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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49) -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다 (마 6:22-24)
(마태복음 6:22-24)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제가 이거 설교(說敎)하러 들어오기 전에 침을 맞았는데, 그 집사님이 백내장 걸렸다고 그래서, 되게 걱정했는데…. 여기서 또 갑자기 눈 이야기가 나오니까…, 하하하. 백내장 걸리지 말라는 얘긴가요, 이게?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이게? 아니겠죠?
자,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그 열(10)이라는 율법(律法)을, 넷(4)으로 설명을 해 주시죠? 넷으로 설명해 주신 뒤에, 그것을 ‘사랑, 아가페’로 결론지으셨습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이란, 열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로, 진리(眞理)로 깨달아서, 먼저 그 안에 담긴,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矜恤)을 알고, 그 ‘하나’를 이웃들에게 전해주어서, 그 하나이신 그 생명! 그 하나는 하나님이니깐요. 그 생명(生命)을 마음에 담게 하는, 그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제 성취(成就)가 되고, 완성이 되는 거죠? 그 하나님이란 분을 우리는 잘 모르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잘 모르는 분을 어떻게 또 사랑하고 그렇습니까? 막연한 우리의 희망사항인 거죠. 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理解)를 이웃에게 흘려 줄 때, ‘네가 진짜 날 사랑하는 구나!’ 이렇게 여겨주신다는 거죠.
자, 그 사랑을 전해 줄 때에, 주의(注意)해야 할 것을 죽 나열해 준 게, 6장의 말씀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6장의 첫 단어가, ‘프로세코(주의하라)’로 시작되는 거라 그랬어요. ‘프로세코!’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항상 첫 단어가 제일 중요한 거라 그랬죠? 무엇을 주의하라 그러셨죠? 6장 2절 복습(復習)하는 거예요. ‘구제(救濟)할 때 조심하라!’ 그랬죠? 첫 번째, 그죠? ‘엘레모수네, 구제’할 때, ‘왼 편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오른 편의 것으로 구제하라!’ 그러니까 비진리, 율법이 아닌, 진리로 구제하라! 그런 말이라 그랬죠?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런 말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은밀(隱密)한 내적(內的)인 것으로 구제를 하라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내용을 구제하라! 그런 말이죠? 구제라는 단어, ‘엘레모수네’가 그 엘레오스’에서 온 단어죠? 거기에 ‘수네’가 되면, 그 ‘엘레오스’가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내 마음이 되면, ‘수네’라고 한다고 그랬죠? ‘디카이오스, 의(義)’를, 그 의(義)가 내 안에 들어오면, ‘디카이오수네’가 되는 거처럼. 그 ‘엘레모수네’는 그 ‘엘레오스’가 내 안에 들어와, 내 마음이 되었을 때, 그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데 ‘엘레오스’가 뭐냐면? 그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휼이나 자비(慈悲)!’ 사전을 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엘레오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휼과 자비! 그것을 올바로 깨달아, 마음으로 가지면, ‘엘레모수네’가 되는 거죠? ‘아, 그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 그렇지! 그것이지!’하고 내가 내 마음에 가져요. 그리고 그걸 전해주면, 그걸 구제라 그래요. 다른 게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그 긍휼과 자비를 올바로 깨달아 안 사람이 그것을 정직(正直)하고 올바르게, 똑바로 전해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제라는 거죠. 진정한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거잖아요, 그죠?
우리가 주일날 살펴본 것처럼, 꿈속에서 아무리 먹을 것을 줘봐야, 깨면, 그 배고픔이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아무리 먹을 걸 많이 만들어 줘봐야, 다 헛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는, 촛불 들고 나가서, 무슨 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옮겨 달라! 그거 개인적으로 하세요. 교회가 그런 일에 앞장서는 건 아녜요. 정규직으로 돌려봐야, 꿈속에서 밥 몇 숟가락 더 먹게 해주는 거죠. 교회는 그런 거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구제하는 거요. 진짜 ‘엘레오스’를 전해 주어서, 그것으로 배불리게, ‘프토코스’의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 결핍이 있는 걸, 아는 자들이, 진짜 그 양식으로 배를 불리는 거. 그것이 구제(救濟)인 거죠?
두 번째로 기도(祈禱)의 문제였습니다.
‘구제할 때 조심해! 프로세코’ 그러더니, ‘프로슈코마이, 기도할 때 조심해!’ 그런단 말예요. 기도라는 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안 사람이, 그 하늘의 뜻대로, 그 아버지를 마음으로 가져서(그래서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로 시작 되는 거죠? 기도가), 그 아버지의 말씀을 양식(糧食)으로 삼아서, 생명의 존재(存在)가 되어서, 그걸 이제 내 안의 양식으로 가지면, 그건 영원한 생명이니까, ‘그 사람이 생명이 있다!’ 이렇게 얘기해주는 거예요.
생명의 존재가 되어서, 그 아버지의 뜻이 ‘옳습니다! 이게 진짜 양식이네요.’하고 고백하고, 또 ‘그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웃들에게 흘려주는 행위! 저들에게도 이러한 이해, 이러한 깨달음, 이러한 사랑의 이해가 깨달아지게 해주세요.’하고, 또 ‘그 사랑이 이런 겁니다.
’하고 흘려주면, 그 전체를 ‘기도(祈禱)’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용서(容恕)가 일어나는 거죠?
따라서 그 기도라는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것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고, 성전 안 골방으로 들어가서, 골방은 성전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재료들과 기명(器皿)들을 제조(製造)하는 곳이니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곳이죠? 겉으로만 봐서는 뭔지 잘 모르니까. 골방으로 들어가서, 그 성전이 담고 있는 내용,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하는 많은 행위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배워서, 그것으로 기도를 해야 되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라!’ 얘기한 거죠?
그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면 안 된다.
‘바톨로게오’ 정확하지 않은 말로 더듬더듬하지 말아라! 이런 말이죠? ‘로고스 바톨로게오.’ 중언부언,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그런 거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중언부언 하면 안 되고. 그리고 그러한 올바른 기도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이제 강조해 주시죠?
그래서 주기도문(主祈禱文) 안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너희들이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容恕)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용서받지 못해!’ 이런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거죠? 그 말은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괘씸해서 우리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용서의 의미를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면, 내가 그 용서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거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죠.
세 번째가 금식(禁食)의 문제였습니다.
금식이란, 꼭 먹어야 할 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율법(律法)의 양식(糧食)을 먹지 않을 수 있는, 진리의 이해 문제를 다루는 게 금식이잖아요? 내용으로 하는 게. 주님은 올바른 금식을 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랬습니다.
머리 감고, 찍고 바르고, 얼굴 깨끗이 씻으라는 말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기름 바른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장사(葬事)지내는 거죠. 그 예수! 육적 예수를 장사지내고.
얼굴 씻는 게 뭐죠? ‘프로소폰’ ‘파님’ ‘프로소폰’은 항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것이 나타난 것을 ‘프로소폰’이라 그래요. 그래서 대부분 얼굴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나쁘지 않은 번역이죠? 얼굴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꼴’이라는 말에서 나온 거니까. 그죠? 얼은 영이고, 꼴은 모형, 모양이에요. 그죠? 얼꼴! 그렇게 이제 예수를 장례지내고, 얼굴을 딱 씻어서, 말씀의 표피를 잘 닦아서, 그 안의 내용을 보게 되면, ‘아! 무엇이 먹어야 하는 것이고, 무엇이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구나!’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랬죠? 그래서 그 이웃에게 올바른 양식을 ‘엘레모수네, 구제’로 넘겨줄 때, 올바른 양식으로 넘겨줄 수 있는 거죠. 진짜 올바른 금식을 할 수 잇는 사람은!
그리고 네 번째가 하늘의 보물(寶物)과 땅의 보물의 문제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올바로 깨달아서, 먼저 하늘들이 되고, 그 안에 그 말씀을 진리로 담아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가 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땅 적 차원으로 말씀을 이해하여, 땅의 행위와, 땅으로서의 아담들의 가치 자랑에, 그 말씀을 사용해 버리면, 그게 바로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늘의 보물인 거고, 그 말씀을 땅의 것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땅의 배설물(排泄物)인 거라 그랬습니다.
자기는 그걸 보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걸 배설물로 본다, 그랬습니다.
율법의 상징(象徵)인 그 바리새인의 그 ‘바리새, 파리사이오스’가 히브리어의 ‘파라쉬’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라 그랬죠? 그 ‘파라쉬’는 ‘나누다, 분리하다’라는 뜻이지만, 모음만 ‘패리쉬’로 바꾸면, 분비물! 배설물(排泄物)! 똥! 이런 말이라 그랬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배설물인 거예요. 그래서 바울도, ‘내가 바리새인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으로서, 율법을 행한 건, 배설물이었다.
’라고 이야기한 거죠. 자기가 겸손(謙遜) 떤 게 아닙니다.
그게 진짜 배설물이라는 걸 자기가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전해주면, 그것이 올바른 구제가 되는 거고, 그것이 바로 기도인 거고, 그것이 바로 양식이 되는 거고, 먹어야 할 올바른 양식이 되는 거고, 보물이 되는 거지만, 그것을 표피적인 율법으로 전해 버리면, 엉뚱한 양식, 배설물을 양식으로 나누어주는 그런 무서운 일이 되는 거예요. 더럽고 추악한 짓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회에서 배설물들을 나눠주고 있는 거예요. 그거 주면서 막 먹으라고. 그런데 잘 먹어, 또. 맛있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하늘의 양식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인지 한 번 보잔 말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눈이 성해야 한다.
’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이 성해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본 것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본문 22절을 보시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런 것들을 안과나 안경점에서 자기들 광고 카피로 쓰는 것들을 왕왕 보는데,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다’ 눈만 좋으면, 온 몸이 밝습니까?
여기에서 ‘눈’이라고 번역이 된 ‘옵달모스’는, ‘옵타노마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이죠? ‘옵타노마이’는 ‘보다’ 동사니까요. 제가 전에 ‘옵타노마이’는 반드시 ‘에이도’와 ‘블레포’의 과정을 거쳐서 ‘호라오’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호라오’는 ‘들음으로 보는 거’예요.
자, 제가 예를 들어 드릴게요. 이게 ‘옵타노마이’가, 안경점 앞에 가면, ‘옵티컬’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그거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에이도’라는 건, ‘거기 있으니까 보는 거’죠. 보라고 보여주는 걸 그냥 인식해버리는 거. 그래서 그냥 껍데기로 봐버리면, 그게 ‘에이도론’이라고 해서, 이게 우상(偶像)이라는 뜻이에요. 우상! 그냥 봐버리면, 껍데기로만 봐버리면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도 그냥 껍데기로만 봐버리면, 그가 우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너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거든, 그게 마지막 때인 줄 알아라!’ 그래요. 그 멸망의 가증한 게, 다른 게 아니라, 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이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예수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섬기는 예수로 봐버리면, 그게 멸망의 가증한 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예수 믿으면, 그렇게 멸망하거든요. 그걸 우상이라 그래요, 성경이.
그리고 ‘블랫보’는 뭐라 그랬죠? 이 ‘블랫보’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걸, 그걸 진짜 내용으로 보게 해주기 위해서, ‘만져보게’ 해주고, ‘먹어보게’ 해주고, ‘찢어보게’ 해주고, 그렇게 여러 시험하게 해주는 거 있죠? 그게 ‘블랫보’예요. 먹어보다, 만져보다, 입어보다, 뭐 이렇게 쓰이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해서, 제대로 그 내용을 알아버리면, 그게 이제 ‘호라오’인 거죠.
그러니까 보세요. 성전이 저기 있습니다.
성전을 그냥 이렇게 봐버려. 그리고는 ‘아, 성전은 저거지! 그러니까 가서, 열심히 거기 가서, 율법을 행하고, 제사지내고, 그럼 되겠지!’ 그러면 그 성전은 우상이 되는 거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대노하신 거 아닙니까? ‘누가 성전을 그렇게 줬냐?’ 그런데 그 성전을 보고, ‘아, 그게 바로 하나님! 그 하나님을 그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 그 능력을 그려놓은 거지! 우리에게 배우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거지!’ 봤는데, 그 안에 있는 내용을 들어. 이게 들음으로 보는 거라 그러는 거예요. 그것을 ‘호라오’라고 하는 거죠.
자, 이렇게 성도는, 반드시 보이는 것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도 눈에 보이는 대로 무작정 읽어버리면, 그러면 그게 여러분에게 저주의 책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뭐, 속독한다고, 무슨 성경 통독! 빨리 읽는 게 무슨 대수라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며칠 만에 한 번 읽고, 뭐, 일 년에 몇 십독을 하고. 다 소용없어요, 그거 달달 외워도 소용없어요. 그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같은 거라니까요. 뭐가 달라요? 내용도 모르고 중얼중얼하는 게. 반드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읽으면서 들어야 돼요. 그렇게 그 보이는 것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봐서 들을 수 있었을 때, 그것을 ‘진리(眞理)’라고 하는 거예요.
22절을 그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눈이 성하면 그 몸은, 다른 것을 밝혀주는 온전한 몸이다!’ 이런 뜻이에요. ‘다른 것을 밝혀주는 온전한 몸이다!’ 그러니까 등불이 눈이라 그래요. 등불이 눈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이걸 잘 기억하셔야 돼요. 등불이라는 말이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나와서 계속 나온단 말예요. 반복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나와요. 등불이!
먼저 성경이 그 ‘등불, 뤼크노스’와 ‘눈, 옵달모스’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눈이 등불’이라는 말과 ‘눈이 성해야 너희들은 밝혀주는 온전한 몸이 되는 거야!’라는 그 의미가 무슨 말인지 알겠죠? 계시록 5장 6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일찍 죽임을 당한 건 예수밖에 없어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보시다시피 눈이라는 것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리켜 ‘영’이라고 그래요. 영! ‘그 눈은 영이야! 일곱 눈, 그건 일곱 영이야!’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영을 당신의 말씀이라 그러셨어요. 요한복음 6장 63절 다시 한 번 보죠.
(요한복음 6:63)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살리는 것은 말씀이지! 율법은 무익한 거야! 이런 말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로고스)이 영이요 생명이라
‘절대 율법으로 너희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은 뭐라 그랬어요? ‘눈’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진리라는 하나로 보지 못하고, 열심히 여러 가지 세목으로 행해버리면, 그건 생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그런 말이죠? 왜? 육은 무익한 거라 그랬으니까. 영이 살리는 거라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영이 바로 눈이고, 그 눈이 바로 말씀이라고 이야기한단 말예요, 여기서. 그런데 제대로 봐야 산다는 거예요. 제대로 못 보면 죽는다는 거예요.
말씀은 분명 아래의 말과 소리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게 맞죠? 하늘의 말로, 하늘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 아래의 말로, 아래의 소리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러나 그것을 진리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그 어둠의 말, 아래의 것은 전부 ‘어두움’이라 그래요. 창세기 1장에서 그러잖아요? 그 아래에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밖에 없다 그래요. 그리고 어두움은 깊음의 이름, ‘파님’을 어두움이라 하자고, 하나님이 거기서 우리하고 합의를 하셨다니까요. 자 이 ‘깊음, 태훔’의 ‘파님’을 ‘호세크, 어두움’이라 부르자! 그랬단 말예요. 창세기 1장 2절에서.
