들 중에서 제자를 택하셨으며, 주님은 항상 제자들을 ‘소자,’ 혹은 ‘아이들(얘들)’이라고 부르셨다. 또 주님은 병자, 세리, 창녀 등 낮은 자들을 섬기셨다. 십자가에서 이러한 예수의 섬김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는 이 세상의 관원과 지혜 있는 자, 능력있는 자, 문벌 좋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다.37) 곧 십자가는 큰 자를 향한 심판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소리 지르거나 고함을 치지 않으셨으며 이웃집 담장 너머로 그 소리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전하셨다. 천국 복음은 가장 작은 겨자씨로 뿌려지며, 아주 약간의 누룩 한 점처럼 전해진다. 천국 복음을 맡은 교회는 비천한 자들의 모임이었으며, 최소한 3세기 동안 그들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외톨이들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모임 속에 뿌려진 작은 천국 복음의 씨가 마침내 로마 제국을 굴복시켰다. 이것이 천국 복음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지만 교회가 크고 강해지자마자 이러한 천국 복음의 능력은 급속히 감소하고 만다.
사람들은 역할론을 들먹이며 메가처치는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이루는 힘은 누구의 권세로 말미암는가? 하나님의 권세인가, 아니면 큰 교회의 권세인가? 자끄 엘륄은 말한다. 진정 신자의 힘은 무력(武力)이 아니라 무력(無力)이라고.38) 마르바 던(Marva Dawn)도 같은 말을 한다. 교회와 신자의 참된 권세는 작음과 약함과 무능력의 권세라고. 하나님은 약함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의 작음과 약함과 무능력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39) 야훼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작은 자들이라야 한다. 큰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를 멸시하시고 작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40)
메가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
크기는 중립적이지 않다. 크기는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 한 사람의 의견은 무(無)나 다름 없지만 100만 명의 의견은 법을 바꾸고, 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권능을 갖는다. 또한 크기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구조와 질서를 요구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의 패자(覇者)가 된 로마가 그 크기에 걸맞는 구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위기에 빠졌음을 간파했다. 한니발의 말을 빌린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말에 의하면, “육체가 먼저 성장해버린 탓에 내장의 발달이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41) 그렇게 해서 카이사르식 로마 개조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규모는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발생시키며, 그에 걸맞는 구조와 질서를 요구한다.
메가처치도 마찬가지다. 메가처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하게 커진 규모 때문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아울러서 그에 걸맞는 구조와 질서를 강요받게 되었다. 메가처치는 단순히 규모만 커진 교회가 아니다. 의미와 가치, 구조와 질서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은 교회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동반한다. 예컨대, 하워드 스나이더가 잘 지적한 대로 메가처치는 제자도에 대한 강조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회다.42) 메가처치 현상이 휩쓸고 있는 지금 한국 교회의 지성인들은 메가처치가 성서의 가르침과 신학적 진리면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1) 구원론
메가처치는 무엇보다도 구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구원이란 천국복음을 듣고, 예수를 따라,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출애굽의 반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엑소더스(Exodus), 곧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다. 세상은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생겨난 사탄적 정치 질서를 말한다. 아담의 쿠데타 이후 인간은 사탄과 거짓 신들의 노예가 되어 저주와 불행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바로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으로 귀순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지옥면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구원이 심판을 피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탄에서 그리스도로 왕을 교체하는 것이며, 새로운 정치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천국은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 질서며, 고로 구원의 삶은 지상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구원은 죽음 이후 사후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리하여 구원은 지옥면피로, 지옥은 사후의 디스토피아로, 천국은 혼령들의 유토피아로 오해되어 왔다. 메가처치는 그러한 구원론을 그대로 답습한다. 때문에 메가처치는 기독교 구원이 세상 탈출이라는 제 2의 출애굽 사건임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다. 메가처치에서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내세적이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상물로 변화되고 있다. 그리고 메가처치와 그 교회 교인들은 오늘도 세상에 사로잡혀 세상 질서를 따라 산다.
2) 교회론
이러한 구원론이 교회론의 왜곡을 초래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천국복음을 듣고, 예수를 따라, 세상을 탈출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교회는 지상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는 새로운 임금과 그의 통치 질서가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정치 집단이다. 때문에 사도와 속사도들은 교회를 이 땅에 침투한 이질적인 나라의 ‘식민지(colony)’라고 묘사하기를 즐겨했다.43) 결국 교회란 사탄의 통치를 거부하고 세상의 질서와 대조를 이루는 대조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세상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고 다스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 세상은 너도나도 큰 자가 되기 위해서 경쟁, 투쟁, 살인을 당연히 일삼지만, 내려가기를 다투는 하나님 나라는 섬김, 평화, 사랑이 왕노릇한다.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교회는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온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메가처치는 교회를 단순히 복음이 전파되는 곳, 더 정확히 말해서 설교가 선포되는 곳으로 본다. 메가처치는 구원을 세상 탈출로 보지 않고, 그래서 사탄의 백성들에게 세상을 탈출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더욱 슬픈 것은 메가처치가 선교와 전도를 최우선적 과제로 여기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이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근본적인 이질성과 대조성은 사라지고 껍데기와 유니폼만 남는다. 하지만 메가처치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메가처치는 점차 가라지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다.44)
3) 예배론
메가처치는 엉뚱한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예배란 김기현의 말대로 가치관을 말한다. 진정 가치있는 것을 알아보고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다.45) 이러한 점에서 예배는 가치관이며,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배는 제의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에덴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의 이전의 예배였다. 그러나 아담의 반역과 함께 가치관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반역 이후 인간은 돈과 쾌락과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은 세상의 새 신(神)들이 되며 이것들을 추종하는 거짓 예배, 곧 우상숭배가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소개하셨다. 즉 참 예배를 허락하신 것이다.46)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예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범을 통해서 참된 예배, 곧 전적으로 새롭고 참신한 삶의 방식을 소개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삶의 방식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나타났다. 성찬은 이러한 예수의 삶의 방식을 회상하는 매개다. 성찬의 자리에서 교회는 예수를 먹고(eating Jesus), 예수가 되고(becoming Jesus), 예수를 사는(living Jesus) 자들이 된다. 이것이 참 예배요, 진정한 삶의 기술이다.
