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품고 사랑이 부르는 대로 가라. 거기 하느님이 계신다.
우리 본당 이병문 신부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신지 15년이 되었다.
보내는 내내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 그랬다고 한다. 언제나 한 웅큼의 약을 자시던 약한 분이셨지만 갑자기, 심장마비로 떠나시다니. 그 충격을 견디기 참 힘들었다. 소중한 사람은 곁을 떠나봐야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알게된다. 우리 곁에 계실 때 좀더 잘할 걸.... 아무리 빠른 후회라도 이미 늦은 거라던데. 하지만 좀은 늦었더라도 그 소중함을, 귀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고쳐나간다면 그것 또한 놓칠 수 없는 깨달음이 아닐까? 아무리 이별의 쓰라림이 컸다해도 시간이 지나가면 서서히 우리 기억에서 멀어져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이병문 베드로 신부님, 오늘 하루만이라도 벗님들에게 그분을 소개하고 싶고 함께 아파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날, 울면서 그분을 떠나보내면서 썼던 내 조사를 읽어주셨으면 한다. ***************************************
참으로 힘든 날들이 지나갔다. 뭐가 뭔지 분주하게 돌아갔지만 마음 한켠은 허전했다. 그랬다. 우리 잠원동 교우들이 겪은 지난 주는. 신부님이 돌아가시다니. 오래 끈 장마가 잠시 한숨을 돌리나 해가 반짝 드는 상큼한 날이었는데.... 지난 주 목요일 점심 때 걸려온 전화는 하늘 한귀퉁이가 무너져버렸다 해얄까. 우리 신부님이 세상을 뜨다니. 말이 되는 거야. 뭔가 내가 해얄 텐데. 서울로 올라가얄 텐데 허둥댔지만 지방 공장에 머물고 있는 나로서는 생각과는 달리 그대로 있을 수밖에.
맨처음으로 신부님을 뵙던 날. 그래 15년 전, 여름 기운이 한풀 죽은 어느날, 우리 본당에 오신 신부님이 떠오른다. 키가 작으마하신 분이 반팔 미색의 사제복을 입으셨는데 매우 건강해보이셨다. 착각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첫 인상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워낙 다부져서 그랬던 모양이다. 당시 보좌신부님의 안내로 성당 구석구석을 살펴보시는데 금방 이것저것 지적하시는 모습이 생생하다. 신부님이 오시고 처음으로 마지한 월요일 새벽미사를 잊을 수가 없다.
세 분의 신부님이 함께 제대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넓은 본당 제대가 꽉찬 느낌이 그렇게 풍성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월요일 새벽미사만은 본당의 신부님 세 분이 함께 드리는 은혜가 넘치는 미사로 그날만큼은 성전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교우들이 참례하였다. 당신이 언젠가 말씀하셨다. 평신도들도 아침 일찍 새벽미사를 드리러 오는데 신부가 잠을 자고 있어야 쓰겠냐고. 새벽미사는 신부들이 함께 드리기로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래요. 그래서 월요일만은 본당 신부들이 모두 참례하자고 하셨다나.
아 이걸 빠뜨릴 수 없지. 신부님이 집전하시는 미사에서 거양성체를 드리는 순간을.... 신부님은 유별나게 오랜 시간 성체를 들고 서 계셨다. 대단했다. 성체를 우러러보는 신자들의 모습도 한층 진지했고 막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하느님께 바치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듯 전율할 수밖에. 미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성체를 향한 거룩한 흠숭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우리신부님의 성체신심은 정말로 대단하셨다. 미사는 거룩했고 교우들의 자세도 차츰 변화되어 갔다. 높이 쳐든 당신 손에 받들어진 예수님의 몸을 우러러 보며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내어줌'을 생각했고 황송한 듯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내릴 때 모두 깊이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사는 이런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현시를 바라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이 거룩한 순간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몸 떠는 황홀한 체험. 이 처럼 거룩한 미사가 어디에 있을까.
