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아침 먹는데/국어 교사를 하는 옛 제자한테서/오랜만에 전화가 온다/술적심도 없이/쥐코밥상으로 아침 때운다며/엄살을 떠니까/어마마, 아침부터 술 생각나느냐며/호호 웃는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나는 마른입을 쩝쩝 다신다/술적심은 술이 아니라/숟가락을 적실 국이나 찌개 같은/국물 있는 음식이야!/또박또박 가르쳐 줬는데도/또, 어머나, 호호 웃는다//이놈 넌 F다!
「비백」(2022, 문학세계사) 전문
오탁번 시인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단연 ‘폭설’이다. 시의 전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워메, 지랄나부렀소잉!/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하느님이 행성만 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그의 시는 별다른 해설이 필요 없다. 우스개로 흘려버릴 이야기에서 시를 발견하는 심미안도 심미안이거니와, 무엇보다 시인은 우리말 사랑이 대단했다. 해서 그는 북한의 노동신문 논평란에 ‘노루잠’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 못 견디게 부러워 “여의도 시러배들은/입만 열면/되지도 않은 외래어를 나불댄다”(「노루잠」)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그런 점에서, ‘폭설’ 속 저 이장님이 눈과 사투를 벌이며 육성으로 들려주는 비속어 역시 욕이라기보다 정감 어린 토속어에 가깝다.
지천(芝川) 오탁번 시인이 지난 15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그의 시를 읽으며 명색이 글 쓴다는 인간이 ‘술적심’은 물론이려니와 ‘쥐코밥상’이 뭔지도 몰랐음을 깨닫는다. 선생이 계셨다면 ‘엣다, 너도 F다!’ 했을 법하다. ‘쥐코밥상’은 쥐가 먹기에도 모자라 코로 겨우 냄새나 맡을 정도로 적게 차린 밥상이라고 ‘예쁜 우리말 사전’은 가르쳐준다. 살을 빼겠다고 쥐코밥상을 차리면서도 그게 쥐코밥상인 줄 몰랐다면 ‘술적심’이라는 말과 함께 알아둘 일이다. 시인은 갔어도 그가 사랑한 우리말은 여전히 곁에 있으니….