어두움이란 건 뭐냐 하면, 아래의 바다, 이 아래의 것들, 그런 것들의 이름을 그냥 어두움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어두움을 여러분이 그 내용이 뭔지 알아버리면, 그 안 그것을 ‘빛’이라 그래요. 어두움이나 빛이나 똑같은 거라니까요. 그걸 알고 나면. 그래야 그걸 용서라고 하는 거예요. 나와 무관한 게 되니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어두움이 나와 무관한 게 되니까. 왜? 나는 그 어두움을 빛으로 보고 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럴 때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단순히 몇 가지 죄를 없는 거로 쳐주는 게 아니라, 용서는. 왜? 율법은 모든 걸 다 지키다가, 하나 어기면 다 어긴 거라 그러는데, 몇 가지 용서해줘 봐야 뭐 하냐고요? 아예 그거와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줘야 진짜 용서받은 자가 되는 거지.
자, 그렇게 우리는 아래의 말과 소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 어두움의 말을 빛의 언어로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이라는 것이, 예수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빛! 광명한 빛이 되는 거란 말예요. 생각해보세요. 빛이 진짜 내려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빛이 아니었어요? 빛이었다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어떤 이들이 그걸 빛으로 보는 이들이 생겨났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분은 진리고 빛으로 오셨다니까요.
자,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그 ‘빛’이라는 단어는 전부 ‘말’과 관련이 있어요. 히브리어로 빛은 ‘오르’죠? 헬라어로 빛은 ‘프호스’입니다.
그런데 ‘오르’라는 것은, ‘마오르’라는 어떤 도구로 빛을 발해요. 그 빛이라는 건 뭔지 몰라요. 아직 발광체가 생겨나기 전에, 창세기 1장 3절에서 빛이, ‘오르’가 생겨났어요. 하나님이 그 빛보고 ‘있어라!’ 그랬다니까요. ‘빛이 있어라!’ 그랬는데, 뭔지 몰라. 파자를 해도, ‘하나님이 시작하셨다.
’ 끝이에요. 그게 빛의 의미이거든요. 뭘 시작하셨냐 말예요? 그런데 넷째 날에 가니까, 그 빛을 발하는 ‘마오르’라는 게 나와요. ‘오르’에다가 ‘마임’을 하나 붙여놓은 거예요. ‘멤’이라는 문자 하나를.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그 ‘멤’이 앞에 딱 붙어버리면, 그 동사가 행해지는 장소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빛이 비춰지는 어떤 곳! 이렇게 해석을 하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1장 3절의 그 빛이 그것을 통하여 비춰지는데, 그게 ‘마오르’예요. 그게 어떤 뜻이냐 하면? ‘진리를 하나님이 말하기 시작한다.
’ 이런 말이에요. ‘마오르’가. 그러니까 1장 3절의 그 빛이 뭔지, 넷째 날에 오기까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게 뭔지, 무슨 빛인지. 우리가 보는 이런 빛은 아닐 거 아녜요? 뭔지 모르는데, 넷째 날에 가면, ‘마오르’라는 게, 큰 광명, 작은 광명 이렇게 한글 개역성경이 번역해 놓았지만, 그게 ‘마오르’예요. ‘마오르 학가돌.’ ‘마오르 학가탄,’ 그런단 말입니다.
그 ‘마오르’가 이 1장 3절의 빛을 비추는 도구인데, 그 비추는 도구가 ‘마오르’라고 쓰여 있는데, 그것이 나중에 율법서에 가면, 전부 성전 안의 그 촛대 있죠? 일곱 촛대! 그 단어로 쓰인단 말예요, 그것이. 그러니까 그게 뭔가 연관이 있을 거 아녜요, 그죠? 그런데 그 단어 자체의 의미는, ‘하나님이 진리로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 이걸 ‘비추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예요. ‘빛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예요. 이게 ‘광명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예요, 성경이.
그런데 헬라어 ‘프호스’라는 단어는, ‘훼미’라는 단어에서 온 건데, ‘프흐뎅고마이’라는 단어와 맥을 같이해요. 그런데 ‘훼미’라는 단어 자체가, ‘말하다, 똑바로 말하다’예요. ‘프흐뎅고마이’라는 단어 자체는, ‘군더더기 없이, 확실하게, 똑바로 이야기해주는 것’을 ‘프흐뎅고마이’라 그러거든요. 자, 보세요. ‘마오르’도 ‘하나님께서 진리로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는 말이고, 헬라어 ‘프호스’라는 단어도 ‘군더더기 없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거짓없이 똑바로 말하다’라는 그런 뜻을 같고 있으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빛’이라는 건, 그 진리의 말과 관련이 있는 단어란 말예요.
그러니까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내가 등대가 되어서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눈이 있어야 된다는 거 아녜요? 그래야 ‘그 빛을 비추는 완전한 몸이 된다!’가 22절이니까. ‘네가 눈이 성하지 않으면 절대 너는 완전한 빛을 비추는 몸이 될 수 없어!’가 그 22절의 의미란 말예요. 원문으로 봤을 때.
그러니까 빛이라는 건, 어두움에 속한 아래의 것들을, 위의 것으로 보아서, 분명한 소리로 말할 수 있을 때, 그걸 ‘빛을 비춘다.
’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신,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그 은혜의 말씀! 그 말씀을 은혜로 보게 하는 그 능력 있죠? 그걸 ‘눈’이라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새로운 눈으로 바꿔주려고, 이렇게 뜨게 해주려고 오셨다는 거예요. 그게 눈이란 말예요. 따라서 눈이 올바르지 않으면 빛이 비추어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빛, 광명)’이라는 단어를, 성소 안의 그 ‘등대!’ ‘마오르, 촛대’라는 단어로 쓰는데, 그 등대가 몇 개예요? 일곱 개죠? 그래서 일곱 등대라고 한단 말예요. 그걸 일곱 영이라고도 한다고 그러네요, 조금 아까 전에 보니까, 그죠? 그러면, 그 등대는 바로 하나님의, 그 창세기 1장의 ‘일곱 말씀, 싸바’의 그 말씀! 그 일곱 언약! 그 일곱 양식! 그게 ‘실컷 먹이다.
’ ‘싸바’라는 단어 자체가 ‘언약을 맺다, 온전하다.
’ 이런 말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일곱 등대라는 건, 바로 그 하나님의 그 언약,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겠잖아요? 그것을 통하여 그 일곱 언약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면, 그 성전이 뭔지를 밝히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그 창세기의 일곱 언약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엉터리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창세기 그 1장의 내용들을, 수시로 예로 들어서 자꾸 설명해드리는 거예요. 그 일곱! 그게 다예요, 사실은. 그 일곱을 창세기 2장부터 다시 또 설명을 해주는 거고요. 그게 창세기 10장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이 돼요. 그리고는 11장부터 다시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또 그걸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을 동원을 해서.
그런데 그 조상들에게 한 말이, 뭔지를 또 몰라. 그러니까 출애굽기부터 다시 ‘이제 율법으로 설명해줄게’하고 율법으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또 못 알아먹어. 그래서 또 선지자들이 와서, 선지서를 통해서, 창세기의 그 말이 율법! 모세오경의 이 말이 아냐? 하고 그걸 뭉뚱그려 설명해주는 걸 선지서라 그래요. 그것도 못 알아먹어. 빛이 와! 그래서 마태복음이 열려서 또 그 얘기를 해 주는 거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 일곱 언약이 뭔지를 알게 되면, 나머지는 그냥 저절로 풀리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일곱 언약(言約)을 기독교 2000년 역사(歷史)가 버렸어요. 심지어 그거는 사람들이 나중에 붙여놓은 감상문이라는 둥, 전체를 요약해 놓은 요약본이라는 둥, 이런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그거 모르면요, 성경전체가 보이지가 않아요. 그걸 보는 눈이 열리지가 않는다니까요.
그래서 성소 안에 일곱 등대가 있는 거예요. 그 불이 꺼지면, 깜깜해지는 거요. 그 불이 확 켜져 있어야, ‘그렇지, 이게 떡 상이고, 이게 향단이고, 저 안에 지성소가 있는 거고, 요 밖은 제단이 있고. 이거 다 밝히는 게 일곱 등대라니까요. 그 말! 그래서 그걸 절대 꺼뜨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꺼뜨리지 말라는 건데…. 그런 것들이 다 성경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게 와전 되어서, 우리 조상들은 아낙네가 불씨를 꺼뜨리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그건 신주 단지 모시듯이, 이사 갈 때도 꼭 불씨는 가지고 다니죠? 그건 하나님의 명령을 엉뚱한 데 써먹은 거예요. 꺼뜨리지 말라는 불씨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건 다시 켜면 되지, 뭘. 그래서 이사 갈 때도요, 제일 먼저 그 불씨가 들어갔어요. 바가지 깨뜨리고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게, 그 불씨였다니까요. 자 계시록 4장 5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4:5-6)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나오네요, 그죠?)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 하더라
자, 일곱 등불, 일곱 영, 눈, 나오죠? 말씀이에요, 당연히. 그 말씀은 하나님을 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말아라! 이런 수준으로 우리에게 말씀 주신 게 말씀 아니란 말예요. 그 말씀은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래서 생명이죠!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 등대에는 등불이 켜질 수가 없어요. 계시록 21장 22절.
(요한계시록 21:22-23)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안에 성전이 없더라, 이렇게 얘기해요. 성전이 없더라. 왜?)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보세요. 계시록에 갔더니 성전의 실체가 뭐냐면? 하나님이래요. 그런데 그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뵈어야 되는 이들이, 멀리서 그 성전을 보고서는, 열심히 거기에서 율법의 행위만 행했단 말입니다.
계시록에 갔더니, 성전은 없더래요. 왜? 하나님이 성전이더라, 그러잖아요?)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러니까 이제는 해와 달이 필요 없죠. 그 어떤 빛도 필요 없어요. 왜? 하나님과 어린양이 뭔지 알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빛이었고, 그 내용을 빛으로 비추는 거였고, 그것이 바로 성전이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어린양이 직접 비춰버리면, 왜 성전이 필요하고 무슨 등이 더 필요하냐고요? 무슨 빛이 필요하냐고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그 말씀! 그 성령! 그 성전!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는 거예요. ‘여호와를 섬기자! 힘써 여호와를 섬기자!’라고 하지 않고, 그 여호와를 알라, 그런단 말입니다.
애초부터 빛이라는 개념은, 어두움을 내용으로 알아버리면, 그냥 그걸 빛이라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처음에 혼돈과 공허와 그 흑암! 그 흑암을 하나님이, ‘내가 이걸 너희들에게 빛으로 보게 해줄 거야!’라고 하나님이 그 언약의 시작을 빛으로 열어버린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에 ‘빛이 있어라!’부터 시작된 거예요. 계시록 22장 5절.
(요한계시록 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하나님이 비춘다는 게 뭐요? 뭐, 하나님이 빛이 확 나나요?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밝히 계시가 되자, 다른 빛이 필요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다 모형이요, 상징이었다는 거죠.
보세요. 눈이라는 거, 등대의 빛이라는 거, 그것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마지막 확인 도장을 찍고 가죠.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이렇게 성경을 올바로 이해를 하고, 잘 읽어보면, 여러분 다른 책이 필요해요? 조직신학 책이 여러분에게 필요합니까? 무슨 주석서가 필요해요? 저는 성경 이외의 다른 책은, 정말 하나도 쓸모없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기 전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게 그거지, 나중에는 다 버리게 되고, 고거 하나만 갖게 돼요. 성경 하나만! 보세요. 그냥 이렇게 읽어놓고, 제가 이제 설명을 하면,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된다니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어. 그런데, 그게 ‘로고스’예요. 그 말은 영이래요. 일곱 영이네요. 그 말씀이 계셨는데, 또 그 말씀이 빛이라네. 당연히 빛이죠? 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게, 빛이 비춰지는 거니까. 그 빛이 비춰지면, 그게 바로 생명이에요. 왜요? 그분은 하나님이니까. 여태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한 게, 이 안에 다 들어가 있잖아요? 그렇게 어두움을 빛으로 잘 깨달아 알면, 그게 바로 생명이라는 거예요.
빛이 어두움에 비췄다는 건,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전부 어두움 밖에 없었다는 건, 이제 그 빛이 그 어두움이 뭔지를 드러내어, 빛으로 비추어버리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죠? 여기에 어두움 밖에 없어요. 어두움 밖에 없는데, 빛이 와서 그 어두움을 비춰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두움이 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걸 빛이라고 하는 거지, 빛이 어두움에 비추어서, 그 어두움을 다른 걸로 바꾸어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자력으로 절대 빛을 볼 수가 없어요. 그들은 눈이 성하지 않은 소경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이 절망적 유한 존재의 한계라는 거예요. 어떤 존재도, 이 유한자들은, 그 빛을 자력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빛이 왔을 때, 그들은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이 있었어요.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소경입니다.
’라는 고백을 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빛이 와서, 아직 십자가도 지지 않았고, 비추지도 않았어요. 빛이 비추어지려면, 그리스도의 영, 일곱 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확 뚫고 들어가야 빛이 비추어지는 건데, 아직 십자가를 지기도 전인데, 그 예수를 보더니, ‘나는 보고 있다!’라고 너스레를 떠는 인간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빛이 와서, 난 아직 아무 것도 안 비추었는데, 어떤 놈들이 먼저 보고 있다네. 먼저 자신이 소경이라는 자인식이 없으면, 절대로 그 하나님의 선물을, 새로운 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낼 수가 없어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눈이 성하다’는 말과 ‘눈이 나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가 조금 살펴드릴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눈이 성하면’이라는 단서를 다시는데, 그 ‘성하다’는 ‘하플루스’라는 단어는요, ‘하’가 부정접두어고, ‘플레코’라는 단어가 ‘엮다, 땋다’ 이런 말이 거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죠? ‘바느질하다’라는 뜻이라 했어요. 그렇게 ‘하플루스,’ 엮이지 않은, 다시, 네 눈이, ‘엮다, 땋다’라는 건, 율법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인간의 노력과 땀이 가미된 거. 이런 말이거든요. 그리고 윗물과 아랫물이 섞여 있는 상태! 그걸 ‘엮는다’라고 해요. 네 눈이 그렇게 율법의 눈이라면, 엮여 있는, 섞여 있는 율법의 눈이라면, ‘하플루스’니까, 그런 율법의 눈이 아니면, 이런 말이죠, 그죠? 그걸 ‘성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네가 네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냥 그 표피로, 율법으로 보지 않을 수 있으면!’ 이런 말이죠. 그게 ‘네 눈이 성하면’이란 거죠? ‘그러면 온 몸이 밝으리라.’ 이 말이 뭐라 그랬어요? ‘빛을 비추는 완전한 몸이다.