그랬다. 우리 신부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만남을 내어주셨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
그분은 그랬다. 언제나 우리와 뭔가를 나누고 싶어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그런 당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은 오랜 뒤의 일이다. 얼마나 우리가 멍청했던가. 처음에는 옆에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무뚝뚝해보이는 신부님이 본당 일을 처리하는데는 치밀했다. 연말이면 접으면 레지오수첩에 들어가게 한 뼘도 안되는 용지에 본당 일 년 사목계획표를 날짜 순서 대로 빼곡이 적어놓았으니 오죽할까. 주일미사 때 주보와 함께 전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지. 당신이 직접 챙긴 계획표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일을 치루어내는 모습을 보노라니 질릴 수밖에.
그분은 신자들의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에는 양보란 일체 없었다. 특히 사순과 대림 피정을 놓고 이야기를 풀어볼까. 사순과 대림시기가 다가오면 본당마다 알찬 강의를 준비하여 주님의 부활과 성탄을 준비한다. 교회에 있어 이때만큼 중요한 시기가 없겠지. 대개 유명짜한 신부님과 수녀님, 더러는 평신도 중에 아주 명성이 높은 사람을 물색하여 강의를 잡겠지. 그야 평일 저녁미사 후가 좋을 테고.
그런대 우리신부님은 달랐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야심이 컸다. 피정프로그램을 짜는데, 주말반, 평일 오전반과 저녁반. 세 개 반으로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도 두 번한다. 총 여섯 개의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간이 없다고 핑게를 대는 신자들을 대비하여 빠져나갈 틈이 없게 만든 거다. 이래도 시간 없다고 피정에 참석 못하겠다 할래?(신부님 생각)
주말반은 토요일과 주일 이틀간이다. 하도 교우들이 간청을 해서 몇 해가 지나자 주말 반은 주일 하루로 축소를 했다. 장소는 본당 영상실에서 했는데 식사는 여성 꾸리아와 구역이 돌아가면서 준비했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큰일을 치루었는지. 자매님들은 신부님 계신 동안 본당에서 밥 해대느라 고생께나 했을 거다. 강사들도 질리는 표정이었지만 감탄을 했다. 평소에 대림, 사순피정을 두 차례 정도 평일 저녁미사 후 특강형식으로 할 때는 참석인원이 200명을 넘지 않았는데 신부님 오시고나서 1,000명은 훨씬 넘지 않았을까.
초빙강사는 신부님께서 정하셨지만 우리가 추천한 강사를 모시고 피정을 진행할 때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당신 방에서 강의내용을 꼼꼼하게 스피커를 통해 듣고서는 내려오셔서 "야 너무 어렵고 재미가 없잖냐" 하면 비상이지. 그러나 다음 시간에는 내려오셔서 "괜찮은데, 좋아" 이 때서야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다. 하여튼 권한을 주시기도 하지만 일일이 챙긴다. 당신 교우들을 이렇게 챙기는 신부님이 어디 그리 흔할까? 밥숫가락을 들기 싫어하는 아이들한테 엄하게 밥을 먹기를 강권하지만 때로는 달래가면서 어떻게 해서든 밥을 먹이고야 마는 집념도 대단했다. 누구는 신부님이 부임하셔서 우리와 씨름을 했는데 결국에는 신부님이 이기셨다고. 당신 생전에 우리본당에서 많이 양보해준 거라는데 다른 본당에서는 어떠했을까.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사실, 신부님은 촌스럽기 짝이 없는 분이시다. 원래 촌놈은 뭔 일을 해도 어울려 밥을 해서 먹으며 떠들석하게 대화를 하다가 설거지까지 하고서 헤어지는 걸 즐기지 않는가? 왁자지껄하게 잔치상을 벌린 자리에 둘러보시며 반찬은 맛나게 먹는지 모자라는 것은 없는지 챙기는 소박한 모습에는 근엄함은 없고 자상한 할아버지 모습만이 보였다.
