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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기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출근한 아버지를 두고 가족들만 피난하던 일들이 동영상처럼 선명하다. 약간의 생필품과 노약자들을 태운 소달구지를 앞세운 피란행렬은 줄을 이었다. 콩을 튀기는 것 같은 총소리와 이따금 지축을 울리는 포격 소리가 십 리 밖에서 뒤쫓아와도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두려워할 줄 몰랐다. 한길 옆 논들에는 아직도 모내기를 못 한 사람들이 못자리에서 뽑은 모를 다뤄놓은 논바닥에 이리저리 마구 흩뿌리는 모습도 보였다. 석 달 뒤 피란에서 돌아왔을 때는 뿌려놓은 모들이 심은 것 못지않게 잘 자라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고추밭엔 빨간 고추가 가지에 무겁게 달렸고 채소도 벌레가 먹지 않고 무성하게 생기를 띠고 있었다.
형기네 가족은 외갓집에서 짐을 풀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렇게 어렵지 않은 피란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소식 없는 아버지 걱정으로 머리를 싸맸으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형기와 형진이는 외사촌들과 함께 냇가에서 고기잡이도 하고 멱을 감으며 재미있게 놀았다. 외할머니가 삶아주는 감자로 간식을 하며 학교 숙제나 공부를 다그치는 사람도 없어 더욱 즐거웠다. 추석이 가까워질 때는 앞산에 올라가 알밤을 줍고, 산골짜기로 조금만 들어가면 어름과 다래를 따 먹을 수 있었다. 피란살이 한 달이 지났지만 형기 아버지 소식은 듣지 못했다. 수소문하며 백방으로 안테나를 곤두세웠으나 백인섭의 소식은 걸려들지 않았다. 여태껏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가족들은 백인섭이 저승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 낙담하고 있었다. 간혹 미군과 국군을 가득 태운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마을 앞을 지날 뿐 어디를 가려면 걷는 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형기는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른들과 함께 걱정할 줄 몰랐던 지난 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전선은 피란 마을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천 비행장에서 이륙한 폭격기가 외가 마을 앞산을 넘어가면 잠시 뒤엔 산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형기가 바위벽의 오목한 자연 동굴에 아들을 기다리다 늦게 합류한 할아버지와 함께 은신해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 귓전으로 유탄이 날아들어 벽에 박히는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들과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골목 옆 감나무 아래서 땅따먹기를 하며 놀이에 빠져있었다. 그때 멀리 동구 밖에서 흰 남방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약간은 절뚝이며 외갓집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본 형기는 훤칠한 키에 걸음걸이 모습이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에 저만치서 땅따먹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형기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인섭은 아이들을 부를 때 맏이인 형진이보다 습관적으로 형기의 이름을 불렀다.
“아빠−!”
깜짝 놀란 형기는 손을 털고 달려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고, 형진이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소리쳤다. 가족들은 맨발로 뛰어나와 백인섭을 맞았다. 그것은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보다 더한 꿈같은 일이었다. 백인섭은 몰골이 초췌한 어머니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가족들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당신의 퇴근을 기다리느라 우리는 그날 피란을 떠나지 못했어요. 하마나, 하마나, 하다가 날이 저물었지요. 아버님이 먼저 떠나라 말씀하셨지만 어른을 혼자 남겨두고 우리만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형기 어머니가 마음을 가다듬고 포항이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던 날의 얘기를 꺼냈다.
“피란행렬은 이미 포항을 벗어나고 있는데 거슬러 등기소를 찾아갔으니 모닥불에 뛰어드는 메뚜기 같았다고 할까. 시가지가 점령당하기는 순식간이었어! 소장과 둘이서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우고 흥해로 빠져나가 이튿날 새벽, 막 호미곶으로 떠나려는 거룻배를 얻어 탈 수 있었어요. 다행히 파도가 그렇게 크게 일지는 않았지만 말 그대로 일엽편주였지. 부지런히 노를 젓고 있는데 난데없이 미군 비행기 한 대가 날아와 머리 위로 돌며 인민군인지 아군인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배 주인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태극기를 흔드는 것을 보고 비행기가 돌아갔어요. 불바다 속을 벗어나서 이곳까지 온 것은 천우신조지요. 어머님이 저를 낳을 때도 불공을 드렸다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합니다.”