’ 이런 말이에요. 다시, ‘네 눈이 보는 걸, 그냥, 표피적으로 보아, 그것을 그냥 율법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성한 눈이라면, 너야 말로 빛을 비추는 온전한 몸이다!’ 이런 말이에요. 온 몸이 성하리라가 아니라. ‘홀로스 호 소마’가 온전한 몸이라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눈을 진리로 갖고 있는 이는, 이 세계관, 이걸 진리의 안경으로 갖고 있는 이는, 어두움을 이렇게 빛으로 비출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너 온전해!’ 그렇게 여겨주신다는 말이에요. 그 말씀을 앞의 5장에서 잘 설명해주셨잖아요? 마태복음 5장 14절 보세요.
(마태복음 5:14-18)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이게 선한 일입니다.
빛을 비추는 것을 선한 일이라 그래요.)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당연하죠. 우리가 그렇게 선한 일, 하나님이라는 빛을 이렇게 비춰주면, 그 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까.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를 가리켜 세상을, ‘호 코스모스’를, ‘호 코스모스’는 어두움이죠? 어두움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에요. 그런데 그걸 비추래요, 우리보고. 그러니까 비추어주면, 로마서 8장에서 배웠잖아요? 어두움인 모든 피조물들이, ‘그래, 내 진짜 내용은 이런 거야.’라고 빛으로 드러나게 될 거 아닙니까? 진리로 드러나게 될 게 아닙니까? 우리보고 그거 하라는 거예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비춰라!’
그 등대의 그 빛은, 산 위의 동네를 밝히 드러나게 한다고 그래요. 산 위의 동네가 ‘폴리스’예요. ‘폴리스’라는 것은 웬만한 마을이 아니라, 울타리로, 성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마을이에요. 그걸 ‘폴리스’라 그러는데, 그 단어가 어디에 쓰이느냐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있죠?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예요.
그러니까 산 위의 동네라는 건, 원래 거기는 예루살렘이죠? 유대 땅에, 산 위의 동네 하면, 그냥 거기 밖에 없었어요.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땅이 다 평지인데, 예루살렘만 요렇게 산! 그래서 시온산이라고도 하죠. 요렇게 올라와 있는데, 그 위에다 도시를 만들고, 거기에다가 성전을 지었다고요. 왜? 보이기에 가장 좋은 곳! 선악과나무요! 동산 중앙에다 세웠잖아요? 그 ‘동산, 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울타리를 치다’라는 단어예요. 동산이라는 말이 아니라. 똑같은 말이에요. 폴리스하고. 울타리를 치고 그 동산 중앙에다가 선악과를 심었죠?
자, 예루살렘 성, 폴리스에다가 울타리를 치고, 성전을 중앙에다 딱 심어놓았단 말예요. 왜? 보라고! 보고 그게 뭔지 알라고! 그러면 생명이란 말입니다.
선악과 보고, 먹어! 먹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무트 타 무트,’ 그러면 산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면.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고 에덴이라는 기쁨의 울타리 쳐진 그곳! 에덴동산이 아니라, 그곳은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두르고, 이렇게 구별해 놓으신 하나님나라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그 하나님나라는 또 우리라면서요? 거룩한 나라! 그래서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우리라고 그러잖아요? 성도! 하나님의 신부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 성전! 그리고 그 간(間)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그냥 하나님나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그의 백성들이 공존하는, 그 하나님나라를 의미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냥 그 안에 들어가서, ‘나는 안전해!’ 이러고 있는다든지, 유대인들처럼. 그 성전을 그냥 섬겨버리는. 그 짓을 하면 망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빛이라는 건, 그 산 위에 있는 그것! 그 폴리스, 거기가 뭔지, 이렇게 드러나게, 동네가 감추이지 못한다는 건, 빛이라는 게, 그 진리의 눈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닫고 나니까, 그 율법의 산! 그리고 그 성! 그리고 그 성전이 뭔지 밝히 드러나더라는 거예요. 뭔지 눈에 의해. 그러니까 그 빛이라는 건, 산 위의 동네, 그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밝게 보이게 하는 능력이란 말예요. 빛이라는 건! 그걸 눈이라고 하고, 영이라고 하고, 말이라고 하고, 생명이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올바른 눈으로 진리를 분별해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들의 행위를 성경이 ‘착한 행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착한 거예요. 다른 게 착한 게 아니라. 착한 거는 기질(氣質)이나 성품(性品)에 의해서.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착함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기질이나 성품에 의해서도 가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죠? 저처럼 뭐 기질과 성품으로도 착하고, (큰 웃음) 이렇게 빛을 비추는 착한 일을 하는 이도 종종 있지만. 아니 가끔 있지만. 그런 착한 행실이 아니란 말예요. 하나님이 인정(認定)하는 착한 행실은, ‘네가 나를 이야기해주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말을 덧붙여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廢)하러 온 것이 아니다.
’ 당연히 이 말이 여기 붙어야죠. 왜? 산 위에 있는 그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는 걸, 밝혀준다는 게 뭐예요? 율법을 진리로 보게 해준다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가 폐해지는 게 아니라, 진리로 완전하게 드러나는 거네요? 주님이 오셔서, 새로운 말을 하셨어요? 전부 구약의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그래서 신약의 헬라어는, 히브리어를 뿌리로 하여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왜? 전부 신약의 이야기는, 구약을 진리로 설명해준 거거든요. 그리고 주님이 쓰신 말도 아람어였잖아요? 아람어, 히브리어는, 우리도 한글과 한자를 같이 써야 말이 되죠? 그런 것처럼 같은 말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아람어를 쓰셨단 말예요. 그러면 그걸 헬라어로 기록해 놓았다면, 신약의 그 헬라어는, 반드시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바탕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게 아니라, 그게 뭔지를 설명해주러 왔다’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가 빛을 비추어, 감추어져 있는 그 산 위의 동네를 확 드러내는 거라는 거예요. 그걸 너희가 하라는 거예요. 그 착한 행실을!
자, 그렇게 껍데기와 모형이 의미를 잃으면, 그걸 뭐라 그러죠? 요한계시록에 가면,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져버린다 그래요. 옛 하늘과 옛 땅은 어디에 나와요? 창세기 1장에 나오잖아요? 그 하늘들과 그 땅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왜 만들었다 그래요?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게, 그거라잖아요?
그러면 그게 뭔지를 알았어요. 그러면 그 하늘과 그 땅에 필요 있어요, 없어요? 그 하늘과 그 땅은 언젠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내 안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사라졌을 때, 그 하늘과 그 땅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 그래요. 그걸 ‘나라’라 그래요. 그걸 천국(天國)이라 그래요.
그렇게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거, 그것이 ‘성한 눈’이에요. 그 눈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즉시 이 현상계가 존재의 영역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 유한의 세계를 조성한 그 근원의 터전인 무한의 영역을 생각하게 돼요, 그 때부터. ‘이게 다가 아니구나!’ 이렇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 속에서는 우리 자신의 존재성이, 이 유한의 영역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아울러 감지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의 영적 눈이 성해지게 되면, 그러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존적 절망의 상태에 대해서, 알게 됨과 동시에, 스스로의 힘으로, 그 유한의 세계에서 그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걸 뭐라 그러죠? 그걸 유식한 말로 ‘원죄(原罪)’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원죄(原罪)라는 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게, 그냥 그게 내재가 된 거! 그걸 원죄라고 하지 않아요. 오리지널 씬(Original Sin)이라는 건, 이 유한존재의 절망적 한계, 이 실존적 이 한계 있죠? 그걸 원죄라고 하는 거예요. 피조물은, 피조물이 스스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어떤 곳이 있고, 그곳에 이를 수 없는 인간들의 절망적 실존(實存), 현실! 이걸 그냥 원죄, 오리지널 씬(Original Sin)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한 원죄라고 불리는 인간 내부의 그 생래적 욕망의 실재에 관해서도, 우리는 이제 알게 돼요. 그 눈이 성해지면! 그래서 그 때부터는 우리 안에서 이렇게 스트러글(struggle)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왜냐하면? 보편적 인간들의 상식(常識)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난 것이 우리를 뚫고 들어와 버리거든요.
그런데 안타까운 건, 아무리 진리(眞理)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그냥 뼛속 깊숙이, 그 실존(實存)의 한계에 사로잡혀있을 수밖에 없는, 그 절망적(絶望的)인, 그 옛 자아(自我)! 내가 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이 옛 자아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절망적인 그 옛 자아의 영향으로, 그러한 인간 실존의 그 충격적 자각이 달갑지가 않아요. 무지하게 고통스럽습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것을 처음 전해준 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살게 놔두지!’ 그런데 그게 진짜 사는 건데!
그래서 성도의 삶은 끊임없이 그 땅의 어두움에로의 그 퇴행의지(退行意志)! 이것으로 점철이 돼요. 자꾸 퇴행해서 땅의 어두움으로 들어가고 싶어 해요. 그리고 그게 맞아, 자꾸. 그냥 이렇게 나를 만족스럽게 해주고,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그렇게 해주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교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강조하면, 여러분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걸 자꾸 말해주고, 제시해주면요, 빚을 내서라도 여러분은 교회에 헌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한 것도 굉장히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니까. 이게 보람이고 자시고 이게 안 되니까. 내고 싶음 맘 별로 없죠? 그게 그동안 얼마나 착취(搾取)를 당했으면! 목사 주변의 핵심 멤버들은 전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면서요? 한국에. 다 빚내서, 그거. 다 착취당해서, 정작 여기 와서는 낼 게 없어! (하하하)
그러한 퇴행 의지! 우리는 그러한 의지를 자꾸 발동하는 나를, 발견하게 돼요. 심지어 그 빛에 의한 자기 실존의 그 까발려짐이, 심히 두렵고, 불쾌하고, 불편해요. 그래서 순간순간 그 인간의 의지와 종교의지와 그 율법의 세계로 퇴행해 들어가는 자기를 발견하면서, 수시로 종교의 탈을 쓰고, 다른 이를 정죄하기도 하고, 심판하고, 그 교리, 도그마의 틀 안에 그냥 갇혀서, 인간의 관습과 행위와 그 의식을 딱, 그 틀에 가두어버리고, 그것이 무한의 생명의 신비에 참여하는 거라고, 이게 진리라고 우기는, 다른 이가 아니라, 나를 발견하게 된다니까요. 진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열을 다섯으로, 그리고 넷으로, 둘로, 하나로, 이렇게 완성해서, 하나님이 넘겨줘도, 그게 두려워서, 이걸 그 어둠의 땅에서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아니 우리 모두가 겪은 과정이라고요, 그게. 마태복음 25정 24절 보세요.
(마태복음 25:24-25)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다섯을 주면, 다섯으로 남기면 돼요. 둘을 주면 둘로 남기면 됩니다.
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하나를 주면, 그걸 하나로 남기면 돼요. ‘그렇지 하나지!’ 이렇게. 그런데 하나를 줬어요. 하나를 주니까, ‘어, 이 하나를 준 분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네.’ 이게 진리잖아요? 그것이 은혜잖아요? 우리가 심지 않아도, 그분은 거두시는 분이고, 내가 심어서 거두는 걸 인과율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를 받았더니, 이게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분이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분이네.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살았던, 아담적 생존방법과는 너무 달라. 그러니까 내가 그 앞에서, 까발려지는 게 두려워요.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 전하는 것도, 이게 가당치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두려워! 혹시, 나는 그 전에도 심은 데서 반드시 하나님은 거두신다는 율법적 사고로 살았고, 지금도 거기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두려운 거예요. 그 용서와 그 사랑과 그 은혜와 그 긍휼에 나를 확 투신해서 던져버리면 되는데, 이게 인간의 상식과는 안 맞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하겠다고 하니까, 두려워서 그 하나를 감추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끝까지 그렇게 감추어둘 수많은 없어요. 과정으로 겪기는 하지만, 결국 그 하나를 꺼내어, 이것을 빛으로 비추어야 된단 말예요. 그런데 그 주인이 왔을 때까지 그걸 감추어두고 있으면, 그건 그 하나를 선물로 받은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끌어내라!’하는 거예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렇게 그것이 성한 눈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라면, 나쁜 눈을 가진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고 다음 절을 한번 보세요. 23절.
(마태복음 6:23)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눈이 나쁘면’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헬라어 ‘포네로스’예요. 요 ‘포네로스’ 요것이 바로 그 ‘페네스’에서 나온 단어죠. 율법적 결핍! 육신적 결핍! 배고픔, 가난, 이게 ‘푸토코스’와 반대되는 ‘페네스’의 의미이거든요. 그러니까 ‘눈이 나쁘면’이라는 말은, ‘말씀을 보는 안목이, 육신적인 것이면, 그 말씀을 그 눈으로 보고, 자기의 육신의 필요에 말씀을 당겨다 쓰면, 이게 ’나쁜 눈‘이라는 거요. 포네로스! 율법적 수고, 율법적 고통, 요게 ’포네로스‘거든요?
그러니까 나쁜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육신의 필요한 것들, 그리고 내 육신을 자랑하고, 내 육신의 보람과 가치를 챙길 수 있는 어떤 비결, 이런 것으로 내가 그 말씀을 보게 되면, 그게 눈이 나쁜 거예요. 나쁜 눈!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그러죠?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 몸이 어둡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이 말은 ‘어두움으로 완전한, 어두움으로 충만한 몸이 될 거야.’ 이런 말이에요. 네 눈이 나쁘면, 네 눈이 어두움으로 가득 찬 몸이 될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서 어떤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네가 빛이라고 갖고 있는 걸, 그게 진짜 어두움인지, 빛인지, 잘 생각해봐! 잘 확인해봐!’ 하시는 거예요. ‘네게 있는 그 빛이 어두움이면, 그 어두움이 how much, 얼마나 하겠냐? 너 지금 빛이라고 갖고 있어, 네 눈이 떠 있다고 착각하고 있잖아? 그래서 넌 뭘 봤고, 본 것을 네 빛으로 갖고 있다.
그걸 네 양식, 네 보물로 갖고 있는데, 너, 그게, 내가 볼 때 어두움이면 어떻게 할 거니?’ 이것이 오늘날 교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에요. 당신들이 빛이라고 갖고 있는 그게, 어두움이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러니까 늘, 그것이 빛인지, 아니면 어두움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라는 거예요. 정작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면서 그 표피적인 겉껍데기만을 그냥 ‘에이도’한 후에, ‘난 볼 수 있고,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아직 빛도 안 비췄는데, ‘나는 봅니다.
’ 이런 이들이 주님 당시에도 있었던 거예요. 요한복음 9장 39절 보세요.
(요한복음 9:39~41)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보세요. 내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보게 해 주면 돼요. 그런데 아직 빛도 안 비췄는데, 본다고 하는 놈들은 그걸 어떡하냐고? 아니 ‘내가 보게 해 줄게’ 그러는데, ‘보고 있는데요.’하는 걸, 어떻게? 보게 해 주냐고요? 이게 그 말이에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해 줄 건데, 보는 자들은 그냥 놔둘 거야. 본다는 거, 그거 계속 보라고. 그런데 그게 소경이야! 그런 말이에요.)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우리는 소경 아냐!’ 이런 말이잖아요? ‘우리는 본다니까!’ 이런 말이잖아요? 누가? 바리새인들이요. 배설물만 내놓는 자들! 양식으로 배설물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 그걸 나눠주는 자들이, ‘우리는 소경 아냐! 우리는 본다니까!’ 주님이 그 앞에서 그랬죠? ‘난 아직 한 번도 안 비췄는데! 뭘 본다는 얘기지? 그러면 할 수 없어. 계속 그거 봐!’ 이게 그런 말이에요.)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들이 진짜 소경들인 거예요. 그들이 눈을 나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인 겁니다.