아~ 견진교리를 이야기해야지. 첫 해에 사무실 직원을 동원하여 교적을 훑어서 대상자를 뽑는데 자그만치 4천 명이 넘는다네. 신부님이 노발대발하여 소매를 걷어부치고서 직접 나섰다. 견진교리신청을 구역장과 단체장을 달달 볶아서 모집했는데 신청서를 정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단체마다 실적 때문에 중복신청서가 여간 많아서야지. 주일 반과 평일 오전반, 오후반 세 개반으로 운영하는데 560명이 넘는 인원을 7주나 끌고가는 게 얼마나 힘이 들까.
그때는 성령세미나로 했는데 온통 진행은 성령기도회에서 맡았다. 성가를 부르는 것부터 강사를 초빙하고 강의 후 그룹나눔까지.....나눔봉사자만 무려 서른 명에 가까웠지. 봉사자를 정하는 것이 여간 힘이 들까. 강의 시작하기 전에 출석부에 일일이 전달사항을 넣어두고 나눔이 끝난 후에는 교무회의를 했다. 봉사자들이 결근하면 땜방봉사자를 투입하는 일부터 챙겨야할 일이 좀 많을까. 출석 체크는 신부님의 고유한 양식을 사용했는데 당신이 명동보좌를 할 때 써먹은 전통을 자랑하는 출석체크(명동은 당신이 첫 사제로 나간 곳이라니 40년 전에 써먹은 것을). 강의 중에도 몇 차례나 오셔서 둘러보시고 출석은 몇 명이고...대단하신 분이다. 신부님이 안수를 주는 날에는 많은 교우들이 울며 주님을 체험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맛에 교리를 진행하면서 겪은 숱한 어려움을 잊게해 주었다.
견진성사날! 성전에는 성사를 받는 교우들만 들어갈 수밖에. 대부모들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본당 좌석이 1,000명을 수용할 수 없잖은가. 사목회 총회장과 남녀구역장이 대신 대부모역활을 할 수밖에. 정말이지 작전사령부처럼 지휘소를 차리고 치룰 수밖에. 전쟁터같은 작전사령부를 방문하셔도 수고한다는 말씀도 없이 다그치기만 하시던 신부님. 무뚝뚝하고 칭찬에 인색하신 신부님이 더러는 야속했지만 지나가는 말로 사목회의 누구한테 봉사자들이 제법 수고했고 일도 잘 치루더라고 칭찬하시더래. 속정이 깊으신 분이라는 걸 그때야 알았다. 맨 처음에는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을 금하시고 가톨릭 성가로 찬미를 하라시더니 어느새 복음성가에 푹 빠지셔서 어느 피정을 하더라도 복음성가팀을 내세우시던 신부님.
기도하는 교우들에게는 무척 신경을 써주시던 신부님! 성체조배실 장궤틀이 하나둘 못 쓰게게 되자 기관장을 시켜 튼튼하게 만들어주셨는데 여간 신경을 쓰신게 아니었다. 아주 당신이 망치를 들고서 만든 거나 진배 없었다. 당신이 가시고 없는 조배실에서 장궤틀에 앉으면 눈물이 앞을 가려 어떡하지요 신부님!
사실 고마운 거는 당신이 부임하시자마자 본당 창틀을 전부 이중창으로 덧붙이신 것을. 사소해 보였지만 난방에 끔찍한 효과를 가져왔다. 전기요금이 줄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성전에서 기도할 때는 정말 신부님이 고마웠다. 겨울, 아무리 추워도, 더우기 새벽미사만 있는 월요일은 성전이 무척 춥다. 그러나 우리 본당만큼은 성전에 머물러 있어보면 추운 줄 모른다. 온 마음을 바쳐 기도에 열중하면 춥고 덥고를 어찌 알겠습니까만 나같이 맹물같은 신자는 기도할 때 주위환경에 좌우될 수밖에. 이중창을 한 덕에 그리 추운 줄 모르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곳에도 신부님의 눈길은 머물러 계셨고 기도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보다 신경을 써주신 당신은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겠지요 신부님!