형기 할머니는 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암송하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백인섭이 살아 돌아온 과정은 부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극적으로 배를 얻어 탄 것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이끈 것 같았다. 그는 한나절이나 걸려 영일만을 가로질러 건너서 오랫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당숙 댁을 물어물어 찾을 수 있었다. 당숙은 그 마을의 유지였다. 고대구리를 하는 그 집은 큰 배를 두 척이나 갖고 있었다. 다음날 포항 쪽 상황을 알아보았으나 가족들이 피란하는 처가댁 지역까지 이미 전쟁터가 되어서 그쪽으로는 아무도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백인섭이 불바다가 된 포항에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백인섭은 가족들의 생사를 몰라 애를 태웠다.
여느 때라면 마을 이장댁에 있는 전화로 급한 연락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멀리서 전화가 걸려오면 이장은 스피커를 통해 “OO댁 전화 왔습니다.”라고 방송을 했다. 그러나 전쟁통에서는 이웃 마을에조차 연락할 수 없었다. 당숙 댁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며 이리저리 수소문해본 결과 오천 쪽은 비행장과 군부대가 바로 옆에 있어서 적의 손아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백인섭은 당숙 댁을 떠나 가족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구룡포까지 왔을 때 통행이 통제되어 그곳에서 몇 날을 보냈다. 차량은 말할 것도 없고 달구지 하나 얻어 탈 수 없었다. 음식을 파는 곳도 없어 며칠 동안은 구걸로 연명했다. 마침내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어서 식구들이 피란하는 처갓집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
백인섭은 석 달 동안의 피란살이 속에서도 국민의 재산권이 달린 등기부의 보전을 생각했다. 포항이 완전히 수복된 것은 그해 10월 초였다. 백인섭은 식구들과 함께 피란에서 집으로 돌아와 이튿날 바로 자전거를 타고 등기소로 향했다. 형산강의 유일한 다리인 형산교를 확보하기 위해 혈전을 벌인 흔적은 곳곳에 그대로 널려있었다. 다리를 건너가자 신작로 옆 적의 진지가 있었던 강 언덕에는 여기저기 몇 구의 인민군 시체가 나뒹굴고, 포탄에 맞아 떨어져 나간 다리 하나는 군화를 신은 채로 서 있었다. 백인섭은 미풍에 실려 오는 시체 썩는 냄새에 숨이 막혔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초토화된 포항시에는 붉은 벽돌조 포항제일교회당 만이 높이 솟아 있었다. 주거지로 숨어든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제일교회당 건물만 남겨놓고 시가지 전체를 무차별 폭격했기 때문이다. 등기소 건물도 담장이 무너지고 서류보관창고도 반파되어 등기부들이 여기저기 바닥에 널려있었다. 사무실에는 책상을 모아 인민군들이 숙식한 흔적이 남아있고 외벽과 천장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어지러웠다.
포항을 되찾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돌아온 등기소 직원은 차석인 백인섭 한 사람뿐이었다. 며칠을 더 기다려도 서울 쪽으로 갔던 소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직원들이 돌아오기 전 처음 한 달 동안 그는 혼자서 사무실과 서류 창고를 정리하고 국민의 소중한 재산목록인 등기부들을 살뜰히 정돈하여 상급 기관인 대구지방법원에 결과를 보고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자 뜻밖에 청송등기소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았다. 오지인 청송등기소도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인민군들은 땅문서를 멋대로 나누어주고 토지를 분배하며 주민들에게 환심을 사려 했었다. 이런 것들을 제자리를 찾아 정리하려면 그와 같은 성실하고 유능한 일꾼이 필요했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