눈이 있기는 있는데, 진리의 눈이 아니라, 율법의 눈이에요. 주님은 그 눈을 보는 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반드시 구렁에 빠지게 되는 거죠. 다른 이들도 같이 끌고 가서! 주님이 그걸 여러 번 말씀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보느냐, 율법으로 보느냐에 의해서, 이 세상을 눈에 보이는 표피로 보느냐, 그 내용으로 보느냐가 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우리의 그 안목(眼目)! 바라보는 그 안목! 그것이 우리의 세계관이 되고, 그 세계관에 의해 우리는 지배(支配)되는 거죠. 그 세계관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을 결정하고, 행동양식을 정하여, 그리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것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눈의 이야기 끝에, 두 주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두 주인!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로, 나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땅의 율법으로 나를 지배하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결정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나의 주인이 되면, 나는 그 주인의 섬김을 받는 자로 살게 돼요. 이게 하나님나라예요. 하나님나라의 주인은 그래요.
그런데 그 말씀이 율법으로 내게 들이닥치면, 나는 그 주인의 종이 되어서, 그 주인을 섬기는 이가 돼요. 왜? 그 모든 말씀이 그 주인이 나에게 하는 그 명령으로 들리거든요. 그러한 율법의 종은 열심히 자신을 불태워서, 자신의 유익을 스스로 챙겨 갖는 그런 인과율의 세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제가 주일날에도 말씀드렸죠? 유다나 다른 제자나 하나도 다른 게 없어요. 전부 예수 죽인 자 맞아요. 우린 전부 가인이라니까요. 그런데 유다만 그 성령이 오시기 전에, ‘내가 팔아버린, 죽여 버린 저 하나님께, 내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은, 내가 나를 죽여, 내가 나를 헌신하여 그 빚을 갚는 길 밖에 없다.
’하고 자기를 죽이면, 그게 마귀가 되는 거요.
오히려 뻔뻔스럽게, ‘아, 내가 주님 사랑하는 거 아시잖아요?’ 이렇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뻔뻔스럽게, 조금 아까, 저주하여 부인(否認)했으면서…. 아니 맞아요. 마땅히 성부, 성자, 성령의 때에, 세 번 다 그 예수를 부인해야, 살아요. 그런데 그것이 뭔지를 알았을 때에는, ‘그렇죠. 마땅히 제가 그걸 부인해야죠. 그래야 그 예수가, 그 하늘의 진리로 내 안에 들어오죠.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게 들어오죠. 내가 부인해버리지 않으면, 그 분이 안 죽는데, 어떻게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까?’ 그러면 사는 거예요.
그런데 ‘아, 내가 정말 남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무책임하게, 나의 잘못을 저 이에게 전가시키겠는가? 내가 나를 죽여,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하여, 그 빚을 갚아보겠다.
’ 그걸 율법이라 그래요. 그 유다는 죽습니다.
그러나 ‘그렇죠. 제가 세 번 부인(否認)해야, 그 하나님이, 내 실존이 어떤 것인지가 밝히 폭로되고, 그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지가 드러나게 되죠. 하나님 그게 맞습니다.
’라고 하면, 그가 사는 유다가 되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이지 뭐예요.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똑같은 거지 뭐예요? 유대인, 이스라엘, 뭐! 다 유다라니까요. 그런데 알고 죽은 유다와 모르고 죽은 유다가 다른 것뿐이에요.
자, 그렇게 율법의 종은 자기를 열심히 불태워서, 자기의 유익(有益)을 챙겨 갖는 인과율의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어요. 마태복음 6장 24절 보세요.
(마태복음 6: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앞부분을 직역을 하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다’란 말이에요. Nobody. 모든 인간은, 한 주인만 섬겨요. 그렇게 갈라져요. 하늘이라는 주인을 섬기느냐? 아니, 그분의 섬김을 받아, 그 섬김 앞에 나를 투신(投身)하느냐? 이걸 섬김이라고 하면 오케이. 그런 존재와 그 하나님을 율법으로 받아서, 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그런 세상 임금으로 섬기는 그런 자! 이 두 종류 밖에 없다는 거죠. 이걸 섞어서 섬기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의 그 섬김을 받든지, 율법 안에서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든지, 둘 중 하나인 거예요. 주님은 분명히 밝히십니다.
인간에게는, 하늘의 주인과, 땅의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능력이 도무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간은 땅의 주인을 섬기도록 태어납니다.
지배(支配)와 피지배(被支配)! 계급(階級)과 굴종(屈從)! 그러한 패러다임 안에서, 자기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큰 존재라 여겨지는 존재 앞에서, 그냥 한껏 쫄아주는 걸 신앙이라 그래요. 안 그래요? 그분은 나를 구원할 능력도 있고, 지옥에 보낼 능력도 있어. 힘도 있어요. 나보다 힘도 훨씬 세. 천지도 창조했대. 그러니까 그 앞에서 한껏 쫄아주면, 이걸 경배(敬拜)라 그러고, 예배(禮拜)라 그러고, 섬김이라 그래요. 이게 세상나라예요.
하나님나라는 그분이 자신을 투신(投身)하여, 제물(祭物)로 투신하여,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를 먼저 섬겨주는 그 나라! 그게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그리하여 그 섬김 앞에 납작 엎드려 찬송(讚頌)하는,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단 말예요. 그렇게 한껏 쫄아주고는 힘 센 신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재량껏 얻어내는 거예요. 그게 보람이어도 좋고, 물질이어도 좋고, 내 천국이어도 좋고, 구원이어도 좋은 거죠. 얻기는 얻었는데, 계속 불편해, 그 관계가! 그게 사랑입니까? 그들은 힘만 센, 세상 임금으로 섬기는 거예요.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세상 임금이라 그래요.
그러한 자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어져요. 그들은 지배와 굴종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그 힘만 센 왕이 아닌,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와 사랑으로 섬기는 어떤 분이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들은 그 왕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영생에 이르게 되는 반면에, 전자(前者)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서의 그 하나님을 지옥의 주인으로 맞이하는 거예요. 그들의 하나님이 사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늘을, 그 진리를 주인으로 가진 사람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무한(無限)의 일자(一者)가 유한(有限) 존재(存在)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을 계시(啓示)해 주시는, 이게 하나님의 죽음이라 그랬죠? 신의 죽음! 당신을 계시해 주는 그러한 섬김의 모습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오히려 그 섬김 앞에 자신을, 진짜 그 때에는 그 앞에 완전히 날 투신(投身)할 수 있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제 믿으니까. 그 때는 그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어도 괜찮아. 어차피 선(善)하게 다루어주실 거니까. 그 때는 완전히 드린다니까요.
그렇게 그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자는, 완전한 순종(順從)으로 그분을 섬기게 되는 거예요. 이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섬기시는 그분의 그 무한한 사랑으로 해석해내요. 그러한 하늘의 종들이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그건 그 생명을 누리는 거예요. 찬송하는 거예요. 옹달샘을 칭찬해주기 위해서는, 시원하게 마시고, ‘맛있다!’하면, 그게 옹달샘에게 최대의 찬사(讚辭) 아닙니까? 그게 하늘의 주인을 섬기는 자의, 섬김의 극치(極致)인 거예요, 그게. 그걸 누리면서 ‘좋다!!!’하는 거. ‘이게 자유구나!’ 하는 거. 그냥 납작 엎드려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진심은, ‘ 그래, 어떡하든지 속아서, 내가 원하는 거 꼭 줘!’ 이거잖아요? 이걸 섬김이라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물질세계의 그 인간 관념 속의 ‘그 주인과 그 종, 그 지배와 굴종’의 관계로 이해를 하고, 그 분의 말씀을 ‘지배와 피지배, 군림과 굴종’의 관계 속에 던져지는, 어떤 명령으로 이해를 해버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러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권력과 지배의 그 욕망 속 세상 임금으로 격하시키는 꼴이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라 그래요, 성경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모독하느냐? 내 이름을 더럽히느냐?’ 그런다니까요. 그 말씀을, 하나님이 목숨 걸고 섬기던 자들에게 했다니까요. ‘네가 내 이름을 왜 모독시키느냐?’고.
그렇게 오해된 하나님 있죠? 그걸 ‘맘모나스’라 그래요. 그걸 한글 성경이 재물(財物)이라고 번역한 거예요. 그건 신(神)의 이름입니다.
그건 ‘허욕(虛慾)’이라는 가짜 신의 이름이에요. ‘맘모나스!’ 은혜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이, 그들의 생 본능(本能)으로 갖고 사는 거, 있죠? 그게 바로 ‘허욕’이에요. 그건 인간의 원죄적 인간 실존의 한계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선함을 추구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그렇게 생각하는 뿌리 깊은 원죄의 욕망! 그 욕망으로부터 발출(拔出)된 그 종과 주인의 관계는, 언제나 정죄(定罪)와 심판(審判)! 꾸짖음과 책망! 자학(自虐)과 가책(呵責)! 억압(抑壓)과 지배(支配)! 이런 선동(煽動)만 난무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면서도, 뭔가 불안하고, 두렵고, 때때로 뭔가 열심히 행했다는 생각이 들면, 교만하고, 자만하고. 세상과 똑같을 뿐이에요. 다른 거 없는 거죠.
그러한 원죄의 포악이 지배하는 고통의 영역 속에, 생명의 주인이신 말씀이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확 비추어졌어요. 그 비침에 의해 우리의 눈이 떠지고, 그 어둠이 뭔지가 우리에게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나니까 정죄도, 심판도, 어두움에 대한 나무람도, 다 나와는 무관한 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 내용으로 보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맘몬은 다른 게 아녜요. 우리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그냥 물질적 세상의 세계관으로 조작해버리면, 그 성경이 ‘맘몬’이에요. 그게 맘몬 신이고, 그것이 물질, 재물 신이에요. 인간들이 인간 가치의 상징적, 상대적 개념으로 만들어낸 게, 돈이며 물질이잖아요? 그래서 돈만 많으면, 그냥 아무리 개차반 같은 인간도, 굉장히 뭔가 있어 보이죠, 이렇게?
따라서 맘몬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물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보편의 원죄적 욕망을 축약해 놓으면 그게 ‘돈’이에요. 그게 재물이고,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의 실체이고, 우리가 가치라고 생각하는 ‘돈’ 같은 거.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가치를 위해, 자기를 도와줄 어떤 존재, 잘 어르고 달래기만 하면! 그건 인간의 욕망이 창조해낸 가짜 신인 거예요. 그 가짜 신은 지배와 굴종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섬김을 받는 신이고, 명령을 내리는 신이고, 인간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선과 악을 바탕으로, 심판과 상급을 내리는 세상 신이에요. 그게 ‘맘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이걸 버려야 되고, 이걸 섬기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성경 안에만 계시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그 말씀을 진리로, 하나님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나에게 율법적 수고를,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그런 하나님으로 안 볼 수 있는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 못 만난다면, 내가 만난 성경 안에서의 그 하나님은, 나를 끊임없이 못 살게 굴고, 괴롭히고, 훈육(訓育)하는 그런 사감(舍監) 선생 정도로 보이는 거예요. 그게 세상 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아래의 물, 그 깊음, 어두움 속에서, 그 하늘의 진리를, 빛으로 깨달아야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냥 그 아래의 패러다임 속에 매몰되어서, 그냥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반드시 보는 것 안의 내용을 여러분은 들을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의 눈이 두 개인 거예요. 둘로 하나님은 나눠주세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선악, 좌우, 상하, 위아래, 다 나누어주세요. 그래놓고는 우리에게 하나로 보라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의 눈이 두 개인데, 하나가 보이죠? 하나로 보이죠? 두 개로 주는데, 너희는 그걸 하나로 보아 가지라는 거예요.
내가 둘로 나누어 들려줄 건데, 너희는 그걸 반드시 하나로 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너희들에게는 그것이, 두 개의 호흡, 두 개의 숨으로 들어갈 거래요. 하나는 죽이는 호흡, 사망의 향기, 하나는 생명의 향기, 호흡으로 들어갈 건데, 두 콧구멍으로 받아서 하나로 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나 반드시 하나로 가지고, 하나로 말하라는 거예요. 그걸 ‘빛을 비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눈이 올바르지 않으면, 이게 율법의 눈이면, 여기서 나가는 말이 엉뚱한 말이 나갈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칠면석척이 부정(不淨)한 거라고 하는 게, 카멜레온, 칠면석척이, 칠면조도 마찬가지고. 색깔이 변(變)하죠? 시시각각으로. 한 색깔을 갖지 못해. 이게 일편단심이 아녜요, 얘는. 그리고 얘는 눈이 각기 다른 곳을 봅니다.
카멜레온 보셨죠? 어떤 인간은 그걸 집에서 키우는 인간도 있더라고요. 각기 딴 걸 봐요. 더 중요한 건, 그의 혀는 살해(殺害)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살해한 걸 자기 양식으로 먹어요. 그래서 부정한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선악구조(善惡構造) 속에서, 그 패러다임으로 봐 버리면, 여러분은 말씀도 그렇게 볼 것이고, 하나님도 그 세상의 하나님으로, 율법의 하나님으로 볼 겁니다.
그리고 엉뚱한 것으로, 여러분의 배설물(排泄物) 같은 것으로, 여러분 안에 양식으로 가득 채울 거고, 그걸 혀로 내어,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춘다고 비추어줄 텐데, 그 혀에 맞아 그 상대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이 어떤 눈인지 확인 하는 건, 아주 사활(死活)을 걸만큼 중요(重要)한 거예요. 이 중요한 걸 하는데, 오늘 따라 이 혀가 왜 이렇게 마비(痲痹)된 것 같이 이렇게 말이 안 나와…. 항상 중요할 땐 그래요.
그러니까 잘 새겨들으세요. 어떤 눈을 갖고 계세요, 여러분은? 성한 눈입니까? 나쁜 눈입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들은 여러분의 그 혀에 의해, 살아나기도 하고, 살해(殺害)당하기도 하고, 그러고 있는 중인 거예요. 확인(確認)하세요. 말씀을 근거로 늘 비추어보셔야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눈을 주러 이 땅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은 눈을 떴다고 착각(錯覺)하고, 그 감은 눈으로 보는 것을, 그 환상(幻像) 같은 것을, 실체(實體)로 착각하며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눈이 성한 눈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참 빛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참 양식(糧食)이기를 원하고,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비추어지고 나누어질 때, 하늘의 참 양식으로, 참 빛으로, 비추어지기를, 나누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9.山上の垂訓:目が清くなければ全身が明るくない (マタイ6:22-24)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22-24)
22 目は体の灯である。だから、もしあなたの目が清ければ、あなたの全身は明るくなる。
23 しかし、もし目が悪ければ、あなたの全身は暗くなる。もしあなたの中にある光が暗ければ、その暗さはどれほど大きいか。
24 人は、二つ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一方を愛して他方を憎む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か、いずれかである。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を同時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
24 人は、ふたり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か、いずれにせよ、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を同時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
私がこの説教をしに来る前に注射を打ったんですが、あの執事が白内障になったって聞いて、すごく心配してたんです…。
ここでまた急に目の話が出てきて…、ははは。白内障にならないようにって話ですか、これ?目が悪ければ全身が暗くなる、ってこと?違うでしょうね?