신부님의 입관식이 다가올 수록 명동성당 뒤편 소성당 앞마당은 신자들의 줄이 줄기는 커녕 길어진다. 퍼붓는 장마비는 야속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자매님은 한강 본당이란다. 그랬을 것이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는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우러나 서로 신부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했고 그분과의 얽힌 추억담을 조근조근 나누노라면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잊어버렸다. 신부님이 거쳐가신 본당 교우들과 오랜 친구가 된 것처럼 따스한 우정이 솟아나온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시간, 9십 중반을 넘긴 신부님의 노모가 오셔서 "병문아~ 니가 왜 여기누워 있노" 하시며 오열했다 한다. 자리에 있던 교우들도 울고 미사를 준비하시던 신부님들의 어깨도 잘게 흔들리더란다. 언제나 혼자 남은 노모를 생각하며 근심하시던 당신께 하나 따집시다. "와 이리 앞뒤 분별없이 혼자 가뿌렸능교" 당신이 신학생일 때 어머님이 편찮으셨다 했다. 그 때 얼마나 어머님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지 기도빨이 넘쳐 어머님이 90이 넘어서도 쌩쌩하다고. 아마 내 생전에 최고로 기도를 했더니만 이제는 기도의 효혐이 없대요. 아무리 그래도 신부님 당신은 불효잡니다. 홀로 노모를 두고 먼저 가시다니요.
추기경님이 주재하시는 입관예절은 엄숙했다. 비좁은 소성당에 들어선 교우들도, 쏱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밖에서 줄을 선 신자들도 마음을 모아 기도를 했습니다, 신부님.
이튿날, 잠원동은 버스를 열세 대를 마련하여 장례미사에 참례했다. 겨우 여덟 시 이십 분인가. 명동성당은 출입구를 닫았다. 넘치는 신자들로 서 있기도 불편해서. 꼬스트홀에도 자리가 없었다지. 신부님을 떠나보내려 신부님들이 입장했다. 얼쭈 칠팔십 분이 넘는 신부님들의 행렬의 끝에 추기경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당했다. 추기경님의 강론은 각별했다. 당신이 서울교구장으로 오실 때 관리국장을 맡긴 우리신부님과의 인연을 말씀하시며 본당신부의 표상이라 했다. 동기신부이신 김자문 신부는 고별사에서 간결하게 말했다. 이병문 신부! 나 이제야 고백하는데 당신은 나의 맨토였소. 사제 생활에서 닥치는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신이라면 이럴 경우 어떡할꺼요 하며 당신을 생각했소. 친구이자 당신의 맨토를 잃어버린 허전함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다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말씀도 하셨지. 분명 하느님께서 이병문이를 그냥 두면 다른 신부들 할 일이 없어질 거라고 부랴부랴 데려가신 거 아닌가. 친구를 잃어버린 쓰라림을 달래는 뜨거운 우정에 어찌 눈물이 나지 않을 건가.
고별식은 장중하다기보다 애틋했다. 명동성당 성가대가 부르는 "이 영혼을 받으소서" 어느 장례미사나 꼭 듣는 이 노래가 오늘은 왜 이리도 애절할까. 나즈막하게 시작하는 합창단의 노랫말은 이랬지. "천주의 성인들이여 오소서. 주의 천사들이여 받아주소서. 이 영혼을 부르신 그리스도여 이 영혼을 받아들여 주소서." 이때까지는 부드러웠고 달콤하기까지 했다. 순간 가슴을 찢어버리듯 터져나오는 소프라노의 쏠로 "천사들이여 이 영혼을 아브라함 품으로 데려가소서. 주여 이 영혼을 받으소서" 소프라노의 목소리라 해도 고음이었고 흡사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을 듯 아프고도 애달팠다. 하느님께 매달리며 '우릴 봐줘요. 나 여기 있어요.' 하고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절박함이 우리를 아프게 했다. 다시 잔잔하게 부드러운 바리톤과 알토의 음색이 어울린 합창단이 "주여!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그랬다. 하느님을 그여이 보고야 말리라는 절박함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팔을 벌려서 우리를 안아주신다는 안도감이 스며들면서 비로소 당신을 보내는 평화를, 행복함이 물밀릴듯이 모두의 가슴에 젖어들었다. 장례미사는 장중했지만 평화로웠다.
