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2
오늘 8시 30분 무궁화 기차로 서울에 간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오늘 다시 내려오는데 추석연휴라서 내려오는 기차편은 모두 매진이 되었다. 아내가 어떻게 할 거냐고 해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가면 빈 좌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예매를 해놓고 사정이 있어서 취소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나와 비슷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없지 않을 테니 버스회사에서 임시 버스라도 운영을 할 것이다. 내 걱정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럼 어디에? 서울 올라갈 때 무슨 책을 가지고 갈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
이틀 전에 도서관에서 네 권의 책을 빌렸다. 유발하라리의 <싸피엔스>, 러셀의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남도현의 <발칙한 세계사> 노영민의 <싯다르타에서 빌 게이츠까지>이다. 모두 역사 관련 책이다.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추석연휴 때(나야 죽을 때까지 연휴지만) 한가하게 읽고 싶어서 빌린 것 책들이다.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는 50쪽 정도 읽었는데 재밌지만 배낭에 넣어가기에는 책이 좀 두껍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유혹을 받는다. 혹시라도 차편이 끊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야한다면 정신을 빼고 읽기에 좋은 책이다.
러셀의 <러셀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는 너무 가볍다. 책 두께가 가볍다는 말이지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 책도 50쪽 정도 읽었는데 놀랄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러셀의 눈에 비친 헤겔이 그렇다.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헤겔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수박 겉핧기식일망정 헤겔 관련 책을 다섯 권 정도 읽은 것 같다. 찰스 테일러의 <헤겔>은 천페이지에 달한다. 내 눈에 비친 헤겔은 위대한 역사 철학자다. 러셀은 아니다. 나는 어느 편에 서야하나? 물론 이런 고민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좀 고민이 된다. 사실은 고민이 된다기 보다는 재밌다. 러셀은 헤겔을 어떻게 보았을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라 줄을 그을 수는 없어서 컴퓨에 메모해놓은 대목이다.
"거시적 역사를 쓰는 일부 역사가는 역사의 '철학'을 논증하려는 욕망을 느낀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는 특정 공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헤겔, 마르크스, 슈펭글러, 그리고 대 피라미드와 그 '신적 메시지'의 해석자들이 있다. 대 피라미트에 관해서는 실로 다종다양한 큼직한 학술서들이 쓰였는데 그 학술서들은 피라미드가 그 건축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예언했다고 주장한다.(이하는 재밌지만 생략....)
헤겔의 역사 이론도 이에 못지 않게 환상적이다. 헤겔의 의하면 "정신Idea"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정대정신Absolute Idea"이 되고자 투쟁한다. 그 정신은 먼저 한 민족에서 구체화되고, 그런 다음 다른 민족에게서 구체화된다. 정신은 중국과 더불어 시작했지만 그곳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인도로 옮겨간다. 그런 다음 그리스로, 그 다음에는 로마로 간다. 정신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에 호감을 가졌다.(정신은 언제나 지식인보다 군인을 선호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그러나 카이사르 이후 정신은 로마인과는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4세기 가량 주저한 끝에 게르만족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그때 이후 게르만족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헤겔 시대까지이어졌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우세는 영원하지 않다. 정신은 언제나 서쪽으로 이동하며, 독일을 떠난 뒤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움직일 것이다. 아메리카 이후로도 계속 서쪽으로 이동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에 도달할 것이다. 물론 헤겔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정신이 세계를 한 바퀴 돈 다음, 절대정신은 구현된다." 그리고 그 후 인류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절대정신은 그리스로의 재림에 상응한다.
이 환상적 이론-대 피라미드 이론만큼이나 터무니없다.-이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혜의 절정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기이하다. 헤겔의 이론은 독일-그것은 독일인의 민족적 허영심에 호소했다.-에서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민족적 허영심과 관계 없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받아들여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제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모든 과학적인 것의 결정판이라고 찬양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약간의 변화를 주긴했다. "정신"을 "생산양식"으로, 정신을 구현한 일연의 "민족"은 일련의 "계급"으로 대체했다.(28쪽)
사실 나도 '헤겔'을 읽으면서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있는거야?"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했었다. 러셀의 글이 명쾌하고 후련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헤겔에 대한 존중은 여전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어쨌거나 이 책을 통해 러셀은 <쾌락으로서의 역사>를 말한다. 진지한 헤겔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내가 다루려는 주제는 쾌락으로서의 역사다. 힘들고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여가 시간을 기분 좋고 유익하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역사다. 나는 비록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아마추어로서 수많은 역사책을 읽어왔다. 이 책에서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내가 역사 읽기로부터 이끌어낸 것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굳이 역사학자가 되려하지 않고서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은 들려주는 데 있다." (17쪽)
오늘은 여기까지. 곧 컴퓨터를 끄고 머리를 감고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겨 기차를 타러 가야한다. 즐거운 여행이 시작된다. 가을에는 구청 벗나무 가로수길을 지나 동네 병원에 가는 것도 즐거운 여행인데 기차를 타고 한강을 지나 서울까지 가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