さて、主はマタイの福音書5章で、あの十(10)という律法を、四(4)で説明してくださいますよね?四つで説明された後、それを『愛、アガペー』で結論づけられました。
その「アガペー」の愛とは、十という神の言葉を、 「一つ」として、真理として悟り、まずその中に込められた、神の慈悲と憐れみを知り、その「一つ」を隣人たちに伝えて、その一つであるその命!その一つは神ですから。その命を心に抱かせる、そんな神への愛と、隣人愛を語っているのです。その神への愛は、隣人愛によって今や成就 (成就)となり、完成となるのです。その神という方を私たちはよく知らないでしょう、そうですね?だからよく知らない方をどうして愛したりできるでしょうか?漠然とした私たちの希望事象なのです。その神に対する正しい理解(理解)を隣人に流す時、「お前は本当に私を愛しているんだな!」 と受け止めてくださるのです。
さて、その愛を伝える際に注意すべきことを、6章の言葉が列挙していると述べました。
だから6章の最初の言葉が「プロセコ(注意せよ)」で始まるのだと。ヘブライ語やギリシャ語では常に最初の言葉が最も重要だと。何を注意せよと言われたのか?6章2節を復習しましょう。「救済する時は注意せよ!」と。第一に、そうですね?「エレモスネ(救済)」を行う時、「左手が知らないように、右手で救済せよ!」つまり偽りの真理、律法ではなく、真理をもって救済せよ!そういう意味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よね?「右手がしていることを左手に知られないようにせよ!」そういう意味では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そして隠れた内的ものをもって救済せよと仰いました。
隠された内容を救済せよ!そういうことですよね?救済という言葉、「エレモスネ」はあの「エレオス」から来た言葉ですよね?そこに「スネ」が加わると、あの「エレオス」が私の心に入り、私の心となる時、「スネ」と言うのだと仰いましたよね?「 ディカイオス、義」を、その義が私の内に入ると、「ディカイオスネ」になるように。その「エレモスネ」は、その「エレオス」が私の内に入り、私の心となった時、それを指すのです。
ところで 「エレオス」とは何か?それは「神の積極的な憐れみや慈悲(慈悲)!」辞書を見てもそう書かれています。
「エレオス」は神の積極的な憐れみと慈悲!それを正しく悟り、心で持つと、「エレモスネ」になるのです。「ああ、その神の憐れみ!神の慈悲!そうだ!それだ!」と私が自分の心に持つのです。そしてそれを伝えるとき、それを救済と言うのです。他の何ものでもない。そうして神の言葉を通して、神の積極的な憐れみと慈しみを正しく悟り受けた者が、それを正直に正しく、まっすぐに伝える時、それがまさに真の救済なのです。真の飢えを解決するのですから、そうでしょう?
私たちが日曜日に見たように、夢の中でいくら食べ物を与えても、目が覚めれば、その飢えは解決されないのです。
ここでいくら食べ物をたくさん作ってあげても、全て無駄だというのです。ですから教会は、ろうそくを持って出て行って、非正規労働者を正規職に移せ!なんてことを それは個人的にやってください。教会がそんなことに先頭に立つべきではありません。正規職に戻したところで、夢の中でご飯を数口多く食べさせるようなものです。教会はそんなことをするのではなく、真の救済を行うのです。真の「エレオス(恵み)」を伝え、それによって満腹になるように、「プトコス(飢えた者)」たち、霊的に貧しい者、 欠乏があることを知る者たちが、真にその糧で腹を満たすこと。それが救済(救濟)なのですか?
二つ目は祈り(祈禱)の問題でした。
「救済する時は気をつけろ!プロセコ」と言ったら、「プロシュコマイ、祈る時は気をつけろ!」と言うんです。祈りとは、天の御心が地で成し遂げられるという、その意味をよく知る者が、その天の御心に従い、その父を心の中に抱いて(だから祈りは天の中にその父から始まるのです?)、その父の言葉を糧として、命の存在 (存在)となって、それを今や私の内なる糧として持つなら、それは永遠の命だから、「その人には命がある!」とこう言われるのです。
命の存在となって、その父の御心が『正しいです!これが真の糧ですね。」と告白し、また「その父の聖なる御心を、隣人たちに注ぎ出す行為!彼らにもこのような理解、このような悟り、このような愛の理解が悟られますように。」と、また「その愛とはこういうものです。」と注ぎ出すとき、その全体を「祈り」と呼ぶのです。
そしてそこで今、赦し(容恕)が起こるのです。
したがって、その祈りというものは、人々が知らない隠れたものとして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であり、神殿の中の奥の部屋に入って、奥の部屋は神殿で使われる様々な材料や器物を製造する場所ですから。その内容を知ることができる場所です。外見だけ見ても何なのかよくわからないから。奥の部屋に入って、その聖殿が内包する内容、そしてその中で行われる多くの行為、それがどんな意味を持つのかをよく学び、それをもって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述べました。
だから「奥の部屋に入り、戸を閉めよ!」と言ったのです。
その「重言復言(むだに言葉を重ねる)」をしてはならない。
「バトロゲオ」不正確な言葉でたどたどしく話すな!こういうことですよね?
「ロゴス・バトロゲオ」。重言復言、一度言ったことをまた言い、また言い、そういうことをするなという意味ではないと説明しました。
重言復言してはならず。そしてそのような正しい祈りは人の罪を赦す力を持っていると、今強調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主の祈りの中にも「我らが我らに罪を犯す者を赦したように」とこう語られることもあれば、「あなたがたは人の過ちを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たちも赦されない!」という表現が聖書に多く出てくるでしょう?この言葉は、私たちが赦さなければ、恨みから神が私たちを赦さないという意味ではなく、私たちが他者に赦しの意味を正しく伝えられないなら、私自身がその赦しの意味を正しく理解していないということだから、私は神に赦されたことのない人間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意味なのです。
そういう意味です。
三つ目は断食の問題でした。
断食というのは、必ず食べるべきものを食べることによって、決して食べてはならない律法(律法)の食物(糧)を食べないようにするという、真理を理解する問題を扱うものですよね。つまり、内容の問題なんです。
主は正しい断食をするために、「頭に油を塗り、顔を洗い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
これは、実際に頭を洗って油を塗り、顔をきれいに洗え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
頭であるキリストに油を塗ると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
それは葬りを行うことです。すなわち、その肉的なイエスを葬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は、顔を洗うとは何でしょうか。
「プロソポン(πρόσωπον)」「パニム(פנים)」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プロソポン」は、見えない神のものが現れたものを指して言われる言葉です。だから多くの場合「顔」と翻訳されますが、悪くない翻訳ですね。
そもそも「顔」という言葉自体も、韓国語の「얼꼴(オルコル)」という言葉から考えると理解しやすいです。
「얼(オル)」は霊、
「꼴(コル)」は形・姿という意味です。
つまり霊の形、霊の現れという意味ですね。
このようにして、まずイエスを葬り、そして顔を洗う、すなわち御言葉の表面をよく拭い取って、その中の内容を見るようになると、
「ああ、何が食べるべきもので、何が食べてはならないものなのか」
が分かるようになる、と言いましたね。
だからこそ、その隣人に正しい食物を「エレモシュネ(ἐλεημοσύνη)、すなわち施し(救済)」として分け与える時、正しい食物を渡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本当に正しい断食ができる人だけが、それを行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そして四つ目は天の宝と地の宝の問題でした。
聖徒は神の言葉を真理として正しく悟り、まず天となり、その中にその言葉を真理として納めなければ、天に宝を積む者にはなれないと語りました。
しかしそれができず、依然として地的な次元で言葉を理解し、地の行いと、 地としてのアダムたちの価値自慢に、その御言葉を使ってしまうなら、それがまさに地に宝を積むことだと述べました。
そのように神の御言葉を天の宝として、その中に収めている人は、その心が天の宝であり、その御言葉を地のものとしてその中に収めている人は、その心が地の排泄物であると言いました。
自分はそれを宝と考えるが、神はそれを排泄物と見なす、と。
律法の象徴であるあのパリサイ人の「パリサイ、パリサイオス」は、ヘブライ語の「パラシュ」をそのまま音訳したものだと言いましたよね?その「パラシュ」は「分ける、分離する」という意味ですが、母音だけを「パリス」に変えると、分泌物!排泄物!糞!そんな言葉だと言っていました。
律法は神の目には排泄物なのです。だからパウロも、『私がパリサイ人として、ベニヤミン族の一人として、律法を行ったことは、排泄物だった。』と言ったのです。自分が謙遜 (謙遜) 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それが本当の排泄物だということを自らが知ったのです。
ですから、神の言葉を真理として伝えれば、それが正しい救済となり、それがまさに祈りであり、それがまさに糧となり、 食べるべき正しい糧となり、宝物となるのです。しかし、それを表層的な律法として伝えてしまうと、間違った糧、糞尿を糧として配るという恐ろしいこと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汚く醜い行いとなるのです。
だからほとんどの教会では排泄物を配っているのです。それを与えながら「さあ食べなさい」と。しかも「よく食べなさい、美味しいよ」と。
ではどうすれば神の言葉を天の宝物、天の糧として持てるのか、見てみましょうか?
今日の本文を見ると、主が「目は清くなければならない」」と語っています。
「目が清らかでなければ正しく見えず、正しく見たものを心に留めることもできないのだ。」と語っているのです。本文22節を見ると、「目は体の灯である。目が清らかであれば、全身が明るくなる」とあります。
こうした言葉を眼科や眼鏡店で自分たちの広告コピーとして使うのをよく目にしますが、「目は体の灯りである。目が清ければ、全身が明るくなる」と。目さえ良ければ、全身が明るくなるのでしょうか?
ここで
「目」と訳された「オプタモス」は、「オプタノマイ」という動詞の名詞形ですよね?
「オプタノマイ」は「見る」という動詞ですから。
以前、私は「オプタノマイ」は必ず「エイドー」と「ブレポ」の過程を経て「ホラオ」として完成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説明しました。
「ホラオ」は「聴いて見る」ことです。
さて、例を挙げましょう。これが「オプタノマイ」で、眼鏡店の前に「オプティカル」と書いてありますよね?あれを見るのです。次に、「エイドス」とは、「そこにあるから見るもの」です。見よと示されているものをただ認識してしまうこと。だから、ただ外見だけ見てしまうと、それが「エイドスロン」と呼ばれ、これは偶像(うそぐし)という意味です。偶像!ただ見てしまうと、 外見だけ見てしまうと偶像です。だからイエスも単なる外見だけ見てしまうと、彼が偶像になってしまうんですよ?
だから主が『もし聖所に滅びの忌むべきものが立っているのを見たら、それが終わりの時だと悟れ!』とおっしゃるんです。その滅びの忌むべきものは、他の何ものでもなく、アンティオコス・エピファネスといったものではなく、十字架とイエスを真理として見ず、仕えるイエスとして見てしまうこと、それが滅びの忌むべきものなのです。皆さんがそうやってイエスを信じるなら、そうやって滅びるのです。それを偶像と言うのです、聖書は。
そして「ブラットボ」とは何と言いましたか?この「ブラットボ」とは、このように目に見えるものを、それを真の内容として見せるために、「触らせて」みせ、「食べさせて」みせ、「裂かせて」みせ、そうして様々な試練を与えるものです。それが「ブラットボ」です。食べてみる、触ってみる、着てみる、そういう意味で使われるんです。そうして、その内容を正しく知ってしまうと、それが今や「ホラオ」になるんです。
だから見てください。神殿がそこにあります。
神殿をただこうやって見てしまう。そして「ああ、神殿はあれだ!だから行って、一生懸命そこに行って、律法を行い、犠牲を捧げ、それでいいだろう!」となると、その神殿は偶像になるじゃないですか?そのために神が激怒されたんじゃないですか?「誰が神殿をそんな風に与えたのか?」しかしその神殿を見て、「ああ、それがまさに神だ!その神様の愛、憐れみ、慈しみ、その力を描いたものなんだ!私たちに学ばせるために、そうして私たちに与えられたんだ!」見たけど、その中にある内容に耳を傾けなさい。これが聞くことによって見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それを「ホラオ」と言うのです。
さて、このように聖徒は、必ず見えるものの中において、神の言葉を聞くことができ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聖書も目に見えるままにむやみに読んでしまえば、それが皆さんにとって呪いの書となることもあります。だから、速読だの、聖書通読だの!早く読むことが何の価値があるというのか…。意味もわからずに、数日で一度読み、何、年に何十回も読むとか。全部無駄です、それを丸暗記しても無駄です。あれは「南無阿弥陀仏 観世音菩薩」と同じですよ。何が違うというのですか?内容も知らずにブツブツ唱えることが。必ず私たちは目に見えるものの中に含まれている内容を、読みながら聞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て見えるものの中に含まれている内容を、見て聞くことができた時、それを「真理」と呼ぶのです。
22節を原文に忠実に直訳するとこうなります。
「体の灯は目である。目が清ければ、その体は、他のものを照らす完全な体である!」という意味です。
「他のものを照らす完全な体である!」だから灯は目だと言うのです。灯は目である、こう言っているのです。
これをよく覚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灯火という言葉は創世記1章から登場し、繰り返し現れるのです。ヨハネの黙示録まで登場します。灯火が!