이제 성당 앞마당에서 당신의 영정을 든 본당 새 사제가 앞자리에 앉고 당신의 나무관을 장의차에 싣는 순서였다. 눈시울을 적신 신자들이 다가와 눈물로 더러는 신부님이 주무시는 나무관을 어루만지며 당신을 배웅했다. "이제 이별이군요. 신부님 잘 가세요" 차는 달리고 초록의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여름풍경이 푸르렀다. 온갖 식물이 몸부림을 치는 생명의 절정에서 당신을 보내는 애달픈 마음을 따라 나도 간다. 당신도 가고 나도 간다. 기여이 우리도 가고말리라 생명의 나라로.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맨 앞자리에 자리한 성직자 묘역, 스무 걸음이 되나. 가까운 자리에 당신을 위한 영원한 집이 황토색 기름진 흙을 파헤치고 기다렸다. 잔득 찌푸린 날씨가 평토를 끝 낼 즈음, 기어이 장대비로 꽂히기 시작했다. 하늘도 울고 우리도 울었다.배웅하는 신자들도 비를 맞으며 외려 후련했을 거다. 작년 오월에 떠나가신 장대익 신부님 자리에서 네 번째 자리였다. 일년 동안 돌아가신 교구 신부님이 세 분이었고 이제 우리신부님이 네 번째였다. 아마 그랬을 거다. "베드로, 이제 오는가. 내 옆에 와서 좋군. 잠원동 출신끼리 계나하자" 여기까지는 분명하지만 장신부님께서 우리신부님한테 사탕을 주셨을까? 내려오면서 우린 말은 없었지만, "신부님이 추울텐데! " 내린 비로 땅은 추웠고 어두울테니.
참 이상도 해라. 버스에서 하관식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나즈막하게 나누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언듯언듯 들을 수 있었다. 나한테만은 하는 신부님의 따스한 보살핌과 관심이 누구에게나 고르게 나누어져 있었다는 걸. 그랬다. 우리본당 교우들의 가슴에는 신부님이 주신 따스한 관심과 사랑이 살아 있음을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게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 어디에나 똑같이 머물러 있다. 하지만 만인에게 향한 당신의 사랑은 만분지 일이 아니라 만분지 만으로 나 하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라면서? 살아계실 때는 몰랐지만 당신의 사랑은 오래오래 우리가슴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관식을 끝내고 돌아와서 잠시 잠이 들었던가. 당신이 가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성당으로 나가본다.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성당은 특전미사도 끝나고 모두들 돌아 간 뒤라 앞마당은 어두웠고 교육관 성모동산 옆자리, 당신과 자주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던 그 자리. 커피향기는 하늘로 올라가는데 입에 문 담배는 썼다. 지금이라도 말씀도 없이 손가락을 내밀며 담배 한 개피를 달라하실 거 같은데... 비는 내리고 비에 흠뻑 젖은 성모님은 왠지 추워보였고 예수 아기님도 고뿔에 걸릴 거 같은데 당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누구한테 담배 달라실까요? 그리고 맛난 커피 누가 대접할까요? 그립지만 미운 당신.... 우리신부님. 금방이라도 사제관으로 들어가시며 우릴 향해 "잘 가슈" 무심하게 인사를 하는 당신의 어깨가 쓸쓸해 보였습니다. 참 무심한 양반 잘 가세요 우리 신부님!!!! 이튿날, 주일미사를 드리고 나오는 교우들의 얼굴이 우울했다. 비로소 신부님을 여윈 것을 실감해서. 오랫동안 이 쓸쓸하고 애절한 이별의 아픔을 견디어내야겠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후기 : 일년 전까지 보좌신부님으로 계셨던 김태근 베드로신부님의 어머니가 주일날, 우리 신부님을 보낸 다음날, 오랫동안 투병하시던 병고에서 벗어나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
우리는 검은 색 상복을 벗을 수가 없었다.
이 아픈 이별의 시간을 잠원동 우리 교우들은 하나가 되어 견디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