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과 두 여인(인현왕후와 장희빈)
우리나라 역사 인물 중에서 사극의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은 숙종의 후궁 장희빈이다.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서로를 밀쳐내야 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궁중 여인이 된 장옥정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둘 다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부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부인이라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 시대에는 그것이 허용되었다.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은 일부다처제를 인정했다. 따라서 대다수 사대부는 본부인 외에 첩을 데리고 살았으며, 특히 왕은 본부인인 왕비 이외에도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현실이 이러하다 보니, 왕의 여자들은 법적으로 위계질서가 정해져 있었는데, 이를 ‘내명부’라고 한다. 즉 왕비 아래에 빈(정1품), 귀인(종1품), 소의(정2품), 숙의(종2품), 소용(정3품), 숙용(종3품), 소원(정4품), 숙원(종4품) 순으로 품계가 정해져 있었다. 궁궐 내에서 발생하는 여자들 사이의 일은 모든 권한이 왕비에게 있었다. 천상천하 지존무상인 왕도 왕실 여자들의 일과 다툼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강 확립 차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장희빈은 내명부 위계상 몇 번째에 해당했을까?
숙종이 ‘빈’의 품계를 내려 주며, ‘희빈’이라 이름을 지어 준 것을 보면 정 1품에 해당한다.
본명이 장옥정인 장희빈은 중인 출신으로 집안이 매우 큰 부자였다. 역관이었던 큰아버지 장현이 중국과의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어 옥정네 집안은 당대 조선 최고의 갑부였다. 이런 집안 출신이기에 옥정은 비록 중인 계층이라도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랐으며, 글공부 또한 사대부 집안 여자들 못지않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편안한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0대로 접어들 무렵에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 났다. 남인 세력의 돈줄 역할을 하던 큰아버지가 ‘경신환국’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경신환국은 숙종이 14세 어린 나이에 임금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 조선 조정은 남인이 주도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 조정을 이끌 경륜이 없던 왕은 나랏일 대부분을 남인에게 의존했는데, 문제는 숙종이 직접 정치를 할 나이가 됐는데도 남인이 자기들 맘대로 나랏일을 요리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숙종은 1680년, 남인을 대거 내쫓고 야당 세력이던 서인으로 조정을 구성하는 일대 모험을 감행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다. 경신년에 정치 국면이 바뀌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아무튼 이 일로 남인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장현은 함경도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장씨 집안 전체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때 옥정의 어머니는 옥정이 궁녀가 되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연줄을 대어 궁에 들여보냈다.
옥정이 궁궐로 들어갈 무렵, 숙종은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를 잃고 홀로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럴 즈음에 숙종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여인네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장옥정이었다. 숙종은 새로 궁궐에 들어온 옥정의 아리따운 자태에 반해 밤이면 밤마다 옥정의 처소를 찾았다.
하지만 문제는 조정 대신들이었다. 경신환국 이후 나라를 이끌던 서인은 자기 정권의 장기적 안정을 위하여 새 왕비만큼은 서인 집안에서 물색하려 했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여자가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이었다. 서인의 선택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대찬성을 했다. 본인 또한 서인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숙종은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새장가를 들어 민씨를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숙종의 마음은 온통 옥정에게 가 있었다. 따라서 새 왕비가 된 민씨는 명목상 부인이었을 뿐 숙종과 깊은 정을 나눌 수 없었다.