まず聖書がその「灯、リュクノス」と「目、オプタルモス」というものをどのように説明しているのかから見ていかなければ、「目が灯」という言葉と「目が清くなければ、あなたがたは照らす完全な体になるのだ!」というその意味が何なのか分かるでしょう?黙示録5章6節を見てください。
(ヨハネの黙示録 5:6)
6 また見ると、玉座と四つの生き物と長老たちの間に、小羊が立っているのが見えた。それは、とっくに屠られたようであった
(とっくに屠られたのはイエスだけです)。七つの角と七つの目があり、この目は、全地に遣わされた神の七つの霊であった。
ご覧の通り、目というものは、早くに殺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と関係があるのです。
ところが、その目を指して「霊」と言うのです。
霊!『その目は霊だ!七つの目、それは七つの霊だ!』と言うのです。
ところが主はその霊を御自身の言葉だと言われました。
ヨハネの福音書6章63節をもう一度見てみましょう。
(ヨハネの福音書 6:63)
63 命を与えるのは霊であって、肉は無益である(命を与えるのはみ言葉だ!律法は無益なものだ!というわけです)。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語った言葉(ロゴス)は霊であり、命である。
「決して律法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命を得られるわけではない。」と語っているのです。
では、その霊とは何と言ったでしょうか?「目」だと言いました。
つまり、み言葉を真理という一つとして見ず、熱心に様々な細則として行ってしまうなら、それは命とは何の関係もないものだという話ですよね?なぜなら、肉は無益だと言ったからです。霊が命を与えると言ったからです。しかしその霊こそが眼であり、その眼こそが御言葉だとここで語っているのです。しかし正しく見なければ生きられない。正しく見られなければ死ぬのです。
御言葉は確かにこの世の言葉と音で記録されているのが正しいでしょう?天の言葉で、天の言語で記録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この世の言葉で、この世の音で記録されています。しかし、しかしそれを真理として悟って知った時、その闇の言葉、 下のものは全て『闇』だと言うのです。創世記1章でそう言っていますよね?その下には混沌と虚無と闇しかないと言っています。そして闇は深淵の名、『パニム』を闇と呼ぼうと、神がそこで私たちと合意されたのです。さあこの『深淵、タフム』の『パニム』を『ホセック、闇』と呼ぼう!そうだったんです。創世記1章2節で。
闇とは何かと言えば、下の海、この下のものたち、そういうものの名前を単に闇と呼ぶのです。ところがその闇を皆さんがその内容が何か知ってしまうと、その中にあるものを『光』と言うんです。闇も光も同じものだからです。それを知った後で。そうして初めてそれを赦しと言うのです。私とは無関係になるから。過去、現在、未来の全ての闇が私とは無関係になるから。なぜ?私はその闇を光として見ているからです。どういうことかお分かりですか?その時それを赦しと言うのです。単にいくつかの罪をなかったことにするのではなく、赦しは。なぜ?律法は全てを守りながら、一つ破れば全て破ったと言うのに、いくつか許したところで何の意味があるというのですか?そもそもそれと無関係な存在にしてこそ、真に赦された者となるのです。
さあ、そうして私たちは、下にある言葉と音で記録されているものを、その闇の言葉の光の言葉として見られるよ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聞けるよ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ですから、神殿というものが、イエスというものが、ある人々には滅びの忌むべきものとなるが、ある人々にはその光!輝かしい光となるのです。考えてみてください。光が本当に降りてきたのに、誰も気づかなかったじゃないですか?でも、あの方は光ではなかったのですか?光だったのです。ところが後になって、それを光として見る人々が現れたというのです。
だからといって別の存在ではなく、その方は真理であり光として来られたのです。
さて、聖書に登場するその「光」という言葉は全て「言葉」に関連しています。ヘブライ語で光は「オル」ですよね?ギリシャ語で光は「フォス」です。
しかし「オル」というものは、「マオル」というある道具で光を放ちます。その光というものが何かは分かりません。発光体が生まれる前に、創世記1章3節で光、つまり「オル」が生まれました。神がその光を見て「あれよ!」と言われたんです。「光あれ!」と言われたのに、それが何かはわからない。字を分解しても、「神が始められた。」で終わっている。
それが光の意味だからです。何を始められたのか?しかし四日目に至ると、その光を放つ「マオール」というものが現れます。
「オル」に「マイム」を一つ付けたんです。「メム」という文字一つを。
ところがヘブライ語では、その「メム」が前にぴったりくっつくと、その動詞が行われる場所になるんです。
つまり光が照らされるどこか!こう解釈すればいいんです。
だから1章3節のあの光は、それを通して照らされるんですが、それが 「マオル」です。その意味は?「神が真理を語り始める。」という意味です。「マオル」が。つまり1章3節のその光が何なのか、四日目に至るまで誰も知り得ません。それが何なのか、どんな光なのか。私たちが目にするこの光とは違うでしょう?何かわからないが、四日目に至ると、「マオール」というものが、大きな光、小さな光と韓国語改訳聖書が訳しているが、それが「マオール」です。「マオール・ハガドル」「マオール・ハガタン」とあります。
その『マオール』が、この1章3節の光を照らす道具で、その照らす道具が『マオール』と書かれているのですが、それが後で律法書に行くと、全部神殿の中のあの燭台ですよね?七つの燭台!その言葉で書かれているんですよ、 それが。つまりそれには何か関連があるはずですよね、そうでしょう?しかしその言葉自体の意味は、「神が真理をもって語り始められる。」
これを「照らす」と言うのです。「光だ!」と語るのです。これが「光明だ!」と語るのです、聖書は。
しかしギリシャ語の「フォス」という言葉は、「フェミ」という言葉から来ていて、「フテングマイ」という言葉と脈を同じくしています。ところが「フェミ」という言葉自体が、「話す、 まっすぐに語る」という意味です。「プテングマイ」という語自体は、「余計なものを省き、確かに、まっすぐに語ること」を「プテングマイ」と言うのです。さあ、ご覧ください。「マオル」も「神が真理をもって語り始め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り、ギリシャ語 「フォス」という言葉も「余計なものがなく、点も欠点もなく、偽りなく真っ直ぐに語る」という意味を持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聖書で言う「光」とは、その真理の言葉と関連のある言葉なのです。
ですから光を照らすためには、私が灯台となって光を照らすためには、必ず正しい目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よ?そうしてこそ 「その光を照らす完全な体となる!」が22節ですから。「あなたの目が健全でなければ、絶対にあなたは完全な光を照らす体にはなれない!」というのがその22節の意味です。原文から見ると。
ですから光というものは、闇に属する下にあるものを、上にあるものとして見て、はっきりとした声で語ることができる時、それを「光を照らす」と語るのです。そしてそれを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私の中に入ってこられた神のその恵みの言葉!その言葉を恵みとして見させるその力がありますよね?それを「目」と言うのです。だから神様は私たちの目を新しい目へと変えようと、こうして開かせてくださるために来られたというのです。それが目というものです。したがって目が正しくなければ光が照らされ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だから創世記1章に出てくるあの「光、光明」という言葉を、聖所の中のあの 「灯台!」「マオル、燭台」という言葉で表すのですが、その灯台はいくつですか?七つですよね?だから七つの灯台と言うのです。それを七つの霊とも言うそうです、少し前に見たところでは、そうですね?では、その灯台こそが神の、創世記1章の「七つの言葉、サバ」のその言葉!その七つの契約!その七つの糧!それが「思う存分食べさせる。」という「サバ」という言葉自体が「契約を結ぶ、完全である。」という意味だと言いましたよね?
ですから七つの灯台というのは、まさにその神の契約、それを語っ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それを通して七つの契約が何であるかを確かに知れば、その神殿が何であるかを明らかに見ることができます。ですから皆さんが創世記の七つの契約について確かに知らなければ、聖書全体をでたらめに見るしかありません。
だから私が創世記の1章の内容を、頻繁に例を挙げて繰り返し説明しているのです。その七つ!それが全てです、実は。その七つを創世記2章から再び説明しているのです。それが創世記10章まで非常に具体的に説明されています。
そして11章からは再びバベルの塔の出来事から始めて、それを説明しているのです。私たちの信仰の祖先たちを動員して。
ところが、その祖先たちに語った言葉が何か、また分からない。だから出エジプト記から再び『今、律法で説明する』と言って律法で説明するのです。しかし、それもまた理解できない。そこでまた預言者たちが来て、預言書を通して、創世記のあの言葉が律法!モーセ五書のこの言葉ではないか?と、それをまとめて説明するものを預言書と言うのです。それも理解できなかった。光が来た!だからマタイの福音書が開かれて、またその話をし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当然、その七つの契約が何であるかを知れば、残りは自然と解けるのです。
しかし皮肉なことに、 この七つの契約をキリスト教2000年の歴史が捨てたんです。それどころか、それは後世の人々が付け加えた感想文だとか、全体を要約した要約版だとか、そんな話をしているんですよ。それを知らなければ、 聖書全体が見えなくなる。それを見る目が開かなくなるというのです。
だから聖所の中に七つの燭台があるのです。その火が消えれば、真っ暗闇になるのです。その火がぱっと灯っていなければ、『そうだ、これが餅の台で、これが香壇で、その中に至聖所があり、この外には祭壇がある。これら全てを照らすのが七つの燭台だ』というのです。その言葉!だからそれを絶対に消してはならないと言うのです。そういう意味で消すなというのですが…。そういうことが全て聖書に出てくるのです。
それが曲解されて、私たちの祖先は女が火種を消すと家から追い出されました。
だからそれは神主のように祀るように、引っ越す時も必ず火種は持ち歩きますよね?それは神の命令を間違ったところで使ったんです。消すなという火種はあれじゃないって言ってるんです。あれはまた灯せばいいだけ、何だって。だから引っ越す時も、一番最初にその火種が入ったんです。瓢箪を割って一番最初に入るのが、その火種だったんです。
さあ、黙示録4章5節を見てください。
(ヨハネの黙示録 4:5-6)
5 座から稲妻と声と雷鳴が出て、座の前に七つの灯がともされていた。これは神の七つの霊である(出てきますね、そうでしょう?)
6 座の前に水晶のようなガラスの海があり、座の中央と座の周囲に四つの生き物がいた。その前後に目が満ちていた。
さあ、七つの灯、七つの霊、目、出てきますね?御言葉です、 当然です。その御言葉は神様を宿しているのです。
神様を紹介しているのです。私たちに「これをしろ!あれをするな!」といったレベルで語られたのが御言葉ではないのです。その御言葉こそが神様なのです。だから命なのです!御言葉が神様であるという真理に目覚めなければ、その灯台に灯はともりません。黙示録21章22節。
(ヨハネの黙示録 21:22-23)
22 私は都の中に神殿を見なかった
(聖なる都、新しいエルサレムについて語っているのです。都の中に神殿が見えなかった、とこう言います。神殿がなかった。なぜ?)
これは、主なる神、すなわち全能者、また小羊が、その神殿であるからである
(見てください。黙示録に行ってみると、神殿の実体とは何か?神だと言います。ところが、その神殿を持って神に会うべき人々が、遠くからその神殿を見て、熱心にそこで律法の行いだけを行っていたというのです。
黙示録に行ってみると、神殿はなかったと言います。なぜ?神こそが神殿だったから、そう言っているでしょう?)
23 その都には、太陽や月の光は必要ない。神の栄光が輝き、小羊がその光となるからである。
ですから今や太陽も月も必要ありません。いかなる光も必要ないのです。なぜなら、神と子羊が何であるかを知ったからです。それがまさに光であり、その内容を光で照らすことであり、それがまさに聖殿だったのです。しかし神と子羊が直接照らしてしまえば、 なぜ神殿が必要で、どんな灯がさらに必要だというのですか?どんな光が必要だというのですか?そう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まさにその御言葉!その聖霊!その神殿!それを通して神を知るべきなのです。だから『主を知ろう!力を尽くして主を知ろう!』と言うのです。『主を仕えよう!力を尽くして主に仕えよう!』とは言わず、その主を知れ、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そもそも光という概念は、闇を内容として知ってしまったら、それを光と呼ぶと神が私たちに与えたのです。初めは混沌と虚無とあの暗闇!その暗闇を神が、「私がこれをあなたたちに光として見せてやる!」と、神がその契約の始まりを光で開いたのです。
だから初めに「光あれ!」から始まったのです。
黙示録22章5節。
(ヨハネの黙示録 22:5)
5 再び夜がなく、また、ともしびも、太陽の光も要らない。主なる神が彼らを照らしてくださるからである。彼らは永遠に王として治める。
神が照らすとはどういうことか? いや、神が突然光を放つのか? その神が誰であるかが私たちに明らかに啓示されると、他の光は不要だったというのです。
それらはすべて型であり、象徴だったのです。
ご覧ください。目というものは、灯台の光というものは、神を内容とする、神の言葉であることが明らかになりました。
最後の確認の印を押しましょう。ヨハネによる福音書1章1節。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1-5)
1 初めに、みことばがあった。このみ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のみことばは神であられた。
2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あった。
3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ない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4 この方の中に命があった。この命は人々の光であった。
5 光は暗闇を照らしたが、暗闇はそれを悟らなかった。
このように聖書を正しく理解し、よく読んでみれば、皆さん他の本が必要ですか?組織神学の本が皆さん必要ですか?どんな註解書が必要ですか?私は聖書以外の他の本は、本当に一つも役に立たないと思います。これがどういう意味か悟るまでは私たちに必要なのはそれですが、後には全部捨ててしまい、あれ一つだけ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聖書一つだけ!見てください。ただこうして読んでおいて、私が今説明すると、かえってその意味が色あせてしまうのです。
初めにみ言葉があった。ところが、それが『ロゴス』です。その言葉は霊です。七つの霊ですね。そのみ言葉があったのに、またそのみ言葉は光だ。当然光ですよね?なぜ?その言葉が私たちに伝えられることが、光が照らされることだからです。その光が照らされると、それがまさに命なのです。なぜなら、その方は神だからです。今までくどくどと語ったことが、この中に全て含まれているでしょう?そうして闇を光としてよく悟り知れば、それがまさに命だというのです。
光が闇に照らしたということは、 そしてこの世には全て闇しか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今やその光がその闇が何であるかを明らかにし、光で照らし出そうとしている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か、そうですね?ここには闇しかありません。闇しかないのに、光が来てその闇を照らし出すのです。だからその闇が何であるかを知った時、それを光と呼ぶのです。光が闇に照らして、その闇を別のものに変えて
出すのではありません。
しかし神の恵みがなければ、その闇に属する者たちは自力では決して光を見ることができません。彼らは目が健全でない盲人だからです。それがまさにこの絶望的な有限存在の限界なのです。いかなる存在も、この有限者たちは、その光を自力で見る能力を持っていません。ですから光が来た時、彼らはまず告白すべきことがあったのです。「私は何も見ることができない盲人です。」という告白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
ところが光が来て、まだ十字架も担がず、照らしてもいないのに。光が照らされるには、キリストの霊、七つの霊によって、彼らの心の奥深くまで突き刺さって入らなければ光は照らされないのに、まだ十字架を担う前だというのに、そのイエスを見て、「私は見ている!」と虚勢を張る人間たちがいたというのです。光が来て、私はまだ何も照らしていないのに、ある奴らが先に「見ている」と言うのです。まず自分が盲目だという自覚がなければ、絶対にその神の贈り物、新しい目を与えようという神の贈り物を受け取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では具体的に「目が健全である」という言葉と「目が悪い」という言葉が何を意味するのか、私が少し説明しましょう。今日の本文を見ると、主が「目が健全であれば」という条件を付けておられますが、その「健全である」という「ハプルス」という言葉は、「ハ」が否定接頭辞で、「プレコ」という語が 「編む、編み分ける」といった意味です。
アダムとエバが善悪の知識の実を食べた後、イチジクの木の葉を編んでスカートを作ったでしょう?「縫う」という意味だと言いました。そうして「ハフルス」、編まれていない、再び、あなたの目が、「編む、編み分ける」というのは、律法を意味するものでしょう?人間の努力と汗が加わったもの。そういう言葉です。そして上流と下流が混ざり合っている状態!それを「編む」と言います。あなたの目がそう律法の目ならば、絡み合っている、混ざり合っている律法の目ならば、「ハフルス」ですから、そんな律法の目でなければ、こういうことですよね?それを「聖なる」と言うのです。
「あなたがあなたの目で見るものを、ただその表皮で、律法として見ないことができれば!」こういうことです。それが「あなたの目が聖なるならば」ということですよね?「そうすれば全身が明るくなるだろう。」この言葉は何と言いましたか?「光を放つ完全な体である。」こういうことです。
再び、「あなたの目が見るものを、ただ、表皮的に見て、それをただ律法として見ないことができる清い目であるなら、あなたこそ光を放つ完全な体である!」こういうことです。
全身が清くなるのではなく。「ホロス・ホ・ソマ」が完全な体という意味ですよね?
