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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을 사색한다(2)(한홍구교수 )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로,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사형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죽여버리겠다는 법적 결정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연해질 수 있을까? 뒤에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울상대생이던 김병곤이 사형을 선고받고 "영광입니다"라고 되받아 전설을 남겼지만, 그 받아침은 진짜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도 선고의 순간에 최대한 의연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입으로 가더란다.
무기징역이라 하려면 입이 삐죽 앞으로 나오고, 사형이라 말하려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에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되더라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잊혀지지 않는 명대사 "나 떨고 있니?"처럼, 아무리 사상범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떨리기 마련이 아닐까?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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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