그러나 메가처치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숫자와 크기를 예배한다. 고대인들이 큰 바위와 큰 나무 앞에 고개를 숙였던 것처럼 현대 기독교인들은 큰 교회에 고개를 숙인다. 교인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작은 교회를 피하고 큰 교회를 선호한다. 목사들도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목회하고 싶어 안달이다. 예배당 곳곳마다 1만 명이니, 3만 명이니, 10만 명이니 성장 목표를 쓴 현수막을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영낙없이 숫자가 예배를 받는 형 1다. 또한 메가처치 교인들은 메가처치의 웅장한 예배당, 호화스러운 설비, 천문학적 액수의 헌금 등을 보면서 돈과 권력과 성공에 대한 갈증만을 학습한다. 결국 메가처치는 맘몬과 그모스를 숭배하는 교회다.
4) 메가처치의 설교
메가처치는 무엇보다 기독교 진리가 심각하게 왜곡되는 교회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의 회복을 무엇보다 강조하였으며, 그래서 개신교회는 상당부분 설교를 회복했다. 그러나 개신교회가 회복한 설교는 예수와 사도들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키케로의 방식, 곧 수사학적 설교를 회복한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은 자신의 몸(현존), 삶(모범), 그리고 말(생명의 용출)로써 진리를 전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기독교 진리의 중심 원리다. 요한이 강조한 대로 그의 육신이 바로 진리다. 또한 예수의 삶, 곧 그의 자기 비움, 겸손, 섬김, 긍휼, 사랑, 대속의 죽음, 그리고 몸의 부활이 진리다. 몸과 삶이 전제된 뒤에 비로소 말이 진리가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47)
그러나 메가처치에서는 순전히 목사의 말만 남는다. 이것은 규모가 만들어 낸 거리 때문이다. 목사와 교인 간의 거리는 목사의 몸과 삶을 제거한다. 결국 설교는 목사의 말, 곧 그가 미리 준비한 설교 원고로 축소된다. 더구나 그의 설교가 대형 스크린에 투사되고, 부속실로 중계되고, 케이블 TV와 위성으로 원격 송출될 때, 녹화 테이프와 영상 파일로 저장되고 재생될 때 목사의 몸과 삶은 완전히 증발되고 만다. 예수께서는 말씀이셨지만 육신이 되셨다. 하지만 오늘날 목사는 육신이면서 말씀으로 화하고 있다. 현대판 영지주의가 출현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사회의 추상성48)과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영지주의적 경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성육신적 원리를 잃어버린 메가처치는 테크노 영지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나아가 대중을 상대로 하는 메가처치 설교자들은 점차 설교와 선전(propaganda)49)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목사의 몸과 삶이 빠져버린 설교는 대중을 설득하고, 학습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선전이 되고 만다.50)
우리의 과제
이명박 정부와 함께 한국 개신교회는 역사상 최고의 금력, 권력, 영향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과거 이승만, 김영삼 정권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통령과 정부 배후에 존재하는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역사상 가장 큰 도전과 위기를 맞고 있다. 과연 포스트 이명박 기독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기독 지성인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며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가처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꼭 필요하리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메가처치의 문제를 최대한 정직하게 고찰하는 것이다. 섣부른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의 기만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성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첫 걸음이다. 둘째로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 곧 교회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첫 번째 과제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신학적 전통과 이론 때문에 쉽사리 의견의 통일을 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서와 초대교회의 전통을 최고의 권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다움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초교파적이며, 실제적이고, 진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앞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위기에 빠진 한국 개신교회가 회복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첫댓글 이 글은 대전 열음터 공동체:신광은 목사께서 서울 청어람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지난10월25일 <종교개혁492주년 기념포럼>을 목요포럼과 부개실에서 공동주최하였는데 이포럼에 발제자로 오신 신목사님께서 이 글내용으로 강의하셨습니다. 젊은학자이며 목회자인 신목사님은 시종 정확하게 메가처치가 가진 함정들을 지적해주셨는데 교회를 사랑하시는 우리벗님들께 소개하고 싶어 올립니다. 더깊은 내용은 저자의책<메가처치논박>을 구입해 보세요. 기쁨의집에 있음
네....집사님 감기 조심하셔요..제가 걸렸단 얘긴 아니구요...ㅋ
이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기에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라도 깨어있어 올바른 사고와 지각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무리들이 목사님들이 아니라 성도들이라는 점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개중에는 정말 우러러 볼만한 목사님들도 계시지만요...그런 목회자들이 진정한 대우를 받는 세상이 될 때 작은 희망이라도 생기는게 아닐른지요... 생각하면 할 수록 참 답답한 현실임에 함께 기도해야 함을, 그 방법 밖에는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