つまり、目を真理で持っている者、この世界観を真理の眼鏡として持っている者は、闇をこのように光で照らすことができる人であり、その人は神様が「お前は完全だ!」と認めてくださるというのです。その御言葉は前の5章でよく説明されていましたよね?マタイによる福音書5章14節を見てくださ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5:14-18)
14 あなたがたは、世の光です。山の上にある町は隠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
15 人がともしたあかりを、隠すために馬の下に置くのではなく、燭台の上に置きます。そうすれば、家の中の人すべてを照らすのです。
16 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の光を人々の前に輝かせ、彼らがあなたがたのよい行いを見て (これが善い行いです。
光を照らすことを善い行いと言うのです。)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に栄光を帰させるようにしなさい。
17 わたしが律法や(当然です。私たちがそのように善い行い、 神という光をこのように照らすと、彼らがその神の栄光を見るから。栄光を帰させるのだ。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止しに来たと思うな。廃止しに来たのではなく、完成させるためである。
18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る。天と地が消え去るまで、律法の一点一画も決して消え去ることなく、すべて成就する。
私たちを指して、この世を、「ホー・コスモス」を、 「ホー・コスモス」は闇ですよね?闇です。
混沌と虚無と闇です。しかし、それを照らせと、私たちに命じ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照らせば、ローマ人への手紙8章で学びましたよね?闇であるすべての被造物が、「そうだ、私の真の姿はこういうものだ」と光によって明らかに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真理によって明らかに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にそれをせよと言っているのです。「あなたがたは世の光である!世を照らせ!」
その灯台の光は、山の上の町を明るく照らし出すと言います。山の頂上の町が「ポリス」です。「ポリス」とは普通の村ではなく、柵や城壁で囲まれた町のことです。それを「ポリス」と呼びますが、この言葉がどこで使われるかと言えば、「聖なる都、新しいエルサレム!」ですよね?その言葉と全く同じ言葉です。
ですから、山の頂上の町とは、 もともとそこはエルサレムですよね?ユダヤの地で、山の頂上の町と言えば、そこ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エルサレム!パレスチナの土地は全て平地なのに、エルサレムだけこんな風に山!だからシオンの山とも言うのです。こんな風にそびえ立っていて、その上に都市を作り、そこに神殿を建てたのです。なぜ?見えるのに最も良い場所!善悪の知識の木ですよ!園の中央に建てたでしょう?あの「園、ガン」という言葉自体が「囲いを築く」という意味です。園という言葉ではなく。同じ言葉です。ポリスと。囲いを築き、その園の中央に善悪の知識の木を植えたでしょう?
さあ、エルサレム城、ポリスに柵を張り、神殿を中央にどっしり植えたというわけです。なぜ?見ろ!見てそれが何かを知れ!そうすれば命というものです。
善悪の知識の木を見て、食べろ!食べて死ねというのです。
「ムート・タ・ムート」、そうすれば生きるのです。それが何かを知れば。
ですからエルサレム神殿は、そしてエデンという喜びの囲いが張られたあの場所!エデンの園ではなく、あの場所は神様が囲いを設け、このように区別しておかれた神の国を象徴しているのです。その神の国はまた私たちだと言いますよね?聖なる国!だからあの聖なる都、新しいエルサレムを私たちだと言うじゃないですか?聖徒!神の花嫁だと言うじゃないですか?
だからあの聖なる都、新しいエルサレム!そしてあの神殿!そしてその間(ま)に囲まれたその場所は、まさに神の国!神と共に歩む、その民が共存する、その神の国を意味するんです。でもそこでそれが何かを知らずに、ただその中に入って、「私は安全だ!」なんて言っているとか、ユダヤ人たちのように。その神殿をただ仕えてしまう。そんなことをしたら滅びるんです。
だから光とは、あの山の上にあるもの!あのポリス、そこが何であるかが、このように明らかにされ、町が隠せないということは、光とは、真理の目を持つ者たちが神の言葉を真理として悟ったからこそ、あの律法の山!そしてあの聖なる場所!そしてあの神殿が何であるかが明らかに現れたというのです。何であるかが目によって。ですからあの光というものは、山の上の町、あのエルサレム!あのエルサレムを聖なる都、新しいエルサレムとして明るく見せる力なのです。光というものは!それを目と呼び、霊と呼び、言葉と呼び、命と呼ぶのです。
その正しい目で真理を見分け、人々に光を照らす人々の行いを聖書は「善い行い」と言うのです。それが善いのです。他のものが善いのではありません。善いものは気質や性品によって。人間が語る善さとは、神の言葉とは関係なく気質や性品によっても持つことができ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そうですね?私のように気質と性品でも善良で、(大きな笑い)このように光を照らす善い行いをする者も時々いますが。いやたまにいますが。そういう善い行いではないのです。神が認める善い行いとは、「あなたが私について語れ」ということです。
そう言いながら、どんな言葉を付け加えますか?「私が律法や預言者を廃止するために来たのではない。
」当然、この言葉がここに付け加えられるべきです。なぜ?山の上にあるあのエルサレムが、聖なる都、新しいエルサレム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するとはどういうことですか?律法を真理として見せるということですか?つまり律法や預言者が廃されるのではなく、真理によって完全に明らかに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ね?主が来て、新しいことを言われたのですか?全部旧約の話をされたじゃないですか?
だから新約のギリシャ語は、ヘブライ語を根として解釈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なぜ?新約の物語は全て、旧約を真理として説明したものだからです。そして主が用いられた言葉もアラム語でしたよね?アラム語とヘブライ語は、私たちもハングルと漢字を共に使わなければ意味が通じないでしょう?そういうように同じ言葉だったんです。ところが主はアラム語をお使いになったというのです。それならそれをギリシャ語で記録したのなら、新約のそのギリシャ語は、必ずアラム語とヘブライ語を基に解釈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だから『私が律法や預言者を廃止するために来たのではなく、その意味を説明するために来た』というのです。それがまさに私が光を照らし、隠されていたあの山の町の姿を明らかにすることなのです。それをあなたがたが行いなさい。その善い行いを!
さて、そのように殻と型が意味を失うと、それを何と言うでしょう?ヨハネの黙示録に行けば、古い天と古い地が消え去るとあります。古い天と古い地はどこに出てきますか?創世記1章に出てきますよね?その天と地を神が造られたのですが、なぜ造ったと言うでしょう?下のものによって上のものを知らせるために、神が造っておかれたのが、それですよね?
そうすれば、それが何かが分かったのです。では、その天と地は必要か、不要か?その天と地はいつか消えるのではなく、私が真理を悟った時、私の内から消えるのです。それが消えた時、その天と地を新しい天と新しい地と言うのです。それを「国」と言うのです。それを天国(てんこく)と言うのです。
そうして最初の天と最初の地を吹き飛ばすことのできる もの、それが「聖なる目」です。その目が私たちに与えられると、私たちは即座にこの現象界が存在の領域の全てではないことを認識します。
この有限の世界を造り出したその根源の基盤である無限の領域を考え始めるのです、その時から。「これが全てではないのだ!」と。
しかし残念ながら、この世の中では私たち自身の存在性が、この有限の領域に縛られざるを得ないことも同時に感知します。そうして私たちの霊的な目が聖なるものになると、そのような人間という存在の実存的絶望の状態について、知るのと同時に、自らの力で、その有限の世界からその無限の領域へと、進んでいこうとする、それを何と言うでしょう?それを学識ある言葉で「 原罪(原罪)」と言うのです。
皆さん、原罪(原罪)とは、アダムとエバが善悪の果実を食べたことが、単に内在化したもの!それを原罪とは言いません。オリジナル・シン(Original Sin)とは、この有限存在の絶望的な限界、この実存的な限界があるでしょう?それを原罪と言うのです。被造物は、被造物自らが決して到達できないある場所があり、そこに到達できない人間たちの絶望的な実存、現実!これを単に原罪、オリジナル・シン(Original Sin)と呼ぶのです。
そのような原罪と呼ばれる人間内部の生来的な欲望の実在についても、 私たちは今や知ることになります。その目が聖なるものとなれば! だからその時から、私たちの内ではこのようにストゥルグル(struggle)が生じ始めます。
‘一体これは何だ?’ なぜなら? 普遍的な人間の常識とは全く異なる、途方もないものが私たちを貫いて入り込んでくるからです。
しかし残念なことに、どれほど真理を悟った人であっても、肉体をまとって生きている間は、ただ骨の髄まで、その実存の限界に囚われざるを得ない、その絶望的な、あの古い自我!私がこの肉体をまとっている限り、この古い自我から抜け出せないじゃないですか?絶望的なあの古い自我の影響で、そのような人間実存の衝撃的な自覚が歓迎されないのです。無知に苦痛です、最初は。そしてそれを最初に伝えてくれたその人を殺したいほど憎むようになります。
「ただこうやって生きさせておいてくれ!」でもそれが本当の生き方なのに!
だから聖徒の生活は絶えず、あの地の闇への退行意志!これで満ちています。何度も退行して地の闇に入りたいと願うのです。そしてそれが正しい、何度も。ただこうして私を満足させてくれ、やりがいを感じさせてくれ。そうしてくれるのが好きなのです。
だから皆さんに教会への献身と奉仕を強調すると、皆さんがやりがいを感じられることを何度も話して、提示してあげると、借金をしてでも皆さんは教会に献身します。
でも私たちは既にやったことに対しても非常に罪悪感を感じさせられるから。これがやりがいとかどうとか、これができないから。払いたい気持ちはあまりないでしょう?それがこれまでどれほど搾取されてきたことか!牧師の周囲の核心メンバーは皆借金まみれだと言いますよね?韓国では。皆借金して、あれ。皆搾取されて、いざここに来ると払うものがない!(ハハハ)
そのような退行の意志!私たちはそのような意志を繰り返し発動する自分を発見するのです。ましてやその光による自己実存の暴き出されが、甚だ恐ろしく、不快で、居心地が悪い。だから瞬間瞬間、その人間の意志と宗教的意志と律法の世界へ退行していく自分を発見しながら、頻繁に宗教の仮面を被り、他者を断罪したり、裁いたり、その教理、 ドグマの枠の中に閉じ込め、人間の慣習と行為とその意識をぴたりと、その枠に閉じ込めてしまい、それが無限の生命の神秘に参加することだ、これが真理だと主張する、他者ではなく、自分自身を発見するのです。真理を聞きながら。
だから熱を五つに、そして四つに、二つに、一つに、 こうして完成させて、神が渡しても、それが怖くて、これをあの闇の地から取り出せない人たちが大半です。いや、私たち全員が経験した過程なんです、それが。マタイによる福音書25章24節を見てくださ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5:24 -25)
24 一タラント受け取った者も来て言った。『主よ、あなたは厳しい方です。植えていないところから刈り取り、掘っていないところから集める方だと知っていましたので
25 恐れて出て行き、あなたのタラントを地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あなたのものはお受け取りください』
五を与えたら、五で残せばいいのです。二つを与えたら、二つで残せばいいのです 。
すべて神がなさることです。一つ与えられたなら、それを一つ残せばいいのです。『そうだよ、一つだろ!』というように。ところが一つ与えられたのです。一つ与えられたので、『ああ、この一つを与えてくださった方は、蒔かないところから刈り取り、労さないところから集められる方だ。これが真理ですよね?それが恵みですよね?私たちが蒔かなくても、あの方は収穫される方であり、私が蒔いて収穫するのが因果律と言いますよね?それが律法ですよね?
ところが一つ受け取ってみると、これが蒔かないところで収穫される方であり、割らないところで集められる方なんだ。でも今まで私が生きてきた、アダム的な生存方法とはあまりにも違う。だから私はその御前で、暴かれるのが怖いのです。そしてそれを誰かに伝えることも、これは到底無理なことなんです。だから怖い!もしかすると、私はそれ以前にも蒔いたところから必ず神は収穫されるという律法的な思考で生きてきて、今もそこから自由に抜け出せないから、その神が怖いんです。その赦しと愛と恵みと憐れみに私を完全に投身して投げ出せばいいのに、 これが人間の常識とは合わないのです。どうしてそれが可能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
ところが、その神様がそう救うとおっしゃるので、恐れてその一つを隠してしまうのです。
しかし神の選ばれた民は、最後までそう隠しておくことはできません。過程として経験はしますが、結局その一つを取り出し、これを光で照ら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ところが主人が来るまでそれを隠しておいたら、それはその一つを贈り物として受けた者ではないのです。だから『引き出せ!』と言うのです。『悲しみに泣き、歯ぎしりする者がいるであろう。’
それが健全な目を持つ聖徒の姿であるならば、悪い目を持つような人はどうなるのか、次の節を見てください。23節。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23)
23 もしあなたの目が悪いなら、あなたの全身は暗くなる。だから、あなたの中にある光が暗いのなら、その暗さはどれほどであろうか。
「目が悪い」と訳された単語がギリシャ語の「ポネロス」です。この「ポネロス」こそがあの「ペネス」から派生した言葉です。律法的な欠乏!肉的な欠乏!飢え、貧しさ、これが「プトコス」と対比される 「ペネス」の意味なのです。つまり「目が悪いなら」という言葉は、「御言葉を見る目が、肉的なものであるなら、その目で御言葉を見て、自分の肉体の必要に御言葉を引っ張ってきて使うなら、これが『悪い目』だ」ということです。ポネロス!律法的な労苦、律法的な苦痛、これが 「ポネロス」なんですよ?
つまり悪い目を持って、神の言葉を私の肉体の必要なもの、そして私の肉体を誇り、私の肉体の喜びと価値を得られるような秘訣、そんなものとして私がその言葉を見るなら、それが目が悪いんです。悪い目!ではどうなると言うでしょう?「全身が暗くなるであろう」。体が暗くなるというのはどういう意味ですか?この言葉は「暗闇で完全な、暗闇で満たされた体になるだろう」という意味です。あなたの目が悪ければ、あなたの目は暗闇で満たされた体になるだろう。そう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どのような警告の言葉を述べられるかと言えば、「お前が光だと思っているもの、それが本当の闇なのか、光なのか、よく考えろ!よく確かめろ!」と仰っているのです。「お前が持っているその光が闇ならば、その闇がどれほどのものか、どれほどの量になるか?お前は今、光を持っていると思い込んでいる、自分の目が開いていると錯覚しているだろう?だからお前は何を見て、見たものを自分の光として持っている。
それを自分の糧、自分の宝物として持っているが、 お前、それが、俺が見るに闇ならどうするつもりだ?」これが今日の教会たちに問いたい言葉です。お前たちが光だと思っているそれが、闇ならどうするつもりだ?