왕과 왕비 사이가 소원하다는 사실은 곧바로 소문이 났다. 서인들과 명성왕후는 애간장이 녹았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 자식 생산을 많이 해야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넓어질 터인데, 그러하질 못했으니 이거 참,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보다 못한 명성왕후가 두 사람 사이를 좋게 하려고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숙종은 어머니 말도 듣지 않고 끝까지 옥정에게만 빠졌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명성왕후는 옥정을 궐 밖으로 내보내라 했고, 단식투쟁을 통해 옥정을 결국 궐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어머니 뒤에서 자신과 옥정 사이를 갈라놓은 사람들이 서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숙종은 서인 세력이 지지하는 인현왕후를 더더욱 미워하며 눈도 마주치려 하질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흘러, 1686년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궁궐 내 여인들의 일은 전적으로 인현왕후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인현왕후는 남편 숙종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되돌리기 위해 옥정의 입궁을 추진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숙종의 눈에 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인현왕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옥정이 궐내로 들어오자, 숙종은 다시 옥정에게 푹 빠져 지내며, 내명부 종4품 숙원을 거쳐 정2품 소의로 옥정의 초고속 신분 상승을 단행했다.
이러한 숙종의 행태에 남인들은 신바람이 났다. 경신환국으로 빼앗긴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코앞으로 바싹 다가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현왕후를 구석으로 모는 일이 하나 더 발생했다. 옥정이 남자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왕자가 탄생하자, 숙종의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앞뒤 재지 않고 이 아이를 자신의 대를 이어 임금이 될 ‘원자’로 지명해 버렸다. 또한 생모인 옥정을 내명부 정1품 지위인 ‘빈’으로 봉하고 복스러움을 뜻하는 ‘희(禧)’ 자를 이름으로 내려 줬다. 서인은 애가 탔다. 이거 자칫 잘못하면 남인에게 엎어치기를 당해 정권에서 내쫓기게 될 형편이 되었다. 서인의 우두머리 격인 송시열이 직접 나섰다. 장문의 상소문을 숙종에게 올렸다.
“왕후의 나이 이제 23세에 불과한데, 조금 더 기다려 보지 않고 후궁이 낳은 아이를 곧장 원자로 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이 상소에 숙종의 심기는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인현왕후를 싸고도는 서인이 고깝기만 한데,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상소까지 올라오자 숙종은 곧바로 서인을 조정에서 쫓아내 버렸다. 이것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또한 숙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현왕후를 궐 밖으로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임명하는 일대 사건을 단행했다. 장희빈의 인생역전은 숙종에 의해서 단번에 실행되었다.
다시 역전되는 두 사람의 기구한 운명
그 시절 어린이들 입에서 이런 노래가 불러졌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으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인현왕후가 폐출된 이후에 어린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노래 가사의 미나리는 민씨를, 장다리는 장씨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노래는 민씨 성을 가진 인현왕후는 영원하지만, 장씨 성을 가진 옥정의 부귀영화는 한 철에 불과하다는 예언성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니라 다를까, 왕비가 된 옥정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인현왕후가 퇴출된 지 6년이 지나 숙종이 다시 깜짝 쇼를 연출했다. 남인이 새 왕비를 등에 업고 조정을 좌지우지하자, 주도권 세력을 서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옥정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어 빈으로 다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 자리에 올랐다. 희빈의 입장에서는 분하고 원통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상천하 지존무상인 왕의 결정을 감히 누가 뒤엎겠는가?
다시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희빈에게 뭔가 작전이 필요했다. 인현왕후만 없어지면, 다시 왕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밀리에 인현왕후 죽이기 작전에 돌입했다. 짚으로 만든 인형에 중전복을 입히고 저주의 주문을 외우면서 바늘로 찔러 대고, 밤이면 밤마다 제단을 차려 놓고 중전이 죽기를 기도했었다. 이러한 일이 효과가 있었던지, 시름시름 앓던 인현왕후가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희빈은 이제야말로 사랑하는 연인 숙종을 독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희빈의 인현왕후 죽이기 작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숙종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숙종은 장희빈의 악독함에 치를 떨며 사약을 내렸다. 아들인 세자를 방패막이 삼아 죽음을 면하려 했지만, 왕의 뜻이 너무 완강하여 희빈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사람은 숙종이란 한 남자와의 인연 때문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30대 중반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짧은 인생을 마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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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숙종과 두 여인(인현왕후와 장희빈) : 한국사 맞수 열전에서 발췌 옮김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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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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