だから常に、それが光なのか、それとも闇なのか、確認し、また確認せよということです。肝心なものを見ずに、その表皮的な外殻だけをただ「ああ」と認めた後、 私は見える、見ている」と錯覚する者が多い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主がまだ光さえも照らしていないのに、「私は見えます。」という者たちが、主の時代にもいたのです。
ヨハネの福音書9章39節を見てください。
(ヨハネによる福音書 9:39~41)
39 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はこの世を裁くために来た。見えない者たちが見えるようになり、見える者たちが盲目になるためである。」
(見てください。自分が見えないと思っているなら、神が見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のです。しかし、まだ光さえも照らされていないのに、見えると言う奴らは、それをどうすると言うのか?いや『俺が見せてやる』って言ってるのに、『見てるんですけど』って言うのを、どうする?見せてやれって言うのか?これがその言葉だ。見えない者たちには見せてやるが、見える者たちはそのままにしておく。見えるってことは、それを見続けろってことだ。でもそれが盲目なんだ!そういうことだ。)
40 パリサイ人の中でイエスと共にいた者たちがこの言葉を聞いて言った。「私たちも盲目なのか?
(『私たちは盲目じゃない!』って言葉でしょ?『私たちは見てるんだ!』って言葉でしょ?誰が?パリサイ人たちだよ。糞尿しか出さない者たち!食物として糞尿をいっぱい抱えながら、それを配る者たちが、『私たちは盲目じゃない!私たちは見ているんだ!』と。主はその前でこう言われたでしょう?『私はまだ一度も明かさなかったのに!何を『見る』と言うのか?それなら仕方ない。ずっとそれを見続けろ!』これがそういう意味です。)
41 イエス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罪はなかったであろう。しかし『見える』と言うから、その罪はただ残るのである。」
彼らは本当の盲人なのです。彼らは目を悪く持った人々なのです。
目はあるけれど、真理の目ではなく、律法の目です。主はその目を「見る目」として認めないのです。そうすると必ず穴に落ちるのです。他の人々も一緒に引きずり込んで!主はそれを何度も語られます。そうして神の言葉を真理として見るのか、 律法として見るかによって、この世を目に見える表皮で見るか、その内容で見るかが分かれるのです。
そして今、私たちのその眼目(眼目)!見つめるその眼目!それが私たちの世界観となり、その世界観によって私たちは支配されるのです。その世界観によって私たちは、私たちの価値観を決定し、行動様式を定め、そこへ向かって動くのです。それによって支配を受けるのです。だからこの目の話の最後に、二人の主人が登場するのです。二人の主人!
神の言葉が天から、私を支配するのか、それとも、地の律法が私を支配するのかによって、私たちの価値観と行動様式が決定されるのです。神の言葉が真理として私の主人となれば、私はその主人に仕えられる者として生きるようになります。これが神の国です。神の国における主人はそういうものです。
しかし、その言葉が律法として私に押し寄せれば、私はその主人の奴隷となり、 その主に仕える者になります。なぜなら、そのすべての言葉が、主が私に下す命令として聞こえるからです。そのような律法の奴隷は、懸命に自らを燃やし、自分の利益を自ら確保する因果律の世界から、一歩も抜け出せないのです。
私も日曜日に話しましたよね?ユダも他の弟子たちも、全く違いはありません。皆、イエスを殺した者たちです。私たちは皆カインなのです。しかしユダだけは、聖霊が来られる前に、『私が売り渡した、殺してしまったあの神様に、私がその借りを返せる道は、私が自分を殺し、私が自分を捧げてその借りを返す道しかない。
』と言って自分を殺せば、それが悪魔になるのです。
むしろ厚かましく、『 ああ、私が主を愛しているのはご存知でしょう?」と頭を掻きながら、厚かましく、ついさっき、呪いながら否認しておきながら…。いや、その通りです。当然、聖父、聖子、聖霊の時、三度ともそのイエスを否認しなければ、生きられません。しかし、それが何であるかを知った時には、 そうですね。当然私がそれを否認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て初めてあのイエスが、あの天の真理として私の内に入ってくるのです。キリストの霊として私の中に入ってくるのです。私が否認しなければ、あの方は死なないのに、どうしてあの方が私の内に入ってくるでしょうか?」そうすれば生きるのです。
しかし『ああ、私が本当に男として、どうして、そんな厚かましく、無責任に、私の過ちをこの者に転嫁できようか?私が私を殺し、懸命に努力し献身して、その借りを返してみせよう。』それを律法と言うのです。そのユダは死にます。
しかし「そうですね。私が三度否認しなければ、その神が、私の実存がどのようなものかが明らかに暴かれ、その神がどれほど偉大かが明らかになるのです。神、それが正しいのです。」と言うなら、彼は生きるユダになるのです。それがイスラエルです。
イスラエルもユダも同じことではありませんか?ユダヤ人、イスラエル、何!皆ユダ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知って死んだユダと知らずに死んだユダが違うだけなのです。
さあ、そうして律法の奴隷は自らを懸命に燃やし尽くし、自らの利益 (有益)を蓄える因果律の世界から、少しも逃れられません。マタイによる福音書6章24節を見てくださ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24)
24 人は、ふたり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か、いずれにせよ、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を同時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
「人は二つ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前半を直訳すると、「二つの主人に仕えることのできる、そのような能力を持つ存在は誰もいない」という意味です。Nobody. すべての人間は、ただ一人の主人にしか仕えません。そう分かれるのです。天という主人に仕えるのか? いや、その方の仕えを受け、その仕えの前に自らを投身するのか? これを仕えと言うならOKです。そのような存在と、その神を律法として受け、私に重い荷を負わせるような世の王として仕える者! この二種類しかいないのです。これを混ぜて仕える者はいない のです。
真理の中で神の言葉のその仕えを受けるか、律法の中でその神を熱心に仕えるか、どちらか一方なのです。主は明らかに示されます。
人間には、天の主人と、地の主人を同時に仕える能力が全くない。
このように語ってください。
正確に言えば、全ての人間は地の主に仕えるように生まれます。
支配と被支配 階級と屈従!そのようなパラダイムの中で、自分より力があり能力があり、偉大な存在と思われる存在の前で、ただひたすらおどおどするのを信仰と言うのです。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その方は私を救う力もあり、地獄に送る力もあります。力もお持ちです。私よりはるかに強い力です。天地も創造したと言います。だからその前でひたすらおどおどすれば 、これを敬拝(けいはい)だと言い、礼拝(れいはい)だと言い、仕えると言うのです。これが世の王国です。
神の国とは、その方がご自身を投身(とうしん)し、生け贄(いけな)として投身し、私たちの内に入られることです。
その方が私たちをまず仕えてくださるその国!それが神の奉仕を受ける、それゆえその奉仕の前に平伏して賛美する、神の国というものです。
このように二つに分かれるのです。そうして思い切りおべっかを使い、力強い神から得られるものを裁量で得るのです。それがやりがいでも良く、物質でも良く、 私の天国でも良く、救いでも良いのです。
得ることは得たのに、ずっと居心地が悪い、その関係が!それが愛でしょうか?彼らは力だけ強い、世の王に仕えているのです。彼らが仕える神を世の王と呼びます。
そのような者たちの中に神の恵みが注がれます。彼らは支配と屈従のパラダイムの下で、力だけ強い王ではなく、憐れみ (矜恤)と慈悲(慈悲)と愛をもって仕えるお方がおられ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彼らはその王を自分の主として迎え入れます。
その人々は神の命を贈り物として受け、永遠の命に至る一方で、前者(前者)は労苦と重い荷としてのその神を地獄の主として迎えるのです。彼らの神はサタンです。
考えてみてください。天を、その真理を主人とする者は、想像すらできない無限の一者が有限の存在の領域に入り込み、あなたを啓示してくださる――これが神の死だと言いましたね? 神の死!あなたを啓示してくださる、そのような仕える姿で、私たちを治めてくださるという事実を知り、むしろその仕えの前に自らを、本当にその時にはその前に完全に身を投じ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その神がどんな方か、今や信じるからです。その時には、その神が私をどう扱っても構わない。どうせ善く扱ってくださるのだから。その時には完全に捧げるのです。
そうして神の奉仕を受ける者は、完全な従順をもって神に仕えるようになるのです。
これは自然なことです。その人は神のすべての言葉を、私たちに仕える神の無限の愛として解釈するのです。そのような天の僕たちに何かすべき義務があるとしたら、それはその命を享受することです。賛美することです。湧き水を称賛するためには、爽やかに飲み、「美味しい!」と言うこと、それが湧き水への最高の賛辞ではありませんか?それが天の主人に仕える者の、奉仕の極致なのです。それを味わいながら「素晴らしい!!!」と言うこと。「これが自由なんだ!」と。ただ平伏して「お与えください!お与えください!」と、本心は「ああ、どうにか騙されてでも、私が望むものを必ずくれ!」ってやつじゃないですか?これを仕えと言うんですか?
しかし神とその民との関係を、物質世界の人間観念における『主人と奴隷、支配と服従』の関係で理解し、神の言葉を『支配と被支配、君臨と屈従』の関係に投げ込まれる命令として理解してしまうじゃないですか?神の言葉を。そうすると、それはまさに、神を権力と支配の欲望に満ちたこの世の王へと貶める結果になるのです。それが神を冒涜することだと、聖書は言います。「なぜお前は私の名を冒涜するのか?私の名を汚すのか?」と。その言葉を、神が命を懸けて仕えていた者たちに言ったのです。「なぜお前は私の名を冒涜させるのか?」と。
そう誤解された神がいるでしょう?それを『マモン』と言うのです。それを韓国語聖書が財物と訳したのです。それは神の名前です。
それは『虚欲 (虛慾)」という偽りの神の名です。「マモナス!」恵みを知らない全ての人間が、彼らの生の本能で持ち生きるもの、ありますよね?それがまさに「虚欲」です。それは人間の原罪的な人間実存の限界です。
自分の意志で善を追求して、自ら神のようになれるだろうという、そう考える根深い原罪の欲望!その欲望から発せられたその奴隷と主人の関係は、常に定罪と審判!叱責と責め!自虐と呵責!抑圧と支配!こうした煽動だけが蔓延るだけです。だから礼拝を捧げながらも、何か不安で、恐ろしく、時に何か熱心に成し遂げたと感じれば、傲慢で、自惚れ。世の中と全く同じです。他には何もないのです。
そのような原罪の暴虐が支配する苦痛の領域の中に、命の主である御言葉が現れたのです。それで私たちに確かに照らされたのです。その照らしによって私たちの目が開かれ、その闇が何であるかが私たちに見え始めたのです。そしてそうなると、定罪も、審判も、闇に対する叱責も、全て私とは無関係なものになるのです。全てがその内容によって見られる のです。
つまりマモンは別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御言葉として来られた神を、単なる物質的な世界観で操作してしまうなら、その聖書こそが「マモン」なのです。それがマモン神であり、それが物質、財産の神です。人間たちが人間の価値の象徴的、相対的な概念として作り出したものが、金であり物質ではないですか?だからお金さえ多ければ、どんなにろくでなしのような人間でも、非常に何かあるように見えますよね、こうやって?
したがってマモンというものは、単に金や物質だけを指すのではなく、その人間普遍の原罪的欲望を縮約するとそれが 「金」なのです。それが財物であり、それが私たちが追求する欲望の実体であり、私たちが価値だと思う「金」のようなもの。ところが神様もそう考えているというのです。
そして自分の価値のために、自分を助けてくれる何らかの存在、 うまく甘やかしてなだめさえすれば!それは人間の欲望が創造した偽りの神なのです。その偽りの神は支配と服従のパラダイムのもとで仕えられる神であり、命令を下す神であり、人間世界の道徳と倫理と善悪に基づいて、裁きと報いを下す世俗の神です。それが『マモン』です。
ですから神とマモンを同時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よね?神に仕えるためには、これを捨てなければならず、これを仕えるためにはこの神は見えないのです。しかしその神は聖書の中にのみ啓示されているのですから、私たちがその御言葉を真理として、神として見るならば、私たちはその神を私に律法的な労苦を、そんな重い荷を負わせるような神として見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もし私たちがその神を聖書の中で出会えなければ、私が出会った聖書の中のその神は、私を絶えず苦しめ、苛み、訓育する寮監 (寮監)先生程度に見えるのです。それが世の神です、皆さん。
私たちは必ずや、下の水、その深み、暗闇の中で、あの天の真理を、光として悟らなければならない者たちなのです。ただあの下のパラダイムに埋没して、ただそれらの支配を受けてはならないのです。必ず見るものの中身を、皆さんは聞き取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だから皆さんの目は二つあるのです。二つに神は分けてくださいます。それが律法ではありませんか?善悪、左右、上下、すべて分けてくださいます。そうしておきながら私たちに一つとして見よと言うのです。だから皆さんの目は二つあるのに、一つに見えるでしょう?一つに見えるでしょう?二つで与えるのに、お前たちはそれを一つとして見よと言うのです。
私が二つに分けて語るが、お前たちはそれを必ず一つとして聞かねばならない。お前たちにはそれが、二つの息、二つの呼吸として入るのだ。一つは殺す息、死の香り、一つは命の香り、呼吸として入るが、二つの鼻孔で受け取って一つになれと言うのです。しかし必ず一つとして持ち、一つとして語れと言うのです。それを「光を照らす」と言うのです。
ところがその目が正しくなければ、これが律法の目ならば、ここから出る言葉は的外れな言葉が出るだろうということです。
だからレビ記を見ると、七面鳥が不浄だと言うのは、カメレオン、七面鳥も同様で。色が変わり (変)えますよね?刻一刻と。一つの色を持ち続けられない。これが一途な心ではないのです、こいつは。そしてこいつは目がそれぞれ違う方向を見ます。
カメレオン見たことありますよね?ある人間はそれを家で飼っている人間もいるそうです。それぞれ違うものを見ます。もっと重要なのは、その舌は殺害(殺害)をします。
そして殺害したものを自らの糧として食べるのです。だから不浄なのです。
同じことです。
皆さんが二つを一つと見ず、依然として善悪構造の中で、そのパラダイムで見続けてしまうなら、皆さんはみ言葉もそう見てしまうでしょうし、神様もあの世の神様として、律法の神様として見るでしょう。
そして、とんでもないもの、皆さんの排泄物のようなもので、皆さんの内を糧で満たし、それを舌で吐き出して、他の人々に光を照らすふりをするでしょう。しかし、その舌に打たれて、相手は死んでしまいます。
ですから、私たちの目がどんな目なのかを確認することは、生死をかけたほど重要なのです。この重要なことをしているのに、今日に限ってこの舌がなぜこんなに麻痺したように言葉が出てこないのか…。いつも重要な時はそうなんです。
ですからよく心に刻んでください。皆さんはどんな目を持っていますか?健全な目ですか?悪い目ですか?皆さんの周囲にいる人々は、皆さんのその舌によって、生き返ることもあれば、殺害されることもあり、今まさにそうなっているのです。確認してください。御言葉を根拠に常に照らし合わせてみなければなりません。
祈ります。
神様、恵みに感謝します。
神様は私たちに新しい目を与えるために、この地に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今なお、閉じた目を開いたと錯覚し、その閉じた目で見ているもの、その幻のようなものを、実体と勘違いして生きている人々があまりにも多いのです。
神よ!私たちの目が健全な目でありますように。
それゆえ、私の中にあるこのものが、真の神のまことの光でありますように。
これがまことの糧でありますように。そして、これが他の人々に照らされ、分かち合われるとき、天のまことの糧として、まことの光として、照らされ、分かち合われますように。
神よ!私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イエス様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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